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베이스

강승구200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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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소리 대신 타인의 소리가 간절할 때가 있다. 단지 타인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받을 수 있으니까. 혹은 자신의 소리보다 타인의 소리가 더 나으리라는 기대감에. 뭐 이것도 아니라면 ‘어디 한 번쯤은 남의 말도 귀 기울여 볼까나?’는 식의, 사회적 정제작업을 거친 치기어린 우월감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타인의 소리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결국 나의 소리는 군가의 화음 내지 불협화음으로 쓰일 뿐이다!’

 


        위의 말이 ‘콘트라베이스’에겐 조금 슬픈 말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자신의 소리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소리가 아니기에. 결국은 타인을 위한 소리로 살아야하기에. 자신의 존재가치가 결국 누군가의 효용에 의해 재단되고, 왜곡되고, 결국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것이.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그의 소설 『콘트라베이스』에서,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이를 ‘어느 평범한 콘트라베이스 주자’에 환기시켜 ―모든 독일인의 기질에 충실하려는 듯―담담하게, 그러나 절제된 격정으로 표현해낸다. 한마디로 글 전체의 감정표현이 중매쟁이 뜸들이듯 능수능란하다는게다. 그래서일까. ‘주목받지 못하는 이도 그만의 세계가 있다’는, 도덕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단순하고 식상한 주제를 하나의 드라마처럼 요리해놨다. (이는 심지어 형식에서조차 드러난다. 따지고 보면 우리보다 나을 것 없는 이가 감히 ‘모놀로그’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 책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소리에 주목하자’, ‘사회에서 꼭 필요한, 그러나 소외된 이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식의 계도를 시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자기 스스로 침잠하기를 좋아하는 인간 특성상, 자기가 바로 콘트라베이스 주자라 여길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제 코가 석자라 여기기에 남 돌아볼 시간따윈 마련할 수 없다고 생각할 거란 뜻이다.  …당장 주위의 소리를 들어봐도 그렇지 않은가.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기꺼이 제1바이올린의 경쾌한 목소리를, 플롯의 은은한 목소리를, 하다못해 바순의 능글맞은 소리조차 내주지 않는다. 다만 여기저기서 콘트라베이스의 음울한 목소리만을 낼 뿐…. 현대인은 모두 자기만을 바라봐주길 원한다. 따라서 이 오케스트라에는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아니 콘트라베이스 주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떨어뜨리길 자청하는 이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주제넘게도 한 마디 하고 싶다. 분명 ‘나보다 못한 이를 사랑하자’는 식의 착한 말따위 할 생각은 없다. 허나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바로 나 자신이 못난이로 불리길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 타인의 입장에서는, 그네들 시계(視界)만큼밖에 자신을 바라볼 수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온전히 알아주는 이를 그토록 염원하면서, 정작 자기 스스로를 폄훼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어떤 심리인가? 오히려 명백히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하위에 있는 우리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조차도 올려다보기에도 벅찬, 아름답고도 장래가 촉망되는 소프라노를 사랑하려 하지 않는가? 주제 넘게도, 자기 자신의 처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꿈꿀 수 없는 것을 꿈꾸려 나아가지 않는가. 더군다나 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비아냥거리긴커녕 용감하다 칭송하지 않는가.

 

        …개미핥기는 어째서 ‘개미핥기’로 불릴까. 만약 개미핥기들이 인간들이 자신들을  개미핥기라고 부르는 걸 안다면 당장에 뛰쳐나와 인간 멱살이라도 잡을 노릇이다. 그도 그럴것이, 개미핥기 입장에서는 ‘동탄신도시나 강남 땅투기 같은 것에나 관심보이는 인간들이 자기네 보이는대로 우리를 ’개미나 핥아먹는 하층 생물’로 규정지었다‘고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단 개미핥기뿐이겠는가. (저 멀리서 나무늘보도 따지러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어렸을 적 우연히 접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저작, 『좀머씨 이야기』를 읽고 그에 반해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끝을 내려 한다. 원래는 그의 또 다른 저작, 『향수』에 대한 서평을 쓰고 싶었지만, 『향수』가 현재 베스트셀러 순위에 든다는 사실을 알고 서평의 주제를 『콘트라베이스』로 바꿔버렸다. 소수의 이야기이길 자청하는 소설이 바로 그 마이너(minor)적 성격 때문에 메이저(major)가 되어버렸다는 게 아이러니하긴 하다. 덕분에 괜히 아무 연관도 없는 에미넴(Eminem)이 생각나 버렸다. 힙합음악계에서 백인이라는 사실 덕에 그는 언더에서 힙합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신랄한 욕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언더그라운드 기질 덕분에 오버그라운드로 나설 수 있었다. 자신이 부정하던 현실을 결국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던 것…어쩌면 그것이 지금 그의, 과거와 비교해 설득력을 상실한 모습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