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의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인 티파니는 1837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에 의해 미국 브로드 웨이에서 설립되었다. 하지만, 티파니도 처음부터 보석상으로 시작한건 아니었다고 한다. 1837년 25살의 젊은 티파니가 친구와 함께 뉴욕에 문방구와 도자기를 취급하는 작은 가게로 시작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티파니의 모태였고 그것을 시작으로 점차 보석상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뉴욕의 작은 소매상으로 출발한 티파니. 결코 서 두르는 법 없이 정성을 다하는 장인 정신으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다. 티파니는 미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하며 미국 대표 보석 브랜드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그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에게 티파니 은제품을 선물할 정도로 티파니 제품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번은아내에게 선물할 보석을 고르기 위해 티파니 매장을 찾았다.
부인에게 어울릴 만한 목걸이를 고른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서 할인받을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티파니는 어떠한 경우에도 할인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당시 티파니의 매장 직원은 “링컨 대통령도 할인을 받지 않았다”면서 아이젠하워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링컨 대통령 역시 자신의 취임식 파티 때 아내가 착용할 진주 보석 세트를 티파니에서 구입할 만큼 티파니 애호가였다.
당대 최고의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티파니의 역사는 18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였던 찰스 티파니(Charles Tiffany)와 존 영(John Young)은 고향인 뉴잉글랜드를 떠나 뉴욕에서 문구용품과 팬시용품을 파는 '티파니 앤 영(Tiffany & Young)'이라는 상점을 열고 당시로선 획기적인 가격정찰제를 도입했다. 그들은 물건 값을 흥정하지 않고 가격표에 표시된 대로 팔고 싶었던 것.
야심 찬 시작이었지만 매장을 연 첫날 매출액은 불과 4달러 98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티파니가 유럽 제품의 수입상들로부터 구입한 희귀하고 이국적인 물건들은 곧 뉴요커들을 매료시켰다. 당시 유럽 귀족들의 고상함과 부유함을 은근히 동경했던 미국 상류층을 중심으로 티파니 앤 영은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티파니는 최고 품질과 독특한 디자인만이 사업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자연스러운 조화와 질서정연한 비례가 강조된 가장 미국적인 제품들을 디자인했다. 1847년부터는 금제품을 생산
했고 1년 뒤 유럽의 다이아몬드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졌을 때는 다이아몬드를 대량 구입하기도 했다. 1851년 은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티파니는 미국 회사로는 최초로 은순도 92.5% 이상을 의미하는 ‘925/1000 규격’을 채택했다.
당시 영국 은화의 표준이었던 이 규격은 후에 미 의회에서 '스털링 실버(Sterling Silver)'라는 미국의 은제품 공식 기준으로 인정받게 됐다. 현재까지도 티파니의 모든 은제품에는 회사명과 함께 '스털링
'또는 '925/1000'이 표시돼 있다. 동업으로 시작된 티파니 앤 영은
1853년 찰스 티파니가 모든 지분을 인수하게 됐다. 회사 이름이 티파니 앤 코(Tiffany & Co.)로 바뀐 것도 바로 이때. 명칭을 바꾸면서 매장도 브로드웨이 550번가로 이전한 티파니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다름 아닌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티파니는 전쟁 중 연합군을 위해 칼· 깃발· 수술용 집기 등 군수물품들을 제조하며 가장 미국적인 브랜드로 발돋움하게 된다.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유례없는 풍요의 시기를 맞게 됐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민첩하게 티파니는 화려하고 정교한 보석들을 생산해냈다. 이는 록펠러와 같은 신흥 부자들의 입맛에 맞아떨어지면서 티파니를 상류층의 보석 브랜드로 확실히 자리잡게 하였다.
티파니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1878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디자인 박람회에서였다. 미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은과 보석 부문을 포함해 모두 8개 메달을 휩쓸었다. 이를 계기로 티파니는 유럽 왕족들의 금 ·은을 세공하는 영광을 얻었다.
1902년 초대 디자인 실장을 맡은 창업자의 아들 루이스 티파니(Louis Tiffany)는 당시의 흐름이던 아르누보(Art Nouveau)의 선구자였다.
아르누보는 자연의 선과 곡선, 그리고 형상을 디자인에 반영하고자 했던 디자인계의 움직임이다. 루이스
는 이를 바탕으로 자연스런 빛의 보석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티파니의 디자인이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티파니는 매장을 샌프란시스코· 런던· 일본 등으로 확장하고 제품군 보석· 식기· 크리스털· 필기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화했다.
티파니는 미국의 역사적인 순간들에 항상 함께 있었다. 1885년엔 미국 정부의 공식 인장을 디자인했다. 이때 만들어진 인장은 현재까지 미국 1달러 지폐에 사용될 뿐 아니라, 미국 정부의 공식 서류에 사용되고 있다. 미 해군 영웅들에게 수여됐던 훈장 역시 티파니의 작품이다. 뉴욕 요트 클럽의 18K 트로피도 티파니가 직접 디자인했다. 이를 계기로 티파니는 미국 프로풋볼 NFL의 우승 트로피와 우승팀의 기념 반지도 만들고 있다.무엇보다 티파니의 명성을 잘 보여주는 것은 보석 세팅, 그 중에서도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이다.
1877년 채굴된 천연 황색 다이아몬드는 지금까지 가장 크고 화려한 보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287.42캐럿에 달했던 이 원석은 티파니의 보석 전문가 조지 쿤즈(George Kunz)박사에 의해 128.54 캐럿의 다이아몬드로 연마됐다. 원석의 절반 이상이 잘렸지만, 90면을 가진 화려한 다이아몬드로 재탄생된 것. 이는 원석의 크기보다는 광채가 중요하다는 티파니의 신념을 잘 보여준다. 또 티파니는 프랑스 왕실 보석을 대부분 매입하며 '다이아몬드의 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티파니의 대표적인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로는 ‘육지세팅(Six-Prong)’을 꼽을 수 있다. 1886년 선보인 이 세팅 기술은 지금까지도 예비 신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디자인으로 '티파니 세팅'이라고 불린다. 밴드에서 분리된 다이아몬드가 6개의 백금 다리에 의해 떠받들여진 형상이다. 완벽한 빛의 반사를 통해 다이아몬드의 자연스런 광채를 살리는 최고의 기술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도 1926년 티파니의 플래티늄 순도 기준이 미국의 공식 기준으로 채택되는 등 티파니는 보석 분야에서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티파니의 디자인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엄격한 기준에 의해 변함없는 아름다움과 매력을 발산할 뿐이다. 창립 이후 철저하게 지켜온 정찰제와 티파니 제품을 사는 사람에게만 제공하는 '티파니 블루 박스'는 티파니의 자존심이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여주인공 홀리(오드리 헵번)에게 티파니는 행복과 부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티파니는 지난 160년 동안 가장 미국적인 매력으로 미국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이어져 왔다.
[펌] 티파니(Tiffany &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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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여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티파니
보석의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인 티파니는 1837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에 의해 미국 브로드 웨이에서 설립되었다. 하지만, 티파니도 처음부터 보석상으로 시작한건 아니었다고 한다. 1837년 25살의 젊은 티파니가 친구와 함께 뉴욕에 문방구와 도자기를 취급하는 작은 가게로 시작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티파니의 모태였고 그것을 시작으로 점차 보석상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뉴욕의 작은 소매상으로 출발한 티파니. 결코 서 두르는 법 없이 정성을 다하는 장인 정신으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다. 티파니는 미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하며 미국 대표 보석 브랜드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그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에게 티파니 은제품을 선물할 정도로 티파니 제품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번은아내에게 선물할 보석을 고르기 위해 티파니 매장을 찾았다.
부인에게 어울릴 만한 목걸이를 고른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서 할인받을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티파니는 어떠한 경우에도 할인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당시 티파니의 매장 직원은 “링컨 대통령도 할인을 받지 않았다”면서 아이젠하워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링컨 대통령 역시 자신의 취임식 파티 때 아내가 착용할 진주 보석 세트를 티파니에서 구입할 만큼 티파니 애호가였다.
당대 최고의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티파니의 역사는 18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였던 찰스 티파니(Charles Tiffany)와 존 영(John Young)은 고향인 뉴잉글랜드를 떠나 뉴욕에서 문구용품과 팬시용품을 파는 '티파니 앤 영(Tiffany & Young)'이라는 상점을 열고 당시로선 획기적인 가격정찰제를 도입했다. 그들은 물건 값을 흥정하지 않고 가격표에 표시된 대로 팔고 싶었던 것.
야심 찬 시작이었지만 매장을 연 첫날 매출액은 불과 4달러 98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티파니가 유럽 제품의 수입상들로부터 구입한 희귀하고 이국적인 물건들은 곧 뉴요커들을 매료시켰다. 당시 유럽 귀족들의 고상함과 부유함을 은근히 동경했던 미국 상류층을 중심으로 티파니 앤 영은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티파니는 최고 품질과 독특한 디자인만이 사업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자연스러운 조화와 질서정연한 비례가 강조된 가장 미국적인 제품들을 디자인했다. 1847년부터는 금제품을 생산
했고 1년 뒤 유럽의 다이아몬드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졌을 때는 다이아몬드를 대량 구입하기도 했다. 1851년 은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티파니는 미국 회사로는 최초로 은순도 92.5% 이상을 의미하는 ‘925/1000 규격’을 채택했다.
당시 영국 은화의 표준이었던 이 규격은 후에 미 의회에서 '스털링 실버(Sterling Silver)'라는 미국의 은제품 공식 기준으로 인정받게 됐다. 현재까지도 티파니의 모든 은제품에는 회사명과 함께 '스털링
'또는 '925/1000'이 표시돼 있다. 동업으로 시작된 티파니 앤 영은
1853년 찰스 티파니가 모든 지분을 인수하게 됐다. 회사 이름이 티파니 앤 코(Tiffany & Co.)로 바뀐 것도 바로 이때. 명칭을 바꾸면서 매장도 브로드웨이 550번가로 이전한 티파니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다름 아닌 남북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티파니는 전쟁 중 연합군을 위해 칼· 깃발· 수술용 집기 등 군수물품들을 제조하며 가장 미국적인 브랜드로 발돋움하게 된다.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유례없는 풍요의 시기를 맞게 됐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민첩하게 티파니는 화려하고 정교한 보석들을 생산해냈다. 이는 록펠러와 같은 신흥 부자들의 입맛에 맞아떨어지면서 티파니를 상류층의 보석 브랜드로 확실히 자리잡게 하였다.
티파니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1878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디자인 박람회에서였다. 미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은과 보석 부문을 포함해 모두 8개 메달을 휩쓸었다. 이를 계기로 티파니는 유럽 왕족들의 금 ·은을 세공하는 영광을 얻었다.
1902년 초대 디자인 실장을 맡은 창업자의 아들 루이스 티파니(Louis Tiffany)는 당시의 흐름이던 아르누보(Art Nouveau)의 선구자였다.
아르누보는 자연의 선과 곡선, 그리고 형상을 디자인에 반영하고자 했던 디자인계의 움직임이다. 루이스
는 이를 바탕으로 자연스런 빛의 보석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티파니의 디자인이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티파니는 매장을 샌프란시스코· 런던· 일본 등으로 확장하고 제품군 보석· 식기· 크리스털· 필기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화했다.
티파니는 미국의 역사적인 순간들에 항상 함께 있었다. 1885년엔 미국 정부의 공식 인장을 디자인했다. 이때 만들어진 인장은 현재까지 미국 1달러 지폐에 사용될 뿐 아니라, 미국 정부의 공식 서류에 사용되고 있다. 미 해군 영웅들에게 수여됐던 훈장 역시 티파니의 작품이다. 뉴욕 요트 클럽의 18K 트로피도 티파니가 직접 디자인했다. 이를 계기로 티파니는 미국 프로풋볼 NFL의 우승 트로피와 우승팀의 기념 반지도 만들고 있다.무엇보다 티파니의 명성을 잘 보여주는 것은 보석 세팅, 그 중에서도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이다.
1877년 채굴된 천연 황색 다이아몬드는 지금까지 가장 크고 화려한 보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287.42캐럿에 달했던 이 원석은 티파니의 보석 전문가 조지 쿤즈(George Kunz)박사에 의해 128.54 캐럿의 다이아몬드로 연마됐다. 원석의 절반 이상이 잘렸지만, 90면을 가진 화려한 다이아몬드로 재탄생된 것. 이는 원석의 크기보다는 광채가 중요하다는 티파니의 신념을 잘 보여준다. 또 티파니는 프랑스 왕실 보석을 대부분 매입하며 '다이아몬드의 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티파니의 대표적인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로는 ‘육지세팅(Six-Prong)’을 꼽을 수 있다. 1886년 선보인 이 세팅 기술은 지금까지도 예비 신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디자인으로 '티파니 세팅'이라고 불린다. 밴드에서 분리된 다이아몬드가 6개의 백금 다리에 의해 떠받들여진 형상이다. 완벽한 빛의 반사를 통해 다이아몬드의 자연스런 광채를 살리는 최고의 기술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도 1926년 티파니의 플래티늄 순도 기준이 미국의 공식 기준으로 채택되는 등 티파니는 보석 분야에서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티파니의 디자인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엄격한 기준에 의해 변함없는 아름다움과 매력을 발산할 뿐이다. 창립 이후 철저하게 지켜온 정찰제와 티파니 제품을 사는 사람에게만 제공하는 '티파니 블루 박스'는 티파니의 자존심이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여주인공 홀리(오드리 헵번)에게 티파니는 행복과 부의 상징이었다. 이처럼 티파니는 지난 160년 동안 가장 미국적인 매력으로 미국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이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