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자유로움인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인가. 마광수의 희대의 문제작 <즐거운 사라>를 읽기 전에 든 생각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책은 사회의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잣대에 휘둘려버린 책이다. 지금 봐도 껄끄러운 면이 없지 않은데 12년 전 발표된 책이니 그 때 당시의 사회적 보수성은 이 책을 음란패설 이상으로는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줄거리부터 이야기해보자.
미대생인 '나사라'는 자유분방한 여대생이다. 가족들은 모두 미국으로 떠나있고 집안 형편도 그만하면 잘 사는 축에 속한다. 성에 대한 학습욕구가 강한 사라는 나이트클럽에 나가 춤을 추는 댄서 생활도 해보고 고급 요정에 나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여러 남자를 만나고 변태적인 성행위(친구와의 레즈비언 섹스와 2:1 섹스 등)까지 한다.
그러던 중 한지섭이라는 교수를 만나고 한지섭과 사랑한다. 보통의 연인 사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지섭은 사라에게 프리섹스를 권하고 사라는 그렇게 말하는 지섭을 이해한다.
그녀는 프로의식을 지니고 요정에 나가고 자기 과 동기의 약혼자까지 유혹한다. 그리고 자신의 야한 옷차림이 신성한 예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야단치는 T 교수까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인다. 사라는 다시 요정에 나가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은 부조리와 사고의 자유다. 겉으로는 야하게 화장하고 꾸미는 사라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지만 속내는 사라를 보면서 성적 욕구를 대리만족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관음증이다.
사라는 사람들의 관음증을 즐긴다. 사람들이 자신을 훔쳐보는 것에 만족하며 더욱 야하게 차려입는다. 그 한 면에는 사람들에 대한 비웃음이 있다.
또한 독자들의 고정관념 같은, 꽉 막힌 성의식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사고의 자유로움. 90년대 초반 사회는 아직 경직되어 있던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주제의식이 아니다. 소설 안에 그려진 성 묘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외설과 예술의 경계는 항상 불분명하다. 예술도 외설이 되고 외설도 예술이 되는 세상에서 그 경계점은 항상 모호하고 그것에서 논쟁은 시작된다.
내가 보기에 즐거운 사라는 외설에 가까운 예술이다. 물론 예술이라고 하기엔 예술성이 그다지 높지는 않은 작품이다.
문제가 될 만한 성 묘사 부분을 잠깐 소개하겠다.
나는 왠지 신경질이 나서 김승태의 윗도리까지 홀라당 다 벗겨버렸다. 그리고는 혓바닥에 잔뜨 힘을 주어 그의 배꼽에서부터 젖꼭지까지, 그리고 젖꼭지에서부터 모가지 언저리까지 날름날름 핥아나갔다. 김승태는 나를 얼싸안고 소파 위에 벌러덩 나자빠지더니 계속 끼둥거리며 헉헉댔다. 아깐 자기가 늙었다고 엄살을 떨어대더니만 정력이 어지간히 센 모양이다. 그러니까 정아하고 항문성교까지 하지……. 그 구멍이 좀 좁나…….
즐거운 사라, 제 4장 177p 중 일부.
이 부분만을 읽는다면 분명 이 글을 쓴 마광수는 변태스럽기만 한 삼류작가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부분이 작품 여러 곳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성 묘사가 아니다. 이것은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본다면 알 것이다. 이러한 장면만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또한 작가가 성문제에 치중해 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바에야 어줍잖은 보수적 도덕율에 따라서 감질나는 묘사를 쓰는 것보다 대놓고 '까발리는 것'이 위선적이지 않고 논리에 맞다.
내가 보기에 한지섭이라는 캐릭터는 마광수 자신의 분신 같다. 이미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나 <광마일기> 등을 통해서 자신이 야한 여자(성 적으로 보수적이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않는, 위선적이지 않고 솔직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 한지섭의 이미지는 마광수와 많이 닮아있었다. (한지섭이 프리섹스에 대해 사라에게 이야기 하는 것과 집착으로써 만나지 않는 것 등을 피력하는 등의 행동)
재미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문체가 어려운 게 흠이다. 쉽게 쓸 말도 전문용어를 남발하는 듯한 인상이 있다. 마광수는 작가라기 보다는 교수에 가까운 사람이다. 즐거운 사라도 자신의 생각을 소설로 풀어놓은 것 같다.
즐거운 사라
문학적 자유로움인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인가. 마광수의 희대의 문제작 <즐거운 사라>를 읽기 전에 든 생각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책은 사회의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잣대에 휘둘려버린 책이다. 지금 봐도 껄끄러운 면이 없지 않은데 12년 전 발표된 책이니 그 때 당시의 사회적 보수성은 이 책을 음란패설 이상으로는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줄거리부터 이야기해보자.
미대생인 '나사라'는 자유분방한 여대생이다. 가족들은 모두 미국으로 떠나있고 집안 형편도 그만하면 잘 사는 축에 속한다. 성에 대한 학습욕구가 강한 사라는 나이트클럽에 나가 춤을 추는 댄서 생활도 해보고 고급 요정에 나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여러 남자를 만나고 변태적인 성행위(친구와의 레즈비언 섹스와 2:1 섹스 등)까지 한다.
그러던 중 한지섭이라는 교수를 만나고 한지섭과 사랑한다. 보통의 연인 사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지섭은 사라에게 프리섹스를 권하고 사라는 그렇게 말하는 지섭을 이해한다.
그녀는 프로의식을 지니고 요정에 나가고 자기 과 동기의 약혼자까지 유혹한다. 그리고 자신의 야한 옷차림이 신성한 예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야단치는 T 교수까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인다. 사라는 다시 요정에 나가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은 부조리와 사고의 자유다. 겉으로는 야하게 화장하고 꾸미는 사라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지만 속내는 사라를 보면서 성적 욕구를 대리만족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관음증이다.
사라는 사람들의 관음증을 즐긴다. 사람들이 자신을 훔쳐보는 것에 만족하며 더욱 야하게 차려입는다. 그 한 면에는 사람들에 대한 비웃음이 있다.
또한 독자들의 고정관념 같은, 꽉 막힌 성의식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사고의 자유로움. 90년대 초반 사회는 아직 경직되어 있던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주제의식이 아니다. 소설 안에 그려진 성 묘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외설과 예술의 경계는 항상 불분명하다. 예술도 외설이 되고 외설도 예술이 되는 세상에서 그 경계점은 항상 모호하고 그것에서 논쟁은 시작된다.
내가 보기에 즐거운 사라는 외설에 가까운 예술이다. 물론 예술이라고 하기엔 예술성이 그다지 높지는 않은 작품이다.
문제가 될 만한 성 묘사 부분을 잠깐 소개하겠다.
나는 왠지 신경질이 나서 김승태의 윗도리까지 홀라당 다 벗겨버렸다. 그리고는 혓바닥에 잔뜨 힘을 주어 그의 배꼽에서부터 젖꼭지까지, 그리고 젖꼭지에서부터 모가지 언저리까지 날름날름 핥아나갔다. 김승태는 나를 얼싸안고 소파 위에 벌러덩 나자빠지더니 계속 끼둥거리며 헉헉댔다. 아깐 자기가 늙었다고 엄살을 떨어대더니만 정력이 어지간히 센 모양이다. 그러니까 정아하고 항문성교까지 하지……. 그 구멍이 좀 좁나…….
즐거운 사라, 제 4장 177p 중 일부.
이 부분만을 읽는다면 분명 이 글을 쓴 마광수는 변태스럽기만 한 삼류작가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부분이 작품 여러 곳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성 묘사가 아니다. 이것은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본다면 알 것이다. 이러한 장면만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또한 작가가 성문제에 치중해 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바에야 어줍잖은 보수적 도덕율에 따라서 감질나는 묘사를 쓰는 것보다 대놓고 '까발리는 것'이 위선적이지 않고 논리에 맞다.
내가 보기에 한지섭이라는 캐릭터는 마광수 자신의 분신 같다. 이미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나 <광마일기> 등을 통해서 자신이 야한 여자(성 적으로 보수적이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않는, 위선적이지 않고 솔직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 한지섭의 이미지는 마광수와 많이 닮아있었다. (한지섭이 프리섹스에 대해 사라에게 이야기 하는 것과 집착으로써 만나지 않는 것 등을 피력하는 등의 행동)
재미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문체가 어려운 게 흠이다. 쉽게 쓸 말도 전문용어를 남발하는 듯한 인상이 있다. 마광수는 작가라기 보다는 교수에 가까운 사람이다. 즐거운 사라도 자신의 생각을 소설로 풀어놓은 것 같다.
어떤 분야든 마광수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 아니던가.
평점: (별 5개 만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