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사연을 듣고, 슬퍼한다. 조금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이 이야기엔 슬픈 사연이 분명 있다. 생뚱맞게 이무기가 떠오른 건 영화 의 주인공 앤드리아(배우 앤해서웨이 분) 때문이다. 영화 속 앤드리아는 분명 용이 되었고 더 큰 용이 될 수 있었지만 이무기와는 다르게 제 스스로 개천으로 뛰어든다. 타자의 의한 영락이 아니었기에 더욱 기가 막힌다. 개천에 빠진 용. 용이 먹을 만한 것은 당연히 개천엔 없다. 용이 작은 실개천에서 살아가려면 제 거대한 몸을 작게 변화해야 한다. 곧 송사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삶의 의외성. 그 기막힌 길목을 만난 앤드리아]
영화는, 대단한 수재는 아니었지만 국립대학교를 졸업하고 작가의 꿈을 소중히 키우고 있는 한 여자 앤드리아의 조금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의 기막힌 우연으로 패션계의 거목 미란다(배우 메릴 스트립분)의 수행비서로 채용되면서부터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드라마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 영화는 패션이라는 전문적인 소재를 십분 이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전연 제3의 세계로 안내한다. 극중 주인공 앤드리아는 즉 관객의 입장(소시민적인, 약자의 대변인)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주인공은 패션의 문외한이라는 점을 강조하니, 영화가 집중조명하는 패션계의 세상은 관객과 주인공에겐 별천지이다.
[영화에 갈등의 소재가 없다니? 맙소사!!! 그럴 순 없어.]
대부분의 드라마틱한 영화가 과도한 절정기를 찾지 못해 방황하듯이 감독 역시 마땅한 갈등거리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란다의 정신분열적 횡포가 영화적 갈등요소를 백프로 수행할 수 없었음을 감독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찾게되 갈등의 요소가 바로 이와 같다.
앤드리아는 그 생활(별천지)에 주인공은 점점 변해가고, 점점 온 곳(과거)을 잃고 가는 길(현재). 갈 곳(화려한 삶의 예정도니 도착지 정도=극중 미란다의 삶)에 대해 열중하게 된다. 한 개인이 삶의 일부분을 엮어놓는 모노드라마의 특성을 배제 하더라도 스토리상 빠질 수 없는 갈등의 요소는 그닥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은 것 같은(영화상, 그 둘이 절실해야하는 근본적인 동기의 표현이 부족했다고 나는 생각한다)주방보조 남자친구와, 역시 은밀할 정도의 친분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이는 친구들(역시 동기 설명 부족)사이에서 주인공의 변화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곡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 갈등의 장이 마련되어진다.
[저마다 튀고 싶은데? 절대로 미련해 보이지 않은 그녀가 왠 평범???????]
영화는 극중 왜 앤드리아가 “왜 평범함으로 돌아와야 했을까?”하는 나의 의문에 대한 첫 번째 이유를 전개상 그녀를 시기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들(애인과 친구들)이었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적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들이 누누이 말한 넌 그쪽 세계 사람이 아니야. 넌 우리처럼 평범해야 해. 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매우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담. 그들은 신인가? 그들이 앤드리아의 감정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분명아니었다. 그들이 틀렸다는 걸 영화는 명백한 증거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 속 앤드리아는 분여 화려한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은 아니라 하지만, 진정으로 마음이 시킨다는 것을 관객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예로 그녀가 작은 일에 성공했을 때에 입가에 빛나는 미소가 관객들로 하여근 성취에 대한 희열을 공유케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시키는 일. 가슴으로 진정 원하는 일. 을 그것을 버리고 유턴해야 했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리무진 안에서 미란다가 했던 그 말 를 듣고 떠난다는 설정. 다분히 유아적 충동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애증의 인물(미란다=괴팍한 성격)과 동류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돌아온 그녀. 억지로 웃게 하다]
마지막으로,
예전의 수수한 옷차림과 행동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갈등의 중심이 되었던 남자친구의 대사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난 이런 네 모습이 제일 이뻐” 라는 식의..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친구는 그 마지막 씬에서 나의 궁금증을(그녀가 그 생활에서 탈출해야하는 까닭을) 풀어줘야 했다. 물론 짧은 대사로 그 모든 상황을 만회하긴 힘들었겠지만. 최소한 그보단 멋있는 감언이설을 펼쳤어야 옳았다. 어쨌든 그 마지막 대사로 나는 완전히 김이 새어 버린 것이다.
다분히 원색적인 제목인
만일 제목처럼 악마의 대명사가 극중 미란다이고, 그 악마가 즐겨 있는 프라다(화려한 삶)이라면 다시 그녀가 돌아왔다는 건 분명 박수칠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진정으로 악마라고 지칭할 수 있는---근본적으로 악마의 숙주를 지닌 인물은 나오지 않는다. 즉, 악마의 진정성이 매우 떨어지며, 미란다는 내가, 관객이 기대했던 악마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궁금하다. 만일 영화가 현실이라면 용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린 앤드리아(앤 해서웨이)의 잉여의 삶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말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하지만 프라다는 꼭 악마의 옷은 아니다 *
[개천으로 돌아간 용, 앤드리아]
우리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사연을 듣고, 슬퍼한다. 조금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이 이야기엔 슬픈 사연이 분명 있다. 생뚱맞게 이무기가 떠오른 건 영화 의 주인공 앤드리아(배우 앤해서웨이 분) 때문이다. 영화 속 앤드리아는 분명 용이 되었고 더 큰 용이 될 수 있었지만 이무기와는 다르게 제 스스로 개천으로 뛰어든다. 타자의 의한 영락이 아니었기에 더욱 기가 막힌다. 개천에 빠진 용. 용이 먹을 만한 것은 당연히 개천엔 없다. 용이 작은 실개천에서 살아가려면 제 거대한 몸을 작게 변화해야 한다. 곧 송사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삶의 의외성. 그 기막힌 길목을 만난 앤드리아]
영화는, 대단한 수재는 아니었지만 국립대학교를 졸업하고 작가의 꿈을 소중히 키우고 있는 한 여자 앤드리아의 조금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의 기막힌 우연으로 패션계의 거목 미란다(배우 메릴 스트립분)의 수행비서로 채용되면서부터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드라마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 영화는 패션이라는 전문적인 소재를 십분 이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전연 제3의 세계로 안내한다. 극중 주인공 앤드리아는 즉 관객의 입장(소시민적인, 약자의 대변인)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주인공은 패션의 문외한이라는 점을 강조하니, 영화가 집중조명하는 패션계의 세상은 관객과 주인공에겐 별천지이다.
[영화에 갈등의 소재가 없다니? 맙소사!!! 그럴 순 없어.]
대부분의 드라마틱한 영화가 과도한 절정기를 찾지 못해 방황하듯이 감독 역시 마땅한 갈등거리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란다의 정신분열적 횡포가 영화적 갈등요소를 백프로 수행할 수 없었음을 감독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찾게되 갈등의 요소가 바로 이와 같다.
앤드리아는 그 생활(별천지)에 주인공은 점점 변해가고, 점점 온 곳(과거)을 잃고 가는 길(현재). 갈 곳(화려한 삶의 예정도니 도착지 정도=극중 미란다의 삶)에 대해 열중하게 된다. 한 개인이 삶의 일부분을 엮어놓는 모노드라마의 특성을 배제 하더라도 스토리상 빠질 수 없는 갈등의 요소는 그닥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은 것 같은(영화상, 그 둘이 절실해야하는 근본적인 동기의 표현이 부족했다고 나는 생각한다)주방보조 남자친구와, 역시 은밀할 정도의 친분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이는 친구들(역시 동기 설명 부족)사이에서 주인공의 변화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곡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 갈등의 장이 마련되어진다.
[저마다 튀고 싶은데? 절대로 미련해 보이지 않은 그녀가 왠 평범???????]
영화는 극중 왜 앤드리아가 “왜 평범함으로 돌아와야 했을까?”하는 나의 의문에 대한 첫 번째 이유를 전개상 그녀를 시기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들(애인과 친구들)이었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적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들이 누누이 말한 넌 그쪽 세계 사람이 아니야. 넌 우리처럼 평범해야 해. 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매우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담. 그들은 신인가? 그들이 앤드리아의 감정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분명아니었다. 그들이 틀렸다는 걸 영화는 명백한 증거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 속 앤드리아는 분여 화려한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은 아니라 하지만, 진정으로 마음이 시킨다는 것을 관객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예로 그녀가 작은 일에 성공했을 때에 입가에 빛나는 미소가 관객들로 하여근 성취에 대한 희열을 공유케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시키는 일. 가슴으로 진정 원하는 일. 을 그것을 버리고 유턴해야 했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리무진 안에서 미란다가 했던 그 말 를 듣고 떠난다는 설정. 다분히 유아적 충동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애증의 인물(미란다=괴팍한 성격)과 동류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돌아온 그녀. 억지로 웃게 하다]
마지막으로,
예전의 수수한 옷차림과 행동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갈등의 중심이 되었던 남자친구의 대사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난 이런 네 모습이 제일 이뻐” 라는 식의..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친구는 그 마지막 씬에서 나의 궁금증을(그녀가 그 생활에서 탈출해야하는 까닭을) 풀어줘야 했다. 물론 짧은 대사로 그 모든 상황을 만회하긴 힘들었겠지만. 최소한 그보단 멋있는 감언이설을 펼쳤어야 옳았다. 어쨌든 그 마지막 대사로 나는 완전히 김이 새어 버린 것이다.
다분히 원색적인 제목인
만일 제목처럼 악마의 대명사가 극중 미란다이고, 그 악마가 즐겨 있는 프라다(화려한 삶)이라면 다시 그녀가 돌아왔다는 건 분명 박수칠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진정으로 악마라고 지칭할 수 있는---근본적으로 악마의 숙주를 지닌 인물은 나오지 않는다. 즉, 악마의 진정성이 매우 떨어지며, 미란다는 내가, 관객이 기대했던 악마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궁금하다. 만일 영화가 현실이라면 용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린 앤드리아(앤 해서웨이)의 잉여의 삶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말이다.
시대유감.
홍대에서 Mo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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