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기다려 주는 해바라기 같은 엄마 품속으로 귀한

김한규2006.12.13
조회24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엄마 품이다. 그 엄마품의 따듯함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이고, 그 인정함은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잘 나타난다. 따스한 엄마품은 약간의 변주를 통해 고향이나 추억으로 상징되는데, 이러한 따뜻함의 귀환들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문득 의문이 든다. 이제부터 오늘날 현대 사회를 이끌어 갔던 모더니즘과 그 단점을 보완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 거기에서 나오는 code로 영화 ‘해바라기’를 다시금 바라보겠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18C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점점 공업화가 되어가면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것이 사회의 원동력이었던 농업사회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농촌에 살던 사람들은 점점 공업화가 된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갑작스럽게 모인 사람들을 수용하고 삶터로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도시라는 곳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가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공장을 돌아가게 하는 기계의 부속품쯤으로 여긴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흘러내려오면서 사람이 주인이 아닌 돈이 주인이고, 공장이 주인이고, 그런 효율적이고, 이윤적인 도시가 주인인 세상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의 한 단면이고 병폐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주가 아닌 자본효율적인 것이 최고인 사회. 이러한 사회가 계속되면서 부작용은 생겨나고 점차 도시는 발달해 가지만 사람들은 점점 피폐화 되어갔다. 이 참혹한 현상을 바꾸기 위해 모더니즘의 전의 생활을 되찾아 오겠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운동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 그대로 모더니즘적인 생활의 이전 생활을 향유한다는 내용이다. 즉, 이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이 주인이고 사람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 나간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공장보다는 공원을 세우고, 자연과 함께 숨 쉬고 생활하는 그러한 사회.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을 버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택해 살아가고 오늘날의 현상들이고, 점차 바뀌어 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영화의 연관성 이런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도시의 건축이나 사회의 변화적인 면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내고 향유하는 문화적인 면모에서도 확연히 들어나고 있다. 특히 오늘날 최고의 대중매체라고 하는 영화에서 그 변화를 쉽게 알 수 있는데, 예전 유토피아를 그린 SF영화들이 많다고 한다면 지금은 디스토피아를 그린 SF영화가 많음이 그 근거를 들 수 있겠다. 이런 영화들 말고도 위에서도 이야기 한바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주로 고향을 찾아가서 추억을 상기시키고 어머니의 품속을 그리워하는 현대인들을 자주 찾아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영화 속 주인공들은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그 시대의 문화 형성의 근본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문화는 그 시대의 거울이자 척도이다. 그 시대 쓰인 책들, 그린 그림, 그리고 찍힌 사진이나 영화들은 그 순간이나 생활들을 다시금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성향은 오늘날 고향을 찾고 추억에 잠기고 어머니의 품속에 들어가고 싶은 현대인들을 왜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만큼 모더니즘적인 사회적 풍토가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그러한 이유에 자꾸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향수에 젖게 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영화 ‘해바라기’의 연관성 그럼 영화 ‘해바라기’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 먼저 줄거리를 보자. 잔혹함과 주먹 하나로 살아온 일명 ‘미친 개’ 오태식. 그러나 그는 교도소에서 해바라기가 만연한 고향의 어느 한 식당 어머니의 개화로 인해 착하게 살려 한다. 그러나 개버릇 남 못준다고, 그가 다짐했던 것들을 지키려 하지만 사회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재개발 문제로 양어머니의 죽음, 여동생의 사고로 인해 이성을 잃은 태식은 재개발 시행하려던 전 조폭의 아지트로 가서 싸우게 되고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며 자신도 죽게 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여동생의 추억을 상기 시키며 태식의 전유물이었던 수첩에 X표를 그리면서 영화는 끝나고 만다. ① 태식은 우리들의 자화상 주인공은 태식이다. 모더니즘적인 사회에 도태되어 주먹으로 살아온 그는 오늘날 사회적 문제아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양어머니에게 회계를 받고 그녀의 품속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약속한다. 술 마시지 않는다. 싸우지 않는다. 울지 않는다. 그리고 수첩에 자신이 하고픈 일들을 적고 그것을 행하면 X표로 지운다. 주먹으로 싸워 교도소에 수감된 죄인이지만 어찌 보면 현대인들의 생활과 다름없다. 돈을 위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술 마시며, 승진을 위해 다른 사람 머리를 짓밟고 올라서는 그리고 타향이란 외로운 곳에 살며 홀로됨에 우는 그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의 품인 어머니의 공간으로 귀향하고 다시 재교육 받는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가르쳐 주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더 나아가 자신과 연결지어주는 공동체를 위해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모더니즘 적인 형태가 아닌 그 이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색체를 풍긴다. ② 사회와 한 개인의 싸움, 그리고 태식의 희망 초반 영화는 일반 조폭영화처럼 무게 있지는 않다. 우선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안겨다 주며 그가 희망을 꿈꾸고 그것을 이루려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사우나 에피소드나 문신을 지우려 찾아간 병원에서의 에피소드는 너무나 재미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가 가지고 있는 희망의 이룸이 얼마나 어려운지 현실에 부딪히는 태식을 보여주며, 점점 어둡게 영화는 그 유쾌한 희망의 빛을 거두고 있다. 그가 갱생 하고 희망을 위해 착하게 산다는 것을 가족만 믿지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다. 심지어 법을 집행하는 경찰들도 그가 언제 사고를 칠가 두려운 마음에 뒷조사에 열중하고 있다. 그렇다. 모더니즘적 사회에서 한 개인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마음으로 살아가기는 물과 기름의 존재처럼 섞이기 힘들다. 많은 영화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이러한 경우 둘 중 하나는 도태되고 많다. 해바라기는 초반 다른 영화들과는 그 길이 다른 듯 하나 모더니즘적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희망의 싸움을 너무나 초인적으로 그리는 단순한 패턴에 휘말리며 점점 재미를 잃어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모더니즘적인 사회에서 한 개인의 희망 찾기는 우리의 구미를 당기는 주요한 요인이고, 그 원인은 바로 우리들이 그런 희망을 찾고 싶어 하는 열망의 대리 만족이라 생각한다. 추운 겨울날 집안의 따뜻함을 생각하며 살을 에리는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그냥 하루를 시계태엽이 움직이는 데로 가지 말고 좀 쉬며 하늘을 가금 보자. 내가 따뜻했던 날들을 추억하면서 어머니의 품속을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그럼 언젠간 우리가 생각하는 희망이라는 역에 안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