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책 198쪽 - 윤성희

곽지미2006.12.12
조회67

그녀는 저녁 10시면 잠이 들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주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한 달에 수도 요금이 5만 원 이상 나왔고,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휴대폰을 정지시켰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고향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고, 매달 말일에는 고시공부를 하는 동생에게 50만원을 온라인으로 송금했다. 의사로부터 신경성 위염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로는 밥을 먹을 때 꼭 백 번씩 씹었다. 밥을 먹고 30분 후에는 약을 먹었다.

그녀는 8년째 도서관에서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은 책을 읽지 않았다. 저기요, 복사 카드는 어디에서 사나요. 저기요,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저기요..... 그녀는 도서관에서 이름 대신 저기요, 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래서 도서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누군가 저기요, 라는 말만 하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는 저기요, 라는 호칭이 자신의 이름보다도 더 익숙했다.

 

앞집에 사는 남자가 이사를 가면서 자전거를 준 뒤로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했다. 40분이 조금 더 걸렸다. 5시 30분이면 퇴근을 했다. 저녁을 먹고, 일일 드라마를 보고, 뉴스를 보고 나면 어느새 10시가 되었다. 그녀는 벽에 슬기 시작한 곰팡이를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눈을 떴다.


자명종은 5시에 맞추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멜로디가 울리기 10분 전에 눈을 떴다. 베개를 잘못 베고 잤는지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가지않았다. 그녀는 아침밥을 짓다가 새로 광고를 하는 '밥맛 좋아지는 쌀' 로 바꿔보면 어떨가, 라는 생각을 했다. 고향 도지사가 직접 텔레비전에 나와 광고를 하는 쌀이었다. 밥을 씹다가, 백 번을 세기 귀찮아지자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동요 한 곡에 밥 한 숟가락이었다.


자전거는 진한 초록색이었다. 앞집에 살았던 남자는 자전거 뒷자석에 아들을 앉히고는 공원을 한 바퀴씩 돌곤 했다. 아들은 왼쪽 다리가 휘어서 혼자서는 걷지 못했다. 자전거에는 전화번호가 크게 써 있는데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5' 라는 숫자가 아들의 휘어진 다리와 닮아 있었다. 오르막길 끝에 '아늑한 미용실' 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눈이라도 쌓이면 천장이 꺼질 듯 낡은 집이었다. '아' 라는 글자가 떨어져서 멀리서 보면 '늑한 미용실' 이라고만 보였다. '늑한' 이라는 단어를 보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누군가 등에 찬바람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삼거리에 있는 '향기로운 빵집' 앞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그곳에서 치즈 바게트를 산 다음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내리막길에서 눈을 감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모두 그녀의 몸을 통과했다.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 길을 내려가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아주 선량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약간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횡단보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오른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내리막길을 지나 오른쪽 길로 접어들자 고등학교가 나왔다. 언젠가, 그녀는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고등학교의 긴 담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왜 길을 두고 담 위를 걷니? 자전거를 세우고 그녀가 여자애에게 물었다. 따분해서. 그 애가 대답했다. 그녀는 떨어질 듯 말 듯 간당간당 달려 있는 남방 단추를 만지작거리면서 그 애의 말을 따라해 보았다. 따분해! 따분하다고 말을 하자 장사가 잘 안 된다며 한숨을 쉬는 어머니의 모습이 잊혀졌다. 난 니가 지겹다, 이제. 그렇게 말을 하고는 떠나간 W의 뒷모습이 서서히 지워졌다. 그녀는 담을 끼고 돌면서 따분해,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길에 물을 뿌리던 문방구 주인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멀리 도서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문을 지키는 수위가 그녀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녀는 오른손에 깁스를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곁에는 책이 열 권 정도 쌓여 있었다. 깁스를 한 손으로 어떻게 책을 날랐을까? 그녀는 남자를 보면서 그런 의문을 가졌다. 남자가 책을 읽는 방법은 좀 독특했다. 한 권을 읽는 데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책을 펼치더니 책장을 빨리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찾는 쪽이 나오면 책장 넘기는 걸 멈추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산기슭에 비스듬히 자리를 잡은 동네를 보았다. 주황색 지붕이 네 개, 초록색 지붕이 두개, 회색 지붕이 다섯 개였다. 남자가 보는 책은 모두 'ㄱ' 으로 시작되는 책들이었다. 남자가 몸을 움직이자 가려졌던 주황색 지붕이 하나 더 보였다. 그녀는 저 지붕들 중에서 색이 하나라도 바뀌면 도서관을 그만두리라는 생각을 했다.

 

왜 저를 쳐다보죠? 어느새 깁스를 한 남자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보니 남자는 앳된 얼굴이었다. 스물셋 정도. 이마에 V자 모양의 상처가 나 있었다. 저기 창문 너머를 봤어요. 제가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지붕 색을 바꾼 집이 하나도 없었죠. 그녀는 이마에 난 상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깁스를 한 남자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학생이 책을 들고 와서는 남자의 뒤에 섰다. 실은 부탁할 게 있어서요. 왜 저를 쳐다보죠? 라고 묻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뒤에 섰던 여학생이 뒤늦게 줄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다가와 책을 내밀었다. 남자는 깁스를 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남자는 깁스를 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혹시, 이 사람이 빌려갔던 책들을 알 수 있을까요? 깁스에는 여러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자는 그중에서 서민경, 이라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본인이 아니면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름은 주황색으로 적혀 있었는데, 이름을 가리킨 남자의 손가락이 주황색으로 보였다. 저기요.... 컴퓨터가 잘 안 돼요. 컴퓨터 검색대에 앉아 있는 학생이 그녀를 불렀다.

초록색 지붕 위로 검은 모자를 쓴 인부가 올라갔다. 동생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달라고 전화를 했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누나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동생은 울먹이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집을 팔아 그돈으로 가게를 차렸지만 손님은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동태찌개는 너무 짰다. 맛있냐? 그렇게 물을 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맛있다는데 왜 손님이 없는 거냐?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 도서관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인부는 초록색지붕에 붓칠을 했다. 초록색 위에 입혀진 색은 초록색이었다. 그녀는 서민경, 이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일주일에 다섯 권씩, 꼬박꼬박 책을 빌려가던 사람이었다.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책을 대출해 간 회원에게주는 '올해의 독서왕' 에 뽑혀 도서관 이름이 새겨진 손목시계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그녀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아직도 'ㄱ' 으로 시작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뭐, 찾는 게 있나요?


그녀는 남자가 읽고 있는 책을 넘겨다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인지 알면 도와줄 수도 있어요. 열람실에 있는 시계가 5시를 알렸다. 폐관 시간이다. 제 여자 친구가 저한테 편지를 썼는데 거기에 198쪽을 보라고 써있었거든요. 남자는 가방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쪽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 책 198쪽을 봐. 너에게 전해 주고 싶은 내 마음이 거기에 있어." 쪽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책이란 글자 앞에 무슨 말이 적혀 있긴 한데 물에 번져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페인트칠을 하는 인부를 보았다. 지붕은 점점 선명한 초록색이 되었다. 사실 초록색보다는 주황식이 더 잘 어울릴 듯한 집이었다. 여자 친구한테 다시 물어보면 안 될까요? 의자 끄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열람실을 빠져나갔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물어볼 수가 없어요. 죽었거든요. 이마에 난 V자 모양의 상처는 끝이 약간 휘어서 갈매기처럼 보였다. 남자가 이마를 찡그릴 때마다 갈매기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을 날았다. 어디선가 물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자료실 문을 닫다 말고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옆에 서 있떤 아르바이트 학생이 뭐라고요? 라며 되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한번 갸우뚱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도서관 로비에 서 있는 그녀를 누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그녀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문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내 사라졌다. 로비에서 는 작은 발소리도 커다랗게 울렸다.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소음이 자신의 귀를 가득 채우는 듯했다. 깁스를 한 남자는 자판기 앞에 서 있었다. 절 찾았죠? 남자는 자판기에서 캔커피 두 개를 꺼내면서 말했다. 그녀는 남자가 뽑은 캔커피를 마셨다. 도와주겠어요. 그녀의 말이 도서관 로비에 큰 소리로 울렸다.

그녀는 열람실 문을 안에서 잠갔다. 내일이 도서관 휴관이니까 오늘 밤새 책을 찾아봐요. 사람이 없을 때 찾는 게 더 편하잖아요. 그녀는 서민경이 빌려갔던 책 목록을 프린트했다. 대신 내일 아침에 밥 사세요. 갈매기 씨! 남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갈매기라니요? 그녀는 남자의 이마에 난 V자 모양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쪽 별명이예요. 이 상처가 꼭 갈매기 같아서요. 그녀는 책을 열 권씩 뽑아 갈매기 앞에 놔주었다. 그러고는 갈매기가 다 읽은 책을 다시 서가에 꽂았다. 갈매기는 문장을 노트에 적어 넣기도 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지겹다는 말을 하고 떠난 W는 일출과 일몰에 관련된 사진만을 모았다. W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출과 일몰을 찍은 사진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했다. 자세히 봐! 여기. 호수에 퍼지 붉은 빛들을. 해가 질 때의 빛들이 조금 더 부드러워. 그녀는 아무리 봐도 어떤 게 일출 때 찍은 것이고, 어떤 게 일몰 때 찍은 사진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해는 낮에 페인트칠을 한 지붕 위에 반쯤 걸터앉았다. 그녀는 막연하게 이런 느낌을 받았다. 일출보다는 일몰이 조금 더 수다스럽다는. 지붕위에 반쯤 걸리 해는 오늘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조바심을 내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해 봐! 내가 들어줄게. 그녀는 해를 향해 약간 짓궂은 윙크를 했다.


 

저기요. 여기 이런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어요. "그는 홍차 두 잔을 마셨고, 나는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갈매기가 책에 있는 한 구절을 그녀에게 읽어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나는 홍차 두잔을 마셨고, 그 친구는 커피 한 잔을 마셨거든요. 이게 우리의 암호였어요. 그 친구는 나랑 싸우면 커피를 시키지 않았어요. 나도 그 친구한테 불만이 있으면 홍차를 시키지 않았고요. 해를 등지고 있어서인지 갈매기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어렸다. 여기 이런 구절도 있네요. "밤새 나뭇가지들이 쌓인 눈을 이기지 못하고 툭툭부러졌다. 그리고 봄이 왔다. 이마에 난 상처가 간지럽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그 상처 사이로 봄 햇살이 스며드는 듯했다." 아마 그 친구는 이 문장을 내게 읽어주고 싶어했을 거예요. 우울할 때면 내 상처를 만지며 위안을 삼곤 했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난 다음, 갈매기는 두 눈을 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이 한순간 바닥으로 쏟아진다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10시가 넘었으므로, 그녀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잠이 들었다. 갈매기는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는 노트에 적어놓은 문장들을 몇 번씩 소리내어 읽곤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깜빡 잠에서 깨곤 했다. 한번은 갈매기가 잠들어 있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이거 보세요. 갈매기가 건내준 책은 200쪽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얇은 책이었다. 책은 196쪽뿐이었다. 이게 뭐야. 그녀가 말하자 갈매기가 책을 한 장 넘겼다. 198쪽이라고 인쇄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 장을 넘겼으니 198쪽이라 할 수 있었다. 발행인 : 서민경. 거기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잠에서 덜 깬 얼굴로 그녀는 웃었다. 하하하! 남자는 무엇이 자랑스러운지 두 손을 허리에 대고 큰 소리로 웃었다. 새벽이 되자 갈매기의 노트에는 더 잇아 적을 공간이 없었다. 그녀는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갈매기는 책을 쌓아놓고 그걸 베개 삼아 잠들어 있었다. 밥은 먹어야지! 그녀는 갈매기를 깨웠다. 반지에 눌려서 V자의 흉터 옆에 작은 동그라미가 새겨졌다. 해가 뜨는 아침에 바다를 나는 갈매기 씨! 무엇을 먹을까요. 그녀는 갈매기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해장국을 시켰다. 새벽부터 해장국을 먹는 사람들로 가게는 빈자리가 없었다. 공원 앞에서 30년이 넘게 해장국집을 해왔다는 주인은 선지해장국에 선지를 넣지 않고 따로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여자분이 있어서 선지는 따로 가지고 왔습니다. 드실 거면 국에 넣으세요. 갈매기는 선지를 국에 넣었고, 그녀는 선지를 국에 넣지 않았다. 깍두기는 너무 컸다. 그녀는 깍두기를 반씩 나눠 먹었고 갈매기는 한입에 넣고 우적우적 소리내며 먹었다.

갈매기는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즉석 사진을 목에 걸고 공원을 어슬렁거리는 남자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번도 즉석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는데..... 여자는 담배 연기가 자기 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누군가 돗자리를 펴더니 그 위에 잡다한 물건들을 진열하기 시작했다. 사진사가 궁금한지 돗자리가 펼쳐진 쪽으로 걸어갔다. 그 친구는 뺑소니차에 치였어요. 제가 가까이서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차번호가 기억나질 않는 거예요. 갈매기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황단보도 저편에는 계절에 맞지 않게 겨울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신호등이 몇 번 바뀌어도 횡단보도를 건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갈매기의 머리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갈매기의 머리를 벤치 등받이에 살짝 올려놓았다. 자전거 안장은 밤새 비를 맞아서 축축했다. 그녀는 고등학교 담을 지나, 긴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회의는 길고 지루했다. 새로 온 관장은 시민에게 가까운 다가갈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관장은 문예지로 등단을 한 적이 있는 시인이었다. 그는 도서관이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단순히 시험공부를 위한 공부방이 되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슬퍼했다. 직원들은 시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잇는 도서관을 만들기 위한 제안서를 하나씩 제출해야 했다. 관장은 제안서를 받아들고는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한달에 한 번씩 작가를 초청해 강연회를 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건 벌써 시에서 가장 큰 서점인 '동아서점' 에서 하고 잇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작가들을 초청해 창작교실을 만드는 게 어떨까요? 정기간행물실에 있는 H가 말했다. 그런 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도 하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H와 사귄다는 소문이 있었던 S가 대꾸했다. S의 목소리는 심한 금속성이어서 두 마디 이상을 들으면 두통이 생기곤 했다. 관장은 또 다른 제안서를 읽었다. 의자마다 작가들의 이름을 새겨 넣자는 의견이 있군요. 여기가 뭐 극장입니까? 직원들이 와! 하고 웃었다. 마치 웃기로 약속한 사람들처럼 똑같은 높이로, 똑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누워서도 책을 읽을 수 있게 온돌방을 만들면 어떨까요? 관장은 안경을 벗어 손가락으로 미간을 눌렀다. 그 제안서는 그녀가 쓴 것이었다. 복도마다 푹신한 쇼파를 갖다놓아서 누구나 비스듬한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옥상에는 해변용 의자를 갖다놓아서 마치 해수욕을 하면서 책을 읽는 기분을 내게 하고, 온돌방을 만들어 눕거나 엎드려서 책을 읽을 수 있게 하면 좋겠다고 그녀는 썼다. 재미있는 발상이군요. 관장은 그녀의 제안서를 반으로 접어 자신의 수첩에 끼워 넣었다. 좋았어. 의견이 채택될지도 모르잖아. 회의실을 나오자 H가 그녀의 어깨에 소을 얹으면서 말했다. 따분해! 그녀는 H에게 말했다.


표지가 뜯겨 나간 책을 호치키스로 고정하다 말고 그녀는 책표지를 뜷어지게 바라보았다. 표지에는 어떤 남자가 구름에 못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구름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보면 컵 같기도 했고 오른쪽으로 돌려보면 꽉 움켜쥔 주먹 같기도 했다. 선생님 아르바이트 학생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그녀 앞에 서류철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책을 반납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분들은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아요. 아르바이트 학생은 붉은 펜으로 밑줄을 그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책을 빌려가 뒤에 이사를 갔거나 고의적으로 잘못되 전화번호를 적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책을 되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쥐어보았다. 툭 불거지 마디가 생각보다 단단해 보였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한 방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주먹 쥔 손을 허공에 대고 휘둘렀다. 그녀는 책을 거꾸로 돌려보았다. 거꾸로 보자 구름은 사람의 옆모습과 닮아 있기도 했다. 못을 들고 잇는 남자의 왼손이 닿아 있는 곳은 사람의 머리였다. 이제 그림은 사람의 머리를 향해 망치를 휘두르는 남자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 형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는 듯 재빨리 책을 펼쳐보았다. "지나갔지요." 198쪽은 그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무엇이 지나갔는지 궁금했지만 그녀는 앞장을 넘겨보지 않았다. 대신 지나갔지요, 로 끝나는 문장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일주일이면 서너 번씩 와서 책을 읽는 갈색 뿔테를 쓴 할아버지를 보면서 그녀는 이런 문장을 생각했다. 내 나이, 칠십. 이젠 어려운 고비는 다 지나갔지요. 그 옆에 앉아 있는 눈썹이 잩은 중년 아주머니를 보면서 이런 문장을 떠올렸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내 청춘이 다 지나갔지요. 그녀가 보고 싶을 때마다 그녀가 사는 집 앞을 지나갔지요. 구석에 앉아서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잇는 고등학생에겐 나름대로 어울리는 문장인 듯싶었다. 그녀는 책을 읽는 사람들의 표정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책을 읽는 사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옅은 미소를 짓는 사람, 한 시간째 잠을 자고 있는 사람 그리고 서가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그녀는 오랫동아 바라보았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5시를 알리 때까지.
오늘 하루는 이렇게 지나갔지요.
그녀는 퇴실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아르바이트 학생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받아쳤다. 내일 하루도 이렇게 지나가겠지요. 모레도 이렇게 지나갈 수 있겠지요. 그녀가 반납기에 쌓여 있는 책들을 서가에 꽂으면서 말했다. 서가 저쪽 편에 있는 아르바이트 학생이 큰 소리로 대꾸했다. 평생 이렇게 지나가 버려라! 책을 꽂다 말고 그녀가 웃었다. 아르바이트 학생도 따라 웃었다. 웃다가, 그녀는 경쾌한 자신의 웃음소리가 너무 어색해서 주춤했다. 내 웃음소리가 이랬나? 잠시 이런 생각을 한 다음 허리를 움켜잡고 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녀는 출근을 하면 가장 먼저 컴퓨터 전원을 켰었다. 도서검색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을 한 다음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를 올렸다. 지붕 색을 하나씩 확인하고 기지개를 켜면 하루가 시작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출근을 하면 곧장 서가로 향했다. 블라인드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책들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녀는 그 사이를 헤매면서 책 한 권을 골랐다. 그러고는 198쪽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와도 노트에 적어두지 않았다. 대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노트에 적는 대신 그녀는 가슴에 새겨두었다. "총을" 이라고 문장이 끝나면 그 다음 쪽으로 눈이 자동적으로 옮겨져 갔다. 하지만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신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그녀는 '총을'로 시작하는 수백 개의 문장을 만들었다.
"삶은 감자를 으깨어" 라는 문장을 읽다가 그녀는 '으깨어' 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되새겨보았다. 동생은 술에 취하면 손을 그녀에게 내밀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누나! 이 손을 으깨어버리고 싶어. 시험 전날이 되면 지나가는 차 바퀴 밑에 손을 집어넣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며 동생은 울었다. 그때는 그냥 술 주정으로만 여겨졌던 동생의 말이 지금에 와서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여자는 하루에 물을 5리터나 마셔댔다. 나는 하루에 밥을 다섯 끼 이상 먹었다. 우리는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이 문장에 파란색 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았다. 그 다음 날 그녀는 500밀리리터 생수를 열 병이나 사서 출근을 했다 점심먹기 전에 2리터를 마셨고 화장실을 다섯 번이나 갔다. 포만감 때문에 점심을 걸렀다. 오후에 3리터를 더 마셨다. 몸속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 사람을 본 적 있어? 그녀는 화장실 입구에서 만난 S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내 주변엔 그런 돼진 없는데. S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평소 금속성의 목소리보다 감기에 걸린 목소리가 훨씬 듣기 좋아 그녀는 차라리 감기가 낫지 않았으면 좋겟다고 생각했다. 혹시, 아는 사람 중에 하루 다섯 끼 먹는 사람 있어? 내친김에 그녀는 정기간행물실로 가 H에게 물었다. 문학자료실과 달리 정기간행물실에는 좌석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H는 패션잡지를 보고 있는 여학생들을 바라보더 ㄴ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기다려봐 저 애들이 곧 잡지를 찢어갈 테니까. 참! 내 친구 중에 하루에 여섯 끼를 먹는 녀석이 있어. 엄청 뚱뚱해. H의 예상과는 달리 여학생들은 잡지를 다 읽고는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있으면 나 소개시켜 줘! 그녀의 말에 H는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어디 아파?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집은 걸을 때마다 마루가 삑거거렸다. 그집에서 나는 늘 늦잠을 잤고, 늦은 아침을 먹었다. 무너져라. 무너져라. 매일 주문처럼 중얼거렸지만,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 문장을 읽는 날 도서관 게시판에 새로운 공고문이 붙었다. 국내 최초로 '내 집 같은 도서관' 을 만들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도서관에 방을 만들다니 웃기지 않아? 글쎄! 좋을 것도 같은데. 공고문을 읽던 남녀가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그해에 아버지는 옆집 주인과 사소한 싸움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옆집담이 자신의 집쪽으로 넘어왔다고 주장했다. 옆집은 옛 건물을 부수고 새집을 지었는데 그때 30센티미터 정도를 더 넓혀서 세웠다는 거였다. 봐라! 예전엔 여기서 담까지 다섯 걸음이었는데 지금은 네 걸은 반밖엔 안되지 않잖니. 아버지는 마당에 있는 화장실에서부터 담이 있는 곳까지 큰 보폭으로 걸었다. 옆집은 애당초 그녀의 집에서 담을 잘못 세운 것이었다고, 그래서 이번 참에 잘못된 것을 똑바로 잡은 것 뿐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해머를 가지고 담을 부수었다. 그때마다 집이 쿵쿵,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국어 교과서를 읽었다. 아버지는 예전의 자리에 새 담을 만들었다. 한 달이 지나자 옆집에서 그 담을 허물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경계에 새 담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새로운 담이 만들어졌다가 허물어졌다. 그녀는 해머 소리를 들으며 초등학교 1학년을 마쳤고, 동생은 만화영화를 볼 때마다 텔레비전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결국 옆집에서 측량기사를 불렀고 아버지가 틀렸음이 밝혀졌다. 그 후로 아버지는 하는 일마다 실패했다. 그녀는 그때가 가장 핵복했다. 아버지가 해머로 담을 부수는 동안 어머니는 새참으로 칼국수를 끓였고, 식구들은 네모난 상에 둘러앉아 칼국수를 먹었다. 아버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뚝, 하고 칼국수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그때 그 칼국수는 맛있었다. 짜지도 않았고 밀가루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무너져라, 라는 문장에 검지손가락을 대보았다. 아버지이마에서 떨어진 땀방울처럼 그녀의 얼굴에서도 무엇인가가 뚝, 하고 떨어졌다.


책 제목이 조금 특이했다. "모기장" 하지만 그녀의 눈길을 끈 건 제목이 아니었다. 그 책이 서가에 뒤집어져 꽂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자기가 읽던 책을 이렇게 거꾸로 꽂아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대출이 되지 않는 사회과학 서적은 이런 경우가 많았다. 시험 시간이 되면, 자기에게 필요한 책들을 전혀 다른 분야 사이에 끼워놓거나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놓는 학생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책을 똑바로 꽂으려다 말고 그녀는 습관처럼 198쪽을 펴보았다. 198쪽에는 쪽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언젠가는 이 책을 읽을 것 같았어요. 혹시 저처럼 198쪽만 읽는 건 아니죠? 공원에서 잡동사니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 가보세요. 선물이 있어요. 갈매기가." 쪽지를 읽고 나자 그녀는 갈매기 이마에 난 상처가 보고 싶어졌다. 갈매기의 이런 어뚱한 생각이 그 상처에서 나온 것 같아 갑자기 그 생처를 한번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계절에 맞지 않게 겨울용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가 여전히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가짜 프라다 가방을 들고 잇는 여자가 할아버지 옆에 서더니 코를 움켜잡았다. 어디선가 전화벨이 우렸다. 전화 왔잖아. 할아버지가 여자의 어깨를 쳤다. 그러고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으면서 여자는 할아버지가 만졌던 어깨를 털어냈다. 신호등이 바뀌었고 그녀는 여자와 나란히 길을 건넜다. 할아버지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즉석 사진을 찍는 사진사도 여전히 공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돗자리에 여러 가지 물건을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남자는 낚시 의자에 앉아서, 손바닥만 한 나무를 깎아 무엇인가 만들고 있었다. 구경하슈! 남자는 그녀를 보자 퉁명스럽게 말을 한 다음 다시 나무 깎는 일에 열중했다. 그녀가 어렸을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보았던 조잡한 플라스틱 인형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 인형은 머리가 없고, 어떤 인형은 다리가 없었다. 찌그러진 자동차 번호판, 어느 나라 것인지 짐작할 수 없는 외국 동전들, 고장난 전화기, K.L.S.라는 이니셜이 새겨지 반지, 그녀는 잡동사니 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뭐에 써요? 그녀는 줄이 끊어진 배드민턴 채를 보면서 말했다. 배드민턴 치는 데 말곤 다 사용할 수 있지. 남자의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땀이 흘렀다. 주름 때문에 남자는 피로해 보였다. 그녀는 돈을 벌면 가장 먼저 이 사람의 이마에 주름살을 제거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다한 물건들 사이에서 그녀는 즉석 사진기로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깁수를 한 팔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깁스에 누나 고마워요, 라고 적혀 있었다. 갈매기의 팔이었다. 이거 얼마예요? 그녀는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는 사진을 꺼냈다. 그건 파는 게 아니라 보관하고 있던 거야. 아! 그거 찾으러 오신 분이구나.


즉석 사진을 찍는 사진사는 매점에 앉아서 우동을 먹고 있었다. 하루에 한 장 찍기도 힘들어, 요즘은. 사진사는 쌍꺼풀이 짙은 매점 여자에게 말했다. 매점 안은 멸치국물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녀는 멸치국물 냄새를 맡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우동 한 그릇 주세요. 그녀는 사진사의 맞은편에 앉아 우동을 먹었다. 다른 곳으로 옮길까 봐. 사진사의 말에 매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저씨! 사진 한 장 찍어주세요.
그렇게 말을 하고 그녀는 재빨리 우동 국물을 마셨다. 면에서는 말가루 냄새가 났지만 국물만은 시원했다.
사진사는 손바닥만 찍겠다는 그녀를 이상하게 보았다. 자난번에 어떤 녀석은 깁스를 한 팔만 찍겠다고 하더니만, 원. 그녀는 손바닥에다 글을 썼다. "갈매기야! 나도 고맙다. 그런데 넌 어디로 갔니" 글씨를 너무 크게 쓴느 바람에, 넌 어디로 갔니, 라는 문장은 손가락에다가 썼다. 손바닥이 간지러워서 쓰면서도 자꾸 웃음이 났다. 사진을 보고서야 문장 마지막에 물음표를 찍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새끼손가락에 물음표를 그려 넣고는 다시 한 장을 찍었다. 천천히 상이 드러나는 사진을 보고 그녀는 그 손바닥이 도무지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거기에는 낯선 손이 있을 뿐이었다. 아직 세상의 고통을 모르는, 그 저 작고 통통한 손이었다. 그녀는 즉석 사진을 비닐봉지에 넣어 잡동사니를 파는 남자에게 갔다. 이것 좀 보관해 주세요? 그녀는 남자에게 사진을 주었다. 이 아가씨가! 내가 뭐 우체부요. 암튼, 거기다 던져놔요. 공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그녀는 무심코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잡동사니를 파는 남자는 그녀가 건네즌 사진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바람에 돗자리가 펄럭였다.


'밥맛 좋아지는 쌀' 은 동네 가게에서 팔지 않았다. 그녀가 단골로 가는 ' 믿음 슈퍼' 주인은 그런 쌀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전국에 체인망을 갖추고 있는 할일 마트로 갔다. 할이 ㄴ마트에는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얹어주겠다는 상품들이 많았다. 그녀는 건전지를 준다고 해서 랜턴을 샀고 군만두를 끼워준다고 해서 물만두를 샀다. 사람들이 몰려 잇는 곳에 가보니 목캔디 두 통을 한 통 가격에 팔고 있었다. 즉석 사진기를 사면 필름 두 통을 서비스로 준다는 말에 그녀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즉석 사진기 가격은 그녀가 한 달마다 내는 수도 요금하고 똑같았다. 물건들을 너무 많이 사서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탔다. 사진기를 산 기념으로 룸미러에 비친 택시 운전사의 얼굴을 찍었다. 택시에서 내릴 때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사진을 선물로 주었다.


새 쌀로 밥을 지었다. 유기농법으로 키웠다는 채소로 샐러드를 만들었고 DHA가 함유되어 있다는 달걀로 달걀말이를 했다. 뉴스에서는 휴일 고속도로의 상황르 보여주었다. 선글라스를 낀 운전자가 말을 했다. 강릉까지 가는 데 열 시간이 걸렸어요. 그녀는 차가 막힌 고속도로에서 하루를 보내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려는 순간, 그녀는 갈매기를 보았다. 차로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서 오징어를 팔고 있는 청년. 마스크를 껴서 정확하게 얼굴을 확인할수는 없지만 그녀는 그 청년이 갈매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깁스를 한 손으로 오징어를 파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뺑소니를 쳤던 그놈,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달걀말이를 밥 위에 얹으면서 그녀는 갈매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갈매기는 오징어를 팔면서 운전자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냉장고 문을 보았다. 거기에는 갈매기가 준 사진이 붙어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갈매기가 누나 고마워! 하고 말해 주었다.

관장은 열람실을 하나 없애고 거기에 새로운 독서 공간을 만들었다. 바닥에는 카펫을 깔았고 가장자리에는 푹신한 가죽 쇼파를 놓았다.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커다란 쿠션을 갖추어놓았다. 베란다에는 야자나무와 해변용 의자를 갖다놓았고, 정원에 있는 나무 아래에도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자를 놓았다. 시민들의 반응은 좋았다. 단지,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더 일찍 도서관에 와야 했다. 새벽이면 줄이 도서관 정문 밖에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S에게 목캔디를 선물했다. 목캔디를 먹으도 S의 금속성 목소리는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목캔디를 들고 있는 S의 손을 즉석 사진기로 찍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들고 있는 손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한번 주먹 좀 쥐어봐! 그녀는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는 H에게 말했다. 왜? H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허공을 향해 권투를 하는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미안해. 사진 찍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정기간행물실을 도망치듯 나왔다. 그녀는 사진들을 벽에 붙였다. 사람들의 다양한 손 모양이 방을 채워갔다.


그녀는 9년째 도서관에서 일을 했다. 밥맛이 좋아져서 살이 자꾸 불어났고 바지를 한 치수 늘려 입었다. 그녀는 저녁 10시면 잠이 들었다. 단지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11시에 잠이 들었다. 위염은 깨끗하게 나았고, 대신 식도염에 걸렸다. 그래서 여전히 밥을 먹고 30분 후에 약을 먹었다. 눈이 자주 내리던 지난 겨울엔 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다. '아늑한 미용실' 은 폭설을 견디지 못하고 지붕이 무너졌다. 그 안에서 잠을 자고 있던 미용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창 너머 동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포클레인이 집들을 허물고 있었다. 곧 아파트가 세워질 것이라고 했다.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 학생의 손을 찍으려다가 즉석 사진기가 고장났다. 하지만 그녀는 고장난 사진기가 더 싱상 아깝지 않았다. 이제 방에는 사진들을 붙을 틈이 없었다. 퇴근 무렵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전거를 놔두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빗방울이 굵어지자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가게를 그만두고 근처 식당에 취직을 했다. 어머니가 일하는 식당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아서 그녀는 대신 동생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잘 안 들리거든요. 다시 걸어주세요. 그녀에겐 동생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만 동생에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금 우울해졌다. 그래서 태어나서 한 번도 우산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녀는 72번 버스를 탔다. 좌석이 비어 있었는데도 앉지 않았고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았다.


도서관에 세워둔 자전거 페달이 녹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