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올 때 마다 조마조마 했더랬다. 1년전 송파 재활용센터에서 친구가 사 준 식탁은 의자가 세 개 였고, 당시에 두 식구인데다 책상의자도 없던 나는 딱이라 생각하고 그것으로 선물받았는데, 아뿔싸! 얼마 지나지 않아 앞뒤로 그네를 타더니 점점 바이킹 수준! 그리고 마침내 방금 아작! 나는 뒤집어지다가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반대쪽으로 넘어져;;;;; 어쨌든 그래도 다른 이가 남의 집에 왔다가 의자가 부서지며 넘어진다는 것은,, 그러고는 아픈 건 자신인데, 부서진 의자에 대해 미안해 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내가 그런 상황의 빌미를 낳는 어떤 공간의 호스트라면... 우웈, 상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부서진 의자.. 나무는 나무 그대로 인데, 기능, 도구적 소모를 다했다. 지난 일년간 나를 지탱해주고 나를 찾아온 이들을 업어준. 그런데도 나는 마당이 있다면 이 녀석을 화장하며 나 역시 잠시동안 따뜻할 텐데, 하는 극악무도한 상상을 하고 있다. 방에서 불 피웠다간.. ;;;; 어쩌면 인간관계의 선도 그러할지도 모른다. 무관할 것 같은 이들은 빨리빨리 쳐내게 된다. 이 생에서 그닥 많은 업을 쌓고 싶지 않아서다. 애완동물도, 식물도, 그렇게 매 순간 내게 업을 요구하는 것들은 대체로 관계를 애초에 맺지 않는 쪽이다. 하지만 완전히 관계를 맺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나의 삶의 양식이 낯설고 다소 충격적이지만 누군가에게 순수한 호기심을 낳을 때도 있다. 심지어 누군가의 손의 아름다움에 불현듯 빠져들게 되기도 한다. 그런 첫인상의 단계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걸러내어진다. 그리고 2단계. 자주 만나면서 겹치기 시나브로 내 일상에 점점 더 들어오게 되는 단계. 할 얘기가 너무 많은 단계. 서양에서는 이 단계에서부터 막역해지지만, 한국에서는 택도 없이 꿋꿋이 예절발라야 하는 단계 3단계, 편안하게 누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단계. 경계를 풀고 몸에 힘을 빼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단계. 오랜, 지나온 이야기들에서 지금 실루엣의 단계를 되찾아주는 계기를 주고받는 관계. 그러면서 Find who you are하는 단계. 4단계. 그 혹은 그녀의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단계. 그래서 그 두려움에 맞서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지는 단계. 그러나 그렇게 찾아냈다고 믿었던 자신이 그 역할에 사실은 맞지 않고, 그저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단계. 아직 제 자리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관계의 톱니바퀴가 그동안 얼마나 허방하게 굴러갔는지를 알고 실망하는 단계. 이 때에 많은 관계가 끝장난다. 5단계. 하지만 위기가 지나면,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가 갔던 그 자리를 나 역시 추체험으로 가, 그 자리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보이고 느껴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단계. 나의 역할이 다른 것임을 깨닫는 단계. 어찌되었던 무너지던 의미들이 다시 형성되고 다른 차원으로 접어드는 단계 그 혹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대상에 대해 깊은 연대로 함께 대적하는 단계. 그녀가 아까워지고, 그녀 자신이 꺼려하며 서성인 불안에 대해 일정한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신뢰의 단계. 6단계. 그, 그녀를 온전히 제 갈길로 보낼 수 있는 단계. 불모였던 인간의 삶에 의미가 생기고, 지금의 세계는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사잇길의 의미를 주고 간 그, 혹은 그녀의 증식의 알리바이에 깊이 고마워하는 단계. (그, 혹은 그녀가 알리바이란 그 혹은 그녀역시 처음부터 의도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의 의도가 처음부터 있고 그 의도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그런 것을 누군가가 흉내낸다면-그것이 흉내내어질 수 있고, 흉내만 내어도 사람들에게 맹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그것은 정말 위험한 짓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 : 사랑한다는 말은 다른 단계에서 하는 것은 반칙이고, 언제나 김새는 짓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튼 주제는 지금 세상에 방에서 불 피울 순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란 거다. 저마다의 모니터를 머리에 얹고서 그것만 바라보느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라는 거다. 지금은 사랑불능의 시대 가장 큰 문제는 삶의 속도가 사람마다 틀려져버렸다는 것. 나는 이제 Full-time으로 occupying하는 사람과는 만나지 않으련다. 그들은 내게 너무 빠르고 꽉차 있다. 그들은 어느새 느린 것들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짐이 될 것들은 버리면서 더 빠른 속도로 가버린다. 나는 빠르게 떠나는 고속도로의 삶을 살다가 몇 해전에 내렸다. 그리고 걷기 시작하였는데, 그 방식은 잡초의 전략같은 것이었다. 뿌리가 내리면 그 다음 스텝을 밟는. 많은 이들은 나의 외모와 말투때문에, 내가 너무 빠르다고 오해하지만, 사실 내가 너무 느리고, 자신들 생각보다 놀지 않기 때문에 나를 떠난다. 나에게 놀러와, 나에게서 자신의 스트레스나 풀기를 바랬다가 내가 느리고 심각한 인간이란 것을 알면 사래를 치며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묻고 싶다. 어떻게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한마디 할 말이 없는지? 왜 쓰지 않는지? 책을 읽고 느낀 것에 대해서 음악을 듣고 느낀 것에 대해서 그림을 보고 느낀 것에 대해서 귀하게 나눈 대화에 대해서 그 모든 순간들에 대해서.. 후.. 나는 나무가 병들어 노랗고 붉게 쓰러져 가는 사이를 리얼타임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의 속도를 사는 자, 그런 나무(종이)에 도저히 담아둘 수 없어 토하듯 써낸 이야기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 포크음악을 나와 함께 듣는 자, 나를 노래하게 하는 자, 내가 노래를 하면 나를 떠나지 않는 자, 걸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자와 연을 맺고 싶다. 함께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했다가 그들은 갑자기 자신의 '내일'을 위해 '오늘'을 버린다. '내일'은 없는데도, 있다는 환상을 빠르게 쫓아가는 사이 실재의 남겨진 이 공간에서 나와 나의 사물들의 오늘은 부식된다. 실재의 시간을 새기고 있는 것은 나의 의자였던 것이다. 나는 의자가 필요하다고, 실재의 부식에 관해 S.O.S싸인을 보냈었다. 함께 하는 동안에는 새 것으로 교체하고 싶지 않았다. 새 것들이 나의 공간을 기웃거리지 못하게 하였다. 관계의 새알이 부화하려는 때에는 새 것이 자꾸 들어오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미개는 다른 체취가 묻은 새끼를 물어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의자를 사지 않는다. 당신의 의자는 당신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 나와 당신이 앉았던 의자, 나와 당신이 살았던 근거 하나가 부서졌다. 모든 것은 파괴되어 조각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부서진 의자'에 대해 글을 쓴다. 이런 기록으로라도 남겨야곘기에. 이렇게라도 당신과의 시간이 몽창 다 미끄러지지 않고 그 명개먼지 한 톨만큼이나라 남아 삶의 근거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스토리를 살리지 못하면 우리는 정말 폭력적이 되고 만다. 글을 쓰는 것,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시간을 몸에 새기는 것이다. 그게 빨리 될리 없지만, 허방하게 하다마다 해서 더욱 되지 않는다. 손가락을 며칠만 놀려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도록 우리 몸의 관성은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제 몸의 보수성을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겹싸고, 규범이라는 제도적인 자기보호장치까지 입고 와서 함께 다른 곳으로 가 다른 옷을 입어 볼 수는 없다. 새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 끝내야 할 것은 체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관성이지, 우리들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밖은 지금 너무 추우니까 며칠 더 방에서 주검을 모시다가 삼일장을 치룰 예정. 너 없이 네가 앉은 의자와 함께. 나머지 두 의자 역시 거의 골로 가시는 노인네 수준인데.. 머, 새들이 페루에 가 죽듯, 내게 와서 죽어라, 의자들아. 내가 쓴 시와 노래들이 온통 나무들, 꽃들의 무덤이 아니었던가!
부서진 의자
사람들이 올 때 마다 조마조마 했더랬다.
1년전 송파 재활용센터에서 친구가 사 준 식탁은 의자가 세 개 였고,
당시에 두 식구인데다 책상의자도 없던 나는 딱이라 생각하고 그것으로 선물받았는데,
아뿔싸!
얼마 지나지 않아 앞뒤로 그네를 타더니
점점 바이킹 수준!
그리고 마침내 방금 아작!
나는 뒤집어지다가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반대쪽으로 넘어져;;;;;
어쨌든 그래도 다른 이가 남의 집에 왔다가 의자가 부서지며 넘어진다는 것은,,
그러고는 아픈 건 자신인데, 부서진 의자에 대해 미안해 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내가 그런 상황의 빌미를 낳는 어떤 공간의 호스트라면...
우웈, 상상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부서진 의자..
나무는 나무 그대로 인데, 기능, 도구적 소모를 다했다.
지난 일년간 나를 지탱해주고 나를 찾아온 이들을 업어준.
그런데도 나는 마당이 있다면 이 녀석을 화장하며 나 역시 잠시동안 따뜻할 텐데, 하는
극악무도한 상상을 하고 있다.
방에서 불 피웠다간.. ;;;;
어쩌면 인간관계의 선도 그러할지도 모른다.
무관할 것 같은 이들은 빨리빨리 쳐내게 된다.
이 생에서 그닥 많은 업을 쌓고 싶지 않아서다.
애완동물도, 식물도, 그렇게 매 순간 내게 업을 요구하는 것들은 대체로 관계를 애초에 맺지 않는 쪽이다.
하지만 완전히 관계를 맺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나의 삶의 양식이 낯설고 다소 충격적이지만 누군가에게 순수한 호기심을 낳을 때도 있다.
심지어 누군가의 손의 아름다움에 불현듯 빠져들게 되기도 한다.
그런 첫인상의 단계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걸러내어진다.
그리고 2단계. 자주 만나면서 겹치기
시나브로 내 일상에 점점 더 들어오게 되는 단계.
할 얘기가 너무 많은 단계.
서양에서는 이 단계에서부터 막역해지지만, 한국에서는 택도 없이 꿋꿋이 예절발라야 하는 단계
3단계, 편안하게 누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단계.
경계를 풀고 몸에 힘을 빼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단계.
오랜, 지나온 이야기들에서 지금 실루엣의 단계를 되찾아주는 계기를 주고받는 관계.
그러면서 Find who you are하는 단계.
4단계. 그 혹은 그녀의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단계.
그래서 그 두려움에 맞서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지는 단계.
그러나 그렇게 찾아냈다고 믿었던 자신이 그 역할에 사실은 맞지 않고, 그저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단계.
아직 제 자리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관계의 톱니바퀴가 그동안 얼마나 허방하게 굴러갔는지를 알고 실망하는 단계.
이 때에 많은 관계가 끝장난다.
5단계. 하지만 위기가 지나면,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가 갔던 그 자리를 나 역시 추체험으로 가, 그 자리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보이고 느껴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단계.
나의 역할이 다른 것임을 깨닫는 단계. 어찌되었던 무너지던 의미들이 다시 형성되고 다른 차원으로 접어드는 단계
그 혹은 그녀가 두려워하는 대상에 대해 깊은 연대로 함께 대적하는 단계.
그녀가 아까워지고, 그녀 자신이 꺼려하며 서성인 불안에 대해 일정한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신뢰의 단계.
6단계. 그, 그녀를 온전히 제 갈길로 보낼 수 있는 단계.
불모였던 인간의 삶에 의미가 생기고, 지금의 세계는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사잇길의 의미를 주고 간
그, 혹은 그녀의 증식의 알리바이에 깊이 고마워하는 단계.
(그, 혹은 그녀가 알리바이란 그 혹은 그녀역시 처음부터 의도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의 의도가 처음부터 있고 그 의도대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그런 것을 누군가가 흉내낸다면-그것이 흉내내어질 수 있고, 흉내만 내어도 사람들에게 맹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그것은 정말 위험한 짓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 : 사랑한다는 말은 다른 단계에서 하는 것은 반칙이고, 언제나 김새는 짓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튼 주제는 지금 세상에 방에서 불 피울 순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란 거다.
저마다의 모니터를 머리에 얹고서 그것만 바라보느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라는 거다.
지금은 사랑불능의 시대
가장 큰 문제는 삶의 속도가 사람마다 틀려져버렸다는 것.
나는 이제 Full-time으로 occupying하는 사람과는 만나지 않으련다. 그들은 내게 너무 빠르고 꽉차 있다.
그들은 어느새 느린 것들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짐이 될 것들은 버리면서 더 빠른 속도로 가버린다.
나는 빠르게 떠나는 고속도로의 삶을 살다가 몇 해전에 내렸다.
그리고 걷기 시작하였는데, 그 방식은 잡초의 전략같은 것이었다.
뿌리가 내리면 그 다음 스텝을 밟는.
많은 이들은 나의 외모와 말투때문에, 내가 너무 빠르다고 오해하지만,
사실 내가 너무 느리고, 자신들 생각보다 놀지 않기 때문에 나를 떠난다.
나에게 놀러와, 나에게서 자신의 스트레스나 풀기를 바랬다가
내가 느리고 심각한 인간이란 것을 알면 사래를 치며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묻고 싶다.
어떻게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한마디 할 말이 없는지?
왜 쓰지 않는지?
책을 읽고 느낀 것에 대해서
음악을 듣고 느낀 것에 대해서
그림을 보고 느낀 것에 대해서
귀하게 나눈 대화에 대해서
그 모든 순간들에 대해서..
후..
나는 나무가 병들어 노랗고 붉게 쓰러져 가는 사이를 리얼타임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의 속도를 사는 자,
그런 나무(종이)에 도저히 담아둘 수 없어 토하듯 써낸 이야기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
포크음악을 나와 함께 듣는 자,
나를 노래하게 하는 자,
내가 노래를 하면 나를 떠나지 않는 자,
걸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자와 연을 맺고 싶다.
함께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했다가 그들은 갑자기 자신의 '내일'을 위해 '오늘'을 버린다.
'내일'은 없는데도, 있다는 환상을 빠르게 쫓아가는 사이
실재의 남겨진 이 공간에서 나와 나의 사물들의 오늘은 부식된다.
실재의 시간을 새기고 있는 것은 나의 의자였던 것이다.
나는 의자가 필요하다고, 실재의 부식에 관해 S.O.S싸인을 보냈었다.
함께 하는 동안에는 새 것으로 교체하고 싶지 않았다.
새 것들이 나의 공간을 기웃거리지 못하게 하였다.
관계의 새알이 부화하려는 때에는 새 것이 자꾸 들어오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미개는 다른 체취가 묻은 새끼를 물어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의 의자를 사지 않는다. 당신의 의자는 당신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 나와 당신이 앉았던 의자,
나와 당신이 살았던 근거 하나가 부서졌다.
모든 것은 파괴되어 조각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부서진 의자'에 대해 글을 쓴다. 이런 기록으로라도 남겨야곘기에.
이렇게라도 당신과의 시간이 몽창 다 미끄러지지 않고
그 명개먼지 한 톨만큼이나라 남아 삶의 근거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스토리를 살리지 못하면 우리는 정말 폭력적이 되고 만다.
글을 쓰는 것,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시간을 몸에 새기는 것이다.
그게 빨리 될리 없지만, 허방하게 하다마다 해서 더욱 되지 않는다.
손가락을 며칠만 놀려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도록
우리 몸의 관성은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제 몸의 보수성을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겹싸고,
규범이라는 제도적인 자기보호장치까지 입고 와서
함께 다른 곳으로 가 다른 옷을 입어 볼 수는 없다.
새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
끝내야 할 것은 체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관성이지,
우리들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밖은 지금 너무 추우니까 며칠 더 방에서 주검을 모시다가
삼일장을 치룰 예정.
너 없이 네가 앉은 의자와 함께.
나머지 두 의자 역시 거의 골로 가시는 노인네 수준인데..
머, 새들이 페루에 가 죽듯,
내게 와서 죽어라, 의자들아.
내가 쓴 시와 노래들이 온통 나무들, 꽃들의 무덤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