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stav Klimt (쿠스타프 클림트)

김지현200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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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1862~1918)

오스트리아의 화가, 비엔나 분리파의 창시자

 

생애

를  창시하여 종래의 미술개념의 지평을 넓히는 진보적인 미술 운동을 지배했으며, 에곤쉴레, 오스카 코슈카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그들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화단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평가되는 구스타프 클림트

 

그는 1862년 7월14일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에서, 보헤미아에서 이주해 온 금세공사 에른스트 클림트의 7형제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술회가 말해주듯 극심한 가난때문에

장녀를 광적인 종교에 잃고 막내딸마저 병으로 잃은뒤 남은 다섯 아이는 무슨일이 있어도 잘 키워 보겠다는 양친의 집념에도 불구하고 그는 짐나지움에 입학하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으로 예정된 미래를 짊어진 해 고등 공민학교인 "뷔르거슐레"에 입학한다

 

1876년 에 입학하면서 그의 예정된 운명의

손길을 뿌리치고 화가로서의 훗날을 예비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교사로 재직 중이던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 같은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 수업을 시작한 그는

그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면서 , 라이헨 베르크 국립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분 받아 학비를 조달하고 아울러 화가로서의 경력도 쌓아나간다

 

1883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콤파니) 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 장식 , 피우메에 있는 리예카 국립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이 이 세 젊은 예술가의 공동작업의 소산이었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 극립극장의 실내장식 작업으로 그 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첫 수상자가 되기도 하는 등 그는 점차 뛰어난 장식 화가로 비엔나 문화계의 전면에 도드라졌다

 

1892년 그의 둘도없는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트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부친 마저 유명을 달리 하면서 그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와 함께 남은 가족과 동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도 또 내면적 위기도 그의 화가로서의 성장을 가로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비엔나의 미술계는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서 소외된 채 길고 나른한 동면에 빠져 있었다

늙고 고루한 예술가들의 횡포와

과도한 상업적 배려에 짓눌려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화단을 바라보며 진작부터 새로운 미술의 기운을 고취시킬수 있는 어떤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1897년 '동떨어진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독점적 위치를 이용하여 악화를 구축하고 있던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를 탈피하고 요셉 호프만,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를 창설,초대 회장에 선임된다

 

의 정신적 수원이었단 헤르만 바는 "우리의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 라고 외쳤고."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버리자." 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계획, 건축, 가구 , 생활필수품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예술'을 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체없이 기관지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을 건설한 클림트는 , 이후 8년간 등 스물세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하면서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예술의 씨를 파종한다

 

1894년 오스트리아 문교부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장화이 발표된 것도 바로 이 분리파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미 서서히, 그리고 노골적이고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누설하고 있던 클림트는, 앞의 두작품에 대해 쏟아진 과도하고 병적으로 관능적이라는 비난은 그런대로 받아넘겼으나

 

1903년 발표된 에 대해 문교부와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여론까지 들고 일어나 '춘화' 혹은 '변태성욕자의 무절제'라고 비난하자, 그를 후원하는 한 실업가의 도움을 받아 문교부로부터 받았던 사례금을 돌려주고 그 작품들을 비엔나 대학에서 철수시킨다

외설적이라는 비난은 비단 이 작품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02년 거장 베토벤을 기념해 만든 30여미터에 이르는 대작 벽화 도 여론의 격렬한 분노에서 벗어날수는 없었다

비록 자국 내에서는 그의 작품이 이렇듯 경원되고 혐오되었으나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그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00년 는 에 금상을 안겨 주었으며, 로댕은 벽화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짐으로써 그를 격려하고 그의 예술의 진가를 확인해 주었다

는 클림트의 지휘아래 속속 젊고 재능있는 화가들을 발굴하여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모네,샤반느,막스 클링거, 맥도널드,매킨토시 같은 외국의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오스트리아에 모더니즘의 씨를 뿌리고 다시 그 영향을 유럽 전역으로 파급한다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의 지나치게 장식적인 경향과 계급적 모호성에 대한 비난이 안팎으로 제기되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집요하고도 잔인한 비난에 지쳐있기도 했던 클림트는, 1905년 돌연 회장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인 예술세계로 침잠한다

난장판 같은 소란에서 어느정도 벗어난 그는, 190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금빛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 그의 예술의 가장 중요한 시기, 이른바 "황금시대"의 경작에 매달린다

등이 이시기 그의 주요한 소출들이었다

그리고 대표작이자 "황금시대"의 절정인 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의 그림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시절, 처음에는 부업이 그리고 나중엔 본업이 되다시피 한 여러 극장의 실내장식 작업 같은 분리파 시절의 건축과 연관된 작업들에서도 내내 장식성은 그의 공기였다

그것은 그의 그림이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런데 "황금시대"를 종료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리파의 반 분리파였던 아돌프로스의 저서 의 영향도 약간은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발언이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이상 진보할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 자신의 말대로 과연 장식성에서 벗어났는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그림의 중요한 상수인 관능성과 마찬가지로 장식성은 그의 최후의 그림들에서까지도 짙게 남아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장식성과 관능성, 아름답지만 부패하기 쉬운 이 ' 살아있는 송장'들을 최후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1908년을 넘어가면서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에 비해 색채가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독립된 구성 요소로 등장하게 되었고, 간간이 나타나던 화면의 정사각형 형태가 거의 고정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재 면에서 풍경과 초상이 그의 그림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말년의 그는 일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

 

 

저 유명한 아프리카 풍의 긴 장옷을 걸치고 일년의 반은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그와는 사돈지간인 의상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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