끝까지 읽어봐라

oㅓ인2006.11.12
조회122

씨발

이게어디 나라냐

경찰하는꼬라지하며

이리저리 돈쓰면서 토시는 꼬라지하며

좆같아서 진짜

尹 이년 너 걸리면

진짜 좆대가리 뭉개버릴줄알아라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저 학생 부모만큼이야 하겠냐만은

너같이 씨밥바같은 년들은

이 하늘아래서 눈까리 뜨고 살아갈 필요가없어.

 

 

 

여대생 河양 피살 사건 - 아버지의 집념과 후회
 
 『납치된 뒤 8일간 생존. 경찰이 이때 최선을 다했더라면…』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망가진 가정
 
  지난 3월 공기총 여섯 발을 머리에 맞고 숨진 채 발견된 河모(22ㆍE대 법학과 4학년)양의 아버지(56ㆍ자영업)는 『내 딸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 애한테 조그만 잘못이라도 있어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않을 겁니다. 돈이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천박한 사고를 가진 자들이 무고한 애의 生命을 그렇게 무참히 앗아가다니… 그들이 저지른 잔인무도하고 天人共怒(천인공노)할 행태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河씨의 가정은 그날 이후 엉망이 됐다. 숨진 河양의 어머니는 지난 8월 『나도 딸을 따라가겠다』며 두 번이나 손목의 동맥을 끊는 자해 행위를 했다. 손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 나왔다. 놀란 河양의 아버지가 급히 구급차를 불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河씨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집사람의 자해 사실을 그동안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지만, 살인자들은 내 딸만 죽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를 죽인 겁니다. 삶의 의미와 목표가 없어졌어요』
 
  지난 8월30일, 서울 삼성동에 있는 河씨의 광고회사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은 강남구청역 바로 옆에 있는 8층짜리 빌딩 6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딸을 잃은 후 河씨는 자신의 사업을 거의 전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직원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사장인 河씨의 책상은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었다.
 
  河씨는 『딸이 죽은 후 모든 일을 포기한 상태』라며 『그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해 회사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이어진 세 시간 동안, 河씨는 담배 한 갑을 거의 다 태웠다. 점심을 먹지 못했다며 사들고 온 500원짜리 「초콜릿 바」는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책상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河씨는 『딸이 납치된 후에도 죽음만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河씨는 빌딩 앞에 있는 8차선 도로를 가리키며 딸이 다녔던 길이라고 목이 메어 말했다. 그의 아파트는 사무실에서 5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불길한 예감
 
  河양은 매일 새벽 이 8차선 도로를 따라 집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수영장에 다녔다. 河양이 수영을 시작한 것은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척추만곡 증상이 있던 河양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허리 통증이 좀처럼 낫지 않았다. 河양은 허리를 치료하기 위해 올해 초에는 인근 한방병원에 한 달간 입원하기도 했다. 한방병원 의사는 수영이 허리 치료에 좋다고 권했다.
 
  河양은 자신이 납치되던 날인 3월6일에도 어김없이 새벽 5시30분경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河양의 아버지는 잠결에 딸이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를 들었다.
 
  「저렇게까지 극성스럽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河씨는 딸이 새벽에 나가는 것이 안쓰러워 괜한 짜증이 났다. 그날 아침 딸이 아침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나 河씨 부부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전에도 딸이 수영장 근처에서 김밥을 사먹고 독서실로 곧바로 간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河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오후 12시가 다 되어도 딸은 점심을 먹으러 나타나지 않았다. 河양의 어머니 설(50)씨는 河씨에게 전화를 걸어 『딸이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오지 않는다』고 알려 왔다.
 
  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河씨는 가족과 같이 점심을 먹을 겸해서 사무실을 나섰다. 河씨 부부가 河양을 데리러 독서실에 도착한 것은 12시30분경. 그러나 딸은 그곳에 없었다. 이때 딸의 남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12시30분에 지하철 2호선 서울대역에서 河양을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딸의 남자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은 河씨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딸은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이렇게 오랜 시간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수영장으로 달려가 보았으나 수영장 측에선 河양이 아침에 수영을 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河씨의 머리 속에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작년 3월경, 河씨의 사돈 되는 尹여인(57)이 河씨의 딸과 자기 사위 金모(31ㆍ서울지법 판사)씨의 사이가 의심스럽다며 河씨의 딸을 미행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尹여인의 사위 金판사와 河양은 이종사촌 간이다.
 
  河씨는 尹여인의 발언과 행동이 어린 딸의 장래를 위협한다고 판단, 그해 6월 尹여인을 검찰에 고발했다. 이런 일련의 일 때문에 2001년은 河씨 가족에게 스트레스가 쌓이는 한 해였다.
 
  딸의 실종이 尹여인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한 河씨는 순간적으로 「납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河씨는 잠시 정신이 아득함을 느꼈지만 곧바로 강남경찰서로 달려갔다. 時針(시침)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체가 발견되어야 수사할 건가』
 
  『내 딸이 실종됐습니다. 작년에 딸을 미행한 사람이 있었어요.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니 빨리 수사에 착수해 주십시오』
 
  河씨는 담당 형사에게 딸이 실종됐음을 설명했다. 河씨는 읍소에 가까운 호소를 했으나 경찰은 매일 접하는 일상적인 일인 듯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고 한다.
 
  경찰은 실종이 아니라 가출신고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경찰과 마냥 다투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河씨는 하는 수 없이 「여성-청소년계」로 가서 가출 신고를 마쳤다.
 
  경찰서를 나온 河씨는 곧바로 딸이 수영장을 가는 길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을 찾아 나섰다. 혹시 새벽에 교통사고라도 당했으면 환경미화원들이 발견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환경미화원들은 『교통사고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경찰서에 가서 거의 빌다시피 했습니다. 나는 작년에 있었던 尹여인의 미행 건과 이로 인한 송사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딸의 실종이 이 일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니 수사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단순 가출이라고 우겼습니다』
 
  河씨는 『당신들은 꼭 시체가 발견되어야만 수사를 할 거냐』고 따지면서 상식적으로 가출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를 경찰에 설명했다고 한다.
 
  『의도적인 가출은 돈이나 신분증 같은 최소한의 소지품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우리 딸이 가지고 가지고 간 것이라고는 아파트 키와 우산, 수영장 출입카드뿐입니다. 복장도 운동복 차림이고 그 아이는 지금 허리가 아파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또 두 시간 이상 연락 없이 없어진 적이 없는 아이입니다. 도대체 당신들이 말하는 가출 중에 이런 경우가 한 건이라도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河씨의 「논리 있는」 설명도 담당 형사에게는 별로 먹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河양이 실종된 지 하루가 지났다. 밤새 속이 새카맣게 탄 河씨는 다음날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를 한 묶음 복사해 왔다. 작년에 尹여인과 벌인 송사 관계 서류였다. 그는 서류를 담당 형사의 책상에 풀어 놓으며 『이 사건 외에는 딸의 실종과 관련지을 만한 것이 없다. 제발 좀 수사해 달라』고 다시 경찰에 매달렸다.
 
  실종 3일째. 부산에 사는 河씨의 처남 설모(41) 변호사가 급히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아파트 경비실에서 河양이 납치되던 날의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냈다.
 
  테이프에는 우산을 쓰고 아파트 정문을 나서는 河양의 뒷모습과 정문을 나서자마자 길 반대편에서 건장한 청년 두 명이 河양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곧이어 河양을 납치하여 태운 듯한 차량의 불빛이 지나갔다. 누가 봐도 납치가 분명했다.
 
  이 테이프를 본 河씨는 지난 3개월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河씨는 이런 테이프가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최소한 8일간 살아 있었다
 
  이 테이프를 들고 경찰에 달려가자,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경찰이 수사를 하기 시작했다.
 
  『비디오 테이프가 발견됐으니 나는 경찰이 당연히 제1용의선상에 오른 尹여인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줄 알았습니다. 주변 동향을 감시하든가…』
 
  경찰에 의하면 河양은 납치된 후 최소한 7~8일간 생존했다. 납치 정황이 담긴 테이프가 발견되고도 최소한 5일은 살아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담당 형사란 사람들이 도무지 납치에 대비한 아무런 전문 지식도 없고 교육을 받은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런 상식적인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었어요』
 
  河씨는 자신이 주장한 것을 경찰이 단 한 가지라도 받아들였으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개탄했다.
 
  첫째, 1억원 정도의 현상금을 걸자. 그러면 저쪽에서 협상이 들어올 수도 있다. 둘째, 언론에 공개를 하자. 이쪽에서 눈치를 채고 있으니 저쪽에서 쉽게 행동은 못할 것이다. 셋째, 검문검색이라도 좀 철저히 해 달라. 넷째, 尹여인에게 가서 맞대면이라도 한 번 해서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라. 당신들이 못 하면 내가 가서 일단 딸아이의 목숨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어 보겠다.
 
  河씨가 이런 주장을 하자, 경찰은 『피해자가 이런 식으로 경찰을 압박하면 수사에 방해가 된다』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결국 河양은 납치 10일 만인 3월16일 경기도 성남시 한 야산 등산로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납치라는 정황과 납치 대상자까지 다 나온 상태였는데 10일 동안 결론적으로는 아무 대응을 하지 않은 꼴이 됐습니다. 그때 내 판단대로 행동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河씨는 비디오 테이프가 발견되고도 딸이 살아 있었을 5일 동안 강남경찰서가 사건 해결을 위해 몰두한 것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딸의 휴대폰은 단축버튼이 되어 있어요. 1번을 누르면 내 전화기로 자동 연결됩니다. 딸이 남겨두고 간 휴대폰을 애 엄마가 답답한 심정에 이리저리 눌러 봤나 봅니다. 그러다가 1번을 눌러서 나 한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오더니 「당신 전화에 딸의 전화번호가 떴다. 혹시 당신 딸한테 전화 온 것 없었냐」고 물어요』
 
  그는 어이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딸에게 전화가 왔으면 내가 뭣하러 딸의 소재를 찾으려고 이러고 있는가』 하고 경찰에 되물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못 걸려온 전화 한 건으로 경찰이 3일 동안 거기에만 매달려 「조사를 해봐야 한다, 어쩐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시간,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허비한 귀중한 10일은 河씨에게는 씻을 수 없는 회한의 시간이 되었다.
 
  『나름대로 고생한 경찰에게 이런 말을 하는 나도 괴롭지만, 강남경찰서가 한 것이라고는 전화소동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울 강남경찰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쪽의 설명을 들으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河양의 시체는 발견된 뒤 곧바로 서울에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河양 피살 사건은 河양의 실종신고가 접수된 강남경찰서와 시체가 발견된 경기도 광주경찰서가 같이 수사를 맡게 됐다.
 
 
  잿빛 세상
 
  지난 9월5일, 기자가 河씨의 아파트를 두 번째 찾아갔을 때 그는 자신의 처연한 심경을 토로했다.
 
  『시신이 國科搜(국과수)로 가면 다음 단계가 뭐겠습니까. 부검을 하겠지요. 딸아이의 법학과 실습시간에 시신 부검을 참관하는 수업이 있었나 봅니다. 딸아이는 일기장에 그날 國科搜에서 자기가 본 검시 소감을 소상하게 일기장에 써 놓았어요』
 
  河양의 일기에는 밤 사이 急死(급사)한 젊은 30代 남자의 시체 부검 참관기가 실려 있었다. 밤 사이 시체가 된 한 젊은이가 부검대에 누워 있고, 그 젊은이의 아버지는 밖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딸의 일기장에 적힌 상황이 그대로 우리에게 재현된 겁니다. 나는 밖에서 울고 있었고, 자기는 부검대에 누워 있었으니…이 세상이 전부 잿빛이고 시간이 거꾸로 흘렀으면 하는 마음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河양에게는 무엇이든지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河양은 일기뿐 아니라 달력에도 빈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河양의 탁상용 달력에는 「○월○일 몇 시에 누구를 만난다」, 「○월○일 몇 시에 어디에 가서 여권을 찾는다」, 「무슨 수업을 몇 시에 받는다」는 것 등을 세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 중에 河양이 가장 많이 기록한 것은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생일이었다. 河양의 친구들은 『그 아이(河양)는 주변에 친구가 밥을 한 끼 먹지 않고 있어도 식당에 꼭 데리고 가서 사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였다. 언제나 친구들을 먼저 챙겨 주었다』고 河양을 떠올렸다.
 
  씀씀이도 소박했다고 한다. 어쩌다 새옷을 사면 『이 옷을 얼마나 싸게 샀는 줄 아니』 하며 자랑했다고 친구들은 전했다. 河양의 아버지는 오히려 딸이 명문大에 다니며 허영심이 들까 봐 용돈을 적게 주었던 것을 가슴 아파했다.
 
 
  딸의 앨범을 끌어 안고
 
  2001년 7월4일에는 「주리」 생일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다음 달 달력 8월17일에는 「주리가 집에 온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주리는 河양이 귀여워한 「요크셔테리어種」 암놈 애완견 이름이다.
 
  주리는 2001년 8월17일 河양의 집에 왔다. 河양은 주리를 데려올 때 『주리가 태어난 지 45일 되었다』는 동물병원 관계자의 말을 듣고, 날짜를 逆算(역산)해서 7월4일을 주리의 생일로 삼아 달력에 표기해 놓았다.
 
  河양은 외출했다가 집에 오면 주리와 뒤엉켜 한바탕 구르고 난 다음 식구들과 인사를 할 정도로 주리를 사랑했다고 한다.
 
  『이 개가 없었다면 딸아이의 엄마가 아마 더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그나마 딸애의 손길이 닿은 것 중에 살아 있는 것은 이놈이 유일합니다』
 
  두 평 남짓한 河양의 방 한쪽 벽면은 헌법, 민법, 형법 등 법학관련 서적이 빽빽했다. 침대 머리맡에 바짝 붙은 작은 화장대에는 화장품이 몇개 놓여 있었고, 침대 벽면에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이 영화는 河양이 대학교 1학년 때 가족과 함께 극장에서 본 영화다.
 
  침대에는 허수아비 하나가 눕혀 있었다. 河양의 어머니는 매일 허수아비를 안고 울다가 지쳐 잠든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는 날이 더워서 모시 방석을 깔고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으나, 요즘은 추울까 봐 조금 두꺼운 이불을 덮어 놓았다고 한다.
 
  방에는 불경을 녹음한 테이프 몇 개도 눈에 띄었다. 빈 방에 불경 테이프라도 틀어 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다.
 
  『애 엄마는 아이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들어가겠다며 앨범하고 일기장을 끌어안고 울기만 할 뿐 방에서 도통 나오질 않아요. 안 마시던 술도 취하도록 마시고… 자신도 고통을 겪을 만큼 겪은 후 아이의 모든 것을 떠 안고 가겠다고 합니다』
 
  河양의 어머니는 딸이 사고를 당한 후 지금까지 외출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6월 월드컵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울 때 河씨 어머니는 『저 속에 딸이 있을 것』이라며 울부짓기도 했다.
 
  책상 위에는 河양이 쓰던 검은 핸드백과 노트가 한 권 놓여 있었다. 河양이 3월5일 자정까지 공부한 내용은 공교롭게도 「不在(부재)와 失踪(실종)」에 관한 것이었다.
 
  『납치 전날 공부한 내용이 「不在와 失踪」입니다. 납치 며칠 전에는 이 아이가 전화기에 뜨는 자기 이름을 「보름달」이라고 바꾸었어요. 보름달 뜨면 자기를 생각하라는 건지…』
 
  河씨는 딸이 죽고 나니까 사소한 것조차 다 마음에 걸린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河양의 아버지가 다른 노트 한 권을 내 밀었다. 얇은 대학노트였다. 첫 장을 넘기자 「My life」라는 영어로 된 제목과 함께 향후 5년간의 계획표와 1년 공부 계획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날그날 공부할 과목과 공부한 분량도 기록돼 있었다.
 
 
  悲劇의 시작
 
  아버지는 딸이 새벽에 수영장을 가는 게 못내 걱정이 돼서 시간을 바꿀 것을 여러 번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河양은 『아침 먹고 공부를 시작하면 오전을 다 허비한다』며 기어코 새벽에 수영장 다니기를 고집했다.
 
  『애가 공부를 얼마나 악착같이 하려는지, 올해 초 허리가 아파 한방병원에 입원 했을 때 밤에 병원에서 불을 켜 놓고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옆의 노인들이 싫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의사에게 말해서 밤에는 집에 와서 공부하고 새벽에 다시 병원에 돌아가 입원하고 그럽디다』
 
  거실 한구석에는 河양이 아픈 허리를 치료하기 위해 짬짬이 누웠을 척추 마사지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딸애는 성격이 명랑하고 활발해서 집안에서 가족간의 갈등이 있으면 조절하고 언제나 가족의 구심점이 되는 아이였습니다. 특히 애 엄마는 딸아이 보고 평소 「네가 내 엄마」라고 할 정도로 딸에게 많이 의지했습니다. 딸을 잃은 상실감은 말할 수가 없어요』
 
  河씨는 딸이 피살된 직후 언론의 보도를 보고 가슴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제한된 정보 때문에 일부 언론이 이 사건이 「치정관계」나 「삼각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어요. 이제야 진실이 거의 드러났지만 아직도 이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명명백백 전말을 밝혀 그동안 고통받았을 딸아이의 학우들과 딸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오해를 풀어야만 내 딸이 곱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河씨 가족의 비극은 1997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카(河씨 처형의 아들), 金모씨가 1999년 11월 말 尹여인의 딸과 중매 결혼을 하면서 시작됐다. 尹여인의 남편은 부산에서 Y제분회사를 경영하는 유모(55)씨로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현재 Y제분의 주가를 조작한 혐의로 실형을 살고 있다.
 
 
  판사 사위를 의심하는 장모
 
  딸의 결혼 무렵,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사위인 金판사와 河양의 사이가 의심스럽다는 말을 들은 尹여인은 두 사람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들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2001년 3월26일, 尹여인은 사위가 근무하는 서울지법 서부지원 빌딩을 찾아갔다. 이날 尹여인은 사위인 金판사를 보고 『네 사촌동생(河양)이 네 사무실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내가 나타나자 황급히 달아났다』고 주장했다.
 
  金판사는 장모가 워낙 강하게 주장하는 지라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河양의 집에 확인 전화를 걸었다. 이 전화를 金판사의 이모가 되는 河양의 어머니가 받았다.
 
  이 전화통화에서 金판사는 『장모가 이모님과 사촌동생이 일본에 갔다 온 것은 물론, 그간의 행적을 소상히 알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金판사로부터 이 말을 들은 河양의 어머니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마침내 河양의 아버지와 尹여인의 현장 검증으로 이어졌다. 河씨는 尹여인과 함께 서부지원으로 갔다.
 
  尹여인은 河씨 앞에서 河양의 걸음걸이를 10여 차례나 흉내내며 『내가 분명히 당신 딸을 이곳에서 보았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尹여인은 벽에다 손을 모으고 『부처님, 내가 말한 것이 거짓말이면 내 자식에게 벌을 주소서』 하며 기도를 했다고 한다.
 
  河씨는 그때 尹여인의 모습이 『도저히 제 정신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고 말했다. 河씨는 尹여인이 딸을 보았다는 그 시간에 딸과 같이 집에서 식사를 했을 뿐 아니라 딸은 서부지원이 어딘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날 밤 11시쯤 河씨 가족 모두가 서울 청담동 金판사의 집(尹여인의 집)에 찾아 갔다. 모든 가족이 있는 데서 3者 대면을 하자는 취지였다. 尹여인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河양의 아버지는 『장모가 주장하는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확실히 말하라』고 金판사를 다그쳤다. 河씨는 『이날 金판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金판사의 애매한 태도가 尹여인의 의심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河양이 피살된 후 金판사의 진술을 받은 광주경찰서 한 관계자는 『이날 金판사가 「장모님,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하고 한 마디만 딱 부러지게 이야기했어도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現職 법조인으로서 입에 꺼내기도 부끄러운 의심을 받고 있는 부분에 대해 해명이나 규명하지 않고 방치한 것에서부터 사건이 커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기자는 金판사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주장에 대한 해명을 들으려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작년 6월, 河양은 자신을 미행하는 남자가 있음을 눈치채고 그와 일부러 부딪쳐서 『왜 미행하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아빠, 나 사법고시 공부할래요』
 
  이 무렵, 河양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기숙사에서도 河양을 찾는 괴전화가 걸려왔다. 河양이 전화를 받으면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河양이 피살된 후 밝혀진 일이지만 尹여인의 돈을 받고 河양을 미행한 「청부미행자」는 전ㆍ현직 경찰 일곱 명을 포함, 심부름센터 직원, 경호업체 직원, 尹여인의 운전기사 등 무려 27명에 이르렀다. 尹여인이 이들로부터 보고를 받기 위해 구입한 휴대폰도 네 대나 되었고, 미행에 사용한 금액은 5000만원 가량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사건 발생 후 「자신의 사위와 河씨와의 관계가 의심스럽다」는 尹여인 주장의 신빙성에 대하여 조사했으나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河양을 미행한 사람들도 이 두 사람이 만나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로 나타났다.
 
  尹여인 자신이 河양이 사는 아파트 경비실에까지 와서 河양의 동태를 묻고 간 적도 있었다고 했다. 아파트 경비원은 「무슨 좋은 혼사가 들어오는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쨌거나 河씨 집 주위에서 거의 날마다 벌어진 이런 미행을 河씨 가족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河양의 아버지는 『2001년 3월에 벌어진 다툼 이후 가족간의 오해를 풀려고 尹여인의 남편에게 항의를 하는 등 3개월을 노력했으나 상대편이 성의를 보이지 않아 결국 작년 6월, 尹여인을 검찰에 고발했다』고 말했다.
 
  尹여인은 7월, 검찰에 의해 명예훼손 및 모욕죄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河씨는 尹여인의 이상한 행동에 쐐기를 박기 위해 법원에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그해 10월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河씨는 이 송사 사건이 잘 해결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마음먹었던 담배도 쉽게 끊을 수 있었다.
 
  河양은 작년 12월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기숙사를 나왔다. 금년 2월에는 본격적인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했다.
 
  그러나 尹여인의 미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河양 집과 河양 휴대폰으로 괴전화가 몇 차례 걸려왔다. 불안해하는 딸에게 河양의 아버지는 『접근금지 결정까지 났는데 너무 신경이 과민한 것 아니냐』며 달랬다. 걸려오는 괴전화로 불안했던 河양은 작년 말 자기 어머니와 함께 강남경찰서를 찾아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범인들은 河양을 납치하기 위해 3월2일, 5일, 두 차례 아파트 앞에서 잠복했으나 실패했다. 河양이 매일 가던 수영장을 3월 들어 격일제로 바꾸었기 때문에 납치범들이 납치 시기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3월6일 새벽 5시47분 세 번째 잠복 끝에 납치범들은 河양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0일 후인 3월16일 河양은 손발이 묶이고 머리에 공기총을 여섯 발이나 맞아 숨진 채 발견됐던 것이다.
 
 
  단서를 잡아라
 
  河양의 시체가 발견된 관할 경기도 광주경찰서는 조그만 단서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河씨 집에 형사 한 명을 상주시키다시피했다. 시체 발견 20여 일이 지난 4월8일경, 河씨는 작년 말에 자기에게 사업을 같이 하자며 접근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언뜻 떠올렸다.
 
  『작년 말 김기준(김용기의 가명)이란 사람이 나에게 접근을 해서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재산이 50억원 가량 있는데 사업을 같이하자」고 했습니다. 이 사람 말이 횡설수설하고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얼굴도 범죄형같이 생긴 것이 도무지 사업을 할 행색이 아니었어요』
 
  이 사람은 河씨에게 『영국에서 온 옷이 인천에 와 있는데 같이 가자』, 『일본에 같이 가서 프랜차이즈 사업성을 알아보자』, 『부산에 투자자가 있는데 같이 가 보자』는 등 몇 번이나 河씨에게 호의적인 제의를 했다. 그러나 河씨는 처음부터 이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제의를 쉽게 거절했다.
 
  河씨는 『나중에 일이 터지고 보니 이 자들이 나를 납치하려고 하다가 잘 안 되니 계획을 바꾸어서 딸을 납치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어쨌든 河씨의 이 제보는 수사의 방향을 급진전시켰다. 이 무렵, 광주경찰서는 河양이 성남의 검단산 인근에서 살해되었다고 판단하고, 河양이 감금되었을지 모를 장소를 찾기 위해 인근 지역에 있는 수천 개의 별장을 우직하게 뒤지고 있었다. 광주경찰서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강력반 세 개를 전부 투입했다.
 
  河씨의 제보를 받은 광주경찰서 담당 형사는 직감적으로 「큰 단서가 걸렸다」고 느꼈다. 경찰은 그 남자가 주었다는 명함의 앞뒤 번호를 조합하여, 그 번호로 전화를 개설한 사람들을 추려냈다. 이렇게 나온 인물 중에 다시 河씨가 진술한 사람과 인상 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가려냈다.
 
  그러자 곧바로 김용기(40)라는 전라도 군산 출신의 인물이 용의자로 지목됐다. 경찰이 파악해 본 결과, 김용기는 1년째 집세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일정한 직업이 없는 한량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50억원대 재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김용기의 전화통화 내역을 확인해 보니 납치 당일 피해자의 집 부근에서 새벽 4시경부터 통화를 한 것이 확인 됐다.
 
  계속 주변 인물을 추적하자 尹여인의 조카인 윤남신(41)의 신원도 파악됐다. 윤남신도 일정한 직업이 없이 尹여인의 주변에서 잔심부름 등을 하며 먹고 사는 인물이라고 경찰은 밝혔다. 윤남신 역시 군산 출신으로 김용기와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주범들 國外로 탈주하다
 
  경찰은 6일 만에 납치에 가담한 주변인물에 대한 신상을 파악하고 이들에게 출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이미 윤남신과 김용기는 3월22일과 4월2일 베트남 등지로 도주한 상태였다.
 
  경찰은 이후 4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김용기에게 공기총을 사준 자, 범행 후 공기총과 실탄을 보관하고 있던 자, 납치에 가담한 자, 납치를 준비한 자 등 일곱 명을 검거했다. 그러나 납치에 직접 가담한 자들은 자기들은 납치만 도왔을 뿐, 河양을 최종적으로 태우고 간 사람은 김용기와 윤남신이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자기들은 尹여인을 모른다고 말했다.
 
  河양의 아버지는 6월 중순 김용기와 윤남신을 잡기 위해 직접 베트남에 들어갔다. 베트남에는 도망간 윤남신의 아버지(尹여인의 오빠)가 봉제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그 쪽에 隱身(은신)하고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河씨는 일주일 만에 큰 성과 없이 돌아왔다.
 
  경찰은 지난 8월20일, 河양을 집요하게 미행했던 尹여인을 河양의 납치 및 감금을 사주한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은 尹여인이 자신의 운전기사 徐모(44)씨에게 베트남으로 달아난 윤남신과 만난 사실을 부인해 달라며 700만원을 주는 등 河양의 납치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사건 초기 尹여인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尹여인이 사건이 발생한 후 잠적했기 때문이다. 경찰이 탐문을 계속하자, 尹여인이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체포에 나섰다.
 
  尹여인은 입원 중인데도 사복을 입고 외출을 하는 등 건강상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경찰은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尹여인을 가로막고 체포를 시도했다. 갑자기 나타난 경찰에 놀란 尹여인은 그 길로 다시 환자실로 뛰어올라가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못 가겠다고 버텼다.
 
  검거된 尹여인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내가 쓰러져서 반신 불수가 되면 당신들이 책임지겠냐』면서 수사진을 애를 먹이고 있다고 한다.
 
 
  딸의 고통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
 
  河씨는 尹여인이 검거됐다는 소식을 듣고 『尹여인이 이미 사건 발생 후 4~5개월이나 숨어다닌 것은 스스로 죄를 자인한 것』이라며 『곧 모든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나머지 범인 두 명이 잡히지 않아 초조하다』고 심경을 밝혔다. 河씨 부부는 딸이 납치 살해된 이후 신경안정제의 도움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河씨는 尹여인같이 편집증적인 정신상태를 지닌 사람이 딸을 최소한 8일 동안 감금하면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를 생각하면 잠이 오질 않는다고 말했다.
 
  『보통의 원한 같으면 그 자리에서 죽일 것 아닙니까. 자기의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딸아이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문을 했겠죠. 면전에 나타나 핍박했을 겁니다』
 
  河씨는 지난 8월30일, 이 사건에 대한 심경을 적은 글을 자기 딸이 다니던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다.
 
  사건 관련자들을 실명으로 거론한 이 글에서 河씨는 자신의 처조카인 金판사를 강하게 비난했다.
 
  河씨의 글이 홈페이지에 나간 후 河양 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河양의 추모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河씨는 金판사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장모 尹씨 사이에 형성된 집안 갈등의 불꽃이 엉뚱하게 딸에게 튀었다고 생각한다.
 
  河씨는 처조카인 金판사가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행동을 보면 인간적인 비애를 느낀다고 했다. 서울에 온 金씨는 河씨의 집과 가까운 곳에 전셋집을 두고 河씨 집에 자주 들락거렸다. 河양의 어머니는 金씨에게 매번 음식을 챙겨 주고 빨래도 해 주었다는 것이다.
 
  河씨는 처조카가 용돈이 궁할까 봐 일부러 딸의 과외 공부를 맡기고 용돈을 주었다고 했다.
 
  河씨는 딸 일이 마무리 되는 대로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등 딸의 靈魂(영혼)을 위로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