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즈 와이드 셧, 스탠리 큐브릭, 1999

이상원2006.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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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성욕과 결혼의 모순적 관계

 

 

부연하자면,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원초적 본능으로서의 성욕과

사회로부터 '주어진' 제도로서의 결혼의 모순적 관계

 

 

분석하자면,

 

결혼은 성욕을 억압한다. 억압된 성욕은 어떤 계기와 마주쳐 결혼에 위기적 순간을 야기한다. 남자는 성적 충동에 휘말려 모험에 들어선다. 저택에서의 비밀-집단-난교파티. 이 난교파티의 연출된 이미지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외관은 고대의 신성한 의식의 형태를 띤다. 의 남녀결합 의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가면을 쓴 사회의 극소수 최고권력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와 제도와 결혼의 창조자이고 통제자이며 재생산자이다. 그런데 이들이 사회와 제도와 결혼이 허락치 않는

원초적 성욕을 이 파티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제도, 이성, 통제, 결혼 등을 수호하는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금지해놓은 자연, 본능, 욕망, 성욕을 실현하는 모순. 따라서 그 파티는 가면을 쓸 수 밖에 없고 암호로 강하게 통제되어야 하고 절대 대중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필연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이 만들어놓고 강제한 윤리를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따라서 톰 크루즈가 목격한 난교파티는 일종의 약한고리이다. 견고하게 조직되어 있는 사회를 일격에 '내파'할 수 있는 급소라고나 할까. 급소를 들켜버린 권력자들이 톰 크루즈의 입을 막고 그를 위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사건은 니콜 키드먼이 다른 남자에게 '성욕'을 느낀 사실을 톰 크루즈에게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즉 성윤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톰 크루즈는 '질투'를 느끼고 부인의 외도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다. 거의 히치콕적 주제다. 미국의 이데올로기와 윤리에 대한 충실한 신봉자이자 실현자인 중산층 백인 남성 의사가 모험에 빠지기 위해서는 부수적인 사건이 더 필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환자의 죽음, 환자의 딸의 급작스런 사랑고백, 창녀와의 조우이다. 이 정도 되면, 냉철한 의사라도 모험을 감행할 정도의 충분한 감정과 혼란과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이 전술한 난교파티이다. 반면 여자의 경험은 현실의 급소가 아니라 꿈이다. 니콜 키드먼은 남편에게 그녀의 억압된 성욕을 고백했다. 금지된 욕망. 따라서 그녀의 다음 수순은 '죄의식'이다. 그녀의 억압된 성욕은 꿈에 극단적으로 반영된다. 바로 현실에서 톰 크루즈가 목격했던 난교의 실현자가 된 것이다. 꿈 속에서 말이다. 꿈 속에서 그녀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수많은 남성들과 난교를 벌이고 남편을 조롱한다. 그리고 행복에 겨워 웃고 있다. 웃으며 자고 있는 그녀를 남편이 깨운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분명 그녀는 비명이 아니라 키득대면서 꿈을 꾸고 있었다. 깨어난 그녀는 끔찍한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이제 마무리를 할 차례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3막 구조이다. 1막은 키드먼이 고백을 하고 부부가 성윤리는 논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이 부분에서 이미 결혼과 성욕이라는 분명한 주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 2막은 제기된 문제에 대한 남과 여의 각각의 경험과 고뇌와 갈등이다. 톰 크루즈는 질투와 강박, 충동을 느끼고 현실에서 부부에게 주어진 성윤리를 위반하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그러나 그 모험의 대가는 크다. 톰 크루즈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한다. 니콜 키드먼은 꿈에서 부부에게 주어진 성윤리를 위반한다. 물론 이 대가도 크다. 바로 심각한 죄의식이다. 남성은 육체로 경험하고, 여성은 정신으로 꿈꾼다. 그러나 효과는 동일하다. 이제 3막에서는 2막의 효과로서 1막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야 한다. 미국대표 톰 크루즈는 그에게 '주어진' 결혼제도를 파괴할 수 없다. 따라서 니콜 키드먼에게 계속해서 결혼의 관계를 유지하자고 한다. 니콜 키드먼은 그녀에게 '주어진' 성욕을 제거할 수 없다. 따라서 무엇보다 최대한 빨리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고 말한다. "Fuck".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  

 

 

평가하자면,

 

형식적인 면에서, 이렇게 지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극단적이고 압도적 이미지로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 스탠리 큐브릭의 독창성인 것 같다. 내가 본 그의 다른 영화 , 도 지적인 느낌보다는 강렬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 느껴지는 영화였다. 물론 대단히 분석적이다. 은 국가가 남자를 군인으로 조직하는 과정을 분석하는데 영화의 절반을 할애하고 있다. 도 인간의 본성을 통제하는 미래상황에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과격한 이미지 덕에 단박에 분석적 태도가 부각되지는 않지만, 결국에는 과격한 이미지 덕에 분석에 힘이 붙는다.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이라는 에릭 로메르의 , 알랭 레네의 같은 영화는 지적인 문제를 지적으로 다룬다. 영화의 스타일 자체가 주로 대사나 설명을 통해 분석하면서 노골적으로 관객의 지성을 요구한다. 뭐가 낫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내 취향의 호오로는 당연히 큐브릭의 스타일이 좋은 쪽이다. 영화의 본질은 결국은 이미지로 기억되는 것이고, 독창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로 승부하는 것이 영화가 문제를 문제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정신분석의 문제들이 두루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문제들 자체가 주제적 위치에 있지는 않다. 영화의 주제는 질투, 강박, 충동, 죄의식, 꿈 등의 정신분석의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바로 성욕과 결혼 사이의 모순이라는 점이다. 이 주제는 좀 더 풍부하고 상징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2막의 난교장면과 그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이 다분히 상징적이기 때문에, 성욕과 결혼 사이의 대립이라는 인물-사건상의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 곧 영화에서 성욕은 자연, 본능, 욕망 등 통제되지 않은 날 것의 진영을 대표한다. 반대로 결혼은 사회, 제도, 이성 등 조직되고 통제된 것들의 진영을 대표한다. 비밀난교와 권력자들의 함수관계를 묘사한 2막의 이미지와 사건들은 이런 진영들 사이의 모순이라는 의미로 확장해서 이해해야 의미가 풍부하고 명확해진다. 그 진영들 사이의 모순으로서의 급소 말이다. 이야기의 결말은 주인공이 급소를 알고서도 다시 충실한 결혼으로 복귀하는 것이고 어쨌든 결혼관계 속에서만 성욕을 실현하는 제한적인 성윤리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시 원상복귀했을 뿐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똑같은 문제는 다시 발생할 수 있다. 대부분이 그렇게 하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결론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따라서 감독은 문제를 분석했을 뿐이다. 더 이상의 전진은 없다. 더 전진해야 할 의무도 없다. 물론 예술에게는 더 전진할 자유가 있다. 이런 주제에 대해 더 전진한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