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바/라/기 ---- 5막 2장

박대용2006.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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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바/라/기 ---- 5막 2장

 

연어의 여행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막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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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방학이 되었다.

  2학년 1학기 성적표를 받아드니 비참했다. 56명중에서 43등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최악의 성적이었다.

  "무슨 수를 써야지, 이래 가지고 대학 가겠니?"

  좀처럼 성적 가지고 간섭을 않던 시은이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심각하게 말했다.

  "방학 동안에 사설 독서실이라도 다닐까 봐."

  "성적만 올라간다면 더한 데라도 다녀야지."

  시은이가 순순히 승낙했다. 

  정우는 동네 사거리에 있는 사설 독서실을 끊었다. 집에서는 밥만 먹고 잠도 도서관에서 자며 하루의 대부분을 도서실에서 보냈다.

  갑갑한 집에서 나오면 공부가 잘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머리가 지끈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거기다가 시도 때도 없이 세상에 대한 짜증과 분노가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서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독서실은 건물 맨 위층인 4층에 있었는데 그 위는 옥상이었다. 정우는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옥상으로 올라가서 담배를 피웠다.

  독서실에는 중학교 동창도 있었고, 고등학교 동창도 있었다. 정우는 그들과 담배를 같이 피우다가 더러는 옥상 귀퉁이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지현을 만난 것은 독서실에서 생활한 지 열흘쯤 지나서였다.

  정우는 공부가 하도 안 돼서 새벽에 공부를 해 보려고 초저녁에 잠을 잤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영어책을 펼쳤는데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쥐고 있는 듯 가슴이 답답했다.

  기분 전환이나 하고 와서 공부를 하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해가 뜨기 바로 직전이어서 도시는 엷은 어둠에 뒤덮여 있었다. 각종 소리만이 밤길을 걷다가 돌멩이에 걸린 듯이 선명하게 튀어 올랐다.

  정우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서 가슴속처럼 어둡고 막막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옥상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듯한 기척이 났지만 돌아보기도 귀찮아서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정우지?"

  차분한 여자의 음성이 아주 가까이서 들려 왔다.

  정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보았다. 얼굴이 주먹만한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도서관을 드나들며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아이였다.

  "나는 서지현이라고 해. 너하고 같은 2학년이야."

  그녀는 불쑥 자기 소개를 하고 나서 싱긋 웃었다.

  정우는 당혹스러웠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한번도 맡아 본적이 없는 향긋한 냄새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너, 나하고 사귀어 보지 않을래?"

  지현이 한발 다가서며 속삭였다.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어서 그녀의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정우는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이 목련꽃처럼 환해졌다.

  "난 너 같은 귀공자 스타일이 좋아. 아랍의 왕자 같은‥‥‥ 모래 폭풍을 피해서 하얀 천으로 머리를 감고‥‥‥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을 닮은‥‥‥ ."

  지현이 영혼까지 꿰뚫을 것 같은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정우가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세계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나, 이제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어. 널 만났으니‥‥‥  더 이상 사막을 배회하지 않아도 될 거야."

  지현이 손을 내밀었다.

  정우는 그녀의 하얀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 순간, 기존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는 바로, 그녀였다.

  "저녁때 우리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 문화 도시를 만들려면 우리처럼 바쁜 사람들도 가끔씩은 문화 활동에 참여해 줘야 하거든."

  "좋아."

  "그럼 일곱 시 반에 피카다리 앞에서 보자. 표는 내가 예매해 놓을게."

  지현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왔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옥상에서 떠나가고 나자 비로소 해가 솟았다. 태양은 오늘은 어김없이 치솟았지만 어제 보았던 그 태양이 아니었다.

  정우는 독서실에다 가방만 던져 놓고 매일 지현과 돌아다녔다. 영화도 보았고 연극도 보았으며, 놀이공원에 가서 놀이기구도 탔고 기차 타고 야외로 놀러가기도 했다.

  첫키스는 만난 지 일주일만에 했다.

  대성리에 가서 배를 빌려 타고 강 한가운데로 나갔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현이 다가왔다. 정우는 흔들리는 배에서 지현과 키스를 했다. 키스를 하는 순간, 보트가 지나가면서 배가 엎어질 듯이 심하게 흔들렸다. 배가 흔들리기 때문인지 키스 자체가 그런 건지 키스를 하고 나니 몹시도 어지러웠다.

  날짜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사랑은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급속도로 익어 갔다. 언제부턴가 마음속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그녀가 보고 싶었고, 길을 걸을 때도 보고 싶었고, 책을 펼쳐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머릿속은 온통 그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우리, 가로등불이 근무를 잘 서나, 밤하늘의 별들은 졸고 있지 않나 순찰 돌지 않을래?"

  하루는 밤 늦은 시간에 옥상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지현이 나타나서 말했다. 정어는 그녀처럼 기발한 말을 할 자신이 없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밤새 걸어서 이 도시의 끝까지 가 보고 싶어."

  거리로 나오자 지현이 팔짱을 꼈다.

  그녀의 보드라운 젖가슴이 지긋이 팔을 압박해 왔다.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오르며 충만감이 들었다.

  정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끝이 어디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서둘 필요는 없었다.

  이대부속병원 담장을 끼고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갔다. 어둠만을 골라 밟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 왔다.

  "너, 혹시‥‥‥ ."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정우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시은이가 손수레를 끌고 언덕길을 올라오다가 도로변에 멈춰 서 있었다.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손수레에는 팔다 남은 모자가 수북했다. 시은이는 손수레 손잡이에 걸터앉아 목에 걸고 있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방울을 닦았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지현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대로 말하기는 죽기보다 싫었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자니 시은이가 몹시 낙담할 것 같았다.

  시은이와 지현의 시선이 동시에 날아와 꽂혔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천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시은이가 다시 수레를 끌고 언덕을 힘겹게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정우는 고개를 돌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달려가서 수레를 밀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지현에게 들키기 전에 어서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아는 여자야?"

  지현이 멀어져 가는 수레를 돌아보며 다시금 물었다.

  "아니‥‥‥ ."

  "대개 기분 나쁜 여자네. 빤히 쳐다보고‥‥‥ ."

  지현이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정우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끼익, 끼익!'하고, 수레축이 바퀴를 돌릴 때 나는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시은이는 소리와 함께 점점 멀어져 갔다. 마음 한 자락이 수레축과 바퀴 사이에 끼어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강변에 찍힌 새의 발자국 만큼이나 무수한 입맞춤
아기 살결같이 부드러운 입맞춤
타는 모래처럼 목마른 입맞춤
유리 조각을 채우는 듯 아픈 입맞춤
다른 곳에서 서로 그리워하는 나무가 있어
어느 날 만나 포개어진다면 이럴까
가지 뻗은 곳과 가지 뻗은 곳이
옹이 진 곳과 옹이 진 곳이
그 나뭇잎 한 잎 한 잎과
잔가지 하나하나 잔뿌리 하나하나까지
내 몸과 꼭 같이 구부러지는 이 느낌
내 몸이 내 몸의 꿈을 끌어안은 것 같은 완전한 겹침

- 전경린,『사막의 달: 염소를 모는 여자』中 -

 

 

 

[KIES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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