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공(公)과 심프슨 부인. 세기의 사랑 나로 하여금 왕위를 버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점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내가 왕세자로서 그리고 최근에는 왕으로서 25년간 봉사하려고 노력한 우리나라 대영제국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는것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뒷받침 없이 왕으로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깨달았다는 것을 여러분께서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내린 결정은 오직 내가 혼자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주기 바랍니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이임사(1936년 12월11일)《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무거운 책임을 이행해 나가기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으며…》 "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 sibility…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연설의 배경]
1936년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지 1년이 채 안되어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王位(왕위)를 내놓는다. 당시 영국법상 이혼한 여인이 왕비가 되는 것을 금했기 때문. 여기서 소개하는 이 연설은 그가 1936년 12월 전국 방송으로 발표한 연설로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남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계기가 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구절로는《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없이는 나는 왕으로서 내가 뜻하는 대로 더 이상 지탱해 나갈 수 없다》고 한 부분이 꼽히고 있다.
에드워드 국왕으로 하여금 사랑을 위해 왕위까지 내어놓게 한 심슨부인은 1927년 미국해군 소위와 이혼한 경력이 있으며, 1928년 어니스트 심슨과 다시 결혼함으로써 심슨이라는 姓(성)을 얻었다. 그녀는 한 사교 모임의 일원으로서 王子(왕자)와 어울릴 기회를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이 웨일스의 왕자(에드워드 8세)와 심슨부인이 만나 사랑의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1934년이었다.
이후 에드워드 8세로 王位에 즉위한 웨일스의 왕자는 영국 왕실이 심슨 부인을 받아들이게 하기위해서 노력했지만 국회를 비롯,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당시 그의 유일한 동지는 이미 퇴역한 윈스턴 처칠 경뿐. 에드워드 왕과 심슨 부인의 애틋한 사랑은 당시 全 세계 신문과 잡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영국 내에서는 정부와 왕실의 강력한 저지로 언론에서 그가 왕위를 거의 내놓을 무렵까지 전혀 다루어지지 않기도 했다.
아래의 연설을 하고 난 바로 그날 밤 에드워드 왕은 호주로 건너가 친구의 집에서 몇 개월 간을 머무르며 심슨 부인의 이혼 절차가 완료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1937년 6월 3일 드디어 프랑스에서 결혼한 두 사람은 이후 영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를 다녔으며 에드워드 前 영국 국왕은 프랑스의 연락 사무소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다. 영국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두 사람은 1967년에야 비로소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공적인 왕실 모임에 초대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사망한 이후에도 나란히 영국 윈저 궁 뜰에 묻혀 있다. 세기의 러브 스토리, 에드워드 왕과 심슨 부인의 고귀한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이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이 연설은 1936년 12월11일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됐는데 윈스턴 처칠 경이 에드워드 왕의 거의 유일한 동지로서 이 연설문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는 후문이다.
1937년 윈저공, 심슨 부인과 결혼.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렸다는 영국 왕 에드워드 8세. 스스로 공(公)이 되었던 짐(朕)과 이혼녀 월리스 심슨 부인의 얘기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허나, 이 세기의 로맨스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었으니. 하나는 전설이 되었고 또 하나는 비화(秘話)가 되었다
매혹적인 가을의 전설은 1930년 9월 시작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심슨 부인의 눈은 열정으로 타올랐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그런 눈으로 전하를 빤히 쳐다본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사람도 없었다. "전하의 바지는 신발과 어울리지 않는군요."
첫눈에 반한 그는 1933년 6월 함께 스키여행을 다녀온 뒤 청혼한다.
세기의 로맨스가 무르익어가던 1936년 1월. 아버지 조지 5세가 사망하자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소!"
심슨 부인은 세번째 결혼을 위해 두번째 남편과의 예비 이혼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국교회와 정부의 반대는 완강했다. 스탠리 볼드윈 총리는 "이혼녀와의 결혼은 군주제의 고결함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경고했다. 그 이듬해 그들이 프랑스에서 결혼했을 때, 영국 왕실은 아무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얘기. 출처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비밀문서다.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포기할 당시 심슨 부인은 주영독일대사와 뜨거운 관계였다. 나치 독일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녀는 영국의 비밀정보를 흘렸다.
독일대사는 그녀에게 매일 17송이의 카네이션을 보냈는데, 17은 그들이 동침(同寢)한 횟수다. 볼드윈 총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 8세에게는 양위(讓位) 이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한 뒤 프랑스와 바하마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유배였다.
윈저공은 사랑을 얻었으나 상심했다. 그러나 심슨 부인은 보석을 사랑했고 활기에 넘쳤다. "사람은 부유할수록 좋고 몸매는 날씬할수록 좋다!"
파리에서 사는 동안 하인 18명의 시중을 받으며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한다. 다만 이따금씩 푸념했다. "세기의 로맨스? 그거 얼마나 죽을 맛인데…."
[펌]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린 윈저공
윈저공(公)과 심프슨 부인. 세기의 사랑
나로 하여금 왕위를 버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점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해서 내가 왕세자로서 그리고 최근에는 왕으로서 25년간 봉사하려고 노력한 우리나라 대영제국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는것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뒷받침 없이 왕으로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깨달았다는 것을 여러분께서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내린 결정은 오직 내가 혼자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주기 바랍니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이임사(1936년 12월11일)《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무거운 책임을 이행해 나가기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으며…》
"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 sibility…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연설의 배경]
1936년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지 1년이 채 안되어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王位(왕위)를 내놓는다. 당시 영국법상 이혼한 여인이 왕비가 되는 것을 금했기 때문. 여기서 소개하는 이 연설은 그가 1936년 12월 전국 방송으로 발표한 연설로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남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계기가 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구절로는《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없이는 나는 왕으로서 내가 뜻하는 대로 더 이상 지탱해 나갈 수 없다》고 한 부분이 꼽히고 있다.
에드워드 국왕으로 하여금 사랑을 위해 왕위까지 내어놓게 한 심슨부인은 1927년 미국해군 소위와 이혼한 경력이 있으며, 1928년 어니스트 심슨과 다시 결혼함으로써 심슨이라는 姓(성)을 얻었다. 그녀는 한 사교 모임의 일원으로서 王子(왕자)와 어울릴 기회를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이 웨일스의 왕자(에드워드 8세)와 심슨부인이 만나 사랑의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1934년이었다.
이후 에드워드 8세로 王位에 즉위한 웨일스의 왕자는 영국 왕실이 심슨 부인을 받아들이게 하기위해서 노력했지만 국회를 비롯,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당시 그의 유일한 동지는 이미 퇴역한 윈스턴 처칠 경뿐. 에드워드 왕과 심슨 부인의 애틋한 사랑은 당시 全 세계 신문과 잡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영국 내에서는 정부와 왕실의 강력한 저지로 언론에서 그가 왕위를 거의 내놓을 무렵까지 전혀 다루어지지 않기도 했다.
아래의 연설을 하고 난 바로 그날 밤 에드워드 왕은 호주로 건너가 친구의 집에서 몇 개월 간을 머무르며 심슨 부인의 이혼 절차가 완료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1937년 6월 3일 드디어 프랑스에서 결혼한 두 사람은 이후 영국을 제외한 여러 나라를 다녔으며 에드워드 前 영국 국왕은 프랑스의 연락 사무소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다. 영국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두 사람은 1967년에야 비로소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공적인 왕실 모임에 초대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사망한 이후에도 나란히 영국 윈저 궁 뜰에 묻혀 있다. 세기의 러브 스토리, 에드워드 왕과 심슨 부인의 고귀한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이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이 연설은 1936년 12월11일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됐는데 윈스턴 처칠 경이 에드워드 왕의 거의 유일한 동지로서 이 연설문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는 후문이다.
1937년 윈저공, 심슨 부인과 결혼.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렸다는 영국 왕 에드워드 8세. 스스로 공(公)이 되었던 짐(朕)과 이혼녀 월리스 심슨 부인의 얘기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허나, 이 세기의 로맨스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었으니. 하나는 전설이 되었고 또 하나는 비화(秘話)가 되었다
매혹적인 가을의 전설은 1930년 9월 시작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심슨 부인의 눈은 열정으로 타올랐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그런 눈으로 전하를 빤히 쳐다본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사람도 없었다. "전하의 바지는 신발과 어울리지 않는군요."
첫눈에 반한 그는 1933년 6월 함께 스키여행을 다녀온 뒤 청혼한다.
세기의 로맨스가 무르익어가던 1936년 1월. 아버지 조지 5세가 사망하자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소!"
심슨 부인은 세번째 결혼을 위해 두번째 남편과의 예비 이혼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국교회와 정부의 반대는 완강했다. 스탠리 볼드윈 총리는 "이혼녀와의 결혼은 군주제의 고결함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경고했다. 그 이듬해 그들이 프랑스에서 결혼했을 때, 영국 왕실은 아무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얘기. 출처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비밀문서다.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포기할 당시 심슨 부인은 주영독일대사와 뜨거운 관계였다. 나치 독일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녀는 영국의 비밀정보를 흘렸다.
독일대사는 그녀에게 매일 17송이의 카네이션을 보냈는데, 17은 그들이 동침(同寢)한 횟수다. 볼드윈 총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 8세에게는 양위(讓位) 이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한 뒤 프랑스와 바하마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유배였다.
윈저공은 사랑을 얻었으나 상심했다. 그러나 심슨 부인은 보석을 사랑했고 활기에 넘쳤다. "사람은 부유할수록 좋고 몸매는 날씬할수록 좋다!"
파리에서 사는 동안 하인 18명의 시중을 받으며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한다. 다만 이따금씩 푸념했다. "세기의 로맨스? 그거 얼마나 죽을 맛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