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의 꿈은 ‘꿈의 속도’로 추락하는가

유희정200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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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의 꿈은 ‘꿈의 속도’로 추락하는가

                          

                                                윤선옥
                                                            

 난생 처음 파업가를 불려보았다. 낯선 음과 모르는 노랫말에 입만 벙긋거리는 게 무안해 괜한 팔뚝질만 열심히 해댔다. 2006년 3월 1일 두꺼운 잠바에 배낭가방 하나를 들쳐 메고 파업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동아대 차가운 강당에 짐을 풀고 흩내리는 진눈깨비에 손이, 발이 온 몸의 감각이 먹먹해질 때까지. 그렇게 모르는 노래말에 모르는 몸짓으로 모르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파업 전야제의 밤이 끝나갔다.


  과연 무엇이 날 파업까지 이끌었던 것일까? 지금처럼 확실한 신념도 비정규직 불법파견이 무언지, 노동법이 무언지도 몰랐던 내가 어떻게 3월 4일 철도 총파업이 끝난 뒤에도 돌아가지 않기를 결정할 수 있었을까?


  그냥 억울했다. 뭐가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단지 너무 억울했다. 내가 KTX에서 보낸 2년이 그리고 2월 26일 사복투쟁부터 3월 4일 철도복귀까지 당했던 설움이 날 그냥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다. 서울 승무지부와는 달리 제대로 된 노조교육 한번 받아보지 못한 부산승무원 대다수가 총파업이 끝난 뒤에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를 인터넷에서 TV에서 또는 신문 한 귀퉁이 가십난처럼 스쳐보는 사람들이 과연 알 수나 있었을까...


  2004년 4월 1일 화려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KTX승무원이 되었다. 시속 300KM 꿈의 고속철도! 지상의 스튜어디어스라는 이름으로 내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찬사와 주목을 받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직장동료들에게 사돈에 팔촌에게까지 싱글벙글 전화기를 붙잡고 자랑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런 게 효도구나’ 내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철도공사 전환이후 정규직 및 정년보장! 준공무원대우! 20대 여성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1위!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화려한 장밋빛으로만 보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철도 개통일인 2004년 4월 1일, 그 개통일 첫 날부터 내 생애 첫 승무가 삐걱대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승무원이 차를 타는데 가장 기본인 승무다이아(열차운행시간표)가 1일 자정이 넘어도 나오지 않았다. 과연 내가 무슨 차를 어떻게 타야 하는지 모르는 불안감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전화기만 바라봤다. 이렇게 시작된 첫 승무를 시작으로 내가 꾼 그 장밋빛 미래가 아스팔트 타르처럼 까맣게 타들어 가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순식간에 정상으로 올라간 롤러코스터가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르게 바닥을 향해 치닫는 것과 같았다. 꿈의 속도인 시속 300km로 말이다.

  

  승무사업을 위탁 운영한다는 한국철도유통(구 홍익회)은 한 달이라는 견습기간에 승무에게 주어야 할 견습비를 떼어갔으며, 초과근무수당과 상여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부산의 경우, 초기 2개월 동안은 한국철도유통의 사무공간조차 마련되지 않아서 철도청 여직원 숙소라는 5평 남짓한 공간에서 100명의 여승무원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화장하고, 혹 있을 수 있는 결승에 대비해 8시간 대기하고, 승무가 끝나면 지친 몸을 쉬어갔다. 바로 옆에 있는 남자팀장님들의 널찍한 락커실, 휴게실에서 경쾌하게 들리는 당구공 소리는 여승무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한참 뒤 부산역 4층에 여승무원 락커실과 휴게실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인원대비 너무도 좁은 공간, 그리고 여름이면 부산역 전 곳에 틀어주는 에어컨을 KTX여승무원 락커실만은 틀어주지 않아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온 몸이 땀투성이가 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1주일에 한번 있는 휴무는 어느새 10일에 하루, 보름에 하루로 바뀌었다. 무리한 스케쥴에 승무원의 대부분이 종합병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병원과 약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나빠지는 몸 상태와는 달리 열차 내 업무는 하루하루 가중되어갔다. PDA라는 것을 하나 던져주더니 얼렁뚱땅 종이 한 장 읽어보게 하고 교육확인서에 싸인을 시켰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바로 PDA를 들고 열차 내를 검표하며 돈을 벌어오라고 시켰다. 검표를 해서 부정 승차객을 잡아내 벌어오는 차내 수익금이 적은 날에는 KTX를 타는 3명의 승무원 중 가장 일 못하는 승무원이 되어야했고 수익금에 대한 인센티브는 열차팀장이 가져갔다. 그리고 PDA조작 미숙이나 계산착오로 생긴 손실분은 여승무원이 사비로 메워야만 했다. 개통 초기 얼마간 화장실을 청소하시던 차내 미화원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려 비닐장갑 하나 없이 맨손으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화장실 청소가 안 돼 열차팀장 눈에 찍힐까봐 치마 유니폼에 무릎을 꿇고 화장실 바닥을 닦았다. 타는 시간대가 1시간내외로 자유로워 미리 착발역을 알 수 없는 자유석 고객의 검표업무 역시 처음에 철도공사 열차팀장의 업무였지만 어느 순간 여승무원의 몫이 되었다. 특실에서는 음료서비스를 한다고 엄청나게 선전만 해놓고 승무원들에게 단 한 번의 서비스 교육도 없어 카트 한번 만져보지도 못한 채 바로 실무에 투입되었다. 서울~광명처럼 중간정차역의 시간간격이 15분정도로 짧을 때에는 15분 만에 140명의 특실고객에게 음료서비스를 하고 필요한 고객에게 담요를 제공 수거하고 깨우미 서비스를 시행하는 초슈퍼 승무원이 되어야했다. 그렇게 보내온 시간이었다. 일일이 말하기조차 치졸해 입을 닫아버리고 지낸 시간이었다.


  2005년 새로 입사한 후배 승무원들의 교육기간이 고작 일주일로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회 첫 초년생 신입승무원에게 퇴사한 승무원에게 반납하게 한 헌 유니폼이 지급되었다. 이런 온갖 부당함을 지적하는 승무원에게 다음해 재계약을 빌미로 협박과 폭언이 쏟아졌고 선별재계약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아파서 응급실로 실려 간 승무원에게는 인력이 부족해 내일 당장 차 탈 사람이 없으니 쓰러져도 열차에서 쓰러지라며 일하러 나오라고 했다. 더 이상 눈을 돌릴 수도, 입을 닫을 수도 없는 잔혹하고 억울한 현실이 나를 다그쳤다.


  그러다 서울에서 노조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05년 9월 처음으로 단체행동에 나섰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처음으로 KTX여승무원의 실상을 알리는 전단지를 근무 후 열차를 타고 내리시는 고객님들께 나눠드렸다. 유니폼에 ‘여승무원 직접고용’이라는 빨간 리본도 달았다.  9월, 10월 이렇게 달이 갈수록 작은 빨간 리본이 어느새 손바닥만한 패찰로, 등을 가득 덮는 등벽보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2006년 2월! 모든 KTX여승무원의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90%가 넘는 압도적 가결로 총파업을 결의했고 현장에서는 3월 1일 철도총파업에 대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2월 26일 KTX 여승무원은 철도노조의 조합원으로써 노조의 행동강령에 따라 사복투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KTX 여승무원은 승무자체를 저지당했다. 모든 철도노조원! 같이 차를 타는 열차팀장, 전무, 새마을 여승무원까지...그 모두는 사복승무가 가능하지만 ktx 여승무원만은 안된다는 철도공사의 희한한 논리가 작용했다.


  억울함에 부산역 광장에서 집회를 했다. 어디서 어떻게 몰려들었는지 모르는 방송사 카메라와 기자들이 나와 우리를 취재했다. 승무제지를 항의하려 철도 정규직 노조원들과 함께 5층 열차승무사무소를 찾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장 가면10m길인 철도유통 사무실를 빙 돌아 300m를 걸어가야 한다고 말하니 철도 정규직 노조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철도공사 사무실을 통해 곧장 가면 금방 가는 길을 왜 300Mm나 돌아서 가야하냐고! 열차팀장님이랑 철도공사 직원들이 여승무원들이 사무실 쪽으로 다니면 시끄럽다며 승무하러 갈 때만 곧장 갈 수 있고 그 외에는 이렇게 돌아서 유통사무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제했다는 것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분이 원통해하시며 "그런 게 어디 있냐!"며 버럭 화를 내셨다. 그 순간 갑자기 울컥 눈물이 솟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같이 유통사무실로 몰려가던 모든 승무원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울면서 공사사무실을 통해 가는 걸 막는 사람들을 밀치고 곧장 유통사무실로 갔다.


  왜 나는 이 부당한 일을 한 번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근데 왜 갑자기 정규직 조합원의 문제제기에 울컥 눈물이 났을까? 승무를 하기위해 곧장 이 사무실을 지나갈 때도 역시 가방 끄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원성에 무거운 캐리어가방을 손에 들고 조심조심 지나가야했다. 열차팀장의 목소리, 다른 철도정규직의 번잡함 역시 시끄러웠을 것인데 왜 우리의 소리만 그렇게 시끄러웠던 것일까? 왜 나는 우리 KTX여승무원만 열차팀장님과 타 열차의 승무원들과 같은 일을 함에도 철도공사 소속이 아닌 걸까? 왜 월급의 반 이상을 중간에서 착취당해야 하는 걸까? 왜 다른 철도직원들은 사복투쟁이 가능한데 왜 KTX 여승무원만 승무를 제지당하는 걸까? 왜? 왜?? 그 짧은 10m를 걸어 들어가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스스로 눈을 막고 귀를 막으며 보지 않으려 했던 현실이 한 조합원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급류가 되어 나를 덮친 것이다. 왈칵 울어버린 눈물과 함께 우리 KTX 여승무원의 가슴을 덮친 것이다.


  한 승무원이 생리통이 너무 심해 열차를 탈 수 없다고 말하자 관리자가 말했다. 피가 철철 넘치더라고 열차를 타라고, 생리를 해서 아픈 날짜를 미리미리 말해주면 모를까 인력이 부족해서 보건휴가는 사용불가라고, 자기 생리날짜도 미리 모른다며 면박을 줬다. KTX 안에  노숙자가 무임승차를 해서 술에 취해 열차 안을 쌍욕을 하며 돌아다니며 공포감을 조성했다. 두려워하고 불편해하는 고객들을 위해 노숙자를 제지한 여승무원은 2주간 병원신세를 져야만 했다. 폭력을 휘두르는 노숙자에게 일방적으로 맞은 것이다.

  열차가 시커먼 터널 안에 멈췄다. 열차 안에 불은 깜깜하게 다 꺼졌고 바닥에서 2m가 넘는 승강문에서 뛰어내려 고객들을 일일이 붙잡아드리고 짐을 들어서 환승시켰다. 하지만 열차팀장이 하면 안전담당, KTX여승무원이 하면 단순 서비스 업무다.

  민족의 명절 추석이다. 형형색색 한복을 입고 열차를 타란다. 휴무인 승무원까지 무조건  출근해서 역에 서서 인사를 하란다. 하지만 승무 후 남은 건 한복에 걸려 넘어진 상처, 그리고 휴무였던 동료가 고객안내 후 남은 건 2500원짜리 식권뿐. 열차팀장님은 명절 인센티브 얘기로 바쁘시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KTX열차 안에서 나는, 우리는 KTX승무원이 아닌 KTX‘여’승무원이었다. 같이 승무를 하고 같이 검표를 하고 같이 안전담당을 함에도 남자팀장님은 전문직업인, 우리는 열차내 눈요깃거리고 1년 단위 소모품일 뿐이다. 억울하다. 계약직이 뭔지 위탁이 뭔지 몰랐다. 사업초창기에 으레 있는 시행착오일 뿐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했던 그 약속이 지켜질 줄 알았다.

  나는 그 10m를  걷는 동안 깨달았다. 그동안 너무 서럽고 억울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가슴에 분노를 품고 3월 1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사복투쟁기간 동안 보여준 언론의 관심 그리고 우리의 영향력에 정말 어쩌면 뭔가 달라질 수 있겠구나! 남들이 얘기하는 대로 1주일만 버티면 된다는 얇은 희망이 우리에겐 있었다.


  하지만 따뜻한 방에 따끈한 밥에 익숙한 나약한 육신은 파업을 전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차가운 시멘트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온 몸이 꽁꽁 얼어붙고 제대로 씻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지 스스로 깨달아가는 1분 1초였다.


  파업에 들어가기 전 승무사무소 앞에 붙어있던 피켓 문구가 있었다. 󰡐다 같이 갔다 다 같이 돌아오자!󰡑 그 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파업이 실패하면 지도부 몇몇 목이 날아가니깐, 꼭 지지 말고 파업에서 이기자는 말은 아닐까 혼자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업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의 진의를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줄 알았던 의지는 시시각각 흔들리고 하루 이틀이 지나자 파업복귀자들이 속속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단순한 문장이 이리도 어려운 말인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동아대에서의 2박을 마치고 3월 2일 부산철도노조산하 전 조합원들은 민주공원으로 거점을 이동했다. 이미 많은 조합원이 추위과 피로에 절어 심신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처음으로 철도노조는 정규직도 아니고 직접고용 노동자도 아닌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철도노조 조합원으로 삼았고, 철도노조의 주요핵심 5대요구안 중 하나가 KTX여승무원 철도공사 정규직화였다. 제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교육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첫 파업! 그리고 노사간의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로 인하여 노사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 중 하나로 KTX여승무원 문제가 거론되었고 정규직조합원간에 KTX여승무원에 대한 암묵적 적대시가 공공연하게 나타났다. 왔다갔다 움직이는 것조차 거슬린다고 해서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한 장소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기도 했다. 혹시라도 미움 살까 제일 늦게 밥을 먹고 알아서 다들 먹고 난 잔반을, 화장실을 우리끼리 조를 꾸려 치우고 청소했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골은 우리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업장의 분위기는 흉흉했고 날선 칼날에 서있는 것처럼 모두들 신경이 날카로웠다.


  결국 서울지하철 기장의 복귀를 기점으로 차례차례 지부별 복귀가 이뤄졌다. 3월 3일 밤 갑자기 노조간부 한 명이 급히 KTX여승무원 전 대오 모두 1층으로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1층은 많은 조합원들이 모여 웅성웅성한 분위기였다. 갑자기 그 분이 말씀하셨다.“고속철도 기장님들이 여러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 복귀를 생각하신다고 하니 여러분들이 무릎 꿇고 울어서라도 잡으십시오.” 어쩔 줄 몰라 하던 우리는 결국 기장님들이 계신 굳게 닫힌 소회의실 앞에 모두 무릎을 꿇었다. 너무 서러웠다. 내가 왜 여기에 무릎 꿇고 있어야 하는 걸까? 내가 과연 뭘 잘못한 거지? 나와 우리 KTX여승무원은 그냥 2년 동안 묵묵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뒤에서 몇몇 정규직 조합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들 쇼 하는 거야!”, “야 기장들, 얘들 밟고 지나가!” 잠시 후 철도노조 간부 및 KTX 지부장이 기장님들과 대화하러 들어갔고 나중에 들은 얘기였지만 그들이 복귀를 선택한 판단과 우리와는 별다른 개연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시간 후 부산은 고속열차 기장의 복귀를 시작으로 파업의 대오가 무너져갔다. 결국 3월 4일 오후 2시부로 철도총파업은 선복귀 후협상이라는 사실상의 백기투항으로 무너졌다. KTX 승무지부는 조합원과의 토의를 거쳐 파업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우리만이라도 남아 총파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 땐 정말이지 승무원으로 일한 2년 동안, 그리고 파업하는 동안 받은 상처 때문에  온 몸이 욱신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돌아갈 길 역시 없었다. 다시 그대로 지난 2년의 생활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아니, 이대로 무릎을 꿇고 돌아가면 우리는 단숨에 해고될 비정규직 신세였다. 그렇게 심신의 상처와 정규직조합원에 대한 배신감을 뒤로하고 다시금 한 가닥 희망을 찾아 부산승무지부 승무원들은 서울승무지부와 결합하기 위하여 3월 4일 저녁, 버스를 타고 경기도 양평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187일이 지났다. 바닥의 한기에 얼어 죽을 것 같던 겨울도, 체포영장․폭력적 연행․고소고발․손해배상 등의 법적 탄압에 힘겨웠던 봄도 지나고 이제는 하얗던 팔뚝이 억센 구리빛 노동자로 변한 여름이 왔다. 이젠 더 이상 파업가도, 몸짓도, 동지란 단어 역시 낯설지 않다. 단 일주일도 버텨낼 수 없을 것 같던 파업을 187일 아니 그 이상 버티게 할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억울함과 분노가 나를 파업으로 이끌었다면 또 그 무엇이 여기 남은 140대오를 지금까지 이끌었을까?


  더 이상 정규직 조합원에 대한 미움은 없다. 전국 곳곳에 흩어진 철도현장을 순회하면서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공공성을 망각한 채 돈벌이에 혈안이 된 철도공사의 외주화 구조조정 정책에 희생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노동자를 갈라치기한 진짜 무서운 적! 노동자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생존권을 쥐고 노동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악다구니하게 만든 진짜 적이 누군지 이제는 분명히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노동유연화 정책이라고 해서 어딜 가나 비정규직이다. 이제는 비정규직도 모자라 중간착취가 필연인 외주외탁이 판을 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교통, 통신, 전기 등등 부문에 있어서의 국가의 노력, 공익성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열심히 일하는데 자꾸만 가난해져간다.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에 살고 있는데 현실은 평등하지 못하다. 이 현실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KTX여승무원의 잘못은 단지 이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자리한 「약자」라는데 있었다. 철도의 핵심 분야라는 승무분야에 「KTX여승무원」이라는 직종이 처음 생겼다. 철도공사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같은 일을 해도 싸게 쓰다 쉽게 버리고 싶었고 노사관계를 회피하고 싶었다.

  거기에 우리가 걸려든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사회초년생으로 구성된 여성 집단이라 어수룩하기만 하다. 제도권 교육 속에서 교육받지 못해 근로기준법이나 노동법에 대해 전혀 몰라 사용자가 불법 행위를 남발해도 그 누구도 그것이 불법인 것조차 모른다. 나중에 경험으로 깨닫고 알아보고 공부해서 부당함에 항의하면 외주위탁에 1년 단위 비정규직이니 잘라버리면 그만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들 생각대로 1년 단위 비정규직으로 280명 전원이 해고됐다. 아무리 불법파견임을, 외주위탁의 부당성을 외쳐도 너희는 하청노동자이니 같이 대화할 자격조차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저들이 간과한 부분이 있다. 우리의 정당한 투쟁에 지독하고 악랄한 착취로 인한 상처만을 남길 수 없다고 결의한 우리의 의지이다. KTX승무원으로 근무한 2년간의 소중한 젊음을 저들이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며 앗아가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다.  187일이란 파업을 통해 진짜 적이 누구인지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안 이상 포기할 수 없다. 더 이상 스스로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닫을 수 없기에 싸우는 것이다.


  날이 조금씩 쌀쌀해져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한 계절만 더 보내면 이 곳 파업장에서 사계절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부산 내 자취방은 아직도 뽀얀 먼지가 쌓인 채 겨울로 남아있다. 파업이 끝나면 연락하기로 마음먹은 친구들이 걸어오는 부재중 통화도 이제는 조금씩 뜸해지고 있다. 부모님께 죄송해서 안부전화 역시 더 이상 걸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분명한 건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세모를 네모라며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우리에게, 국민에게 하는 철도공사, 정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사용자의 선전에 속아 우리를 정규직에 목매는 무지몽매한 사람들로 매도해버리는 일부 대중들까지. 우린 보여줄 것이다. 잘못된 것이 어떻게 바로잡혀가는 지를! 진정한 믿음과 단결된 힘으로 자본의 부당한 힘조차도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진짜 내 소망은 찬바람이 나기 전에, 더 이상 친구들의 전화를 부재중으로 답하지 않기 위해, 부모님의 지친 주름과 한숨이 늘기 전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의 소망이자 KTX여승무원 모두의 소망에 공감하며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땅에 사는 남녀노소 모두가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 동등한 인간임을 인정한다면, 정부와 공기업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KTX여승무원의 이 긴 파업 자체가 이 땅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이 짓밟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음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기를 소망하며 짧은 수기를 마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