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을까 아직 사귀는 중이었는데, 내 방에서 밸런타인데이라고 초콜릿이라도 먹자 싶어 귀여운 초콜릿 상자를 찾아 열어보았더니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초콜릿을 먹으려고 편의점까지 걸어갔다. 추운 밤이었다. 바람은 몰아쳤고, 별은 어지러울 정도로 반짝거렸고, 공기는 베일 듯 맑았다. 선반에 진열된 초콜릿이 하나같이 맛없어 보여, 내가 사고 싶은 건 없네, 라고 했더니 그는 그럼 우유하고 코코아 가루를 사가서 맛있는 핫 초콜릿을 만들자고 했다. 그리고 둘이서 훈훈한 방으로 돌아가, 정성껏 데운 우유에 코코아 가루와 시나몬과 카르다몬을 넣어 정말 맛있는 핫 초콜릿을 만들었다. 끓어 넘치지 않게 조심조심하고, 너무 달지 않게 신경을 쓰고, 컵을 데우고……. 그렇게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온 마음을 집중한 덕에 더욱 맛있었다. 이렇게 나중에 되새겨 보니, 꽤 한참을 마셨던 것 같다. 집중했던 즐거운 추억은 왜 나중에 돌아보면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p. 122 (하치 하니 中)
비둘기도, 소매치기도, 이민 온 아주머니도, 여행자도, 모두 왠지 모르게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광장을 도는 엄마들도 이미 자식이 돌아오리란 기대는 하지 았는 듯 보였다. 다만 인생의 시간을, 답답하고 어쩔 수 없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서 당시의 사건이 안일하게 흘러가는 이 시간에 묻혀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이미 할머니가 된 그 사람들은 딸과 아들의 사진을 목에 걸고 있으면서도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 점이 오히려 현실감이 있었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시간의 경과이며 슬픔의 색채였다.
슬픔이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단지 엷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어 그것으로 위로 삼을 뿐이다. 저들의 슬픔에 비하면 나의 슬픔이란 이 얼마나 치졸한 것인가. 근거도 없고, 저들처럼 부조리함에 뿌리를 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게 지나간다. 다만 어느 쪽이 대단하게 깊다 할 수는 없다. 모두 공평하게 이 광장에 있다.
p. 139 (해시계 中)
인생은 수많은 사건의 연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주변에서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길밖에 없다. 실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만이 사랑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다.
p. 154 (창밖 中)
혼자가 아닌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이렇게 고독을 까맣게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임질 것은 자신의 목숨뿐, 늘 지니고 있는 것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데 혼자가 아니다. 이렇다 할 것 없는 가장 평범한 시간을 이렇게 공유할 수 있다. 그 기쁨과 안심이 배 속 깊은 곳에서 찡하게 밀고 올라온다. 안전한 나라에 있는 것도 아닌데, 족히 안심하고 있다. 깨끗한 시트, 어슴푸레한 조명, 큼지막한 창문, 낯선 천장, 텔레비전에서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스페인어의 울림. 햇볕에 그은 피부가 화끈거린다. 잠의 물결이 천천히 나의 의식으로 밀려온다. 행복한 때에는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법인데, 그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육체와 정신과 시각과 상황이 모두 조화롭게 어울려 있을 때, 사람은 그렇게 느끼는 것이리라.
p. 156 (창밖 中)
신지는 최고의 여행 친구였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게 하는 데는 천재적이었다. 그는 내 사소한 동요나 불쾌함을 보고도 적절히 못 본척 해주었다. 여행에 익숙한 그와 함께 움직이면서 나는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자그마한 일이라도 남에게 의지하다 보면 서로에게 점차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을, 그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면서도 타인은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담도 느끼지 못하는 방식으로 가르쳐주었다. 흥분해서 도를 지나치든 지갑을 잃어버리든 그는 늘 침착해서, 그 빠른 전환은 황홀할 정도였다.
p. 171 (창밖 中)
나는 저녁나절에 그저 어슬렁거리고 싶어 거리로 나온 사람들과 그 표정을 오랜만에 본 기분이 들었다. 도쿄에서는 다들 목적이 있어 움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쉬기 마련이다. 그냥 한가하니까 바깥 구경이나 하자 싶어 나온 사람들의 표정에는 사람을 푸근하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따. 시간이 고무줄처럼 느긋하게 직 늘어난 느낌이다.
파리의 해거름,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과도 비슷하다. 희미한 햇살이 비치고, 오늘의 첫 알코올을 주문하고, 하루의 피로가 서쪽으로 기우는 반짝임 속에 녹아드는 느낌이다.
그 불가사의한 활기에 우리의 마은도 덩달아 들떴다. 술 한잔을 마실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루의 일과가 끝나서가 아니라, 디너가 기대돼서가 아니라, 그냥 이 활기 속에 몸담는 것이 즐거울 뿐이라고 햇볕에 그은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불륜과 남미 by 요시모토 바나나
언제였을까 아직 사귀는 중이었는데, 내 방에서 밸런타인데이라고 초콜릿이라도 먹자 싶어 귀여운 초콜릿 상자를 찾아 열어보았더니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초콜릿을 먹으려고 편의점까지 걸어갔다. 추운 밤이었다. 바람은 몰아쳤고, 별은 어지러울 정도로 반짝거렸고, 공기는 베일 듯 맑았다. 선반에 진열된 초콜릿이 하나같이 맛없어 보여, 내가 사고 싶은 건 없네, 라고 했더니 그는 그럼 우유하고 코코아 가루를 사가서 맛있는 핫 초콜릿을 만들자고 했다. 그리고 둘이서 훈훈한 방으로 돌아가, 정성껏 데운 우유에 코코아 가루와 시나몬과 카르다몬을 넣어 정말 맛있는 핫 초콜릿을 만들었다. 끓어 넘치지 않게 조심조심하고, 너무 달지 않게 신경을 쓰고, 컵을 데우고……. 그렇게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온 마음을 집중한 덕에 더욱 맛있었다. 이렇게 나중에 되새겨 보니, 꽤 한참을 마셨던 것 같다. 집중했던 즐거운 추억은 왜 나중에 돌아보면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p. 122 (하치 하니 中)
비둘기도, 소매치기도, 이민 온 아주머니도, 여행자도, 모두 왠지 모르게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광장을 도는 엄마들도 이미 자식이 돌아오리란 기대는 하지 았는 듯 보였다. 다만 인생의 시간을, 답답하고 어쩔 수 없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서 당시의 사건이 안일하게 흘러가는 이 시간에 묻혀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이미 할머니가 된 그 사람들은 딸과 아들의 사진을 목에 걸고 있으면서도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 점이 오히려 현실감이 있었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시간의 경과이며 슬픔의 색채였다.
슬픔이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단지 엷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어 그것으로 위로 삼을 뿐이다. 저들의 슬픔에 비하면 나의 슬픔이란 이 얼마나 치졸한 것인가. 근거도 없고, 저들처럼 부조리함에 뿌리를 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게 지나간다. 다만 어느 쪽이 대단하게 깊다 할 수는 없다. 모두 공평하게 이 광장에 있다.
p. 139 (해시계 中)
인생은 수많은 사건의 연속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주변에서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길밖에 없다. 실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만이 사랑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다.
p. 154 (창밖 中)
혼자가 아닌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이렇게 고독을 까맣게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책임질 것은 자신의 목숨뿐, 늘 지니고 있는 것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데 혼자가 아니다. 이렇다 할 것 없는 가장 평범한 시간을 이렇게 공유할 수 있다. 그 기쁨과 안심이 배 속 깊은 곳에서 찡하게 밀고 올라온다. 안전한 나라에 있는 것도 아닌데, 족히 안심하고 있다. 깨끗한 시트, 어슴푸레한 조명, 큼지막한 창문, 낯선 천장, 텔레비전에서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스페인어의 울림. 햇볕에 그은 피부가 화끈거린다. 잠의 물결이 천천히 나의 의식으로 밀려온다. 행복한 때에는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법인데, 그 순간 나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육체와 정신과 시각과 상황이 모두 조화롭게 어울려 있을 때, 사람은 그렇게 느끼는 것이리라.
p. 156 (창밖 中)
신지는 최고의 여행 친구였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게 하는 데는 천재적이었다. 그는 내 사소한 동요나 불쾌함을 보고도 적절히 못 본척 해주었다. 여행에 익숙한 그와 함께 움직이면서 나는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자그마한 일이라도 남에게 의지하다 보면 서로에게 점차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을, 그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면서도 타인은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담도 느끼지 못하는 방식으로 가르쳐주었다. 흥분해서 도를 지나치든 지갑을 잃어버리든 그는 늘 침착해서, 그 빠른 전환은 황홀할 정도였다.
p. 171 (창밖 中)
나는 저녁나절에 그저 어슬렁거리고 싶어 거리로 나온 사람들과 그 표정을 오랜만에 본 기분이 들었다. 도쿄에서는 다들 목적이 있어 움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쉬기 마련이다. 그냥 한가하니까 바깥 구경이나 하자 싶어 나온 사람들의 표정에는 사람을 푸근하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따. 시간이 고무줄처럼 느긋하게 직 늘어난 느낌이다.
파리의 해거름,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과도 비슷하다. 희미한 햇살이 비치고, 오늘의 첫 알코올을 주문하고, 하루의 피로가 서쪽으로 기우는 반짝임 속에 녹아드는 느낌이다.
그 불가사의한 활기에 우리의 마은도 덩달아 들떴다. 술 한잔을 마실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루의 일과가 끝나서가 아니라, 디너가 기대돼서가 아니라, 그냥 이 활기 속에 몸담는 것이 즐거울 뿐이라고 햇볕에 그은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