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조>(재수생ver.) 그 가을의

김명식200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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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생ver.)

 

 그 가을의 어느날이었다. 이미 가끔식 장수생으로 자리보전을 하던 석담은 그날도 강남메가스터디에 출첵하기 바쁘게 EBS 파이널을 찾았다. 그것도 그 무렵에는 거의 풀지 않던 언어와 수리였다. 벌써 몇 달 째 언어와 수리를 가까이 않던 고죽은 그런 선배의 집착에 까닭 모를 심화를 느끼며, 듣기평가를 틀기 바쁘게 선배의 곁을 물러나고 말았다. 어딘가 모르게 선배의 과장된 집착에는 5수생 후배의 방황을 비웃는듯한 느낌이 드는데가 있었다. 그러나 한동안 매점에서 서성이는 사이에 그는 문득 장수생 선배의 하는 양이 궁금해졌다.

 

 자습실에 돌아오니, 석담은 컴퓨터용 싸인펜뚜겅을 덮어 놓고 눈을 감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방금 풀다 그만 둔 것인듯 언어 60문제중에서 앞의 55문제만 풀려 있었다.

 "강남대성의 설법대반 재수생은 60분에 언어 60문제를 풀었다고 한다. 나는 벌써 70분인데 60문제를 단숨에 풀 기력도 남지 않았으니...."

 그렇게 탄식하는 석담의 얼굴에는 자못 처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고죽은 그 말을 듣자 억눌렸던 심화가 다시 솟아올랐다. 선배의 그 같은 표정은 그에게는 처연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만만함으로 비쳤다.

 

 "설령 이 문제를 다 푸시고, 100점을 받고, 여기서 이만기가 솟아오르며, EBS가 노닌들, 그게 선배를 위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고죽은 자신도 모르게 심술궃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친 채 기진해 있던 석담은 처음 그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 말의 참뜻을 알아들은 듯 매서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소리냐? 그와같이 드높은 경지는 재수를 하는 이면 누구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이르러보고 싶은 경지다."

 "거기에 이르러 본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고죽도 지지않았다.

 "만점에 이르러 보지도 않고, 거기에 오르면 더 높은 경기가 없을가를 근심하는구나. 그럼 너는 일찍이 재수종합반의 고수들이 성취한 드높은 경지로 플랫카드에 이름을 휘날린 선배들이 모두 쓸모없는 일을 하였단 말이냐?"

 "현역인 재학생들을 속이고, 재수생들을 속인 것입니다. 도대체 모의고사에 만점을 받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지식의 현묘(玄妙)함이 있은들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도로 이름하면, 2등급이나 3등급에게도 도가 있고, 뜻을 어렵게 꾸미면, 현역의 내신시험 또한 현묘함이 있습니다. 플랫카드에 드리우는 이름이 있다하나 대학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으며, 성적표가 남겨진다 하나 재수학원도 세월에 쇠퇴해가는데 하물며 성적표이겠습니까? 거기다가 그것은 옆에있는 같은 재수생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했고, 재수생들에 벌벌떠는 현역들을 도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허망함과 쓰라림을 감추기 위해 이를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경지를 설정하여 자기를 위로하고 고1과 고2들을 홀렸던 것입니다....."

 

 그 때였다. 고죽은 불의의 통증으로 이마를 감싸안으며 엎드렸다. 노한 석담이 앞에 높인 듣기평가 테잎과 라디오을 집어 던진것이다. 샘솟듯 솟는 피를 훔피고 있는 고죽의 귀에 장수생 선배의 광기어린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내 일찍이 네놈의 천골을 알아보았더니라. 가거라. 너는 진작부터 대구 범성학원에 나앉어야 할 놈이었다. 용케 점수를 숨기고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이제 나가면 모의고사 1회에 등수는 후히 받을 게다....."

 

 결국 그자리가 그들의 마지막 자리였다. 그 길로 강남 메가를 나선 고죽이 다시 돌아온 것은 이미 선배가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벌써 5년 전의 일이건만 고죽은 아직도 희미한 아픔을 느끼며 이제는 주름살로 덮여 흉터가 벌로 드러나지 않는 왼쪽 이마어름을 만져 보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떠오르는 선배의 얼굴은 미움도 두려움도 아닌, 문제풀이의 속도와 점수. 그것이었다.

 

 "선배님, 김군이 왔습니다."

 다시 추수의 목소리가 그를 끝모를 회상에서 깨나게 했다. 이어 교실문이 열리며 초헌의 둥글넓적한 얼굴이 나타났다. 대할 때 마다 100점의 0을 대하는 것과 같은 유별난 애정을 느끼게 하는 후배였다. 후배가 무던하다거나 이렇다할 불평 없이 2년 가까이나 그가 자습실을간 후 빈 자리를 대신 채워주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모의고사 때문이었다. 수능기출문제를 풀기도 전에 파이널이니 뭐니, 사탐 교과서도 모르면서 손주은이니 EBS를 깝쳐대는 요즈음 젊은 재수생들답지않게 초헌은 교과서로만 2년을 채웠다. 또 재수경력이 5년 이라고 하지만 5년을 하루같이 학원에만 붙어 산 그에게는 결코 짧은 것이 아닌데도 그 해 4월 전국연합평가에선 언수 100점을 수줍게 맞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풀이는 교과서적인것 같으면서도 인강의 힘으로 충만되어 있어, 고죽에게 남 모를 감동을 주곤 했다. 젊었을 때는 그토록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재수생활이 쌓이면서 느껴지는 선배 석담의 풀이를 연상케하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교보에 나가보시렵니까? 추수 누님 말을 들으니, 문제집이 좀 남은것 같은데..."

 학원의 선배에게 인사도 잊은 채 초헌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더듬거렸다. 그의 내숭스러워 뵈기까지 하는 어늘도 젊었을 때의 고죽같으면 못 견뎌 했을 것이리라.

 "그러니까 한권이라도 더 확보해야지. 그래, EBS 만점마무리는 기어이 내놓지 않겠다더냐?"

 "EBS 집필진이 출판할 때 10월의 출판품목에만 있던 거라 지금 내놓기는 어렵다 했습니다."

 "오르비의 자료를 준다고해도?!"

 "누구의 자료라도 미리 줄수는 없다는게 출판진의 생각이었습니다. 교보쪽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알 수 없는 것들이구나. 오늘은 내가 직접 만나 봐야겠다."

 "정말 나가시겠습니까?"

 "잔말말고 조퇴증이나 끊어 오너라.."

 고죽이 재촉하자 초헌은 묵묵히 나갔다. 궁금하다는 표정은 여전하였지만 선배가 왜 그렇게 집요하게 시험지와 문제집을 거두어 들이려 하는지는 그날도 역시 묻지 못했다.

 

(중략..)

 

"초헌아"

 고즉은 조용하게 초헌을 불렀다. 미욱해 보이는 얼굴에 비해 수리를 치고 있을 때도 귀가 밝은 듯 초헌은 몇 번 부르지 않아 머리를 들었다.

"선배님 무슨 일이십니까"

머리가 띵한 상태에도 상체를 벽에 기대고 있는 고죽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사물함에 가득차 있는 내 모의고사 성적표를 가져오녀라."

"네?"

"모아놓은 모의고사 성적표를 꺼내 놓으란 말이다."

 그러자 초헌은 시키는 대로 했다. 여기저기서 꺼내 놓으니 10수를 하면서 쌓인 성적표는 150장이 훨씬 넘었다. 성적표는 한 교실 바닥을 모두 덮을 만 했다.

"고죽씨 뭐 자습시간에 뭐 하시는 겁니까?"

그제서야 메가스터디 대표이사인 손주은도 궁금한 듯 물었다. 자습시간에 다른 짓을 하고 있는 고죽의 행동이 10수한 장수생의 행동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실이 어둡고 허리가 불편하구나."

"스탠드가 어디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한번찾아보겠습니다."

 여간해서는 고죽이 하는 일을 캐묻지 않는 초헌이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가더니 3M의 삼파장 스탠드와 앉기에 편한 듀오백의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안이 수배나 밝아지고 앉기에 편해지자 고죽은 초헌에게 명했다.

"지금부터 모의고사 시험지를 하나씩 내게 펴보이도록 해라."

초헌은 고죽이 시키는 대로 했다. 첫번째 시험지는 2005년 6월 학평 의 시험지였다.

"교육과정평가원이 주최한 모의수능인데, 오절(五節 : 언어, 수리, 외국어, 사탐, 제2외국어)의 난이도가 고르지 못했다.왼쪽으로 미뤄 놓아라."

그 다음은 2006 9월 대성모의평가 시험지였다. 

"이미 신경향과 창의성을 강조해 놓고 오히려 EBS 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단지 베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왼편으로 미뤄 놓아라."

그 다음은 2006 11월 정일 모의고사 시험지였다.

"정일(正一)시험은... 내용도 형식도 엉망이다."

고죽은 사이비라고까지 극언했다.

 

 계속해서 고죽은 한장한장 자평을 해나갔다. 현역들이 푼 시험지를 대하듯 준업하고 냉정한 평이었다. 시중의 모의고사에 있어서는 EBS를 반영했을 경우에는 그 임모나 집자의 부실함을 지적하여, 그리고 인강의 내용이 반영되었을 경우에는 그 교졸과 천격을 탓하면서 모두 왼편으로 제쳐놓았다. 교과서의 엄격함과 10수인 장수생의 눈까지 곁들이니 오른편으로 넘어갈 게 없었다...

(그만씀. 힘들다.) 

 

 

 

허생전에 필받아서 갈겨봤습니다. 생각했던 것 보다는 제가 쓴게 재미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