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周恩來; 1898~1976)의 생애]

이양자2006.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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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周恩來; 1898~1976)의 생애]


 

 

       [주은래(周恩來; 1898~1976)의 생애]


  절강성 소흥에 살던 주은래의 선조들은 강소성의 회안(淮安)으로 이주했는데 그의 조부 주반룡(周攀龍)은 해주직예주(海州直隸州)의 지주(知州)였다. 주(周)씨 가문은 전통적인 유학자이며 관리계급으로서 몰락해 가는 명문가였다. 주반룡의 둘째아들인 주이능(周貽能)과 청하현(淸河縣) 지현(知縣)이던  만청선(萬靑選)의 딸 만동아(萬冬兒)와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이가 바로 주은래였다.

1898년 3월 5일에 태어난 주은래는 주씨 집안의 장손이었으며 그 이름은 ‘은총이 도래’한다는 뜻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자(字)는 상우(翔宇)였다.

  어린 시절의 주은래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아버지보다는 3명의 어머니들이었다.

생모 만(萬)씨는 기울어져가는 주씨 집안을 혼자 이끌어 간 솔직하고 활달하며 과감한 성품으로 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 한사람은 주은래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더 큰 영향을 끼친 양어머니이자 숙모인 진(陳)씨였다.

진씨는 어린 주은래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녀는 유명한 유학자 가문 출신의 여성으로서 그녀 자신이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으므로 어린 주은래의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어린 은래에게 당시(唐時)와 송사(宋祠)를 가르쳤다.

그리고 주은래의 성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사람은 유모 장씨였다. 유모는 주은래를 매우 귀여워했고, 당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주은래는 분명 아버지보다는 3명의 어머니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주은래가 다섯 살 되던 해에, 그의 생모는 주은래를 포함한 세 아들과 주은래의 양모와 유모를 데리고 그의 친정인 회음의 만(萬)씨 집안에 옮겨가서 살게 되었다. 주은래에게는 이 당시의 생활이 어린 시절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는 외가에서 사촌들과 함께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외할아버지가 쓰던 서재에서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핵으로 서른다섯의 나이로 생모가 죽고 또 1년 후 양어머니 진씨마저 죽음으로써  겨우 10살의 어린 나이에 주은래는 두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겪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회안의 옛 집으로 돌아와 어느 때보다도 가난하고 슬픈 생활을 해야 했다.

 

  주은래가 새로운 세계와 접촉할 기회를 얻은 것은 1910년 봄이었다. 생계초자 유지하기 어려운 사정이었으므로 주은래는 큰 아버지 주이갱(周貽賡)을 따라 만주의 봉천성 은주(銀州)로 가게 되었다. 겨우 12살이던 그는 만주 생활에 잘 적응했다. 그는 만주의 거칠고 척박한 기후에도 훌륭하게 견뎌냈으며, 이는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함양시켜 준 바탕이 되었다. 그 곳에서 동관(동관) 모범학교에 입학하여 그는 최초로 신학문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고 혁명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동관의 모든 이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주은래도 청나라 황실과 만주족의 오랜 풍습인 변발을 잘라버리고 혁명의 대열에 가담했다.

  1913년 주은래는 15세 나이에 큰아버지를 따라 다시 천진으로 이사를 해야 했으므로 천진에 있는 중등교육기관 남개학교에 입학했다.

주은래는 남개중학에 다니는 동안 각 분야에 걸쳐 신식교육을 받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했으며 민주주의와 애국주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그는 학업 성적 뿐만 아니라 과외 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해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고 또한 자신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은 모두 위기에 처한 중화민족을 부흥시키기 위함이란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북경에서는 원세개가 총통이 되어 독재정치를 일삼고 있었으며, 1915년에는 일본의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요구에 굴복하여 21개조항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에 주은래는 공원에서 중국의 민족적 모욕에 강력히 항의하며, “우리 중국인의 뜨거운 피로 오늘의 치욕을 씻을 것이다.”라고 외쳤다.

이듬해 원세개가 스스로 황제가 되었을 때에는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주은래도 다른 젊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의 영향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7년 남개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주은래는 일본의 대학에 유학할 계획을 세웠다. 근대적 학문과 사상을 공부하기 위해 주은래는 일본으로 건너가 이미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남개학교 다닐 때 사귀었던 친구들의 도움으로 도쿄의 동아학원에 들어가 우선 일본어를 배웠다.

그러나 공부보다도 생활고 때문에 더 괴로운 나날이었다. 더구나 당시의 중일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중국인 유학생들의 사기도 극도로 저하되어있었다. 이 무렵 러시아 혁명의 소식은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게 되었다. 주은래 역시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관한 기사에 부쩍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주은래는 조국으로 돌아가 나라의 부흥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정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주은래는 1년 반 동안이나 일본에 머물면서도 대학에 입학은 하지 못했지만 하루 13시간 이상 신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공부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만날 수 있었다.

  주은래의 귀국시점은 5.4운동 발발 직전이었다. 얼마 후 5.4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 1919년 7월, 주은래는 천진의 남개대학에 입학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을 시작했다.

남개중학교 시절의 교장 장백령이 이 대학 총학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주은래는 그의 도움으로 의 주필로 일했다. 주은래는 글을 통하여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침탈과 군벌들의 만행을 비판하고 낡은 제도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고발했다.

그리고 천진에 있는 남녀 학생들의 애국적인 조직들을 통합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오사(覺悟社)》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 즈음 주은래는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될 등영초(鄧潁超)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천진의 제1여자사범학교 학생으로서 천진 여학생애국연맹을 이끄는 지도적인 인물이었으며, 이후 주은래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동지였다.

  당시 일본 상품을 수입해 폭리를 취하던 상인들이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20년 1월 주은래는 5~6천명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를 주도하였으며 곧 체포되었다.

수감된 주은래는 당당하게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그리고 수감생활 중 주은래는 함께 수감된 동지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역설했다. 주은래가 13주 동안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자 언론은 용기있는 그를 지지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동에 감명을 받았다.

 

  1920년 11월, 22살의 주은래는 두 번째 유학길에 올랐다. 근공검학(勤工儉學: 근로유학생)의 일원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는데 등소평, 주덕, 이입삼, 채화삼, 진의 등도 있었다.

주은래는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서 프랑스어 학원에 두 달간 등록했고, 어떤 프랑스 공산주의자에게서 개인 교습도 받았다. 그러나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정규 대학에 등록하지는 못했다. 《공산당선언》《크로포트킨 자서전》등을 열심히 읽었다.

  주은래는 프랑스에 도착한 즉시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입당 권유를 받았을 때 그는 망설였으며 입당 후에도 마르크스주의 교리에 대해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설된 것은 1921년이었으며 이 사실은 곧 프랑스에 있는 중국인들에게도 알려졌다. 주은래도 그 해 중반 무렵, 신생 공산당으로부터 급진정책이 주류를 형성하는데 가담하도록 권유받았고 곧 파리의 공산당 소조의 일원이 되었다.

1922년 3월 주은래는 독일유학이 프랑스보다 생활비가 적게 든다는 이유로 베를린으로 옮겨가 교외에서 방을 얻어 생활했다.

  이 당시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진정으로 귀의하게 된 데에는 절친한 친구 황애(黃愛)의 죽음이 있었다. 천진의 각오사 단원으로 활약하던 황애는 1922년 3월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한 중국 공산당 최초의 순교자였는데, 그 충격으로 주은래는 비탄에 잠겨 버렸다. 결국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초기의 의혹이야 어쨌든, 주은래는 이제 아무런 조건없이 공산주의 활동에 자신의 인생을 던질 각오를 했다.

  주은래는 유럽대륙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공산당과 공산청년동맹의 일에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 점차 유럽의 중국 공산당 내에서 상위직을 맡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당내의 파벌싸움이나 분쟁을 해결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

  이즈음 중국에서는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이 코민테른의 권유로 1923년 국공합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리하여 손문은 1924년 1월 공식적으로 국공합작을 선언했고, 이로써 양당이 힘을 합쳐 북벌을 단행하여 중국을 통일할 계획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4년 동안에 걸친 유럽에서의 활동은 주은래가 마르크스주의를 행동으로 체득하고 이해할 수 있게한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1924년 7월, 주은래는 중국 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귀국하였고 당시 혁명의 중심지이며 손문이 이끄는 국민당의 본거지인 광주에는 11월에 도착했다. 공산당 내에서 그의 직책은 군사부장이었으며, 공산당과 정략적 합작관계를 유지하게 된 국민당을 위해서 일하게 되었다.

  1924년 11월 손문은 국공합작의 산물로 혁명군의 간부양성을 위해 황포(黃浦)에 군관학교를 창설했는데, 주은래는 이 학교의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 학교의 교장은 손문의 신임을 받는 장개석이었다.

주은래는 혁명에 대한 왕성한 투지와 불타는 애국심으로 학교 내에서 정치조직을 결성하고 마르크스주의 전파를 위해 신문을 발행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1925년 3월 중국 혁명의 정점에서 손문이 사망했다. 손문 사망 이후 국민당 내에서는 공산당과의 합작을 두고 이미 좌우파로 갈려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그의 인생에 다시 등영초가 등장하였다. 그녀와는 이미 유럽에 있을 대부터 편지로 사랑을 나눠왔으나 그녀가 공산당 상해 대표로서 이곳 광주에 파견되어 직접적으로 만난 것은 실로 5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은래는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혼했고, 1925년 8월 8일 두 사람은 간단한 결혼식을 올렸다.

 

주은래가 결혼한지 불과 10여일 후,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 요중개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동시에 1926년 1월의 제2차 국민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장개석이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상의 실권을 장악했다.

장개석은 국민당 좌파에 대한 우파의 반감이 높아진 것을 계기로 자신의 세력을 점차 강화했다. 요중개의 암살을 이유로 우파 지도자들을 추방하는 한편, 이번에는 국민당 내의 공산당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26년 3월 장개석은 중산함 사건을 일으켜 이지룡을 즉각 체포하였고 주은래 등 공산당 간부들도 국민당의 요직에서 쫓아냈다. 또한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 왕정위도 장개석의 압력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함에 따라 국민당은 이제 장개석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북방의 군벌들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공산당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장개석은 합작의 지속을 주장하던 주은래를 황포군관학교에 복직시키는 한편 공산당원들에게 정식훈련을 시키는 것도 허용했다.

그리고 북벌이 시작되었을 때, 주은래는 제1군의 정치부 주임으로 해안을 따라 북상해 가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시켜 혁명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7년 초 상해에서는 장개석 군대가 진입하기 전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4월 12일 새벽, 장개석 군대는 중무장을 하고 상해에 입성하여 공산당과 노동자 규찰대에 대해 기습을 가했다.

장개석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공산당 지도자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고자 했으며 5천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들을 학살했다. 잔혹한 백색 테러는 계속되었다. 주은래에게도 현상금 20만 달러와 함께 체포령이 내려졌다. 주은래는 극적으로 상해를 탈출했다.

  약세인 공산당 내에서는 새로이 조성된 현정세 이후의 투쟁방법을 두고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주은래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민당 좌파를 이용하여 장개석에게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은래의 방법도 곧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국민당 좌파 역시 반공으로 기울어져, 그 지도자 왕정위는 7월 14일 반공정책을 결의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후 주은래를 비롯한 많은 공산당원들이 남창으로 이동해 1만 명의 농민군을 조직했다. 이들이 최초의 홍군이었다. 8월 1일, 주은래, 주덕 등의 주도하에 봉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창을 점령한지 3일 만에 우세한 적의 병력에 밀려 패퇴하고 말았다. 비록 실패했으나 8.1 남창봉기는 중국공산당에게는 매우 뜻 깊은 날이 되었다. 1933년 6월 30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이 날을 홍군건군기념일로 삼았다.

  주은래는 홍군의 창설자였으며, 당을 국민당으로부터 독자적인 존재로 만든 공로자였다. 이런 점은 확실히 주은래를 다른 동지들보다 돋보이게 했다. 더구나 야심이 없고 성실하며 온건한 그의 성품은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다.

  1928년 5월 중국 공산당 6차 전국대표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주은래는 당 조직부장에 선출되어 이입삼(李立三)과 함께 당의 주요 실무를 나누어 맡게 되었다.

주은래는 주로 군사전략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 이입삼과 의견대립을 보였는데, 이입삼은 대도시들을 점령한다는 계획 하에 팽덕회와 모택동 등으로 하여금 장사(長沙)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모택동은 장사 공격에 실패했고, 당중앙의 승인도 없이 정강산으로 후퇴하여 당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국민당과 군벌들의 계속되는 공격을 훌륭히 극복하면서 농민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근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주은래가 그런 모택동의 전략을 처음부터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까지 당중앙의 모택동에 대한 비판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했다.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에도 계속 북벌을 단행하여 중국의 중심부를 평정하는데 성공한 장개석은 1930년부터 공격의 초점을 공산당으로 돌렸다. “일본은 피부병에 불과하나 공산당은 심장병이다.”라고 생각한 장개석은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를 내세워 마침내 전병력을 동원하여 1차, 2차, 3차에 걸쳐 공산당을 공격했다.

이를 견뎌낸 공산당을 4차, 5차에 걸쳐 100만명을 동원하여 장개석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폰 젝트 장군을 군사고문으로 맞아들여 새로운 전략으로써, 토치카와 도로망을 구축하는 한편 홍군 근거지에 대한 철저한 경제봉쇄를 병행했다. 홍군 역시 모스크바로부터 파견된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으로 하여금 직접 전선에서 작전을 지휘케 하였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지자 주은래와 모택동, 주덕 그리고 오토 브라운은 북상항일을 주장하며 10월 16일 홍군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1만 2천 킬로미터(2만5천리)의 정처없는 패주행군에 들어갔다.

그것은 만 1년 동안에 걸친 고난의 길이었다. 광동, 호남, 귀주 등 12개의 성을 거치는 동안 그들 일행은 17개의 산과 18개의 강을 건너고 사막과 늪지대를 지나야했다.

  대장정 3개월만인 1935년 1월 초, 준의(遵義)에서 열린 정치국확대회의는 공산당의 혁명운동 지도권을 둘러싼 중요한 결정이 내려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여기서 모택동은 당 지도부의 군사전략을 실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당 지도부의 박고(博古; 진방헌)가 모택동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모택동과 당 지도부의 주장은 팽팽하게 대립하였고, 마지막으로 주은래가 발언할 차례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실수를 솔직하게 자인했다. 그는 책임을 깨끗이 인정하여 군사위원회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한편 모택동 동지에게 홍군의 지휘권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모택동은 이 시점부터 당과 군에 대한 지도권을 장악했다. 주은래는 이제 모택동과 서열이 바뀌어 그의 뒤에서 영원한 참모역에 머물렀다. 오랜 정치적 경험을 통해서 그는 개인적인 야심과 파당적 분열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주은래가 보여주었던, 온몸을 던지는 희생과 노력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한 중국의 단결을 위해서도 발휘되었다.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가 된 것은 1936년 12월 12일의 서안(西安)사변이었다. 장학량과 양호성에 의해 장개석이 납치된 서안사건에서 공산당 측 조정자로 서안에 온 주은래는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공합작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설명했고 이에 감동받은 장개석은 주은래에게 “상세한 협상을 위해 남경으로 오라”고 말했으며 서명은 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약속은 지킨다(言必信行必果)”라고 했다.

  장개석은 주은래와의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으나 국공합작을 위한 양측의 절충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7년 7월 7일, 마침 북경 근처의 노구교에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 총격전(노구교사건)이 벌어지고 급기야 중.일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됨에 따라 9월에 국․공 양측은 전격적으로 합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국공합작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중심으로 중국 내의 모든 세력들을 단결시킨 거국적인 항일민족통일전선이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 여름 이후 태평양 전역에서 계속된 일본의 패배는 중일전쟁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미국의 지원을 받는 중국군은 상대적으로 세력을 강화해 가고 있었다.

  합작기간 동안 주은래는 공산당 외교 책임자로서 연안과 중경을 왕래하면서 모택동과 장개석 간의 가교역할을 했다. 그는 모택동의 성실한 ‘참모’이자 중국 혁명의 유능한 ‘조역’이었다.

1945년 8월 중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중일전쟁을 승리로 끝냈으나 평화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공양측의 상호불신은 항일전 와중에도 무력충돌을 낳았지만, 전후 미국정부와 주은래의 중재교섭에도 결국 국공내전을 피할 수 없었다.

장개석 군대가 최신식의 미제 무기를 보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홍군도 일본군이 보유하던 상당량의 무기를 노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위한 준비는 충분했다. 반면에 국민당의 군대는 오랫동안의 전쟁으로 지쳐서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으며, 지휘관들 역시 극도로 부패하여 공산당과 싸울 의욕도 없었다. 홍군은 곳곳에서 승승장구하여 놀랍게도 49년 3월까지는 북경과 천진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5월에는 양자강을 도하하여 총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을 공략하였고 결국 그들을 대만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1949년 10월 1일, 신중국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새로운 공화국에서 주은래가 맡은 일은 정무원 총리와 외교부장이라는 막중한 임무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이 나라의 살림살이를 꾸려나가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만 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중국군의 참전은 경제건설 초창기에 있던 중국에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U.N에 의해 침략국으로 낙인찍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상태에 빠진 중국으로서는 더욱 커다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소련의 자본과 기술의 원조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던 중국은 이제 심각한 대소(對蘇)의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중국에 대한 원조는 당시 대외적으로 알려진 만큼 그렇게 우호적인 조건도 아니었으며, 그렇게 적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은 원조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으며,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불만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중소관계의 분열을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사실 양국간 갈등의 불씨는 이미 이 당시부터 싹트고 있었다.

  주은래는 50대의 나이로 하루에 20시간을 일하고, 모자라는 잠은 자동차 안에서 해결하기가 일쑤여서 그의 아내 등영초도 말릴 수 없어서 두 손을 들 정도였다. 그는 궂은 일을 도맡아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가정의 주부’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동시에 나라 밖에서의 그는 당과 모택동의 충직한 심부름꾼이었다.

  유럽 각국의 외교관들과 정치가들은 낯설고 이질적인 동양의 대국에서 온 주은래에게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주은래의 세련되고 여유있는 매너와 함께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과 외국어 실력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스탈린의 장례식에서 주은래는 일약 세계 외교무대의 새로운 인물로 부상했다.

 

1954년 6월 말 제네바 회담이 휴회에 들어갔을 대 주은래는 인도와 미얀마를 방문했고 특히 인도 수상 네루와 가진 회담에서 유명한 「평화공존 5원칙」을 천명함으로써,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중립주의를 확대하기위한 발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1955년 4월에는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된 회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반둥 회의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29개국이 참가했는데 결국 주은래의 노력으로 네루를 비롯한 많은 나라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주은래는 중국의 발전을 위해, 공산주의자가 아니거나 당의 정책에 의견을 달리하더라도 망명 지식인들과 과학자들에게 귀국하여 공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은 곧 모택동의 ‘백화제방(百花薺放)’운동의 전주곡이었다.

그러나 백화제방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던 많은 지식인들은 색출되어 박해를 받게 되었고, 주은래는 이들에 대한 처벌을 극소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모택동과 유소기는 주은래가 이끄는 기술관료들이 주로 소련 고문관 및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8년간이나 경제를 이끌어 왔으나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보고, 중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그것이 이른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었다.

모택동은 주은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전에 공산주의의 기반을 확고히 다져 놓겠다는 조바심으로 인해 무리한 목표를 세웠다. 결국 지나치게 높은 목표는 모택동을 궁지로 말았으며 그의 위신과 권위는 크게 실추되어 유소기에게 국가주석 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다.

  1950년대 후반의 중국은 국내정책에서 뿐만 아니라 대외정책에서도 급격히 좌경 노선으로 기울어, 중국의 외교관계는 경직되어 갔다. 1

956년의 스탈린 격하운동은 중소 양국간의 이념논쟁을 몰고 왔고, 서로 상대방을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로 비방하는 사태로까지 발전되었다.

  한편 주은래는 대약진 운동으로 초래된 생산성 하락을 만회하고 중국의 낙후된 경제를 조속히 회복하기 위해 1959년 초 다시 소련 방문에 나섰으나 소련은 국방신기술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한편 핵폭탄 제조계획에 대한 원조도 취소했다. 더구나 소련은 1960년 초 중국에 파견된 모든 소련인 기술자들을 철수시킴으로써 중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62년 중국과 인도차이나의 국경분쟁과 쿠바 미사일 위기는 중소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중인전쟁(中印戰爭)에서 소련은 인도차이나의 입장을 지지했고 쿠바 위기 이후 미국과의 급속한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중국과의 전략적 입장 차이를 명백히 했다.

 

중인전쟁 이후 실추된 중국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 중국은 제3세계에 대한 외교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1963년 12월, 주은래는 75일간에 걸쳐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13개 국가와 동유럽의 알바니아를 순방하는 외교 대장정의 길에 올랐다.

미얀마, 파키스탄, 스리랑카를 방문하는 마라톤 순방외교를 전개했다.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 1965년까지 주은래의 노력으로 중국은 무려 49개국과 정식 국교를 수립했으며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도 격상될 수 있었다.

주은래의 외교는 융통성 있고 기민하면서도 예리함과 온화함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실리를 중시하면서도 언제나 솔직했다.

  1964년 말에 소련에서는 흐루시초프가 실각되고 새로운 정치권이 출범했으나 브레즈네프와 코시긴 등 소련의 새 지도부는 중국에 추호의 양보도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중소관계는 전혀 개선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의 관계는 오히려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대외적 긴장의 국면에서 이번에는 중국 국내에서 모택동과 유소기 간의 정치적 긴장이 심화되고 있었다. 양자간의 대립은 이미 1963년부터 인민공사(人民公社) 정책과 농촌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둘러싸고 현실화되어 1964년에는 본격적인 암투가 시작되었다. 주은래는 당내의 갈등에 직접 개입하기 보다는 일단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모택동과 유소기 간의 대립은 비단 두 사람 사이의 권력투쟁의 측면만을 띠고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의 혁명과 사상을 우선하는 파와 실용주의적인 테크노크래트 간의 대립이기도 했다.

실용주의자는 수정주의자로 매도되었다. 이같은 배타적인 모택동의 태도는 1964년 10월 중국의 ‘자력갱생’적인 원폭제조에 크게 자신감을 얻은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무력개입의 증대에 자극 받은 것이기도 했다. 

 

  1966년에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란 기치 아래 마침내 일대 정당운동(整黨運動)이 벌어져 유소기와 등소평 등이 주요 공격대상이 되었다. 이에 모택동의 신임을 받고 있는 국방부장 임표와 홍위병들은 당과 정부에 반동적인 수정주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초 주은래도 유소기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긴 했으나, 홍위병들의 무차별적인 파괴 책동에 대해서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고 나섰다.

  1966년 가을, 그는 홍위병의 대집단이 북경으로 밀려오는 것을 저지하라는 훈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그는 “중국은 자네들이 통치하고 있는가? 아니면 모주석이 다스리고 있는가?”라고 엄중하게 나무랐다.

또한 1967년 봄에도 주은래는 홍위병들에 대해 “업무에 정통한 간부는 당의 보배다. 모주석도 그들에 대한 투쟁이 지나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고 꾸짖었다.

  1968년 8월 이후 문화대혁명의 타도 대상은 국내의 수정주의뿐만 아니라 국외의 수정주의 세력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곧 수정주의와 소련에 대한 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중소관계도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양국의 갈등은 급기야 논쟁의 수준을 넘어 무력충돌(진보도사건)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내 정정(政情)이 혼란스러운 데다가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른 상태에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초강대국과 동시에 적대관계에 돌입한다는 것은 중국 지도자들에게 일대 위기의식을 심어주었다.

  악화일로를 향해 치달아왔던 중국의 대외관계는 1969년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에 의해 완화될 기미를 보였다.

그는 중국을 더 이상 고립국으로 방치해 둔다면 결코 세계평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미국으로서도 아시아 문제에 있어서 중국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제7함대에 의한 대만해협 초계활동을 축소하면서 중국에 관계개선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양국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71년 4월 중국은 일본에서 개최된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미국 선수단을 중국으로 초청하였다. 이 자리에서 주은래는 “미국 선수들의 중국방문은 양국간의 우호관계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었다”고 말하여 본격적인 외교관계의 재개를 암시했다.

이른바 핑퐁외교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후 불과 3개월만인 7월 중국은 닉슨 대통령의 방중 초청을 발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그 해 가을 중국은  UN에 가입하였다.

 

  1970년대 초의 변화는 대외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정치무대에서도 나타났다. 문혁기간 중 모택동은 국방부장 임표의 힘을 빌려 유소기의 세력을 제압했고, 그 와중에 임표는 당내 서열 2위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모택동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임표와 모택동의 격돌은 불가피한 운명처럼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 1971년 9월 중국에서는 이상한 현상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모든 군용기와 민간항공기의 비행이 일체 금지된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임표가 6월 3일 이후로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 당국은 6개월이 지난 이듬해 봄에야 그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내용인즉 임표와 그 일파가 모택동 암살을 포함한 권력 탈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