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1972

이상원2006.11.26
조회45

1. 名不虛傳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다.

 

 

2. 누아르적 전통

 

흔히 누아르풍의 전통을 따른 명작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을 꼽곤 한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난 왠지 늘어지는 느낌에 지루했었다. 수수께끼를 풀어과는 과정이나 그 결과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는 누아르적 전통 위에 있으면서도 서사시적 느낌이 강하여 역사적-영화적 함의와 함께 오락성도 뛰어나다.

 

누아르는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탐구하는 장르다. 사회의 각종 권력들의 이면을 들추어 그 추악함을 탐구한다. 폭력, 결탁, 유착, 비리, 이권 등.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탐욕, 질투, 폭력, 배신 등. 이런 것들이 주된 이야기인 만큼 누아르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빛의 통제를 통한 빛과 그림자, 밝고 어두움의 대비를 주요한 스타일로 사용한다. 이는 인간과 사회의 이중성과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는데 유용하다.

 

는 첫째 장면에서 이미 자신의 누아르적 정체를 대략 드러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인물의 얼굴을 중심으로 명암이 드러나면서 첫 대사가 시작된다. "난 미국을 믿었소." 그러나 그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은 이 이탈리아 이민자에게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베풀지 않았다. 그가 기댈 곳은 마피아와 대부 밖에 없다. 이제 카리스마 넘치는 대부 돈 꼬를레오네(말론 브란도)가 등장한다. 역시 그의 얼굴을 중심으로 명암이 드리워져있다.

 

이 첫째 장면을 누아르적 전통에서 해석한다면, 마피아와 대부의 존재 자체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면이다. 표면으로서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응하는 이면으로서의 폭력조직 마피아. 마피아는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조직이기 때문에 절대 미국의 표면이 될 수는 없겠지만, money & business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미국적인 조직이다. 우리나라 조폭의 역사가 자유당 시절의 정치깡패에서 유래한다는 점과 비교해보자. 저개발된 국가는 국가가 나서서 경제를 계획하기도 하지만 국가가 나서서 조폭을 조직하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에 따르면 미국은 기업적인 조폭에 의해서 권력이 매수된다. 그러니까 마피아는 미국적이고 미국적이되 그 이면일 수밖에 없다. 첫 장면의 대사와 영상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곳곳에 이런 함의가 풍부하게 배치되어 있다. 판사와 정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대부, 뉴욕 경찰반장을 매수한 또 다른 보스의 설정이 그렇다. 또 대부의 부하 클레멘자가 갈대밭에서 배신한 운전수 폴리를 죽일 때, 갈대밭 저 너머로 보이는 자유의 여신상은 이 영화를 단순한 깡패조직 영화로 볼 수는 없게 한다. 는 폭력이라는 미국의 이면을 마피아를 통해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동시에 주인공들의 성격과 그 명멸을 분명히 함으로써 사회와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탐구하는 누아르적 전통에 서있는 영화이다. 

 

蛇足 - 한국의 누아르

바로 이런 점이 우리나라의 시시껄렁한 조폭영화들이 누아르 운운하는 것이 가당치 않은 이유이다. 예를 들면 김지운 감독의 . 물론 이 영화는 누아르 스타일의 조명에 많은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병헌의 근무처인 술집bar, 황정민이 이병헌을 찌르던 실내체육관, 이병헌이 억류되었다가 고군분투 끝에 탈출하던 폐건물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 영화의 갈등을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본질, 등장인물의 감정이 무엇인가? 나는 을 멜로영화로 파악한다. 결국 핵심은 여자를 사이에 둔 이병헌과 김영철의 갈등이다. 이들의 직업이 조폭이고 총격전이 난무한다고 해도 결국은 여자에 대한 감정을 둘러싼 남자들의 격돌을 다룬 것에 불과하다. 액션이 가미된 멜로영화라면 모를까, 누아르라고 과도하게 선전한 것은 어불성설이다. 누아르풍의 스타일을 조금 사용했다고 해서 내용과 무관하게 그 형식만으로 영화를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뚜렷한 인물 설정

 

마피아 조직의 탐구와 더불어 이 영화의 인물 탐구 역시 돋보인다. 주인공 3인은 각각 뚜렷한 어떤 인간의 군상을 대변한다.

 

1> 대부 돈 꼬를레오네 - 권력

말론 브란도의 명연이 돋보이는 이 역할은 권력자의 풍모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대부는 조직을 세우고 일군 장본인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원숙하고 노련하다. 그는 사태를 예리하게 파악하는 혜안을 가지고 있으며, 철저한 계산 하에 움직인다. 그러나 그 실리적 분석과 계산은 철저히 숨기고 겉으로는 원만하고 겸손하게 명분을 내세울 줄 안다. 겸허히 물러서야 하는 순간과 단호하게 나가야 할 순간을 구별할 줄 알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지도자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어떤 신비감, 즉 카리스마와 매력이 넘치는 것은 물론이다. 대부는 폭력조직의 보스이므로 그를 찬양할 수는 없지만, 그는 하여간 자신의 세계에서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을 두루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단지 필요한 것일 뿐. 하지만 질문해보자. 미국의 기업가, 정치가, 심지어 대통령 등이 대부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지도자의 덕목은 어디에서나 비슷하지 않을까? 다만 그 능력을 어디에 쓰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잠시 후 마이클에 이르면 그 대답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2> 대부의 장남 소니 - 파멸

이 인물은 소설에서는 대물의 소유자로 묘사되어 있다. 영화 초반부 대부의 딸 코니의 결혼식 장면에서 한 여자가 무언가의 크기를 묘사하면서 주변의 여자들과 수다떠는 장면이 있는데,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은 그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 여자는 소니의 처로 보인다. 여튼 소니는 그런 만큼 과잉된 남성성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남자는 힘! 힘이다!  따라서 소니는 남자에게는 폭력, 여자에게는 정력을 과시한다. 이런 힘을 내세운 다혈질의 성격이 결국은 그를 파멸로 몰아간다. 그가 죽이고 두들겨 팬 사람들의 원성이 결국 그에게 기관총을 들이댄 것이다. 성격적으로 무엇인가가 과잉된 사람들이 파멸에 이를 가능성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크다. "신은 누군가를 파멸시킬 때 먼저 그를 미치게 한다"는 구절이 사무엘 풀러의 에 등장한다.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겠다. 과잉은 광기와 상통하는 것이다. 소니의 과잉, 소니의 광기, 소니의 파멸. 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3> 대부의 막내이자 후계자 마이클 - 운명

알 파치노가 연기한 마이클은 운명의 장난에 걸려든 엘리트이다. 알 파치노는 대부의 아들이지만, 마피아의 길을 가지 않고 엘리트의 길을 가던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미국의 이면 출신이지만, 미국의 표면이 되고자 했던 대부의 열망이었다.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버지는 적에게 피습당해 중상을 입는다. 형 소니와 이탈리아에서 결혼한 처는 적들에게 목숨을 잃는다. 자신이 마피아로 나서서 먼저 폭력을 감행하지 않으면 가족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마저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 이런 상황은 마피아를 증오하던 엘리트 마이클, 아버지의 표현을 따르자면 주지사나 상원의원 명함을 달 수 있었던 마이클이 조직의 후계자가 될 수 밖에 없도록 종용한다. 에서 제임스 코번이 고통스럽게 내뱉은 말이 맞다. "원하는 것과 얻게 되는 것은 다른 것이다."  

 

 

4. 대부2, 3

대부 2편, 3편에서 마피아가 망해도 좋고, 대부의 조직만 망해도 좋다. 다만 마피아나 마이클이 반성하지 않기만을 빈다. 미국의 이면을 대표하는 자들이 반성한다는 것은 이면의 추악함을 드러냄으로써 의의를 획득한 영화의 원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죽어도 좋으니 반성하지만은 마라. 계속 폭력배로 남아주기만을 빈다. 마이클이 매형을 죽였냐는 처의 질문에 태연자약하게 "No"라고 오리발을 내밀던 그 뻔뻔함과 교활함을 그대로 간직하기를 말이다. 말론 브란도도 반성하지 않았다. 의 기타노 다케시처럼 끝까지 악당으로 남기만을 바라며! 

 

 

蛇足2

 

마리오 푸조의 원작소설 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코폴라의 영화 역시 초대박 흥행에 영화사의 빛나는 걸작이 되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소설보다는 영화가 낫다.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소설을 읽고서는 지금처럼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의 는 영화를 먼저 봤다. 그 발상은 흥미로웠지만 영화 자체는 별로였다. 뭐 기억나는 장면이 없다. 나중에 소설을 읽을 때는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소설을 먼저 읽었다면 영화는 전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소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이외의 의미가 영화에는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