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는 종종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예를 들어, 죽음의 순간이 가져다줄 고통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것들에 대한 무지가 두려운 것이다, 라거나 진정한 죽음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것일 때만 가능하다, 라면서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잘도 떠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서른 살을 넘은 이후에는 죽음에 대해 말을 아끼게 된 것 같다. 젊음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죽음을 추상으로만 인식할 뿐이었지만, 나이듦은 점차 죽음을 구체적인 무엇으로 받아들이도록 부추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사카 코타로의 『종말의 바보』는 연작소설집이다. 2004년과 2005년에 씌어진 소설들은 8년 후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거짓말 같은 사실이 발표된 이후 5년이 지난 시점, 그러니까 인류의 멸망이 3년 정도 남은 시점의 이야기이다. 일본의 센다이라는 도시, 그 중에서도 도시의 외곽에 자리 잡은 센다이 힐즈 타운과 그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구의 종말, 그리고 지구의 종말에도 불구하고 연명되고 있는 삶, 아니 지구가 종말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뚜렷해진 실루엣같은 삶의 이야기이다.
「종말의 바보」.
“...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었다. 노후를 위한 돈도, 주택융자를 위한 돈도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적금이나 예금으로 생활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결과, 시간을 쓸 줄 몰라서 난처해진 사람도 틀림없이 있으리라.” 지구의 종말이 주는 광풍의 시기를 겨우겨우 견뎌낸 노부부는 산책을 한다. 아집이 강했던 아버지는 지구의 종말이 발표되기 전에 아들을 잃었고, 딸과는 그런 아들이 빌미가 되어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아내는 남편을 위해 혹은 딸을 위해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다.
「태양의 약속」.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는 나는 지금 정말 하기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10년동안 그렇게 노력을 해도 서지 않던 아기가 어느 순간 아내의 뱃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를 낳는다고해도 그 아이가 살아갈 시간은 (뱃속에 있는 시간을 포함한다고 해도) 3년이 전부이다. 어떤 결정이 아이를 위해, 그리고 이 부부를 위해 옳은 결정일 것인가...
「형제의 복수」.
지구의 종말이 발표되기 전 누이 동생의 죽음에 단초를 제공한 뻔뻔스러운 프로그램 진행자를 찾아 살인을 눈앞에 둔 형제...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날 이 진행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딸은 동반자살을 막 결행하려던 참이다. 도대체 이 남자를 죽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의 소원인 죽음으로부터 떨어뜨려 지구의 종말의 순간까지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좋을까...
「동면의 소녀」.
4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적어놓았던 소녀... 그녀는 이제 자신이 하고자 한 일 하나를 막 끝냈다. 그것은 아버지의 서재에 가득하던 아버지의 책을 전부 읽은 것이다. 3천권은 안 되지만 2천권은 훌쩍 넘는 책을 4년에 걸쳐 모두 읽은 그녀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한다.
「강철의 킥복서」.
“... 불합리하다고 아우성치고, 공포에 부들부들 떨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돌변하던 일은 벌써 끝났다. 십대 젊은이는 어쨌거나 잘 질리게 마련이라 절망하는 데도 벌써 질린 것이다...” 공황에 빠져 살인이 횡행하던 시절을 지나며 이제 청년이 된 나는 그 전에 다니던 킥복싱 도장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엔 지구의 종말의 발표와는 상관없이 내내 도장을 지키는 관장과 언제나처럼 샌드백을 두들기는 킥복싱 챔피언이 있었다. “내일 죽는다고 삶의 방식이 바뀝니까?”
「소행성의 밤」.
자신 때문에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제야 목을 매 죽을 작정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걸려온 전화 한 통... 대학시절 자신에게 별을 보여주던 친구는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고 다들 아우성인 지금 새로운 소행성을 발견했다며 그 사실을 친구에게 자랑하고 있다.
「가족의 탄생」.
부모의 죽음과 함께 홀로 남겨진 나는 언제부터인가 살아남은 사람들과 역할극을 하듯 관계를 맺고 있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잠깐, 누군가의 언니로 잠깐, 누군가의 애인으로 잠깐 살아가고 있던 나... 그러나 어느 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고, 그 가짜 가족 구성원인 이들이 다른 구성원에게 도움을 주면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다.
「노인의 망루」.
지구의 종말 발표 이후 그만 집이 불타버려서 모시게 된 아버지... 괴팍하기 그지없는 그 아버지는 이제 힐즈 타운의 옥상에 자신만의 망루를 세우고 있다. 아내와 어린 자식을 책임지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이고, 아버지에게 그 망루는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이제 나는 아버지와 화해하듯 자신의 아내와 딸을 데리고 아버지의 망루에 오른다.
인류 전체가 동시에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상대적인 박탈감이라는 것도 사라질 테고,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를 운운하는 일도 없을 테고, 왕따도 없을 테고, 야근도 없어지겠지... 재난 영화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아온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지구를 구하게 되는 영웅도 등장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 짜잔 사실 지구는 멸망하지 않아, 라고 말하며 안심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영화 속에서 거리에 쏟아져나와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까... 하지만 좀더 문학적으로 다루어질 수도 있었을 소설은, 일본 사소설 특유의 만화 같은 스타일이 (어쨌든 굉장히 계몽적인) 너무 강력해서 (어련하겠는가...) 문학 작품의 무게감 같은 걸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니 만화책을 읽듯이 가볍게 읽으면 좋겠다.
ps. 정말 바보 같게도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아직 살아보지도 못한 아파트를 위해 대출받은 융자금을 갚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대한민국의 중산층들은 어떤 기분이 될까,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근래 저녁 뉴스의 메인 아이템을 보았다면 어쩔 수 없는 연상작용이다. ‘의식주’가 아니라 의식‘주’의 세상이 아닌가, 이거야 원...
종말을 앞둔 지구인들의 따뜻하고 만화같은 일상... <종말의 바보>
젊은 시절에는 종종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했다. 예를 들어, 죽음의 순간이 가져다줄 고통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것들에 대한 무지가 두려운 것이다, 라거나 진정한 죽음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것일 때만 가능하다, 라면서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잘도 떠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서른 살을 넘은 이후에는 죽음에 대해 말을 아끼게 된 것 같다. 젊음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죽음을 추상으로만 인식할 뿐이었지만, 나이듦은 점차 죽음을 구체적인 무엇으로 받아들이도록 부추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사카 코타로의 『종말의 바보』는 연작소설집이다. 2004년과 2005년에 씌어진 소설들은 8년 후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거짓말 같은 사실이 발표된 이후 5년이 지난 시점, 그러니까 인류의 멸망이 3년 정도 남은 시점의 이야기이다. 일본의 센다이라는 도시, 그 중에서도 도시의 외곽에 자리 잡은 센다이 힐즈 타운과 그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구의 종말, 그리고 지구의 종말에도 불구하고 연명되고 있는 삶, 아니 지구가 종말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뚜렷해진 실루엣같은 삶의 이야기이다.
「종말의 바보」.
“...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었다. 노후를 위한 돈도, 주택융자를 위한 돈도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적금이나 예금으로 생활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결과, 시간을 쓸 줄 몰라서 난처해진 사람도 틀림없이 있으리라.” 지구의 종말이 주는 광풍의 시기를 겨우겨우 견뎌낸 노부부는 산책을 한다. 아집이 강했던 아버지는 지구의 종말이 발표되기 전에 아들을 잃었고, 딸과는 그런 아들이 빌미가 되어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아내는 남편을 위해 혹은 딸을 위해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다.
「태양의 약속」.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는 나는 지금 정말 하기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10년동안 그렇게 노력을 해도 서지 않던 아기가 어느 순간 아내의 뱃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를 낳는다고해도 그 아이가 살아갈 시간은 (뱃속에 있는 시간을 포함한다고 해도) 3년이 전부이다. 어떤 결정이 아이를 위해, 그리고 이 부부를 위해 옳은 결정일 것인가...
「형제의 복수」.
지구의 종말이 발표되기 전 누이 동생의 죽음에 단초를 제공한 뻔뻔스러운 프로그램 진행자를 찾아 살인을 눈앞에 둔 형제...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날 이 진행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딸은 동반자살을 막 결행하려던 참이다. 도대체 이 남자를 죽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의 소원인 죽음으로부터 떨어뜨려 지구의 종말의 순간까지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좋을까...
「동면의 소녀」.
4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적어놓았던 소녀... 그녀는 이제 자신이 하고자 한 일 하나를 막 끝냈다. 그것은 아버지의 서재에 가득하던 아버지의 책을 전부 읽은 것이다. 3천권은 안 되지만 2천권은 훌쩍 넘는 책을 4년에 걸쳐 모두 읽은 그녀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한다.
「강철의 킥복서」.
“... 불합리하다고 아우성치고, 공포에 부들부들 떨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돌변하던 일은 벌써 끝났다. 십대 젊은이는 어쨌거나 잘 질리게 마련이라 절망하는 데도 벌써 질린 것이다...” 공황에 빠져 살인이 횡행하던 시절을 지나며 이제 청년이 된 나는 그 전에 다니던 킥복싱 도장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엔 지구의 종말의 발표와는 상관없이 내내 도장을 지키는 관장과 언제나처럼 샌드백을 두들기는 킥복싱 챔피언이 있었다. “내일 죽는다고 삶의 방식이 바뀝니까?”
「소행성의 밤」.
자신 때문에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제야 목을 매 죽을 작정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걸려온 전화 한 통... 대학시절 자신에게 별을 보여주던 친구는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고 다들 아우성인 지금 새로운 소행성을 발견했다며 그 사실을 친구에게 자랑하고 있다.
「가족의 탄생」.
부모의 죽음과 함께 홀로 남겨진 나는 언제부터인가 살아남은 사람들과 역할극을 하듯 관계를 맺고 있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잠깐, 누군가의 언니로 잠깐, 누군가의 애인으로 잠깐 살아가고 있던 나... 그러나 어느 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고, 그 가짜 가족 구성원인 이들이 다른 구성원에게 도움을 주면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다.
「노인의 망루」.
지구의 종말 발표 이후 그만 집이 불타버려서 모시게 된 아버지... 괴팍하기 그지없는 그 아버지는 이제 힐즈 타운의 옥상에 자신만의 망루를 세우고 있다. 아내와 어린 자식을 책임지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이고, 아버지에게 그 망루는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이제 나는 아버지와 화해하듯 자신의 아내와 딸을 데리고 아버지의 망루에 오른다.
인류 전체가 동시에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상대적인 박탈감이라는 것도 사라질 테고,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를 운운하는 일도 없을 테고, 왕따도 없을 테고, 야근도 없어지겠지... 재난 영화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아온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사뭇 다르다. 그러니까 지구를 구하게 되는 영웅도 등장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 짜잔 사실 지구는 멸망하지 않아, 라고 말하며 안심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영화 속에서 거리에 쏟아져나와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까... 하지만 좀더 문학적으로 다루어질 수도 있었을 소설은, 일본 사소설 특유의 만화 같은 스타일이 (어쨌든 굉장히 계몽적인) 너무 강력해서 (어련하겠는가...) 문학 작품의 무게감 같은 걸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니 만화책을 읽듯이 가볍게 읽으면 좋겠다.
ps. 정말 바보 같게도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아직 살아보지도 못한 아파트를 위해 대출받은 융자금을 갚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대한민국의 중산층들은 어떤 기분이 될까,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근래 저녁 뉴스의 메인 아이템을 보았다면 어쩔 수 없는 연상작용이다. ‘의식주’가 아니라 의식‘주’의 세상이 아닌가, 이거야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