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분명 우수한 종교이고 그 안에는 인류구원의 놀라운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재 기독교에서 통용되고 있는 대다수의 성경해석 방식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제대로 이글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많은 학자들이 예수의 참 뜻을 오해하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볼까요?
기독교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행위를 통해 사후에 천국에 가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중요한 요소는 '나' , '예수 그리스도' , 그리고 '믿음' , 세 가지입니다. 즉, 이 세 가지 요소를 알고 있어야 기독교 신앙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성경해석은 세 가지 요소 중 첫 번째이면서 예수가 자주 말하는 '나'에 대해서 전혀 알려들거나 생각해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성경해석 방식이 간과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 가톨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활발한 연구와 신앙활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니, 매우 바람직한 현살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의 방상복 신부님은 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라고 하면 육신과 더불어 활동하는 현재의식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경험의 총집합체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이러한 나는 참 나가 아닙니다. 참 나가 아니기에 영원할 수도 없고 또 영원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일평생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서도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린 노인들을 종종 봅니다. 그들의 기억과 경험은 육신이 아직 죽기도 전에 먼저 죽어버린 것이지요.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육체는 비록 살아 있지만 정신이 없으니, 그들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것입니다. 정신이 없는데 과연 '누구'가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까?
또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정체성은 어디로 갔을까요?
또한 꿈을 꿀 때도 꿈속에서는 우리의 현재의식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대신 잠재의식이 의식 세계를 지배합니다. 즉, 꿈속에서의 의식 세계는 이미 그 의식 활동의 부자유성 때문에 우리가 깨어 있을 때의 현재의식과는 그 종류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와 꿈꿀 때의 존재방식부터가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무엇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변하고 잊혀지는 기억과 경험의 총체를 '나'라고 여기고 있는 한,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맙니다.
두 번째로 믿는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는 그를 '선한 이'라고 부르는 호칭에 대하여 "누가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이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라고 자기의 신성(神性)을 부인했는가 하면, 또한 "나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있었노라"고 말해서 자기의 영원불멸성, 즉 신성을 나타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를 보는자는 곧 아버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라고도 말했으며, 나아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곧 진리임을 강조하는 표현이 정점에 이르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혼란수럽게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예수가 '그리스도 예수'이며, 참 생명이요 진리인 예수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즉, 태어나서 자라는 개체의 입장에서 살아야하는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본래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인 신성으로서의 예수. 이와 같이 볼 때 전자인 형상과 욕망을 지닌 인간의 육체에 관련된 예수 자신은 '선하지 않다'고 표현하였고, 후자인 인간의 형상 속에 깃들어 있으나 인간의 육체를 넘어서 있는 영원한 신성으로서의 예수 자신은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자의 예수는 보는 자는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그 예수는 곧 그리스도 예수로서 길이요, 진리요, 참 생명이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예수를 잘 생긴 청년으로서 형상화시키고 그 형상을 신자들에게 갖게 하는가 하면 또는 이름뿐인 예수라는 단어에 공허하게 집착하게 합니다.
우리가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약을 먹어야지, 약은 만지 않고 감기약 이름에만 매달린다고 해서 그 감기가 낫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겉모습으로서가 아닌, 눈에 보이진 않으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영원한 사랑과 생명인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자체를 제 가슴 속에서 발견해야지, 생각 속의 형상이나 이미지, 혹은 성경에 나타난 정보로 얻은 예수를 진정한 예수로 안다면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예수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현대의 성서해석 흐름은 예수를 어떻게 이해시키고 있습니까? 후자의 예수에는 거의 신경 쓰지도 않고 전자인 예수에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신앙인들은 에고(Ego)의 '나라는 생각'이 바로 원죄임을 깨닫고 생각의 세계를 넘어선 깊은 묵상이나 명상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우주 본래 모습으로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극히 인간지식에 기초한 관념 속의 하나님만을 찾아서 생각과 감정의 표면적인 차원에서만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세 번째로는, '믿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믿음에도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갖게 되는 얕은 믿음은 정보에 대한 신뢰감을 갖는 정도이지만, 믿음이 깊어지면 그 믿음의 대상과 온몸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가 됩니다. 깊은 믿음은 이러한 거대한 힘이 있기에 생사까지 초월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기독 신앙의 주된 사조는 믿음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와 하나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이 너를 구원한다는 일차원적인 정보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해주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 차원의 정보제공은 에고(Ego)를 없애는 근본방법을 가르쳐주거나 근본적으로 사람을 새사람으로 만들어주기보다는, 에고(惡)와 그에 대립되는 이타(利他)의 개념(善)을 다시 만들어놓고 그 구 개념 사이에서 내면적인 싸움과 대립을 계속하도록 종용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죽을 때까지 선과 악의 대립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또 그로부터 용서해 달라고 비는 일을 끝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다행히 최근의 새로운 신학(神學)은 이러한 방면에 눈 떠가고 있고 선진국의 교회들은 이미 이러한 개념들을 도입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알면 믿음은 저절로 실현됩니다. 이를 제대로 안 사람은 이미 예수의 말대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가 거하는 한 몸, 하나의 상태가 실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안 사람은 저절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한 몸을 이룬 그 상태가 곧 천국이요, 완전한 믿음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사례를 사랑과 자기 희생의 화신(化身)인 인도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과 언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그분은 이교도인 힌두교도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과연 누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 것일까요?
기독교 구원의 논리
기독교는 분명 우수한 종교이고 그 안에는 인류구원의 놀라운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재 기독교에서 통용되고 있는 대다수의 성경해석 방식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제대로 이글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많은 학자들이 예수의 참 뜻을 오해하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볼까요?
기독교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행위를 통해 사후에 천국에 가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중요한 요소는 '나' , '예수 그리스도' , 그리고 '믿음' , 세 가지입니다. 즉, 이 세 가지 요소를 알고 있어야 기독교 신앙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성경해석은 세 가지 요소 중 첫 번째이면서 예수가 자주 말하는 '나'에 대해서 전혀 알려들거나 생각해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성경해석 방식이 간과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 가톨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활발한 연구와 신앙활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니, 매우 바람직한 현살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 가톨릭의 방상복 신부님은 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라고 하면 육신과 더불어 활동하는 현재의식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경험의 총집합체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이러한 나는 참 나가 아닙니다. 참 나가 아니기에 영원할 수도 없고 또 영원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일평생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서도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린 노인들을 종종 봅니다. 그들의 기억과 경험은 육신이 아직 죽기도 전에 먼저 죽어버린 것이지요.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육체는 비록 살아 있지만 정신이 없으니, 그들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것입니다. 정신이 없는데 과연 '누구'가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까?
또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정체성은 어디로 갔을까요?
또한 꿈을 꿀 때도 꿈속에서는 우리의 현재의식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대신 잠재의식이 의식 세계를 지배합니다. 즉, 꿈속에서의 의식 세계는 이미 그 의식 활동의 부자유성 때문에 우리가 깨어 있을 때의 현재의식과는 그 종류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와 꿈꿀 때의 존재방식부터가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무엇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일까요? 이것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변하고 잊혀지는 기억과 경험의 총체를 '나'라고 여기고 있는 한,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맙니다.
두 번째로 믿는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는 그를 '선한 이'라고 부르는 호칭에 대하여 "누가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이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라고 자기의 신성(神性)을 부인했는가 하면, 또한 "나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있었노라"고 말해서 자기의 영원불멸성, 즉 신성을 나타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를 보는자는 곧 아버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라고도 말했으며, 나아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곧 진리임을 강조하는 표현이 정점에 이르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혼란수럽게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예수가 '그리스도 예수'이며, 참 생명이요 진리인 예수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즉, 태어나서 자라는 개체의 입장에서 살아야하는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본래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인 신성으로서의 예수. 이와 같이 볼 때 전자인 형상과 욕망을 지닌 인간의 육체에 관련된 예수 자신은 '선하지 않다'고 표현하였고, 후자인 인간의 형상 속에 깃들어 있으나 인간의 육체를 넘어서 있는 영원한 신성으로서의 예수 자신은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자의 예수는 보는 자는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그 예수는 곧 그리스도 예수로서 길이요, 진리요, 참 생명이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예수를 잘 생긴 청년으로서 형상화시키고 그 형상을 신자들에게 갖게 하는가 하면 또는 이름뿐인 예수라는 단어에 공허하게 집착하게 합니다.
우리가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약을 먹어야지, 약은 만지 않고 감기약 이름에만 매달린다고 해서 그 감기가 낫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겉모습으로서가 아닌, 눈에 보이진 않으나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영원한 사랑과 생명인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자체를 제 가슴 속에서 발견해야지, 생각 속의 형상이나 이미지, 혹은 성경에 나타난 정보로 얻은 예수를 진정한 예수로 안다면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예수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현대의 성서해석 흐름은 예수를 어떻게 이해시키고 있습니까? 후자의 예수에는 거의 신경 쓰지도 않고 전자인 예수에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신앙인들은 에고(Ego)의 '나라는 생각'이 바로 원죄임을 깨닫고 생각의 세계를 넘어선 깊은 묵상이나 명상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우주 본래 모습으로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극히 인간지식에 기초한 관념 속의 하나님만을 찾아서 생각과 감정의 표면적인 차원에서만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세 번째로는, '믿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믿음에도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갖게 되는 얕은 믿음은 정보에 대한 신뢰감을 갖는 정도이지만, 믿음이 깊어지면 그 믿음의 대상과 온몸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가 됩니다. 깊은 믿음은 이러한 거대한 힘이 있기에 생사까지 초월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기독 신앙의 주된 사조는 믿음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체와 하나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이 너를 구원한다는 일차원적인 정보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해주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 차원의 정보제공은 에고(Ego)를 없애는 근본방법을 가르쳐주거나 근본적으로 사람을 새사람으로 만들어주기보다는, 에고(惡)와 그에 대립되는 이타(利他)의 개념(善)을 다시 만들어놓고 그 구 개념 사이에서 내면적인 싸움과 대립을 계속하도록 종용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죽을 때까지 선과 악의 대립에서 벗어나질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또 그로부터 용서해 달라고 비는 일을 끝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다행히 최근의 새로운 신학(神學)은 이러한 방면에 눈 떠가고 있고 선진국의 교회들은 이미 이러한 개념들을 도입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제대로 알면 믿음은 저절로 실현됩니다. 이를 제대로 안 사람은 이미 예수의 말대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가 거하는 한 몸, 하나의 상태가 실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안 사람은 저절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한 몸을 이룬 그 상태가 곧 천국이요, 완전한 믿음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사례를 사랑과 자기 희생의 화신(化身)인 인도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과 언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그분은 이교도인 힌두교도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과연 누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