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선배언니 친한 친구 얘긴데요..." 저녁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처자가 얘기를 꺼냈습니다. "둘은 서로 첫사랑이었대요. 서로 동갑이었는데 둘 다 깊이 사랑했고, 남자가 군대에 간 동안에도 그 여자는 그 남자를 기다렸대요. 그 남자가 제대하고 둘은 다시 만나 사랑했는데 그 남자가 졸업할 무렵에 둘은 크게 싸우고 헤어졌대요. 아마 여자쪽 집안에서 그 남자를 달가와 하지 않았다나봐. 종교도 그렇고 집안도... 아무튼 그 남자, 자존심 센 사람이라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나봐요. 여자는 울며 매달렸는데 남자는 너를 위해서야 라면서 냉정하게 헤어졌대." 무슨 얘기일까 하며 말없이 처자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헤어지고 3년이 넘도록 둘은 서로 연락 한번 안했대요. 하지만 그 여자 마음 속에는 첫사랑 그 남자 말고는 그때까지도 아무도 들여놓을 수가 없었대. 정말 사랑했으니까.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하지만 헤어진지 3년이 넘으면서 그 여자는 집안의 강요 때문에 선을 봤고... 나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남자도 자길 잊었을테니 이젠 나도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요. 결국 처음 맞선 본 남자랑 선 본지 두 달만에 결혼을 했대요. 그러다가 우연히 그 여자 회사 앞 길에서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를 만난거야..." 처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보고 무척 놀란 눈치더니 금새 무표정하게 묻더래요. 그때 그 여자는 임신중이라 배가 불룩하게 나왔었고, 아마 그래서 그 남자는 더 놀랐었나봐... 그 남자가 여자한테 행복하냐고 묻더래요. 그 여자는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서 숨도 쉬기 힘들었는데 그래도 그냥 억지로 웃으면서 행복하다고 그랬대..." 그 남자는 도대체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걸까? 참 바보같은 질문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몇마디 말도 못하고 길에서 서로 쳐다보기만 하다가... 남자가 문득 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그 여자 사진을 꺼냈대요. 언젠가 다시 만나면 돌려주려고 가지고 다니던 거라고 하면서. 그러고는 그 남자, 그냥 돌아서서 가더래. 그러니까 그 남자는 헤어지고 나서도 내내 그 여자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나봐... 그 여자는 그 남자가 돌려준 자기 사진을 손에 들고 그냥 멍하니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대요. 지갑에 넣을 수 있게 가위로 귀퉁이를 오려낸 자기 사진을 들고..." 처자가 다시 얘기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에 그 남자가 다시 그 여자 회사로 찾아 왔더래요.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그냥 서로 마주보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하는 얘기도 없이.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끝나서 들어가야 하는데 여전히 말도 없이 그냥 그렇게... 식당을 나와서 헤어지기 직전에 그 여자도 사진을 꺼내서 그 남자한테 돌려줬대." "그 남자가 준 사진을 도로?" "아니, 그 남자 사진. 그러니까 그 여자도 그 남자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남자가 다시 찾아 올거라 생각하고는 사진을 회사에 두고 있었대요. 돌려 주려고... 헤어지기 직전에 그 여자가 그 남자한테 담담한 목소리로 그랬대. 다시 만날 수 없겠냐고. 친구로서..." "이런..." "그랬더니 그때까지 무표정하게 있던 그 남자 얼굴이 막 일그러지면서 이젠 모든 게 너무 늦어 버렸잖아 하고 소리 치더래. 그 여자는 너무 화가 나서 돌아섰대. 헤어지자고 한 것도 그 남자였고, 그 여자도 오래도록 그 남자를 기다렸으니까. 모랄까... 그 남자에 대해 오래도록 쌓여왔던 감정이 폭발해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더래요... 그 여자, 결혼 전까지 그 남자가 자기를 다시 찾기를 기다리면서 그랬대. 지금이라도 날 찾아오면 다 용서해주고 받아줘야지 하고. 그렇게 견디다가 포기하고 어렵게 마음 잡고 결혼했는데, 이제서야 나타난 남자가 그런 소리 하니까 너무 화가 나고 밉고... 아무튼 그렇더래요." "음... 그럴만하네." "네.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그 여자 이름을 크게 한번 부르더래요. ㅇㅇ야 하고. 그 여자가 돌아섰는데 그 남자가 여자 얼굴을 보면서 눈물이 글썽해서는 웃고 있더래. 그 여자도 그 남자를 보면서 이를 악물고 웃었대요..." "웃어? 두 사람 다? 실성을 했나... 왜 웃은거래?" "몰라... 아마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웃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던 거였겠지. 정말 마지막이란 걸 알았을테니 마지막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실상은 펑펑 울고 싶었던 거 였겠지만..." "음... 소설같은 얘기다." "그렇죠? 그러고 몇 달이 지난 후에 그 남자가 우리 회사 선배언니 한테 전화해서 만나자고 그랬대요. 회사 선배언니는 그 여자랑 제일 친한 친구사이이고 그래서 그 남자하고도 학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냈었대... 술집에서 만나서 그 남자가 묻더래요. 그 여자, 아기 잘 낳았냐고. 건강하냐고. 그래서 그렇다고... 선배언니는 담담하게 친구인 그 여자의 지난 얘기를 해줬대요. 헤어지고 나서 그 여자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그런데 그 남자도 그 여자와 헤어진 후로 줄곧 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언젠가 분명히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하면서 살았다나봐요." "음..." "그 남자가 그러더래요.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여자 역시 자기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말도 안되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런 소망이 어느샌가 확신이 되어 버렸었다고... 그 얘기 하면서 그 남자, 선배언니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더래요. 그 자존심 센 남자가..." "그 남잔 그럼 왜 진작 그 여자를 찾지 않은 거래?" "음... 아마 그 여자 집에서 자기를 반대했으니까 뭔가 번듯한 위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나봐요. 아무튼 선배언니는 그 남자 그런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한편으로는 그 남자, 결혼해서 살고 있는 그 여자한테 또 찾아가거나 할까봐 걱정되서 냉정하게 말했대요. 선 보고 두 달만에 결혼한 그 여자. 분명히 지금 남편인 그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한거고, 지금 그 부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그 남편도 좋은 사람이라고. 이제와서 어쩔수는 없는거라고..." 문득 답답함이 느껴져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처자의 남은 얘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참을 멍하니 앉아 술만 마시다가 일어섰대요... 헤어지기 전에 그 남자가 선배언니한테 묻더래요. 사랑을 믿냐고... 선배언니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쳐다보고 있는데 그 남자가 그러더래. 사랑이란게 얼마나 무력한 건지 아냐고. 지난 시간동안 얼마나 끈질기게 마음 속으로 그 여자를 부르고 생각했는지 아냐고 그러더래요. 하지만 사랑은 아무런 힘도 없다고. 사랑 따위. 그런 건 없다고 말하더래..." "흠... 답답한 얘기네. 그게 끝이야? 그 후에 그 두 사람, 다시 안 만났대?" "네. 그게 끝이었대요. 그 남자 소식은 더는 모르고. 선배언니도 친구인 그 여자한테는 그 남자 만났었다는 얘기 안 했대요. 결혼해서 애 낳고 살고 있는데 공연히 마음 어지러울까봐. 그리고 그 여자도 선배언니한테 그 남자를 만났었다는 얘기 안 하더래. 그리고 일 년인가 지나고 나서야 그 여자가 선배언니한테 그 남자 만났었다는 얘기를 하더래요. 그때 자긴 정말 친구로라도 그 남자를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고... 그런 마음들을 다 얘기하더래." "그래서 선배언니도 그 여자한테 그 남자 만났었다는 얘기 했대?" "아니. 안 했대요. 그 여자는 가지고 있던 그 남자 사진들, 결혼 하기 전에 한장만 남겨놓고 모두 불태워 버렸는데. 그래서 하나 남은 그 사진 꺼내 보지도 못하고 깊숙히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걸 왜 돌려주었는지 후회스럽다고 하더래요. 눈물이 글썽해서는." "흠..." "선배언니는 결국 그 남자가 찾아 왔었다는 얘기, 지금까지도 그 여자한테 안 했대. 친구인 그 여자, 이젠 애가 둘이고 남편하고도 별 문제없이 잘 지낸다고 하던데... 왠지 그 첫사랑 두사람의 비밀을 자기가 떠안고 있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조금 더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여자한테 얘기해 줄 생각이래요. 친구니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겠죠..." 어쩌면 흔한 러브스토리였지만 안타깝고 답답하게 만드는 얘기였습니다. 처자가 빈 찻잔을 만지작 거리면서 다시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선배언니가 그 친구 얘기 해주고 나서 나한테 그러대요. 자기는 실은 부러운 생각도 들더래요. 그 두사람." "부럽다고? 모가 부러워?" "자기도 첫사랑이 있었고 결혼해서 살고 있지만, 그 두사람처럼 그렇게 뼈아프게 절절히 사랑해보지 않은 것 같다고요. 이제는 그런 사랑,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요." "흠... 그런게 부럽긴 모가 부럽냐. 남의 얘기니까 로맨틱하게 느끼는 거지. 막상 자기가 그런 입장이라면 그걸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가슴 아픈 사랑이 모가 좋아. 노래도 있잖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말야." "하긴 나도 너무 슬픈 사랑은 싫어. 오죽 괴로웠으면 그 남자, 사랑이 무슨 힘이 있냐고 했을까. 그렇죠?" "내 듣기에 그 소리는 그냥 변명이야. 그렇게 사랑하고 못 잊었으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찾아가서 만나던가 했어야지. 본인이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눈에 안보이는 사랑이라는게 대신 해주길 바라는 거잖아. 사랑이 무슨 초능력이냐? 안 그래?" "응... 그런데 나는 왠지 이해가 돼요. 그 얘기 들으면서 나도 사랑이 정말 힘이 있는걸까 생각해 봤는데...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운명이란 건 있는 것 같은데... 오빠는 정말 사랑이 힘이 있다고 생각해?" 처자가 저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왠지 허를 찔린 기분으로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예전에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다는 걸 기억했습니다. 처자도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던 걸까요. 대체 사랑이 무슨 힘이 있나... 이미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기분이 들어서 슬며시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습니다. "음, 글쎄... 사랑이 정말 아무 힘도 없다면 그건 너무 쓸쓸하지 않나? 사는게 말야... 그런데 그 여자도 좀 그렇다. 결혼까지 한 여자가 뭐하러 첫사랑 사진은 가지고 있었대? 그런 말도 있잖아. 과거가 있는 여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과거를 못 잊는 여자는 용서할 수 없다." "음... 글쎄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결혼했어도 첫사랑 상대의 사진이나 편지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 물론 그게 결혼생활에 문제가 된다면 안되겠지만요. 꼭 그런게 과거를 잊지 못해서 라거나, 지금 남편에 대한 배신. 그런 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혼자 있을때 때로 꺼내 보고 싶은 어릴 때의 일기장. 모 그런 거 아닌가 생각 하는데요." "그럼 만약에 내가 내 첫사랑 여자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걸 발견했다. 그럼 어떨 것 같애?" "에? 으음, 물론 기분 나쁘겠죠. 그럼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만 아는 어느 장소에 두고... 음... 이것도 생각해 보니까 기분 나쁘겠는데..." 이쯤에서,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이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생각하는데 처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오빠는 아직 그런거 가지고 있어요? 첫사랑 사진이나 편지 같은 거요." "네버. 난 그런거 가지고 있는 거 없어, 정말로. 그런데... 그렇게 묻는 댁은 어떠슈?" "나도 그런거 없어요.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억도 아니었고... 모, 하긴 오빠나 나나 좀 냉정한 사람들이잖아." "음, 그렇지... 재미없다. 다른 얘기 하자." 걱정한 대로 공연히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 같아서 처자의 표정을 살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하는데, 처자가 저를 빤히 쳐다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습니다. "지갑 줘봐요." "뭐? 아이 참, 사진 같은 거 없다니까. 있어봐야 퇴계선생하고 세종대왕 초상화 밖엔 없어. 가족사진 한 장 하고." "에? 이 남자 이상하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데... 정말 지갑 안에 아직도 첫사랑 사진 가지고 다니나봐." 어라? 진심인가? 정말 그런걸 의심하는 걸까? 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째려보는 처자의 얼굴을 보면서 처자가 저에게 장난을 거는 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조금 오바스럽게 지갑을 꺼내어 처자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나 원... 불심검문도 아니고... 삥 뜯을려는거 아냐? 봐라 봐! 있긴 모가 있다고 그래?" 처자가 히죽 웃으며 제 지갑을 열어 보았습니다. "음, 정말 가족사진 가지고 다니네요. 뜻밖이네... 음... 여자 사진은 없네... 그런데 오빠 주민등록증 사진 정말 엉망으로 나왔다. 하하하~" "우쒸, 지갑 이리 내놔... 어? 야!!! 만원 도로 안 집어넣어?!!" 처자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 그 사람들처럼 은 어쩌면 오래도록 심각한 내상을 남기기도 하나 봅니다. 누구든 결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통과의례지만 말 그대로 처음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이므로, 내성을 기르지 못한 채 맞닥뜨려야 하는 갑작스런 열병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 만큼 뜨거운 고열에 시달려야 하고 완치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이라는 것. 그래서 미숙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깨어질 확률이 높고, 그 만큼 많은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는 사랑이지만 피해 갈 방법은 없는 거겠지요. 어찌됐던 첫사랑이 없다면 두번째, 세번째 사랑도 없는 걸테니까요. 첫사랑은, 그 다음 사랑의 열병을 씩씩하게 이겨내기 위한 백신인 걸까요? 처자에게 제가 했던 진술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진 한 장, 편지 한 통. 첫사랑과 관련된 그 무엇 하나 남겨두지 않았지요. 처자의 말처럼 냉정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 나에게 첫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그 어떤 물증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화석이 되어버린 기억 말고는. 사랑이 끝난 후. 그 모든 흔적들을 남김없이 파기해 버린 저같은 사람도, 반대로 그런 추억들을 소중히 감싼 채 자기만의 깊은 곳에 몰래 숨겨놓은 사람도, 그런 상반된 행동의 이유는 그러나 하나일 거라 생각합니다. 죽을 것만 같은 혼자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살기위해서 말입니다. 사랑이란 걸 경험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어쩌면 조금은 맥이 빠져버렸다는 기분이 듭니다. 열정의 시간이 지나간 후 식어버린 재처럼, 홍역같은 사랑의 아픔을 겪은 사람은 다음 사랑이 다가오면 자기도 모르게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리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일종의 자기 보호본능이겠지요. 다시 아픔을 겪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조심성 말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의심하고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가슴 속에 타오르려는 불꽃을 애써 숨기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열정을 숨긴 채 상대를 바라보며 가만히 숨을 고르는 방어자세를, 처자는 '냉정' 이라고 표현했고 저는 '조심성' 이라고 표현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란게 정말 힘이 있나라는 질문을 우물거리는 대답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저 역시 그런 절망스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조금은 냉정하고, 조금은 조심스러워진 사람의 대답은 그렇게 맥빠진 것이었나 봅니다. 끝나버린 사랑 때문에 오래도록 마음을 닫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하지만... 우린 그 순간에 분명히 한가지를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의 끝자락이 아니라 사랑의 한 가운데 있었을 때. 그때 얼마나 기뻤었는지...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하여... 끝나버린 사랑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슬픔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만일 운명이란 걸 믿는다면, 그래서 어긋나버린 사랑이 운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운명의 힘을 믿는다면... 그런 운명과 맞서 싸워 굴복시키는 사랑의 힘도 역시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랜만에 책을 몇 권 샀습니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서, 처자에게 두레박에 담아 선물할 책 한 권도 추가했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이란 소설입니다. 오래 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었는데 제목이 주는 무게감에 비해 쉽게 읽히는 소설이었지요. " ...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해야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소설의 맨 마지막은 위와 같은 독백으로 끝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자 역시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가슴속에 무언가 뜨거운 것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랬었던 것처럼. http://dvdprime.dreamwiz.com/bbs/view.asp?major=ME&minor=E1&master_id=40&bbsfword_id=&master_sel=&fword_sel=&SortMethod=0&SearchCondition=6&SearchConditionTxt=꼬메바&bbslist_id=896044&page=1 <EMBED style="LEFT: 30px; WIDTH: 300px; TOP: 11126px; HEIGHT: 45px" src=http://www.chk.pe.kr/music/Little_Bird.wma width=300 height=45 loop="true">
사랑, 기억하십니까
"회사 선배언니 친한 친구 얘긴데요..."
저녁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처자가 얘기를 꺼냈습니다.
"둘은 서로 첫사랑이었대요.
서로 동갑이었는데 둘 다 깊이 사랑했고,
남자가 군대에 간 동안에도 그 여자는 그 남자를 기다렸대요.
그 남자가 제대하고 둘은 다시 만나 사랑했는데
그 남자가 졸업할 무렵에 둘은 크게 싸우고 헤어졌대요.
아마 여자쪽 집안에서 그 남자를 달가와 하지 않았다나봐.
종교도 그렇고 집안도...
아무튼 그 남자, 자존심 센 사람이라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나봐요.
여자는 울며 매달렸는데 남자는 너를 위해서야 라면서
냉정하게 헤어졌대."
무슨 얘기일까 하며 말없이 처자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헤어지고 3년이 넘도록 둘은 서로 연락 한번 안했대요.
하지만 그 여자 마음 속에는 첫사랑 그 남자 말고는 그때까지도
아무도 들여놓을 수가 없었대. 정말 사랑했으니까.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하지만 헤어진지 3년이 넘으면서 그 여자는 집안의 강요 때문에
선을 봤고... 나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남자도 자길 잊었을테니 이젠 나도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요.
결국 처음 맞선 본 남자랑 선 본지 두 달만에 결혼을 했대요.
그러다가 우연히 그 여자 회사 앞 길에서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를
만난거야..."
처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보고 무척 놀란 눈치더니 금새 무표정하게
묻더래요. 그때 그 여자는 임신중이라 배가 불룩하게 나왔었고,
아마 그래서 그 남자는 더 놀랐었나봐...
그 남자가 여자한테 행복하냐고 묻더래요.
그 여자는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서 숨도 쉬기 힘들었는데
그래도 그냥 억지로 웃으면서 행복하다고 그랬대..."
그 남자는 도대체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걸까?
참 바보같은 질문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몇마디 말도 못하고 길에서
서로 쳐다보기만 하다가...
남자가 문득 지갑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그 여자 사진을 꺼냈대요.
언젠가 다시 만나면 돌려주려고 가지고 다니던 거라고 하면서.
그러고는 그 남자, 그냥 돌아서서 가더래.
그러니까 그 남자는 헤어지고 나서도 내내 그 여자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나봐... 그 여자는 그 남자가 돌려준 자기 사진을 손에 들고
그냥 멍하니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대요. 지갑에 넣을 수 있게
가위로 귀퉁이를 오려낸 자기 사진을 들고..."
처자가 다시 얘기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에 그 남자가 다시 그 여자 회사로
찾아 왔더래요.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그냥 서로 마주보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하는 얘기도 없이.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끝나서 들어가야 하는데 여전히 말도 없이
그냥 그렇게...
식당을 나와서 헤어지기 직전에 그 여자도 사진을 꺼내서
그 남자한테 돌려줬대."
"그 남자가 준 사진을 도로?"
"아니, 그 남자 사진. 그러니까 그 여자도 그 남자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남자가 다시 찾아 올거라 생각하고는 사진을 회사에
두고 있었대요. 돌려 주려고...
헤어지기 직전에 그 여자가 그 남자한테 담담한 목소리로 그랬대.
다시 만날 수 없겠냐고. 친구로서..."
"이런..."
"그랬더니 그때까지 무표정하게 있던 그 남자 얼굴이
막 일그러지면서 이젠 모든 게 너무 늦어 버렸잖아 하고
소리 치더래. 그 여자는 너무 화가 나서 돌아섰대.
헤어지자고 한 것도 그 남자였고, 그 여자도 오래도록 그 남자를
기다렸으니까. 모랄까... 그 남자에 대해 오래도록 쌓여왔던 감정이
폭발해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더래요...
그 여자, 결혼 전까지 그 남자가 자기를 다시 찾기를 기다리면서
그랬대. 지금이라도 날 찾아오면 다 용서해주고 받아줘야지 하고.
그렇게 견디다가 포기하고 어렵게 마음 잡고 결혼했는데,
이제서야 나타난 남자가 그런 소리 하니까 너무 화가 나고 밉고...
아무튼 그렇더래요."
"음... 그럴만하네."
"네.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그 여자 이름을 크게 한번
부르더래요. ㅇㅇ야 하고.
그 여자가 돌아섰는데 그 남자가 여자 얼굴을 보면서 눈물이
글썽해서는 웃고 있더래.
그 여자도 그 남자를 보면서 이를 악물고 웃었대요..."
"웃어? 두 사람 다? 실성을 했나... 왜 웃은거래?"
"몰라... 아마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웃는 모습 보여주고 싶었던
거였겠지. 정말 마지막이란 걸 알았을테니 마지막으로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실상은 펑펑 울고 싶었던 거
였겠지만..."
"음... 소설같은 얘기다."
"그렇죠? 그러고 몇 달이 지난 후에 그 남자가 우리 회사 선배언니
한테 전화해서 만나자고 그랬대요.
회사 선배언니는 그 여자랑 제일 친한 친구사이이고 그래서
그 남자하고도 학교 다닐 때부터 알고 지냈었대...
술집에서 만나서 그 남자가 묻더래요.
그 여자, 아기 잘 낳았냐고. 건강하냐고. 그래서 그렇다고...
선배언니는 담담하게 친구인 그 여자의 지난 얘기를 해줬대요.
헤어지고 나서 그 여자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그런데 그 남자도 그 여자와 헤어진 후로 줄곧 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언젠가 분명히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하면서
살았다나봐요."
"음..."
"그 남자가 그러더래요.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여자 역시 자기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말도 안되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런 소망이 어느샌가 확신이 되어 버렸었다고...
그 얘기 하면서 그 남자, 선배언니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더래요.
그 자존심 센 남자가..."
"그 남잔 그럼 왜 진작 그 여자를 찾지 않은 거래?"
"음... 아마 그 여자 집에서 자기를 반대했으니까 뭔가 번듯한
위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나봐요.
아무튼 선배언니는 그 남자 그런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한편으로는 그 남자, 결혼해서 살고 있는 그 여자한테
또 찾아가거나 할까봐 걱정되서 냉정하게 말했대요.
선 보고 두 달만에 결혼한 그 여자. 분명히 지금 남편인 그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한거고, 지금 그 부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그 남편도 좋은 사람이라고. 이제와서 어쩔수는 없는거라고..."
문득 답답함이 느껴져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처자의 남은 얘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참을 멍하니 앉아
술만 마시다가 일어섰대요...
헤어지기 전에 그 남자가 선배언니한테 묻더래요. 사랑을 믿냐고...
선배언니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쳐다보고 있는데
그 남자가 그러더래.
사랑이란게 얼마나 무력한 건지 아냐고.
지난 시간동안 얼마나 끈질기게 마음 속으로 그 여자를 부르고
생각했는지 아냐고 그러더래요.
하지만 사랑은 아무런 힘도 없다고. 사랑 따위. 그런 건 없다고
말하더래..."
"흠... 답답한 얘기네. 그게 끝이야? 그 후에 그 두 사람, 다시
안 만났대?"
"네. 그게 끝이었대요. 그 남자 소식은 더는 모르고.
선배언니도 친구인 그 여자한테는 그 남자 만났었다는 얘기 안 했대요.
결혼해서 애 낳고 살고 있는데 공연히 마음 어지러울까봐.
그리고 그 여자도 선배언니한테 그 남자를 만났었다는 얘기 안 하더래.
그리고 일 년인가 지나고 나서야 그 여자가 선배언니한테 그 남자
만났었다는 얘기를 하더래요.
그때 자긴 정말 친구로라도 그 남자를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고...
그런 마음들을 다 얘기하더래."
"그래서 선배언니도 그 여자한테 그 남자 만났었다는 얘기 했대?"
"아니. 안 했대요. 그 여자는 가지고 있던 그 남자 사진들,
결혼 하기 전에 한장만 남겨놓고 모두 불태워 버렸는데.
그래서 하나 남은 그 사진 꺼내 보지도 못하고 깊숙히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걸 왜 돌려주었는지 후회스럽다고 하더래요.
눈물이 글썽해서는."
"흠..."
"선배언니는 결국 그 남자가 찾아 왔었다는 얘기, 지금까지도
그 여자한테 안 했대.
친구인 그 여자, 이젠 애가 둘이고 남편하고도 별 문제없이 잘
지낸다고 하던데...
왠지 그 첫사랑 두사람의 비밀을 자기가 떠안고 있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조금 더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여자한테
얘기해 줄 생각이래요. 친구니까.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겠죠..."
어쩌면 흔한 러브스토리였지만 안타깝고 답답하게 만드는
얘기였습니다.
처자가 빈 찻잔을 만지작 거리면서 다시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선배언니가 그 친구 얘기 해주고 나서 나한테 그러대요.
자기는 실은 부러운 생각도 들더래요. 그 두사람."
"부럽다고? 모가 부러워?"
"자기도 첫사랑이 있었고 결혼해서 살고 있지만, 그 두사람처럼
그렇게 뼈아프게 절절히 사랑해보지 않은 것 같다고요.
이제는 그런 사랑,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요."
"흠... 그런게 부럽긴 모가 부럽냐. 남의 얘기니까 로맨틱하게
느끼는 거지.
막상 자기가 그런 입장이라면 그걸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가슴 아픈 사랑이 모가 좋아. 노래도 있잖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말야."
"하긴 나도 너무 슬픈 사랑은 싫어. 오죽 괴로웠으면 그 남자,
사랑이 무슨 힘이 있냐고 했을까. 그렇죠?"
"내 듣기에 그 소리는 그냥 변명이야.
그렇게 사랑하고 못 잊었으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찾아가서
만나던가 했어야지.
본인이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눈에 안보이는 사랑이라는게
대신 해주길 바라는 거잖아.
사랑이 무슨 초능력이냐? 안 그래?"
"응... 그런데 나는 왠지 이해가 돼요.
그 얘기 들으면서 나도 사랑이 정말 힘이 있는걸까 생각해
봤는데...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운명이란 건 있는 것 같은데...
오빠는 정말 사랑이 힘이 있다고 생각해?"
처자가 저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왠지 허를 찔린 기분으로 잠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예전에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다는
걸 기억했습니다.
처자도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던 걸까요.
대체 사랑이 무슨 힘이 있나...
이미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기분이 들어서 슬며시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습니다.
"음, 글쎄... 사랑이 정말 아무 힘도 없다면 그건 너무 쓸쓸하지
않나? 사는게 말야...
그런데 그 여자도 좀 그렇다.
결혼까지 한 여자가 뭐하러 첫사랑 사진은 가지고 있었대?
그런 말도 있잖아.
과거가 있는 여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과거를 못 잊는 여자는
용서할 수 없다."
"음... 글쎄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결혼했어도 첫사랑 상대의 사진이나 편지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되는 거 아닌가?
물론 그게 결혼생활에 문제가 된다면 안되겠지만요.
꼭 그런게 과거를 잊지 못해서 라거나, 지금 남편에 대한 배신.
그런 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혼자 있을때 때로 꺼내 보고 싶은 어릴 때의 일기장.
모 그런 거 아닌가 생각 하는데요."
"그럼 만약에 내가 내 첫사랑 여자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걸
발견했다. 그럼 어떨 것 같애?"
"에? 으음, 물론 기분 나쁘겠죠.
그럼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만 아는 어느 장소에
두고... 음... 이것도 생각해 보니까 기분 나쁘겠는데..."
이쯤에서,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이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생각하는데 처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오빠는 아직 그런거 가지고 있어요?
첫사랑 사진이나 편지 같은 거요."
"네버. 난 그런거 가지고 있는 거 없어, 정말로.
그런데... 그렇게 묻는 댁은 어떠슈?"
"나도 그런거 없어요.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싶은 기억도
아니었고... 모, 하긴 오빠나 나나 좀 냉정한 사람들이잖아."
"음, 그렇지... 재미없다. 다른 얘기 하자."
걱정한 대로 공연히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 같아서
처자의 표정을 살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하는데,
처자가 저를 빤히 쳐다보며 피식 웃더니 말했습니다.
"지갑 줘봐요."
"뭐? 아이 참, 사진 같은 거 없다니까.
있어봐야 퇴계선생하고 세종대왕 초상화 밖엔 없어.
가족사진 한 장 하고."
"에? 이 남자 이상하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데...
정말 지갑 안에 아직도 첫사랑 사진 가지고 다니나봐."
어라? 진심인가? 정말 그런걸 의심하는 걸까?
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째려보는 처자의 얼굴을 보면서
처자가 저에게 장난을 거는 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조금 오바스럽게 지갑을 꺼내어 처자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나 원... 불심검문도 아니고... 삥 뜯을려는거 아냐? 봐라 봐!
있긴 모가 있다고 그래?"
처자가 히죽 웃으며 제 지갑을 열어 보았습니다.
"음, 정말 가족사진 가지고 다니네요. 뜻밖이네...
음... 여자 사진은 없네...
그런데 오빠 주민등록증 사진 정말 엉망으로 나왔다. 하하하~"
"우쒸, 지갑 이리 내놔... 어? 야!!! 만원 도로 안 집어넣어?!!"
처자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 그 사람들처럼 은 어쩌면
오래도록 심각한 내상을 남기기도 하나 봅니다.
누구든 결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통과의례지만 말 그대로
처음 겪을 수 밖에 없는 일이므로,
내성을 기르지 못한 채 맞닥뜨려야 하는 갑작스런 열병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 만큼 뜨거운 고열에 시달려야 하고 완치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이라는 것. 그래서 미숙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깨어질 확률이 높고,
그 만큼 많은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는 사랑이지만 피해 갈 방법은
없는 거겠지요.
어찌됐던 첫사랑이 없다면 두번째, 세번째 사랑도 없는 걸테니까요.
첫사랑은, 그 다음 사랑의 열병을 씩씩하게 이겨내기 위한
백신인 걸까요?
처자에게 제가 했던 진술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진 한 장, 편지 한 통. 첫사랑과 관련된 그 무엇 하나
남겨두지 않았지요.
처자의 말처럼 냉정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 나에게 첫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그 어떤 물증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화석이 되어버린 기억 말고는.
사랑이 끝난 후. 그 모든 흔적들을 남김없이 파기해 버린
저같은 사람도, 반대로 그런 추억들을 소중히 감싼 채
자기만의 깊은 곳에 몰래 숨겨놓은 사람도,
그런 상반된 행동의 이유는 그러나 하나일 거라 생각합니다.
죽을 것만 같은 혼자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살기위해서 말입니다.
사랑이란 걸 경험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어쩌면 조금은
맥이 빠져버렸다는 기분이 듭니다.
열정의 시간이 지나간 후 식어버린 재처럼,
홍역같은 사랑의 아픔을 겪은 사람은 다음 사랑이 다가오면
자기도 모르게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리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일종의 자기 보호본능이겠지요.
다시 아픔을 겪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조심성 말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의심하고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가슴 속에 타오르려는 불꽃을 애써 숨기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열정을 숨긴 채 상대를 바라보며 가만히 숨을 고르는
방어자세를, 처자는 '냉정' 이라고 표현했고
저는 '조심성' 이라고 표현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란게 정말 힘이 있나라는 질문을 우물거리는 대답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저 역시 그런 절망스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조금은 냉정하고, 조금은 조심스러워진 사람의 대답은
그렇게 맥빠진 것이었나 봅니다.
끝나버린 사랑 때문에 오래도록 마음을 닫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하지만...
우린 그 순간에 분명히 한가지를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의 끝자락이 아니라 사랑의 한 가운데 있었을 때.
그때 얼마나 기뻤었는지...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하여... 끝나버린 사랑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슬픔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만일 운명이란 걸 믿는다면,
그래서 어긋나버린 사랑이 운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운명의 힘을 믿는다면...
그런 운명과 맞서 싸워 굴복시키는 사랑의 힘도 역시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랜만에 책을 몇 권 샀습니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서,
처자에게 두레박에 담아 선물할 책 한 권도 추가했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이란 소설입니다.
오래 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었는데 제목이 주는 무게감에 비해
쉽게 읽히는 소설이었지요.
" ...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랑해야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소설의 맨 마지막은 위와 같은 독백으로
끝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자 역시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가슴속에 무언가 뜨거운 것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랬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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