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최지선200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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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실제로 그렇게 발음해본 적은 없지만

그때 누군가 내 심장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었다면

아마도 이런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왜 태양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 거야?

왜 니들은 내가 외로울 때만 내 곁에 없는 거야?

왜 내가 미워하는 놈들은 승승장구를 하는 거지?

왜 이 세상은 내 약을 바싹바싹 올리면서

나의 행복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는 거냐구!……라고.

 


*

 

 

"십오 년 전 설에 엄마 심부름으로 큰댁에 갔을 때, 내가 당한 일을,

가족들 누구도 관심 두려 하지 않았어. 내가 왜 이렇게 된 줄 알아?

내가 왜 세 번이나 약을 먹고 손목을 긋고 이 지경이 된 줄 아느냐구!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정말 내가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건,

그러고도 엄마도 오빠들도 심지어 아빠까지! 그걸 없던 일로 해버렸다는 거야.

 

마치 오늘 검사영감님인 오빠가 오니까 당연히 입건될 내가

음주운전에 걸린 일이 없었던게 되는 것처럼 그랬다는 거야!

나는 죽을 것만 같았는데,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는데……

 

모두들 입을 다무니까 없던 일이 되어버렸어……

대체 다들 왜 그랬는지 아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어.

 

잘나가던 여당 국회의원이었던 큰아버지……

그 큰아버지가 없으면 우리 집 사업이 안 되니까, 큰아버지가 봐주지 않으면

아버지가 사업하면서 탈세하고 불법으로 입찰하고 배임하고

가지가지 횡령 못 하니까, 그게 안 되니까!"

 

"그만해라!"

 

큰오빠는 많이 참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는 내 입에서 담배를 빼앗아 거칠게 자동차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렇다고 물러서면 내가 문유정이 아니었다.

 

"난 그때 겨우 열다섯이었어…… 내가 왜 죽으려고 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왜 그러는지 이제 알겠어?

우리 가족, 엄마, 아버지, 오빠들…… 나보다 그게 더 중요했던 거야……

 

우리 식구들이 날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날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하게 했는지 알기는 알아?

 

그런 오빠가 그 인간들을 두고 짐승 같다는 소릴 해?"

 

 

*

 


영화마다 한마디 걸러 욕이었고,

세련되었으나 실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게 잔인한 장면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연애하고 싶어할 만큼 매력적인 사람들이 그랬다.

 

그래도 한국 영화는 세계 영화제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고

신문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

 


"왜냐하면 나는 엄마를 싫어하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엄마에게 가면

저는 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게 뻔할 거거든요. 그래서 온 거예요.

 

당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그렇게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미워할 만큼 기대하거나

사랑을 나눈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싫어하지도 못하는 사이니까……

 

저로서는 이게 편했던, 아니 편했다기보다 차라리 여기가 더 나았어요.

오해하진 마세요.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에요."

 

 

*

 


내 입으로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간이라는 객관적인 용어를 쓴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야 한다면

살아서 보는 마지막 봄을 맞고 있을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모르겠다, 내가 그에게 느꼈던 동질감은 무수히 많았다. 실은 처음부터 그랬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우리가 인생의 어떤 시기부터 내내 죽음의 열차를,

쫓겨서 그랬든, 자발적으로 그랬든, 타고 싶어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열차라는 것을 타고 싶다고 생각하고 나면,

세상의 가치들이 모두 헤쳐 모여, 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해지지 않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해졌다.

 

죽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왜곡된 것도 많았지만

제대로 보이는 것 또한 많았다.

죽음은 이 세상의 가치 중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모든 소유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돈, 돈, 돈 하면서 돌아버린 이 세상에서 그것을 비웃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고,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

 


"지난번에 만나고 나서 돌아가 곰곰 생각해봤는데,

진짜 이야기, 진짜 좋은 거 같아요.

 

나도 진짜 이야기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에는 진짜 이야기가 있고 가짜 이야기가 있는지

당신 때문에 처음 알았어요.

 

대학도 나오고 그것도 모자라

멋있는 나라 프랑스에 유학도 갔다 오고 화가이고 교수이고 집이 부자인 사람도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어요……."

 

 

*

 


"생각해봤는데…… 오빠는 네가 원한다면…… 한다.

설사 내가 그 일 때문에 옷을 벗게 된다 해도, 그럴 일도 없겠지만,

엄마가 펄펄 뛰신대도, 오빠가 옷 벗고 변호사 개업해서라도…… 한다.

 

유정아, 만일 사실이라면 오빠가 그 인간을……

어떻게…… 어떻게…… 그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

 


"그러면 돈 때문에 그 사람들을 죽여야 된단 말인가요?"

 

그는 돈이 아니라, 비용이에요,

하는 낯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나를 그냥, 외면하고 말았다.

 

 

*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해보고 싶은 게 뭐니? 하고 제가 물었더니,

그 아이들이 바다가 보고 싶다는 거예요.

산 넘어가도 산이고 산 넘어가도 산인데,

바다가 한 시간만 기차 타고 가면 있다는데 바다를 보고 싶은 게 소원이라고.

 

그래서 제가 꼭 그 소원 들어주겠다고 했더니,

이 녀석들이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주소가 군포우체국 사서함으로 되어 있으니까

이 녀석들이 내가 무슨 군포시에 사는 돈 많은 사장쯤 되는 줄 알았는지,

지네들끼리 작전을 짰다면서 내년 일월 일일 강릉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기로 결정했다고 편지가 온 거예요.

 

수녀님…… 어떻게 하죠?"

 

 

*

 


"유정이 누님, 나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살고 싶었어요. 예전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 수갑 찬 손으로라도 아이들한테 편지 쓰고,

나 수갑 찬 몸으로라도 여기서 있는 힘껏

사람들에게 내가 받았던 사랑 전하면서……

 

평생 그렇게 피해자들 위해 기도하고 속죄하면서……

여길 수도원처럼 생각하면서 살면……

 

나 그렇게라도 살아 있으면 혹시 안 될까,

염치없지만, 정말 염치없지만 나 처음 그런 생각했어요……."

 

그것이 내가 윤수를 본 마지막이었다.

 

 

*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래서 왔어……

엄마를, 용……서 한다고 말……하려고."

 

예리한 칼로 가슴을 잘게 잘게 죽죽 긋고 있는 것처럼 아팠다.

그렇게 갈라지고 마른 그 가슴 한구석에서

오래 응고되어 있던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내 눈으로 눈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눈이 몹시 아파왔다.

 

 

*

 


"내가…… 사랑해보려고 했었단 말이야.

난 어차피 아무 남자하고도 사랑할 수가 없는 사람인데,

그래서 그 사람 살아만 있으면 영영 감옥에 있어도 괜찮았단 말이야.

 

살아만 있으면."

 

 

*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오빠가 달래듯 물었다.

"그랬으면…… 살려주었어?"

내가 묻자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입으로 누구한테도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어 오빠."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또 실패였다. 그랬다. 바보같은 짓이었다.

 

 

*

 


그리고 그분이 이 노트를 거부하시면 한마디만 전해주십시오.

 

우리가 만나던 그 시간, 우리가 마셨던 인스턴트 커피,

우리가 나누었던 작은 빵,

 

일주일에 그 몇 시간으로 인해

저는 어떤 모욕도 참아낼 수 있었고,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었으며,

원수를 용서할 수 있었고,

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신께 뉘우치며 참회했다고 말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진정 귀중하고 또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었다고.

 

혹여 허락하신다면, 말하고 싶다고……

당신의 상처받은 영혼을 내 목숨을 다해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살아서 마지막으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내 입으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 말, 을 꼭 하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

 

 

그때 뜨거웠던 그의 손이……

왜 그때 웃으면서 그의 손을 마주 잡지 못했을까……

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윤수의 말대로 너무나 간단했는데,

그냥 사랑했으면 됐는데…… 이제 그 온기가 사라져버렸다.

 

온기가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인간의 영혼에서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 또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

 


교장은 안주머니에서 통장을 꺼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액수는 작았다.

 

교장이 다시 말을 꺼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지금 운동장 가에 스탠드 지붕을 얹는 공사를 하고 있는데……

거기 혹여 보태면 안 될까 싶어서요.

교실은 휑하니 넓긴 한데,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다가 비를 피하거나,

여름에 그늘 아래 책을 읽거나 할 경우 언제나 불편했거든요.

 

그래 이 돈을 그 지붕 공사를 하는 데 보태면 어떨까 말씀드리려고."

 

 

*

 


"울지 말아라. 우리 이쁜 유정이.

 

네가 이겨냈을 때, 처음 구치소에 따라왔을 때,

윤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때,

네가 윤수를 살려보려고 엄마에게 찾아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네가 이뻤는지……

 

고모가 실은 그전부터 가슴 졸이면서 널 몰래 지켜보고 있었는데……

 

너는 뜨거운 사람이야, 뜨거운 사람은 더 많이 아프다.

하지만 그걸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

 


이제는 편히 쉬세요, 사랑합니다, 나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