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무엇이 되겠다는 사람은 바라는 것이 뚜렷해야 합니다. 연주가가 되겠다는 사람은 연주가가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강력한 바램이 없으면 좋은 연주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저런 유혹에 흔들립니다. 다른 이들이 그림을 잘 그리면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싶고 운동을 잘하면 자신도 운동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갈팡질팡한 가운데에서 연주가로서의 자화상이 자꾸 흔들리게 됩니다. 이러한 흔들림은 학생 때에 자주 겪는 일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과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방황도 어떤 끝에 도달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연주가는 음악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연주가라면 음악적으로 바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음악의 종류도, 어떻게 해석하겠다는 방향도 명확합니다. 이러한 명확성은 1+1=2와 같은 수학적 명확성이 아닙니다. 그 명확성은 방향의 명확성입니다. 뭔가를 바란다는 것은 바라는 것으로의 추구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술가를 흔히 구도자(求道者)에 비유하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는 연주가는 그냥 연주가일 뿐 예술가의 위치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바램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절감하고 그 없는 것에 도달하려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바라는 것의 성취는 항상 어떤 창조행위를 의미합니다. 연주가를 흔히 '재창조자'라고 부르는 일이 많습니다마는 사실 '재(再)'라는 글자는 불필요합니다. '재창조'라는 말은 작곡가가 이미 작곡한 것을 연주한다는 의미로 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사실 연주자의 창조적인 몫은 작곡가의 다른 종류의 것이기에 '창조'라는 말도 합당한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는 연주가는 연주곡의 선택이 막연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곡인지 아닌지 조차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곡이 바라는 것도 모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연주곡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끔 연주회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표기를 위해 제목을 물어보거나 누구의 몇 번 연습곡이냐를 묻는 연주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연습할 때에는 전혀 모르다가 연주회 직전에야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주는 들어보나 마나 겨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주에서는 연주자의 창조적 기여라든지 그 음악에 대한 애정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 곡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찾은 것도 없고, 찾은 것이 없으니 남에게 줄 것도 없습니다.
바라는 사람의 특징은 무언가를 찾는 것입니다.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보물이 눈앞에 놓여있어도 찾지 않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습니다. 찾는 사람은 범상한 일에서도 엄청난 것을 봅니다. 연주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얘기합시다. 연주가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음색을 얻을까 하고 고심합니다. 좋은 음색을 얻기 위해 이러저러한 방법을 다 써봅니다. 같은 악기로 연주해도 연주자가 다르면 음색이 달라집니다. 음색도 찾아내야 찾아집니다. 자기가 바라는 음색이 없이는 그것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바램은 음색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품 연구, 작품해석, 연주의 표정도 어떻게 하고 싶다는 열정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질문2 :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질문은 무언가 자신의 한계를 넘는 것을 요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거기에 제한을 가하는 성격의 것입니다. 바란다고 하여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라는 것은 더디게 성취되는 것이기도 하여 금방 손에 쥘 것 같지만 손밖에 있는 일이 흔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바라면서도 자신이 현재 위치해 있는 지점을 -희망적인 생각과 상관없이- 밝혀보라는 요구를 택하여 사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일은 스스로를 위해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완벽성에 대한 생각을 더욱 장려할 것입니다. 연주가는 연주할 곡에 끌려 다니는 것은 아직 '할 수 없다' 는 것을 뜻합니다. 연주에게 '할 수 있다' 는 것은 곡을 자신의 의지대로 재현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 을 따지지 못하게 하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타인의 이목'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는 '할 수 있는 것'을 잘 살피지 않고 '이 정도의 것은 해야겠지' 하는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런 생각에 빠지면 그는 이미 타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정신을 가지고 좋은 연주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될 말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성장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음악학의 한 분과 중에는 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학문은 연주 테크닉과 사람의 신체와의 관련성을 연구합니다. 어떤 조건을 가진 사람은 어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유리하다든지, 또는 어떤 체형이 어떤 테크닉을 가능케 하는 것들을 살피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손크기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모든 손가락에 두루 힘이 있어야 좋습니다. 특히 무슨 악기를 배우기 전에 이러한 생리학적 검토를 하는 것은 대단히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시간을 들이고도 신체조건 때문에 성공적인 연주자가 될 수 없다면 그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탁월한 연주자들의 신체조건을 조사해보면 반드시 이상적 체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는 창조성을 발휘하는 연주자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장 뒤에는 연주자들의 강력한 바램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조건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연주자는 조건이 좋은 사람보다 더욱 노력하여 '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성장시킨 사람입니다.
능력은 단숨에 자라지 않습니다. 평생을 한 악기에 매달려도 좋은 연주자가 되려면 아주 재미없는,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반복적 연습을 거쳐야 합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비교적 쉽게 연주 테크닉이나 음악성이 체득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개의 경우 내가 지금 당장 어떤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보다 큰 문제는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지 않는, 예민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노력해야 할까요? 노력하는 것이 재미있어질 때까지 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재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공부에서 어떤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공부는 지속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의 연주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연주에 남이 흥미를 가져주기 바란다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때에는 자기의 연주가 재미있는가 하는 것도 같이 물어야 합니다.
명령1 : 너 자신을 알라
자신이 바라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안다 함은 자신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자신을 안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이외에도 더욱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점만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를 잘 살피면 자신을 아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누구의 자식이고, 어떤 학교를 나왔고 하는 것들은 바꿀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그 '바라는 것' 은 지금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그 '바라는 것' 속에서만 헤매게 될 때에는 '구름 잡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기에 '할 수 있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바라는 것'이 '할 수 있는 것' 을 풍요롭게 할 수 있고, 그것의 반대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물음은 고착적인 자기파악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적인 자기파악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실현(自己實現)이란 말은 자기확인(自己確認)과는 다릅니다. 예술가는 자기실현을 지향해야 하는데, 이는 이미 있는 것에 머무른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새로운 처지에 이르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은 자기확인을 뜻하지 않고 자기실현을 뜻합니다. 이 유명한 구호가 단지 자기 확인에 멈춘다고 하면 그 의미는 결코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구호가 얼핏 자기확인만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 단계, 즉 자기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을 같이 명령하지 않는다면 예술가적 창조행위를 돕지 못할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구호는 결과적으로 자기능력의 개발을 추진케 할 것입니다. 머리 속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연주자는 철저하게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남이 잘하는 것은 자신이 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남이 잘하는 것에 빨려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연주를 가늠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주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남이 100미터 건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1미터를 즐거워하십시오. 그 1미터가 자신의 예술적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을 그대로 자신에게 옮겨 심으려고 하기보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잘 가꾸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장점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작은 단점에는 대범하게 대처하고 장점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장점입니다, 자신은 슈베르트를 더 잘 할 수 있는데, 남이 쇼팽을 잘한다고 자신도 거기에 매달린다면 잘못된 일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일입니다.
연주교육처럼 개인화된 교육이 드뭅니다. 아직까지도 연주자를 길러내는 교육은 개인레슨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량교육이 되지 않는 연주교육은 예술과 자기발견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나란히 배운다고 해도 집단교육의 진도는 곧장 어려움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우는 사람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교육의 입장은 이 개인레슨의 입장을 부러워 할 것입니다. 다른 학과목들을 가르칠 때에는 똑같은 것을 배워 각각 다른 성과를 내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이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해서라기 보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입니다. 사실 결과가 좋지 않은 학생들은 다시 개인수업을 받는 것이 타당한 것이지요. 바로 이 바람직한 상태가 연주교육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좋은 연주교사라면 학생을 잘 관찰하여 그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할 것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똑같이 강요하는 방식의 연주를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 교사의 성공은 학생의 성장에 달려 있습니다. 선생은 훈련자이며 협조자입니다. 훈련은 필요합니다.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고 훈련받는 일이 교육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계속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학생은 선생님이 협조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즉 훈련에 해당하는 것을 제때에 잘 마무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음악을 만드는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 선생을 협력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학생을 훈련생으로만 생각하는 선생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선생이거나 탁월한 선생일 수가 없습니다. 선생은 훈련도 학생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학생의 자기발견에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스승은 항상 위대한 학생입니다. 왜냐하면 학생 개개인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연주자도 항상 학생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배우면서 자기발전에 주력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발전이 체질화된 사람입니다. 그는 호기심이 가득합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무엇을 찾는다는 것이 그에게는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무엇을 찾으면서 언제나 자신감도 함께 찾습니다.
명령 2 : 자연스러우라
연주교육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아마 '자연스러우라'는 명령어로 생각됩니다. 기악교육이건 성악교육이건 간에 이 말은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이 말은 흔히 막연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라는 구체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뭔가 부자연스러운 연주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오는 것이기에 말하는 사람 자신도 어떤 명확한 구체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말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풀릴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부자연스러운 연주란 '어렵게 하는 연주'를 두고 말합니다. 쉽게 하는 것을 두고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자연스러우라'는 주문은 '쉽게 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어려운 부분은 연주하는 사람이 '자연스러우라'는 말을 들은 즉시 쉽게 연주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쉽게 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연주란 '비자연(非自然)'이나 '부자연(不自然)'을 자연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울 리가 없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들리는 부분은 가장 애쓴 부분이다'라고, '자연스러움'은 '애씀'에 의해 얻어집니다, 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우리의 일상어법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연주의 '자연스러움'에는 있습니다. 물론 자연스러운 연주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에 현혹되면 안됩니다. 음악가들은 '천재'라는 감투를 쓴 사람들이 많아서 이들이 거의 노력 없이 무엇을 많이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손해입니다. 자신이 어떤 천재성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의 수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바하의 첫째 아들 프리드만은 아들 중 가장 재능이 많은 음악가였습니다만 칼 필립이나 요한 크리스찬에 못 미치는 음악가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천재는 애씀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애씀이 있으면 없는 천재성도 나타납니다. 사실 베르디와 바그너의 초기 작품을 보면 거기에 어떤 천재를 엿볼 수 있는 점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작곡가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어떤 연주가가 학교 다닐 적에는 형편없었다고 하는 질시의 말을 우리 주위에서 들을 수 있는데, 이는 뒤집어 보면 후에 잘하게 됐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내리깎는다는 말이 높이는 말이 된 것입니다.
자연스러움과 애씀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 얘기해 봅시다. 자연스러움은 그 속에 들어있는 진짜 알맹이를 잘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이 저절로 감춰져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움이 힘든 일을 감쪽같이 처리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이 무엇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연주자가 활달한 손놀림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때에 우리들은 그 손가락 놀림을 상당히 파악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서 느린 동작으로 보면 우리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때에는 자연스럽게 보이던 것이 자연스럽게만 여겨지지 않고 연주가의 애씀도 같이 보이게 됩니다. 애씀은 드러나면 좋지 않습니다. 느린 동작에나 나타나는 편이 좋습니다. 마치 좋은 일을 하고 '내가 좋은 일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 선행을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씀은 드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애씀은 자연스러움의 옷을 꼭 입어야 합니다.
자연스러움은 실수를 안 하려고 하여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해 내고자 하는 음악을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수없이 넘어갔다는 정도의 수준은 자연스러움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움은 연주를 쉽게 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인데, 그 연주가 단순히 쉬운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 쉬움이 음악의 특징에 잘 부합되는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의 실현은 가장 높은 예술의 경지일 것입니다.
자연스러움이란 어떤 고착된 상태가 아닙니다.. 같은 곡을 연주한다 해도 이 사람의 자연스러움과 저 사람의 자연스러움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연주자들이 각각 다른 신체조건을 갖고 있고 음악적으로 바라는 것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움에 이르는 길은 각자의 시행착오나 실수를 통해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주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수많은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연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연습은 시행착오나 실수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연주·해석·표정
연주자를 해석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연주자'가 실제의 음향으로 청중을 만난다는 뜻이 두드러진 반면, '해석자'는 음악과의 관련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해석'은 무엇의 해석입니까? 이는 두말할 것 없이 곡의 해석입니다. 물론 '연주'도 곡을 연주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연주'는 '해석'처럼 곡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작곡가의 의도나 의지를 드러낸다는 의미를 그리 강하게 풍기지는 않습니다. '연주'가 '해석'의 차원이 되려면 곡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합니다. 악보로 놓여있는 곡을 겨우 소리로 만들었다면 그것을 해석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해석을 원할 때에는 작품에 대한 관심이 증가합니다. 이럴 경우에 해석자는 곡의 의미를 캐물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곡의 의미는 작곡자가 곡을 만들 때의 의도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음악은 시대적 양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관해 공부를 할뿐만 아니라 당시의 연주관습에 대해서도 공부합니다. 한편 이론분야(화성학·대위법·분석 등)의 공부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마는 이 공부가 연주와 관련되어 생각되는 일이 흔치 않습니다. 연주가들이 이론분야의 공부를 싫어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걸 배워서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들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론학습의 대부분이 작곡의 초보과정처럼 되어 있는 데에도 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주자들에게 이 부분의 공부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작곡 학도의 방식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곡의 전체적 구조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파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주가들은 흔히 여러 번 반복 연주함으로써 나름대로 곡의 구조에 대해 파악합니다. 그러니까 그 곡을 꼭 어떤 기호나 용어로 표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파악한 것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연주자들에게는 거기까지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좋은 연주자들의 연주는 많은 경우 곡의 구조와 잘 조화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 오른손의 선율이 왼손의 화성보다 더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 모방양식에서 테마가 다른 대선율보다 더 잘 들리도록 연주하는 것 등은 구조적 파악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인데, 좋은 연주가들은 이런 일에 실패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해석자가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도 작곡자의 뜻이 들어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곡자의 의도를 추구하다 보면 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첫째로, 작곡자의 의도 표시를 기록한 것들이 많지 않습니다. piano나 forte의 표시도 없는 곡에서 연주가들은 작곡가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어떤 방식으로든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19세기에 옛 악보를 재발견한 사람들은 그 음표의 단위가 아주 큰 것을 보고서, 옛 음악은 무조건 느린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연주했습니다. 이런 느린 연주가 옛 음악을 연주하는 데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은 나중에 나옵니다마는, 옛날에는 어떻게 연주했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작곡가의 의도를 알면서도 무시하는 연주도 있을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연주가가 새롭게 해보는 연주가 있을 수도 잇습니다. 연주자가 결국에 도달하는 지점은 자신의 의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연주할 곡이 더 억센 울림을 가져야 할텐데 자신의 체력적 조건 때문에 더 부드러운 울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주는 더 자신에게 맞춘 음악이 되겠지요. 이런 것이 곡이 요구하는 것과 명확하게 맞지 않을 경우, 해석 자체가 성공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연주자들의 '자기 방식'의 독자적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결점을 눈가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또한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이루어진다면 타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여기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해석을 바라는가?' 이 문제에서 흐려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들려질 수 없고 생각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곤란하겠지요. 그러한 해석은 들려 질 수 있을 때까지 더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오늘날의 연주가들은 해석자이기 보다는 '대중 앞에서 무언가 인상적인 소리를 내는 사람'으로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강합니다. 음악가 중에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 연주가입니다. 연주가는 연주가 끝나는 즉시 박수로 보답 받습니다. 연주자는 남을 도취시킵니다. 연주자는 자신도 청중에 의해 도취될 수 있기를 강력히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연주로 청중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주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연주자들은 대단히 청중을 의식합니다. 심지어는 작곡가를 의식하는 것보다 더 할지 모릅니다. 우선 연주자들은 청중들에게 흠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틀리지 않도록 테크닉을 잘 연마하려고 합니다. 연주자들은 청중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그래서 곡예와 같은 어려운 테크닉을 잘 연마하여 그것을 보이려고 합니다.
오늘날의 연주 테크닉은 대부분의 경우 기계를 상대로 연마되고 있습니다. 즉 많은 학생들이 음반에 녹음된 것과 자신의 테크닉 정도를 비교하며 공부하는 일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음반이라는 것은 아주 잘하는 사람이 수차례에 걸쳐서 녹음을 한 후, 좋은 부분들만을 골라서 그것들을 이어서 만듭니다. 그러니까 실제의 연주에서는 그 정도의 완벽성이 없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어찌 됐든 녹음된 상태는 대단히 탁월한 테크닉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완벽한 모델은 연주가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것을 무조건 모방하려는 경향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음반은 도움을 주는 만큼의 피해도 같이 줄 것입니다. 모방을 하고 있다면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 보다는 자기 발견에 더 힘써야 합니다. 음반의 연주자는 자신과 손 크기도 다르고 호흡길이도 다르고 성대 구조도 다르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모방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불리한 방법으로 연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음반은 참고로 하되 결국에는 그걸 버려야 자신이 연주가 삽니다. 아직 되지 않은 테크닉은 섣불리 하기보다는 기다려야 합니다. 심지어는 잘 할 수 있는 것까지도 사용을 미루었다가 나중에 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오늘날은 음반의 존재 때문에 완벽성에 대한 귀가 더욱 예민해진 관계로 아직 설익은 채로 하게 되면 그만큼 핀잔을 많이 듣게 될 것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일은 테크닉을 연주의 중심점으로 삼는 점입니다. 테크닉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고, 즉 테크닉이 어떤 음악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지 않고 음악을 지배할 때에 음악은 시들고 말 것입니다. 테크닉을 위해 음악을 하지 마십시오. 음악을 위해 테크닉을 배우십시오. 이곳이 거꾸로 된 상태라면 아직 훌륭한 음악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상태가 뒤집힐 때에 비로소 여러분의 음악은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손가락은 이런 순서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해있으면 그것은 아직 좋은 피아노 연주가 못됩니다. 성악가가 높은 소리를 낼 때에 소리를 위로 띄워 아랫배로 그 소리를 받쳐 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발성이지 성악예술은 못됩니다. 연주는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지 테크닉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연주에는 해석 이외에 또다른 성격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표정입니다. 연주에도 표정이 있습니다. 깨끗하고 매끈한 연주와 해석이 전혀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생각해 봅시다. 뜻도 모르는 외국어 가사로 노래부르는 사람의 경우, 발음도 정확하고 음악도 틀리지 않았지만 대단히 무미건조한 음악을 들려줍니다. 그 가사의 뜻을 아는 사람은 언어의 의미에 따라 단어들을 각기 알맞게 발음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악적 프로그램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를 모르고 무조건 소리내는 것은 싱거운 연주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음악외적인 것만이 연주의 표정과 관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악에서 표정을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프레이즈 구분 짓기, 아티큘레이션, 템포, 음색 변화 등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공부는 참으로 요긴할 것입니다.
마무리
이 글은 무엇을 바라야 할지, 어떤 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얻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자신의 자유에 관한 문제이고 자신의 결단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무한대의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지만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불가피성의 압박감이 있습니다. 연주의 해석이나 표정에 관해서는 단지 스치고 지나간 정도입니다. 이 문제는 학술화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변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곡을 두고 거기에 관해서 논했다고 하면 이런 막막한 글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 글은 대단히 큰 주제를 표면적으로 가볍게 다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것에 대해 달가워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연주자가 자신의 일을 스스로 설계하고 결단하여, 거기에서 스스로 만족감을 얻고, 다른 사람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이 글이 이러한 바람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생각하고 노력하는 사람과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주자에게 주는 글
질문1 : 무엇을 바라는가?
연주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무엇이 되겠다는 사람은 바라는 것이 뚜렷해야 합니다. 연주가가 되겠다는 사람은 연주가가 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강력한 바램이 없으면 좋은 연주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저런 유혹에 흔들립니다. 다른 이들이 그림을 잘 그리면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싶고 운동을 잘하면 자신도 운동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갈팡질팡한 가운데에서 연주가로서의 자화상이 자꾸 흔들리게 됩니다. 이러한 흔들림은 학생 때에 자주 겪는 일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과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방황도 어떤 끝에 도달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연주가는 음악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연주가라면 음악적으로 바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음악의 종류도, 어떻게 해석하겠다는 방향도 명확합니다. 이러한 명확성은 1+1=2와 같은 수학적 명확성이 아닙니다. 그 명확성은 방향의 명확성입니다. 뭔가를 바란다는 것은 바라는 것으로의 추구가 명확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술가를 흔히 구도자(求道者)에 비유하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는 연주가는 그냥 연주가일 뿐 예술가의 위치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바램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절감하고 그 없는 것에 도달하려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바라는 것의 성취는 항상 어떤 창조행위를 의미합니다. 연주가를 흔히 '재창조자'라고 부르는 일이 많습니다마는 사실 '재(再)'라는 글자는 불필요합니다. '재창조'라는 말은 작곡가가 이미 작곡한 것을 연주한다는 의미로 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사실 연주자의 창조적인 몫은 작곡가의 다른 종류의 것이기에 '창조'라는 말도 합당한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는 연주가는 연주곡의 선택이 막연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곡인지 아닌지 조차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곡이 바라는 것도 모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연주곡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가끔 연주회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표기를 위해 제목을 물어보거나 누구의 몇 번 연습곡이냐를 묻는 연주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연습할 때에는 전혀 모르다가 연주회 직전에야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주는 들어보나 마나 겨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주에서는 연주자의 창조적 기여라든지 그 음악에 대한 애정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그 곡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찾은 것도 없고, 찾은 것이 없으니 남에게 줄 것도 없습니다.
바라는 사람의 특징은 무언가를 찾는 것입니다.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보물이 눈앞에 놓여있어도 찾지 않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습니다. 찾는 사람은 범상한 일에서도 엄청난 것을 봅니다. 연주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얘기합시다. 연주가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음색을 얻을까 하고 고심합니다. 좋은 음색을 얻기 위해 이러저러한 방법을 다 써봅니다. 같은 악기로 연주해도 연주자가 다르면 음색이 달라집니다. 음색도 찾아내야 찾아집니다. 자기가 바라는 음색이 없이는 그것이 찾아지지 않습니다. 바램은 음색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품 연구, 작품해석, 연주의 표정도 어떻게 하고 싶다는 열정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질문2 :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질문은 무언가 자신의 한계를 넘는 것을 요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거기에 제한을 가하는 성격의 것입니다. 바란다고 하여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라는 것은 더디게 성취되는 것이기도 하여 금방 손에 쥘 것 같지만 손밖에 있는 일이 흔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바라면서도 자신이 현재 위치해 있는 지점을 -희망적인 생각과 상관없이- 밝혀보라는 요구를 택하여 사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일은 스스로를 위해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완벽성에 대한 생각을 더욱 장려할 것입니다. 연주가는 연주할 곡에 끌려 다니는 것은 아직 '할 수 없다' 는 것을 뜻합니다. 연주에게 '할 수 있다' 는 것은 곡을 자신의 의지대로 재현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 을 따지지 못하게 하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타인의 이목'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는 '할 수 있는 것'을 잘 살피지 않고 '이 정도의 것은 해야겠지' 하는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런 생각에 빠지면 그는 이미 타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정신을 가지고 좋은 연주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될 말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성장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음악학의 한 분과 중에는 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학문은 연주 테크닉과 사람의 신체와의 관련성을 연구합니다. 어떤 조건을 가진 사람은 어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유리하다든지, 또는 어떤 체형이 어떤 테크닉을 가능케 하는 것들을 살피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손크기를 갖추고 있어야 하고 모든 손가락에 두루 힘이 있어야 좋습니다. 특히 무슨 악기를 배우기 전에 이러한 생리학적 검토를 하는 것은 대단히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시간을 들이고도 신체조건 때문에 성공적인 연주자가 될 수 없다면 그 손실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탁월한 연주자들의 신체조건을 조사해보면 반드시 이상적 체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는 창조성을 발휘하는 연주자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할 수 있는 것'이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장 뒤에는 연주자들의 강력한 바램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조건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연주자는 조건이 좋은 사람보다 더욱 노력하여 '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성장시킨 사람입니다.
능력은 단숨에 자라지 않습니다. 평생을 한 악기에 매달려도 좋은 연주자가 되려면 아주 재미없는,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반복적 연습을 거쳐야 합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비교적 쉽게 연주 테크닉이나 음악성이 체득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개의 경우 내가 지금 당장 어떤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보다 큰 문제는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지 않는, 예민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노력해야 할까요? 노력하는 것이 재미있어질 때까지 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재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공부에서 어떤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공부는 지속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의 연주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연주에 남이 흥미를 가져주기 바란다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때에는 자기의 연주가 재미있는가 하는 것도 같이 물어야 합니다.
명령1 : 너 자신을 알라
자신이 바라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안다 함은 자신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자신을 안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이외에도 더욱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점만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를 잘 살피면 자신을 아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누구의 자식이고, 어떤 학교를 나왔고 하는 것들은 바꿀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그 '바라는 것' 은 지금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합니다. 그 '바라는 것' 속에서만 헤매게 될 때에는 '구름 잡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기에 '할 수 있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바라는 것'이 '할 수 있는 것' 을 풍요롭게 할 수 있고, 그것의 반대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물음은 고착적인 자기파악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적인 자기파악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실현(自己實現)이란 말은 자기확인(自己確認)과는 다릅니다. 예술가는 자기실현을 지향해야 하는데, 이는 이미 있는 것에 머무른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새로운 처지에 이르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은 자기확인을 뜻하지 않고 자기실현을 뜻합니다. 이 유명한 구호가 단지 자기 확인에 멈춘다고 하면 그 의미는 결코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구호가 얼핏 자기확인만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 단계, 즉 자기를 새롭게 형성하는 것을 같이 명령하지 않는다면 예술가적 창조행위를 돕지 못할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구호는 결과적으로 자기능력의 개발을 추진케 할 것입니다. 머리 속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연주자는 철저하게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남이 잘하는 것은 자신이 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남이 잘하는 것에 빨려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연주를 가늠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주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남이 100미터 건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1미터를 즐거워하십시오. 그 1미터가 자신의 예술적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을 그대로 자신에게 옮겨 심으려고 하기보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잘 가꾸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장점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작은 단점에는 대범하게 대처하고 장점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장점입니다, 자신은 슈베르트를 더 잘 할 수 있는데, 남이 쇼팽을 잘한다고 자신도 거기에 매달린다면 잘못된 일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일입니다.
연주교육처럼 개인화된 교육이 드뭅니다. 아직까지도 연주자를 길러내는 교육은 개인레슨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량교육이 되지 않는 연주교육은 예술과 자기발견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나란히 배운다고 해도 집단교육의 진도는 곧장 어려움을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우는 사람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교육의 입장은 이 개인레슨의 입장을 부러워 할 것입니다. 다른 학과목들을 가르칠 때에는 똑같은 것을 배워 각각 다른 성과를 내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이는 그것이 좋다고 생각해서라기 보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입니다. 사실 결과가 좋지 않은 학생들은 다시 개인수업을 받는 것이 타당한 것이지요. 바로 이 바람직한 상태가 연주교육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좋은 연주교사라면 학생을 잘 관찰하여 그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려고 노력할 것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똑같이 강요하는 방식의 연주를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 교사의 성공은 학생의 성장에 달려 있습니다. 선생은 훈련자이며 협조자입니다. 훈련은 필요합니다.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고 훈련받는 일이 교육에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계속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학생은 선생님이 협조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즉 훈련에 해당하는 것을 제때에 잘 마무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음악을 만드는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 선생을 협력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학생을 훈련생으로만 생각하는 선생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선생이거나 탁월한 선생일 수가 없습니다. 선생은 훈련도 학생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학생의 자기발견에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스승은 항상 위대한 학생입니다. 왜냐하면 학생 개개인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연주자도 항상 학생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배우면서 자기발전에 주력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발전이 체질화된 사람입니다. 그는 호기심이 가득합니다. 그는 계속적으로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무엇을 찾는다는 것이 그에게는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무엇을 찾으면서 언제나 자신감도 함께 찾습니다.
명령 2 : 자연스러우라
연주교육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아마 '자연스러우라'는 명령어로 생각됩니다. 기악교육이건 성악교육이건 간에 이 말은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이 말은 흔히 막연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라는 구체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뭔가 부자연스러운 연주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오는 것이기에 말하는 사람 자신도 어떤 명확한 구체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말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풀릴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부자연스러운 연주란 '어렵게 하는 연주'를 두고 말합니다. 쉽게 하는 것을 두고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자연스러우라'는 주문은 '쉽게 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어려운 부분은 연주하는 사람이 '자연스러우라'는 말을 들은 즉시 쉽게 연주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쉽게 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연주란 '비자연(非自然)'이나 '부자연(不自然)'을 자연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울 리가 없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들리는 부분은 가장 애쓴 부분이다'라고, '자연스러움'은 '애씀'에 의해 얻어집니다, 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우리의 일상어법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연주의 '자연스러움'에는 있습니다. 물론 자연스러운 연주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에 현혹되면 안됩니다. 음악가들은 '천재'라는 감투를 쓴 사람들이 많아서 이들이 거의 노력 없이 무엇을 많이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손해입니다. 자신이 어떤 천재성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의 수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바하의 첫째 아들 프리드만은 아들 중 가장 재능이 많은 음악가였습니다만 칼 필립이나 요한 크리스찬에 못 미치는 음악가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천재는 애씀이 있어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애씀이 있으면 없는 천재성도 나타납니다. 사실 베르디와 바그너의 초기 작품을 보면 거기에 어떤 천재를 엿볼 수 있는 점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작곡가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어떤 연주가가 학교 다닐 적에는 형편없었다고 하는 질시의 말을 우리 주위에서 들을 수 있는데, 이는 뒤집어 보면 후에 잘하게 됐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내리깎는다는 말이 높이는 말이 된 것입니다.
자연스러움과 애씀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 얘기해 봅시다. 자연스러움은 그 속에 들어있는 진짜 알맹이를 잘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이 저절로 감춰져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움이 힘든 일을 감쪽같이 처리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이 무엇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연주자가 활달한 손놀림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때에 우리들은 그 손가락 놀림을 상당히 파악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서 느린 동작으로 보면 우리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때에는 자연스럽게 보이던 것이 자연스럽게만 여겨지지 않고 연주가의 애씀도 같이 보이게 됩니다. 애씀은 드러나면 좋지 않습니다. 느린 동작에나 나타나는 편이 좋습니다. 마치 좋은 일을 하고 '내가 좋은 일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 선행을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씀은 드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애씀은 자연스러움의 옷을 꼭 입어야 합니다.
자연스러움은 실수를 안 하려고 하여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해 내고자 하는 음악을 잘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수없이 넘어갔다는 정도의 수준은 자연스러움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움은 연주를 쉽게 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인데, 그 연주가 단순히 쉬운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 쉬움이 음악의 특징에 잘 부합되는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의 실현은 가장 높은 예술의 경지일 것입니다.
자연스러움이란 어떤 고착된 상태가 아닙니다.. 같은 곡을 연주한다 해도 이 사람의 자연스러움과 저 사람의 자연스러움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연주자들이 각각 다른 신체조건을 갖고 있고 음악적으로 바라는 것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움에 이르는 길은 각자의 시행착오나 실수를 통해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주자가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수많은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연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연습은 시행착오나 실수를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연주·해석·표정
연주자를 해석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연주자'가 실제의 음향으로 청중을 만난다는 뜻이 두드러진 반면, '해석자'는 음악과의 관련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해석'은 무엇의 해석입니까? 이는 두말할 것 없이 곡의 해석입니다. 물론 '연주'도 곡을 연주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연주'는 '해석'처럼 곡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작곡가의 의도나 의지를 드러낸다는 의미를 그리 강하게 풍기지는 않습니다. '연주'가 '해석'의 차원이 되려면 곡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합니다. 악보로 놓여있는 곡을 겨우 소리로 만들었다면 그것을 해석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해석을 원할 때에는 작품에 대한 관심이 증가합니다. 이럴 경우에 해석자는 곡의 의미를 캐물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곡의 의미는 작곡자가 곡을 만들 때의 의도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음악은 시대적 양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관해 공부를 할뿐만 아니라 당시의 연주관습에 대해서도 공부합니다. 한편 이론분야(화성학·대위법·분석 등)의 공부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마는 이 공부가 연주와 관련되어 생각되는 일이 흔치 않습니다. 연주가들이 이론분야의 공부를 싫어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걸 배워서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들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론학습의 대부분이 작곡의 초보과정처럼 되어 있는 데에도 큰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주자들에게 이 부분의 공부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작곡 학도의 방식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곡의 전체적 구조에 대해 나름대로 확고한 파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주가들은 흔히 여러 번 반복 연주함으로써 나름대로 곡의 구조에 대해 파악합니다. 그러니까 그 곡을 꼭 어떤 기호나 용어로 표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파악한 것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연주자들에게는 거기까지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좋은 연주자들의 연주는 많은 경우 곡의 구조와 잘 조화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 오른손의 선율이 왼손의 화성보다 더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것, 모방양식에서 테마가 다른 대선율보다 더 잘 들리도록 연주하는 것 등은 구조적 파악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인데, 좋은 연주가들은 이런 일에 실패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해석자가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도 작곡자의 뜻이 들어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곡자의 의도를 추구하다 보면 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첫째로, 작곡자의 의도 표시를 기록한 것들이 많지 않습니다. piano나 forte의 표시도 없는 곡에서 연주가들은 작곡가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어떤 방식으로든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19세기에 옛 악보를 재발견한 사람들은 그 음표의 단위가 아주 큰 것을 보고서, 옛 음악은 무조건 느린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연주했습니다. 이런 느린 연주가 옛 음악을 연주하는 데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은 나중에 나옵니다마는, 옛날에는 어떻게 연주했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작곡가의 의도를 알면서도 무시하는 연주도 있을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연주가가 새롭게 해보는 연주가 있을 수도 잇습니다. 연주자가 결국에 도달하는 지점은 자신의 의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연주할 곡이 더 억센 울림을 가져야 할텐데 자신의 체력적 조건 때문에 더 부드러운 울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주는 더 자신에게 맞춘 음악이 되겠지요. 이런 것이 곡이 요구하는 것과 명확하게 맞지 않을 경우, 해석 자체가 성공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필연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연주자들의 '자기 방식'의 독자적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이 결점을 눈가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또한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이루어진다면 타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여기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해석을 바라는가?' 이 문제에서 흐려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들려질 수 없고 생각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곤란하겠지요. 그러한 해석은 들려 질 수 있을 때까지 더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오늘날의 연주가들은 해석자이기 보다는 '대중 앞에서 무언가 인상적인 소리를 내는 사람'으로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강합니다. 음악가 중에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 연주가입니다. 연주가는 연주가 끝나는 즉시 박수로 보답 받습니다. 연주자는 남을 도취시킵니다. 연주자는 자신도 청중에 의해 도취될 수 있기를 강력히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연주로 청중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주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관계로 인해 연주자들은 대단히 청중을 의식합니다. 심지어는 작곡가를 의식하는 것보다 더 할지 모릅니다. 우선 연주자들은 청중들에게 흠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틀리지 않도록 테크닉을 잘 연마하려고 합니다. 연주자들은 청중을 사로잡으려 합니다. 그래서 곡예와 같은 어려운 테크닉을 잘 연마하여 그것을 보이려고 합니다.
오늘날의 연주 테크닉은 대부분의 경우 기계를 상대로 연마되고 있습니다. 즉 많은 학생들이 음반에 녹음된 것과 자신의 테크닉 정도를 비교하며 공부하는 일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음반이라는 것은 아주 잘하는 사람이 수차례에 걸쳐서 녹음을 한 후, 좋은 부분들만을 골라서 그것들을 이어서 만듭니다. 그러니까 실제의 연주에서는 그 정도의 완벽성이 없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어찌 됐든 녹음된 상태는 대단히 탁월한 테크닉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완벽한 모델은 연주가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것을 무조건 모방하려는 경향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음반은 도움을 주는 만큼의 피해도 같이 줄 것입니다. 모방을 하고 있다면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 보다는 자기 발견에 더 힘써야 합니다. 음반의 연주자는 자신과 손 크기도 다르고 호흡길이도 다르고 성대 구조도 다르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모방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불리한 방법으로 연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음반은 참고로 하되 결국에는 그걸 버려야 자신이 연주가 삽니다. 아직 되지 않은 테크닉은 섣불리 하기보다는 기다려야 합니다. 심지어는 잘 할 수 있는 것까지도 사용을 미루었다가 나중에 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오늘날은 음반의 존재 때문에 완벽성에 대한 귀가 더욱 예민해진 관계로 아직 설익은 채로 하게 되면 그만큼 핀잔을 많이 듣게 될 것입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일은 테크닉을 연주의 중심점으로 삼는 점입니다. 테크닉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고, 즉 테크닉이 어떤 음악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지 않고 음악을 지배할 때에 음악은 시들고 말 것입니다. 테크닉을 위해 음악을 하지 마십시오. 음악을 위해 테크닉을 배우십시오. 이곳이 거꾸로 된 상태라면 아직 훌륭한 음악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상태가 뒤집힐 때에 비로소 여러분의 음악은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손가락은 이런 순서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해있으면 그것은 아직 좋은 피아노 연주가 못됩니다. 성악가가 높은 소리를 낼 때에 소리를 위로 띄워 아랫배로 그 소리를 받쳐 준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발성이지 성악예술은 못됩니다. 연주는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지 테크닉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연주에는 해석 이외에 또다른 성격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표정입니다. 연주에도 표정이 있습니다. 깨끗하고 매끈한 연주와 해석이 전혀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생각해 봅시다. 뜻도 모르는 외국어 가사로 노래부르는 사람의 경우, 발음도 정확하고 음악도 틀리지 않았지만 대단히 무미건조한 음악을 들려줍니다. 그 가사의 뜻을 아는 사람은 언어의 의미에 따라 단어들을 각기 알맞게 발음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악적 프로그램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미를 모르고 무조건 소리내는 것은 싱거운 연주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음악외적인 것만이 연주의 표정과 관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악에서 표정을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프레이즈 구분 짓기, 아티큘레이션, 템포, 음색 변화 등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공부는 참으로 요긴할 것입니다.
마무리
이 글은 무엇을 바라야 할지, 어떤 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얻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자신의 자유에 관한 문제이고 자신의 결단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무한대의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지만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불가피성의 압박감이 있습니다. 연주의 해석이나 표정에 관해서는 단지 스치고 지나간 정도입니다. 이 문제는 학술화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변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곡을 두고 거기에 관해서 논했다고 하면 이런 막막한 글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 글은 대단히 큰 주제를 표면적으로 가볍게 다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것에 대해 달가워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연주자가 자신의 일을 스스로 설계하고 결단하여, 거기에서 스스로 만족감을 얻고, 다른 사람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이 글이 이러한 바람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생각하고 노력하는 사람과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