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性 소중하게 지키기 - 사진첩 Ver.

전성준200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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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性 소중하게 지키기 - 사진첩 Ver.

와 - 조회수와 댓글, 뜻밖의 숫자네요. 댓글을 보니 5만의 조회수 중 아마 열에 아홉은, 작고 빽빽한 글자와 스크롤에 안구가 터질 듯한 안압과 함께 호흡이 가빠지고 혈압상승과 뒷골이 당김을 느끼면서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셨겠지만. ㅎㅎ 긴데다 지루하기까지한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읽어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격려의 말씀 감사하구요. 복받으실 거예요. ^^ 격려는 아니라도, 괜시리 분노가 치밀고 적개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참아가며 "옛다 관심"의 더부살이 정신을 발휘하야 댓글 달아주신 분들도 땡스입니다.

 

종교 대 안티종교 식의 댓글이 많더군요. 댓글을 보고 글을 돌아보니 그렇게 보일 수 있고, 비종교인 입장에서는 보면 거북하게 느껴졌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일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였지요. 그러다 다른 이들과도 나눠보고 싶어 광장에 올린 것입니다. 제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너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라는 것이었어요. 종교를 갖지 않은 분이라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 만큼은 함께 공감하고 끄덕일 수 있다면 좋겠네요.

 

"좀 더 생각해 보시고, 3주 후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 멘트를 아시나요? 신구 선생님이 테이블에 두 팔을 기댄 채 나긋나긋 점잖게 그렇게 대사를 치고나면 다시 나레이션이 이어집니다. "지난주 방송된 사연에 대한 시청자여러분의 ARS 설문 결과, 이혼하라 82%, 그냥 살라 18%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땡큐." 사랑을 말하는 어느 댓글을 보면서 문득 그 프로를 떠올렸습니다.

 

결혼 전까지 이 프로를 매주 빠짐없이 보던 친구가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계속 보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불륜과 이혼, 서로 감쪽같이 속이고, 위자료 문제로 꼼수를 쓰는 따위의 일들이 비일비재한 세상이니 그 방송을 보면서 온갖 상황들과 그 대처법을 배워둬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 말을 듣고 그러지 마삼~ 그러지 마삼~ 정신차리삼~ 하고 대꾸했던 기억이 납니다.

 

뜨겁던 열망이 식고 나면, 시선 표정 말투 손길 모두 미지근해집니다. 상대의 결점이 눈에 들어오고, 미간이 찌푸려지며, 차츰 연락이 뜸해집니다. 무관심해집니다. 근사한 혹은 왠지 끌리는 다른 이성이 눈에 들어오면 금새 마음이 그에게로 기울고, 둘 사이에서 이쪽 저쪽을 견주며 조건을 재봅니다. 사랑한다던 그 혹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의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부릅니다. 시작이 어렵지 한번 하고 나면 그 뒤로는 별거 아닙니다. 미안함이나 죄의식은 점차 무뎌집니다.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이고 그러다 싸움이 벌어지며 큰소리가 오갑니다. 추태. 가증스러운 속마음. 좋아 죽고 못산다던 사이가 원수가 되고, 한쪽이 눈물을 쏟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작별을 고합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대단히 무책임한 상황입니다. 무책임한 그 혹은 그녀는 코너에 몰립니다. 그러나 이때 뽑아드는 비장의 카드. 궁지로부터 결정타, 필살기를 날립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어."라고 멘트를 던져주는 것이지요. 그 한마디에 상대방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KO 넉다운, 그것으로 게임셋, 만사 OK입니다. 혹시 상대방이 거기에서 그치지 못하고 왜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왜 나를 떠나느냐는 식의 어리석은 물음으로 잽을 던지면, "너를 사랑했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아. 나도 내 맘을 모르겠어. 그런데 그런 내게 왜 그러냐고 물으면 나는 어떻게 하니? 자꾸 이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니? 너도 힘들겠지만 나도 너무 힘들다. 이제 우리 더이상 이러지 말자. 우리 그만 힘들자. 응?"하는 식의 뭔가 대단히 야리꾸리하고 갸우뚱하면서 납득이 안가면서 찜찜스럽고 굉장히 교활하게 느껴지는 대답을 하고 돌아섭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면죄부로 용도변경되는 순간입니다.

 

다들 사랑해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결과로 가정이 깨어지고, 증오심과 분노로 치를 떨며, 복수를 꿈꿉니다. 그래도 만나서 이별을 고하는 사람은 그나마 상전이고, 아예 새로운 이성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전 연인과는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는 인간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사랑했었다, 사랑이었다 말하지만. 왠지 너무나 가벼워 보이는 그것은 정말 사랑이었을까요. 사랑, 참 아름다운 것인데, 오늘날 세상은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은 아닌지.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무엇일까요.

 

아래는 이전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0.


나는 수도승이 아니다. 수도승은 커녕, 어디에서 조금이라도 야한 것이 보이면 침을 젤젤 흘리며 눈을 빛내는,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세계에서 제일로 '밝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1.


세상에서 가장 풍요하고 세련된 뉴요커들의 삶을 그린 . 그들은 자유롭게 작은 성관계를 거듭한다(작은 성관계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잠시 후에 소개하도록 하자). 사실 나는 그 드라마를 - 특히 사만다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 침을 젤젤 흘리며 보곤 하지만, 아무튼. 그러나 보고 나면 늘 뭔가 찜찜한 느낌이 남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르기 때문이다.

 

"행복할까?"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서로가 세련되고 말끔한, 근사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 이들의 인스턴트 만남에서는 실수나 작은 결점이 용납되지 못한다. 때로는 솔직함과 정직함이 지나쳐 자신의 부족하고 연약한 약점까지 밝히는 이들도 있다. 용기있는 고백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하자가 있다는 것이 자꾸만 떠올라 결국 참을 수 없다. 바로 레드카드를 꺼내 퇴장시키는 것이다.

 

이 사람과 만나 침대로 향하고, 며칠 후 사소한 실수나 혹은 오해로 그를 퇴장 시킨다. 그러고 또 며칠 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침대로 향하며, 며칠 후에는 다시, 얼마전 자신이 그 어떤 사내를 퇴장시킬 때와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는데 이번에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어찌보면 별거 아닌 - 당하는 입장에서는 어쩌면 대단히 부당하게 느껴질만한 - 이유로 새로운 그로부터 레드카드를 받고 그의 인생으로부터 퇴장당하는 것이다.

 

이들은 100년이 가도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려 있을 것이다. 이를 채우기 위해 더 근사한 남자, 더 깊은 쾌락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이지만, 공허감은 점차 더 깊어질 뿐이다.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방법으로는 가슴의 공백을 결코 메울 수 없다.

 

먼저 인플레이션의 문제이다. 이들은 소중하고 값진 성, 섹스라는 자신의 보물을 너무 값싸고 흔한 것으로 홀대하고 있다. 성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 사랑을 나눈 그와의 관계 역시 언제든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로 인해 다음의 문제가 발생한다. 단 한 사람에게 전부를 걸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전부를 걸지 못하므로 그 한 사람만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인간이기에 완전할 수 없으며 어딘가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는 완벽하지 않다. 뭔가 약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핍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의 그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용납하며, 있는 그대로의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때, 이러한 사랑을 진짜 사랑, 온전한 사랑, 참된 사랑이라 하자. 진정한 사랑, 온전한 사랑은 이러한 불완전함과 결핍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섹스앤더시티의 너무도 근사하고 잘난 뉴요커들은 소유한 것이 너무 많을뿐더러, 단 한사람에게 - 성을 포함한 - 자신의 전부를 거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지극한 사랑에 이를 수가 없다.

 

그들이 더욱 비참한 것은 - 이는 재앙이라 할만한데 - 뉴요커들, 그중에서도 남부럽지 않은 전문직으로 성공한 이들의 삶은 너무도 바쁘고 끊임없는 경쟁의 연속이어서, 레이스에서 멈춰설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삶을 살며 오랜동안 깨닫지 못하고 달려왔으나 분명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끼며 잠시 멈춰서야 할 때가 있다. 자신이 달려온 길, 삶을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누구나 사는 중에 때로는 허무와 고통과 같은 것을 맞닥트리게 되는데, 이때에는 걸음을 멈추고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짚어내고 인생의 문제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섹스앤더시티의 그들은 너무 바쁘고 너무나 잘 나가서 그런 시간을 갖을 수 없는 것이다. 남아시아 저개발국가의 주민들이 풍요롭고 세련된 선진국 주요도시의 전문직 남녀보다 행복의 체감에서 단연코 앞서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을 누릴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일본 소설들에도 섹스앤더시티의 허무와 비슷한 것이 흔히 나타난다. 일본 소설 속 인물들은 많은 경우 원인 모를 허무감에 빠져있고, 쓸쓸하고 불안하다.

 

예를 들어 - 역시나 침을 젤젤 흘리면서 보았던 - 소설 실락원을 보자. 이 소설 속 남녀 역시 그렇다. 그런 허무감,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그들이 찾는 것이 대게 섹스, 작은 성관계이다. 이로부터 쾌락을 얻음으로 이들은 잠시 허무감과 불안, 두려움을 잊게 된다. 그러니 이를 도피처로 삼아 더욱 거기에 몰입하게 된다. 섹스가 아름다운 성이 아닌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발버둥, 고통을 잊기 위한 몰핀, 쾌락의 도구인 마약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내 그런 쾌락과 이를 통한 위안이라는 것이 대단히 얕고 유한한 것임을 알아차리게 되고, 결국 그들은 새로운 도피처를 찾게 되는데 그것이 자살이다.

 

기준과 원칙은 무너지기는 쉽지만 이를 다시 쌓고 회복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또한 한번 무너진 것이 다시 무너지기는 더욱 쉬운 일이다. 성도 마찬가지이다. 일순간의 유혹 앞에, 눈 앞의 쾌락을 좇아 혼전 혹은 혼외 섹스와 같은 작은 성관계에 우리를 내어 주고 나면, 그 뒤로 우리는 언제든 그렇게 내 몸과, 성을 쉽게 내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소중하고 귀한 것을 그에 합당하게 아끼고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을 소중히 지킬 때에는 그것이 허락되는 단 한 사람에게 전부를 걸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 온전한 참 사랑을 이룰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성이 흔하고 쉬운 것이 될 때에는 사랑 역시 쉽게 만나고 쉽게 끝낼 수 있는 것이 되고만다.

 

소중하고 행복한 섹스, 아름다운 성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그 경계가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소중히 지키고 보호할 경계도 함께 사라져버려, 경계가 막아내야 할 고통과 채워지지 않는 허무와 방황 따위의 것들이 마구 우리의 삶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며칠전 채널을 돌리다 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의 강연을 이전에도 TV로 본적이 있었다. 그때 "섹스는 다리 사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귀로 나누는 것"이라 했던 그의 말이 인상깊었다.

 

과연 어떤 삶을 창조하라는 것일까? 그는 "성의 혁명"이라는 말을 종종 되뇌였다. 책을 보건 TV를 보건 性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성의 혁명? 그게 뭘까?' 귀를 기울인다.

 

그는 '큰 성관계'와 '작은 성관계'라는 말을 했는데 '성의 혁명'과 같이 역시나 낯선 표현이다. 궁금증은 더해간다. 이미 섹스와 관련해 읽은 정보의 양이 수레 하나 가득 채움직하며, 성과 관련한 단어를 거의 모두 섭렵할 정도로 깊고 심오한 나의 내공으로도 어리둥절할 정도의 낯선 표현을 쓰다니. 에드 영 목사는 아마도 섹스계의 고수인듯 하다.

 

이내 설명이 따른다. 큰 성관계는 아버지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한 섹스를 뜻한다. 즉 두 남녀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만나 서로 사랑하고, 남편과 아내로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큰 성관계야 말로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며, 귀하고, 즐겁고, 또한 행복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작은 성관계는 큰 성관계 이외의 모든 섹스를 뜻한다. 즉, 혼전 혹은 혼외 성관계 등을 말한다. 에드 영의 음성에 따르면 이러한 작은 성관계는 큰 성관계에 비하면 너무도 보잘 것 없고 덧없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날 프로그램에는 에드 영 목사 뿐 아니라 그의 아내도 함께 출연하여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과 큰 성관계의 아름다움과 즐거움, 소중함과 귀함 또한 자연스러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역설했다. 자녀들에게 큰 성관계의 기쁨과 행복에 비하면 작은 성관계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하고, 큰 성관계야 말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임을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을 보며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크리스쳔 가운데 성이나 섹스라는 단어 앞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며 이를 터부시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 이는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며, 정직하지도 못한 반응이다. 성과 섹스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으며, 또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 대로 창조하신 우리의 일부이자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축복이다. 중세적 마인드로 성을 쉬쉬하고, 괜히 죄의식을 느끼며 모르는체 하고, 입을 다물고 귀를 막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이므로 성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다. 또한 성은 아름답고 귀한 것, 참으로 소중하고 행복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기쁨을 감사히 그리고 온전히 누리고 만끽하기 위해 크리스쳔들은 산부인과와 비뇨기과의 의사 및 간호사보다, 또 포르노 배우들보다 더 성과 섹스에 대해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 당장에 서점에 달려가 '성교육책'에서 부터 '최고의 연인, 그녀를 위한 섹스테크닉'에 이르기까지 서가에 넘쳐나는 성, 섹스관련 서적 가운데 자신의 연령과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 성에 대해 빠삭하게 알아야만 한다.

 

잠시 다른 이야기이기지만, 소련에 부하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인 자국의 인민들에게 "여러분, 부자가 되십시오(obogaschaites, enrichissez-vous)!"하고 외쳤다가 '졸라' 비판 받았드랬다. 비록 그의 운명은 가혹했지만, 그의 표현은 마음에 든다. 그의 외침을 흉내낸다면 이런 것이 되겠지. "여러분, 섹스 박사가 되십시오!" 푸히힛!

 

 

 

3.

 

사랑이 중요하고 중심인 것이다. 섹스도 중요하시만 그것이 중심이 된다면 이는 쾌락의 추구일 뿐이고, 결혼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이뤄지는 섹스라 할지라도 그것이

- 사랑과

-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

- 헌신과 배려

- 서로를 인정함과 용납함

-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

- 있는 그대로의 사랑과 같은

참 사랑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성과 섹스는 아무리 결혼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행해진다 하여도 단순한 쾌락의 추구 밖에는 안될 것이며, 이와 같은 것이 모두 바로 에드 영 목사가 말하는 작은 성관계에 해당할 것이다.

 

섹스는 사랑의 완성일 때, 사랑의 완성으로 존재할 때 이를 창조하신 그분의 본래의 목적과 의미에 부합하게 되며, 그때 비로소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것,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것이 되는 것이다.

 

쾌락 또한 마찬가지이다. 섹스는 사랑 가운데 있어야 하고, 쾌락은 다시 그러한 섹스의 일부분일 때에 가치있는 것이 된다. 성은 쾌락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쾌락이 먼저가 아니고 사랑이 먼저인 것이다.

 

사랑 > 섹스 > 쾌락

 

사랑이 있고 섹스가 있고 쾌락이 있을 때, 아름다운 성, 소중한 섹스를 참으로 그리고 온전히 누릴 수 있지 않을까.

 

 

 

4.

 

이번 여름까지 나는 '서로 사랑하면 결혼하기 전이라도 사랑을 나눌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그 여름을 지나면서 달라졌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끊임없이 기도하게 하셨다. 주시는 말씀 가운데 거듭해 성의 소중함과 귀함, 그리고 이를 그 소중함과 귀함에 합당하게 지키기 위한 순결의 중요성을 전해 주셨다. 그런 가운데 마음이 열리고, 진심으로 그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는 순결을 볼맨 얼굴로 억지로 마지못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순종하며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스물 일곱에야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심으로 인정하지 못하면서 마지못해 따랐던 지난 십 수년의 시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이 가는가?

 

다시말해 성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것,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결혼을 통해 하나 된 단 한 사람과만 나누라 말씀하신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우리의 손이 참 귀한 보물을 쥐고 있다고 하자. 그 아름답고 귀한 것, 소중한 것을 우리는 결코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을 것이며, 쉽게 아무에게나 맡기지도 않을 것이다. 성과 섹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당신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소중히 지키라 하신 것, 사랑하는 단 한 사람 남편과 아내로 만난 단 한 사람에게만 그것을 허용하고 선사하라 하신 것은, 그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것을 소중히 지켜주시기 위함이다. 또한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섹스를 하지 말라고 하시거나, 섹스를 금기시 하라 말씀 하지 않으셨다. 성이 더럽고 나쁜 것이라고 하신 적도 없다. 당신께서는 분명히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외롭고 안스러워 보여 그 짝으로 하와를 창조하여 두 사람을 사랑으로 맺어 주셨고,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 하셨다.

 

그렇게 성과 섹스는 참 아름답고 귀한 것이지만, 우리가 그 본래의 아름다움과 귀함 그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누리기 위해서는, 이 즐겁고 황홀한 또 복된 나눔이 사랑과 결혼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이뤄져야만 한다.

 

TV 드라마와 CF에서, 잡지에서, 영화관의 스크린과 인터넷에 오르는 사람들의 글에서, 또 무수히 많은 사진과 동영상들에서, 이들을 통해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작은 성관계를 보여준다. 작은 성관계가 당연한 것이라 말한다. 스물 일곱의 동정은 동료들에게 '믿을 수 없는' 것이거나 웃음거리이고, 혹은 대단히 미련하고 자학적인 악취미, 종교의 도그마에 감금된 부자유 등으로 해석된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묻고 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합니까? 나는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며 우리에게 성과 섹스를 선사하실 때 뜻하신 바를 알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메뉴얼, 우리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의 사용설명서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이다.

 

말씀을 알지니 말씀이 우리를 지키고, 또한 자유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