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칠불사

임태규200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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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七佛寺)
 하동 칠불사


 지리산 반야봉 동남쪽 해발 약 800m 고지에 자리잡은 칠불사는

쌍계사로부터 산길을 따라 약 10km정도 올라가야 하는데,

삼국시대 초기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가락국의  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 곳에 와서 수도를 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칠불사라 불리운다.

 

하동 칠불사


  수로왕은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 있었던 아유다국(Ayodhya)의

공주 허황  옥을 왕비로 맞아들여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삼남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 왕자는 출가하여 허황옥의 오빠인 인도스님

장유보옥선사를 따라 처음에는 가야산에서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을 짓고 더욱 정진,

수로왕 62년(서기 103년) 모두 성불하였다.

 

하동 칠불사

일주문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들은 수로왕은 크게 기뻐하여

국력을 기울여 이 곳에 큰 절을 짓고 일곱 부처가 탄생한 곳이라

해서 칠불사라 불렀다 한다.

 

하동 칠불사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최초로 전해졌다고 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 보다 약 270여년 앞선 기록이다.

 고구려 · 백제 ·신라가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 들인데 반해 가야

즉, 가락국은 바다를 통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수용했음을

칠불사 창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하동 칠불사

대웅전과 문수전

 

하동 칠불사

대웅전 내부

하동 칠불사

대웅전

 

* 대웅전 주련 *


佛身充滿於法界(불신충만어법계)
普現一切衆生前(보현일체중생전)
隨緣赴感靡不周(수연부감미부주)
而恒處此菩提座(이항처차보리좌)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사
모든 중생 앞에 널리 나타나시니
인연 따라 감응함이 두루하시어   
이 보리좌에 항상 계시네   

 

하동 칠불사


 

하동 칠불사



  신라 효공왕( 897∼911)때 담공선사가 선방인 벽안당을

아자(亞字)모양으로 구들을 놓았는데 초기에는 한번 불을 때면

100일 가량 따뜻했다고 한다.

 

하동 칠불사

亞字房

 

이 아자방은 이중 온돌구조로 되어 있는데 방안 네 모퉁이와

앞 뒤 가장 자리 쪽의 높은 곳은 좌선처(坐禪處)이며,

십자형(十字形)으로 된 낮은 곳은 좌선하다가

다리를 푸는 경행처(輕行處)이다.

 

하동 칠불사

 

* 아자방 주련 *


曇空手藝遠聞唐(담공수예원문당)
來自金官築亞房(래자금관축아방)
巧制奇功窺不得(교제기공규부득)
令人千萬費商量(령인천만비상량)
不臥一食面壁坐(불와일식면벽좌)
鞭逼工夫似雪相(편핍공부사설상)
懸崖撒手飛身轉(현애살수비신전)
中間切莫擬思量(중간절막의사량)
松風秋月班圓石(송풍추월반원석)
枯木花開劫外香(고목화개겁외향)
他年與我來相見(타년여아내상견)
臨濟狂風現一場(임제광풍현일장)

 

담공선사 빼어난 솜씨 멀리 중국까지 알려졌고
금관가야에서 오시어 아자방을 축조하셨네
정교한 공법 기이한 공적 엿볼 수 없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천번 만번 생각케 하네
눕지 않고 한끼 먹고 면벽하고 앉아
다그치는 참선공부 서리발 같이 엄하네
천길 벼랑 끝에 매달린 손놓고 몸을 돌려야 하나니
중간에 아예 사량분별 하려들지 말게나
솔 바람 가을 달은 바위에 비춰 어리고
고목에 꽃이 피니 영겁 밖의 향기로다
훗날 나와 더불어 만나게 되면
임제의 선풍이 한 바탕 나타나리

이 아자방은 유명해서 중국 당나라에까지 알려 졌으며,

방 구조의 탁월한 과학성으로 인해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 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雲上院

아자방에서 150여 미터를 더 올라가면 20명의 스님들이 상주하며

 참선 수행 정진하는 운상선원이 나옵니다.

이곳은 일체의 외부인이 출입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하동 칠불사

운상선원

  신라 경덕왕( ?∼765)때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간 머물면서

거문고를 연구하여 신곡 30곡을 지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옥보고는 이 곳에서 왕산악 이후

금법을 정리하여 거문고가 우륵의 가야금과 더불어 우리나라

현악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한다.

 

* 운상선원 주련 *
 

塵勞逈脫事非常(진로형탈사비상)
緊把繩頭做一場(긴파승두주일장)
不是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
得樹攀枝未足貴(득수반지미족귀)
懸崖撒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

 

생사 해탈하는 것이 보통 일 아니니
화두를 굳게 잡고 한바탕 애쓸지어다
차가움이 한번 뼈속을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매화꽃이 코찌르는 짙은 향기 얻으리
나무가지에 매달리는것 귀한 일 아니니
천길 벼랑에 매달린 손을 놓아야 대장부라 하리

 

하동 칠불사

운상선원

 

그래서 이 곳 운상원을 일명 옥보대라 부르기도 한다.
  칠불사는 통일신라 이후부터 동국제일선원이라 하여

금강산 마하연 선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2대 참선도량으로 불리웠다.

 

하동 칠불사보설루 * 보설루 주련 *
山梅落盡野花飛(산매낙진야화비)
谷口春殘客到稀(곡구춘잔객도희)
遙望千奉紅樹裏(요망천봉홍수리)
杜鵑啼處一僧歸(두견제처일승귀)
荷葉團團團似鏡(하엽단단단사경)
菱角尖尖尖似錐(릉각첨첨첨사추)
風吹柳絮毛毬走(풍취류서모구주)
雨打梨花협蝶飛(우타이화협접비)
春山無伴獨相求(춘산무반독상구)
伐木丁丁山更幽(벌목정정산갱유)
不貪夜識金銀氣(불탐야식금은기)
遠害朝看靡鹿遊(원해조간미록유) 산에는 매화꽃 지고 들에는 꽃잎 날리니
골짜기 봄 저물어 오는 손님 드문데
멀리 바라보니 천봉우리 붉은 숲속에
두견새 우는 곳에 한 스님이 돌아오네
연잎은 둥글둥글 둥글기가 거울 같고
마름껍질은 뾰족뾰족 뾰족하기 송곳같네
버들개지 바람부니 솜털은 공처럼 굴러가고
배꽃에 비 뿌리니 꽃잎이 나비처럼 날으네
봄산에 벗이 없어 홀로 찾으니
나무 베는 소리 정정하여 산은 더욱 그윽하네
탐심을 내지 않으니 밤에도 금과 은의 기운을 알고
해칠 마음 멀리하니 아침에 사슴이 와서 노는 것을 보네 하동 칠불사

 

따라서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머물렀는데 고려때의 정명,

조선조의 벽송, 조능, 서산부휴, 백암선사 등이 대표적이며

대은, 금담 두 율사가 이 곳에서 용맹기도 끝에

서상수계(瑞相受戒)를 받아 해동계맥(海東戒脈)을 수림했는데

지리산계맥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동 칠불사

아자방 후원

 

또한 한국 다도(茶道)의 중흥조 초의선사가

1828년 이 곳 아자방에서 정진하는 여가에

다신전을 초록(抄錄)하여 동다송(東茶頌)의 기초를 정립하였다.

근세에는 용성, 석우, 효봉, 금오, 서암선사 등이

6.25이 전 가람이 불타기 전에 이 곳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하였고

 지금도 수많은 청풍납자(淸風衲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눈푸른 선객들이 불철주야 반야의 보검을 갈고 있다.

 

하동 칠불사

후원

  임진왜란으로 퇴락한 가람을 서산 부휴선사가 중수 하였으며

서기 1800년 실화로 전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금담 · 대은 두 율사에 의해 복구되었고,

1951년 1월에 지리산 공비토벌 때 국군의 방화로

아자방을 비롯한 대가람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후 30년 가까이 잡초만 무성한 폐허로 버려져 있다가

제월통광선사가 1978년부터 20여년에 걸쳐 칠불성지 복원

대작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동 칠불사

석간수간

 

 신라 말의 고승 도선국사가 저술한 옥룡자결」에 의하면 

"하동 땅에서 북쪽으로 1백리 가면 와우형(臥牛形)의

명지가 있는데 이 곳에 집을 지으면

부(富)는 중국의 석숭 못지 않고 백자천손이 번창할 것이며,

기도처로 삼으면 무수인(無數人)이 득도할 것" 이란

내용을 접할 수 있는데 예로부터 이르기를 음택(묏자리)으로는

오대산 적멸보궁이 으뜸이고,

양택(집터)으로는 지리산 칠불암이 제일이라 한다.

 

하동 칠불사



  지리산 반야봉(해발 1,732n1)의 거대한 혈맥이

동남쪽으로 용트림하여 30리를 뻗어 내린 해발 800m 고지에

자리잡은 칠불사의 지세(地勢)는

칠불사에서 피아골 연곡사로 넘어가는 당재 남쪽

반개 연화봉의 중턱에서 바라보면 그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하동 칠불사

문수전

 

하동 칠불사


 

* 문수전 주련 *
  

千峯盤窟色如濫(천봉반궁색여람)
誰謂曼殊是對談(수위만수시대담)
堪笑淸凉多小衆(감소청양다소중)
前三三與後三三(전삼삼여후삼삼)

 

천 봉우리 깊은 골짜기 쪽빛같이 푸르른 데
그 누가 말하리 문수 만나 얘기 했다고
우습다 청량산 대중이 몇이냐고 하니
전삼삼 후삼삼이라 함이여

하동 칠불사

문수보살상

  예로부터 지리산은

문수보살이 일만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한다는 곳으로서

이 산의 명칭이 대지문수사리보살에서 유래되었다.

과거 칠불의 스승이신 문수보살의 대지혜를 나타내는

반야봉을 주봉으로 하는 칠불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수신앙 중심지로서

많은 기도 ·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데

매달 음력 초나흘 문수재일에 정기법회를 열고 있으며

매일 문수기도를 봉행하여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의 귀의처가되고 있다.

 

하동 칠불사

칠불상

하동 칠불사

원음각

 

* 원음각 주련 *

 

願此鍾聲遍法界(원차종성변법계) 

원컨데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퍼져

鐵圍幽暗悉皆明(철위유암실개명) 

캄캄한 무간지옥 모두 다 밝아지고
三途離苦破刀山(삼도이고파도산) 

삼도 고통 여의고 도산지옥 부서져서

一切衆生成正覺(일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 다 함께 성불하여 지이다.

 

하동 칠불사

후원

하동 칠불사


 

하동 칠불사

아자방과 대웅전

하동 칠불사

문수전과 설선당

하동 칠불사

설선당

하동 칠불사

 

* 설선당 주련 *

 

歷劫傳傳無盡燈(역겁전전무진등)
不曾挑剔鎭長明(부증도척진장명)
任他雨灑兼風亂(임타우쇄겸풍란)
漏屋虛窓影自淸(루옥허창영자청)
一塢雲霞只寂然(일오운하지적연)
十年甁鉢遠人煙(십년병발원인연)
遙知槐穴千鍾祿(요지괴혈천종록)
不博松窓半日眼(불박송찬반일안)
麻衣曾不下山局(마의증불하산국)
慙槐如今道未成(참괴여금도미성)
柏樹工夫誰得力(백수공부수득력)
蓮花世界但聞名(연화세계단문명)
狂歌每向愁中發(광가매향수중발)
淸淚多因醉後零(청루다인취후령)
坐罷蒲團還失笑(좌파포단환실소)
莫將吾輩算天氓(막장오배산천맹)

 

수억 겁에 전하고 전하여도 다함이 없는 등불이여
일찌기 심지 돋운 적 없어도 영원히 밝기만 하네
저 비 뿌리고 거친 바람 부는데 버려두어도
허술한 집 빈 창에 그림자 스스로 맑디 맑네
노을진 산사의 언덕 적막함이 감도는데
십년 동안 수도생활 세속인연 멀리했네
알았노라 조정의 천종록을 받은 부귀영화도
소나무 창가에서 반나절 조는 것만 못한 것을
누더기 베옷으로 산문 밖에 나가지 않았건만
여지껏 도를 이루지 못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네
화두참구 참선공부 그 누구가 득력 했나
연화세계 극락정토 이름만 들었을 뿐이네
미치광이 노래는 수심 중에 튀어나오고
맑은 눈물 취한 후에 하염없이 쏟아지네
앉아서 좌복만 떨어트려 쓴 웃음만 나오니
나같은 무리를 훌륭한 수도자라 하지말게

 

하동 칠불사


* 칠불사에 전하는 장유화상 관련 전설 *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장유화상의 행적이 설화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유화상(長遊和尙)은 허왕후의 오빠로

보옥선인(寶玉仙人)이라고도 하며 수로왕의 7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7왕자를 성불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지리산 반야봉 칠불사에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동 칠불사

 

허왕후는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 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에 들어가 3년간

불법을 수도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들을 찾아갔으나

여전히 장유화상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그 후 다시 지리산을 찾은 왕후를 장유화상은 반가이 맞으며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만나라고 하였다.

그때 ‘어머니,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 연못(影池)을 보니

황금빛 가사를 걸친 금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 등 일곱 생불(生佛)이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던 곳에

칠불사를 세웠다.

 

하동 칠불사

 

허보옥은 동생의 신행길을 함께 왔는데,

산에 들어가 부귀를 뜬구름과 같이 보며 불도(佛道)를 설경하고

산을 떠나지 않았다고(長遊不返) 하여

장유화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현재 김해시 장유면 불모산 정상 부분에는

장유화상 사리탑으로 알려진 8각 원당형 부도가 있습니다만,

양식상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가락국기에는 장유화상의 허왕후 신행길

수행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김해 『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에

적혀있습니다만 역시 후대의 기록입니다.

장유화상에 대한 설화는 허왕후 도래설화의 불교적인 윤색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동 칠불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