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레이 (1890-1976)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한 만레이는 초기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회화 작품들을 주로 발표하다가 마르셀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다다이즘에 접근했다. 1915년 마르셀 뒤샹과 처음 만났으며 같은 해, 첫 개인전의 카다로그를 복사하기 위해 처음 카메라를 잡은 것을 시작으로 뒤샹과 함께[뉴욕, 다다]라는 잡지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마르셀 뒤샹과 가장 막역한 사이였던 만레이는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패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는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1920~1930년를 대표하던 세계적인 시인, 음악가, 화가들의 초상사진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1921년 파리로 옮겨간 후 본격적으로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 하였고 1924년경부터 앙드레 부르통이 이끌던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 하였으며 당시 프랑스 패션계를 주름 잡던 폴 푸아레를 소개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패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36년부터 37년을 기점으로 패션 잡지[하퍼스 바자]에 사진을 제공하였다. 그는 사진의 표현영역을 넓히는 여러 가지 혁신적 기법을 발명했는데,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에다 직접 피사체를 배치하여 거기다가 빛을 비추어 나타나는 이미지 레이오그래프, 솔라이제이션 기법 등으로 명성을 얻었으다다이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만든 아방가르드 영화의 걸작 ‘에미크 바키아’ ‘불가사리’, ‘이성으로의 회기’는 유럽 전역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1951년 미국의 척박한 문화적 풍토와 자신의 예술에 대한 몰이해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만레이는 그 후로 회화 작업을 했다. 프랑스 정부는 만 레이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 하였으나 부조리와 기존 가치의 파괴를 신조로 하는 다다이즘 운동의 순수성과 동지들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며 수상을 거절 했다. 하지만 죽기 전 마지막 생일날, 주위 사람들이 훈장으로 메달과 리본을 교환해 달아 주었다. 1976년 사망해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그의 아내 줄리엣이 평소 그가 즐겨쓰던 말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관심 하지는 않았던’ 이라는 비명을 새겨주었다. 만레이는 미의 모험자이며, 미의실험자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작품을 제작한 멀티아티스트였으며 특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모던한 작품으로 현대 사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전설적인 사진가이자, 화가, 오브제 제작자,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만레이는 20세의 가장 독창적이고 다재다능한 예술가중의 한 사람이다. 전시를 통해 소개될 110점의 만레이의 작품과 함께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싹을 틔운 현대 예술이 걸어온 있는 그대로의 발자취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질문한다. 더 이상 고안하고 싶고 더 이상 해보고 싶은 스타일이 남아 있는가? 그것들은 고안이 아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창조적 행위에 관한 한, 나는 평생을 외로운 섬에서 살아온 은둔자임과 동시에 톱니바퀴의 한 톱니일 뿐이다.’
- 만레이 -
앗제의 사진과 그의 여러 작업이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유를 알려면 그가 주로 작업을 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과 미국의 사진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사진은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한 기록으로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평이한 사진으로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앗제의 작업은 오늘날 평이하고 사진의 주류로 보이는 형태의 작업을 가능하게 한 정신적, 미학적 혁명을 성취하고 있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에 있어 사진의 주된 경향은 인간을 의도적으로 장식하고 포장해서 그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자연스러운 귀족의 모습으로 만들거나 도식적인 명함판을 양산하는 초상사진의 영역, 그리고 사진에 여러 가지 조작을 가해 피그멘트의 효과를 내면서도 사물의 인식체계는 여전히 17,8세기 낭만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예술 지향적 사진의 영역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런 경향을 완전히 거부하고 현대사진의 이정표를 세운 앗제의 사진이 갖는 혁명적 성과는 곧 드러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의 역사에서 앗제는 두 가지 부분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중 하나는 다분히 미국을 중심으로 생겨나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견해이며 비교적 최근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앗제가 오늘날 사진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척자이며 이전의 역사에서는 다분히 무시되어 왔던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사진사의 전면에 복원시킨 위대한 선각자라는 평가이다. 이런 시각은 앗제가 남긴 수천 장의 사진이 19세기 말 대도시로의 급격한 변화과정 속에 있었던 프랑스 파리(Paris)와 그 근교인 일드프랑스(Ile-de-France)지방의 세부적인 모습을 백과사전적으로 그리고 정밀한 지도를 그리듯이 담담히 기록하고 있고, 또 이러한 기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수반하는 인간의 소외-사실 그의 사진에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 없지만-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항상 18X24 cm 크기의 유리 플레이트로 작업을 했고, 광각 렌즈를 사용했으며 카메라의 앞부분이 위로 올라가게끔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중 일부는 사진의 윗부분이 렌즈의 이미지 밖으로 벗어나 있는 것도 있고, 또 그의 사진 대부분이 사진의 광학적 축 즉 원근법의 소실점이 화면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바로 다른 사진가들의 작업과 다른 앗제 사진만의 독특한 힘을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건물이나 길의 수직선은 항상 수직으로 뻗어 있다. 이는 앗제가 자신의 표현 의도를 위해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과 주변의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그 후 1927년 사망할 때까지 일생동안 오직 파리와 그 근교의 완벽한 사진기록에만 매달렸다. 당시 유행한 예술사진과 살롱에 출품하는 유혹에 한 번도 빠져들지 않았고, 당시 유행에 크게 뒤떨어지는 오래된 장비를 사용하면서도 순수한 시각으로 대상을 찍어 나갔다. 그의 사진적 접근방식은 직설적이었고, 어떤 특별한 효과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대상들을 기록해서 오늘날 다큐멘터리 사진사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의 하나인 6000여점 이상의 사진을 남겨 놓았다.
브라사이는 으젠느 앗제 계열을 이어받은 프랑스 예술파 사진의 주축 작가로서, 그의 위치는 오늘날까지 확고부동하다. 그는 본래 그림을 좋아해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미술학교에 다녔지만, 다시 베를린의 미술학교에서도 공부한 적이 있다. 그 후 1923년에는 파리로 나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브라사이는 예술에 관한 한 다양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이러한 예술적 천성이 그로 하여금 파리에 머물게 했으며 쉽게 예술의 도시에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그는 그 당시 피카소, 브라크를 비롯한 화가들과 헨리 밀러,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등과 함께 어울렸다. 그의 사진 작품의 특질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섬세함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예술가적인 그의 기질이 항상 화면 전체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사진뿐만 아니라 그림은 물론, 조각도 만들고 시도 많이 썼다. 그의 사진세계는 소재, 사실기록성의 존중이라는 사진에 대한 입장, 시적인 감성에 의한 분위기의 파악이라는 점에 있어서 앗제와 동일하다. 그런데 앗제의 사진이 내향적이고 소박한데 비해 그의 사진은 외향적이며 화사하다. 앗제와 달리 정공법으로 밀고 들어가서 대상의 조화를 추구하였으므로 개방적이고 직접적이다. 그의 사진에서는 대체적으로 화면 속에서 인물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공간적인 상황이나 분위기는 존속적인 조화관계로 처리했다. 대상접근방식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정서적인 반응 또한 다르다. 앗제의 시적인 분위기 묘사가 소박한 감미로움인데 비해 브라사이는 관능적이고도 화려한 정감으로 대상을 파악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성을 지닌 브라사이인 만큼 사진 작품에서 회화적인 정취나, 조각적인 형태미나, 혹은 시적인 로망을 풍기고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에만 치우치는 일이 없이 항상 사진적인 조건 속에서 그것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브레송은 스냅 사진의 지위를 세련되고 섬세한 예술로 높인 작가로 평가된다. 사진작가로서 "결정적 순간 (decisive moment)"을 잡아내는 능력, 디자인에 대한 정확한 눈,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방식, 사진 이론과 실기에 대한 박식한 언급 등을 통해 브레송은 현대 사진작가들 중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의 사진과 사진 에세이는 30년 간 세계 주요 잡지에 소개되어왔고, 그의 작품은 미국과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는데, 기념비적인 전시회였던 '결정적 순간 (Decisive Moment)' 전은 루브르에서 열린 최초의 사진전이었다. 브레송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의식은 사진기자의 필수적인 자질이라고 언급했으며,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없다면,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처한 인간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아무리 잘 찍은 사진이라 할지라도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폴크너 등 저명 인사들의 초상에는 편안한 방식으로 그들의 개성과 성격이 함축되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에 대하여 간결하게 '한 사건에게 알맞은 인상을 부여하는 형태의 명확한 구성 뿐 아니라, 그 사건의 의미심장함을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동시에 인식하는 것'임을 언급했다. 그의 작품은 순간적인 무방비 상태에 대한 스냅샷이며, 브레송은 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의 책 '결정적 순간'에서 브레송은 사진에서는 가장 작은 것이 위대한 주제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세부가 중심 사상이 될 수도 있음을 언급한다. 그는 모든 아마추어 사진작가들도 소유하고 있는 장비를 이용하여 작품활동을 했는데, 주로 일반적인 50mm렌즈를 장착한 35mm 카메라를, 때때로 풍경을 촬영하기 위하여 망원 렌즈를 이용하기도 했다. 브레송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을 발휘하여 귀중한 이미지들을 남겼다. 우리는 그의 눈을 통하여 세상을 더욱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진실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만레이사진전&세계사진역사전
만레이 (1890-1976)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한 만레이는 초기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회화 작품들을 주로 발표하다가 마르셀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다다이즘에 접근했다. 1915년 마르셀 뒤샹과 처음 만났으며 같은 해, 첫 개인전의 카다로그를 복사하기 위해 처음 카메라를 잡은 것을 시작으로 뒤샹과 함께[뉴욕, 다다]라는 잡지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마르셀 뒤샹과 가장 막역한 사이였던 만레이는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패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는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1920~1930년를 대표하던 세계적인 시인, 음악가, 화가들의 초상사진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1921년 파리로 옮겨간 후 본격적으로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 하였고 1924년경부터 앙드레 부르통이 이끌던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 하였으며 당시 프랑스 패션계를 주름 잡던 폴 푸아레를 소개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패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36년부터 37년을 기점으로 패션 잡지[하퍼스 바자]에 사진을 제공하였다. 그는 사진의 표현영역을 넓히는 여러 가지 혁신적 기법을 발명했는데,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에다 직접 피사체를 배치하여 거기다가 빛을 비추어 나타나는 이미지 레이오그래프, 솔라이제이션 기법 등으로 명성을 얻었으다다이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만든 아방가르드 영화의 걸작 ‘에미크 바키아’ ‘불가사리’, ‘이성으로의 회기’는 유럽 전역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다. 1951년 미국의 척박한 문화적 풍토와 자신의 예술에 대한 몰이해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만레이는 그 후로 회화 작업을 했다. 프랑스 정부는 만 레이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 하였으나 부조리와 기존 가치의 파괴를 신조로 하는 다다이즘 운동의 순수성과 동지들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며 수상을 거절 했다. 하지만 죽기 전 마지막 생일날, 주위 사람들이 훈장으로 메달과 리본을 교환해 달아 주었다. 1976년 사망해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그의 아내 줄리엣이 평소 그가 즐겨쓰던 말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관심 하지는 않았던’ 이라는 비명을 새겨주었다. 만레이는 미의 모험자이며, 미의실험자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작품을 제작한 멀티아티스트였으며 특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모던한 작품으로 현대 사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전설적인 사진가이자, 화가, 오브제 제작자,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만레이는 20세의 가장 독창적이고 다재다능한 예술가중의 한 사람이다. 전시를 통해 소개될 110점의 만레이의 작품과 함께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싹을 틔운 현대 예술이 걸어온 있는 그대로의 발자취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질문한다. 더 이상 고안하고 싶고 더 이상 해보고 싶은 스타일이 남아 있는가? 그것들은 고안이 아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창조적 행위에 관한 한, 나는 평생을 외로운 섬에서 살아온 은둔자임과 동시에 톱니바퀴의 한 톱니일 뿐이다.’
- 만레이 -
앗제의 사진과 그의 여러 작업이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유를 알려면 그가 주로 작업을 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과 미국의 사진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사진은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한 기록으로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평이한 사진으로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앗제의 작업은 오늘날 평이하고 사진의 주류로 보이는 형태의 작업을 가능하게 한 정신적, 미학적 혁명을 성취하고 있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에 있어 사진의 주된 경향은 인간을 의도적으로 장식하고 포장해서 그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자연스러운 귀족의 모습으로 만들거나 도식적인 명함판을 양산하는 초상사진의 영역, 그리고 사진에 여러 가지 조작을 가해 피그멘트의 효과를 내면서도 사물의 인식체계는 여전히 17,8세기 낭만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예술 지향적 사진의 영역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런 경향을 완전히 거부하고 현대사진의 이정표를 세운 앗제의 사진이 갖는 혁명적 성과는 곧 드러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의 역사에서 앗제는 두 가지 부분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중 하나는 다분히 미국을 중심으로 생겨나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견해이며 비교적 최근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앗제가 오늘날 사진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척자이며 이전의 역사에서는 다분히 무시되어 왔던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사진사의 전면에 복원시킨 위대한 선각자라는 평가이다. 이런 시각은 앗제가 남긴 수천 장의 사진이 19세기 말 대도시로의 급격한 변화과정 속에 있었던 프랑스 파리(Paris)와 그 근교인 일드프랑스(Ile-de-France)지방의 세부적인 모습을 백과사전적으로 그리고 정밀한 지도를 그리듯이 담담히 기록하고 있고, 또 이러한 기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수반하는 인간의 소외-사실 그의 사진에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 없지만-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항상 18X24 cm 크기의 유리 플레이트로 작업을 했고, 광각 렌즈를 사용했으며 카메라의 앞부분이 위로 올라가게끔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중 일부는 사진의 윗부분이 렌즈의 이미지 밖으로 벗어나 있는 것도 있고, 또 그의 사진 대부분이 사진의 광학적 축 즉 원근법의 소실점이 화면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바로 다른 사진가들의 작업과 다른 앗제 사진만의 독특한 힘을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건물이나 길의 수직선은 항상 수직으로 뻗어 있다. 이는 앗제가 자신의 표현 의도를 위해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과 주변의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그 후 1927년 사망할 때까지 일생동안 오직 파리와 그 근교의 완벽한 사진기록에만 매달렸다. 당시 유행한 예술사진과 살롱에 출품하는 유혹에 한 번도 빠져들지 않았고, 당시 유행에 크게 뒤떨어지는 오래된 장비를 사용하면서도 순수한 시각으로 대상을 찍어 나갔다. 그의 사진적 접근방식은 직설적이었고, 어떤 특별한 효과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대상들을 기록해서 오늘날 다큐멘터리 사진사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의 하나인 6000여점 이상의 사진을 남겨 놓았다.
브라사이는 으젠느 앗제 계열을 이어받은 프랑스 예술파 사진의 주축 작가로서, 그의 위치는 오늘날까지 확고부동하다. 그는 본래 그림을 좋아해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미술학교에 다녔지만, 다시 베를린의 미술학교에서도 공부한 적이 있다. 그 후 1923년에는 파리로 나가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브라사이는 예술에 관한 한 다양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이러한 예술적 천성이 그로 하여금 파리에 머물게 했으며 쉽게 예술의 도시에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그는 그 당시 피카소, 브라크를 비롯한 화가들과 헨리 밀러,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등과 함께 어울렸다. 그의 사진 작품의 특질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섬세함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예술가적인 그의 기질이 항상 화면 전체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사진뿐만 아니라 그림은 물론, 조각도 만들고 시도 많이 썼다. 그의 사진세계는 소재, 사실기록성의 존중이라는 사진에 대한 입장, 시적인 감성에 의한 분위기의 파악이라는 점에 있어서 앗제와 동일하다. 그런데 앗제의 사진이 내향적이고 소박한데 비해 그의 사진은 외향적이며 화사하다. 앗제와 달리 정공법으로 밀고 들어가서 대상의 조화를 추구하였으므로 개방적이고 직접적이다. 그의 사진에서는 대체적으로 화면 속에서 인물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공간적인 상황이나 분위기는 존속적인 조화관계로 처리했다. 대상접근방식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정서적인 반응 또한 다르다. 앗제의 시적인 분위기 묘사가 소박한 감미로움인데 비해 브라사이는 관능적이고도 화려한 정감으로 대상을 파악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성을 지닌 브라사이인 만큼 사진 작품에서 회화적인 정취나, 조각적인 형태미나, 혹은 시적인 로망을 풍기고 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에만 치우치는 일이 없이 항상 사진적인 조건 속에서 그것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브레송은 스냅 사진의 지위를 세련되고 섬세한 예술로 높인 작가로 평가된다. 사진작가로서 "결정적 순간 (decisive moment)"을 잡아내는 능력, 디자인에 대한 정확한 눈,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방식, 사진 이론과 실기에 대한 박식한 언급 등을 통해 브레송은 현대 사진작가들 중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의 사진과 사진 에세이는 30년 간 세계 주요 잡지에 소개되어왔고, 그의 작품은 미국과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는데, 기념비적인 전시회였던 '결정적 순간 (Decisive Moment)' 전은 루브르에서 열린 최초의 사진전이었다. 브레송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의식은 사진기자의 필수적인 자질이라고 언급했으며,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없다면,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처한 인간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아무리 잘 찍은 사진이라 할지라도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폴크너 등 저명 인사들의 초상에는 편안한 방식으로 그들의 개성과 성격이 함축되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에 대하여 간결하게 '한 사건에게 알맞은 인상을 부여하는 형태의 명확한 구성 뿐 아니라, 그 사건의 의미심장함을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동시에 인식하는 것'임을 언급했다. 그의 작품은 순간적인 무방비 상태에 대한 스냅샷이며, 브레송은 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의 책 '결정적 순간'에서 브레송은 사진에서는 가장 작은 것이 위대한 주제가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세부가 중심 사상이 될 수도 있음을 언급한다. 그는 모든 아마추어 사진작가들도 소유하고 있는 장비를 이용하여 작품활동을 했는데, 주로 일반적인 50mm렌즈를 장착한 35mm 카메라를, 때때로 풍경을 촬영하기 위하여 망원 렌즈를 이용하기도 했다. 브레송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을 발휘하여 귀중한 이미지들을 남겼다. 우리는 그의 눈을 통하여 세상을 더욱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진실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