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by 츠지 히토나리

송현진2006.12.20
조회31

DAIHITSUYA by Hitonari TSUJI, 2004.

 

 

우연한 기회에 편지 대필 아르바이트를 하게된 작가 지망생.

그리고 그를 찾은 의뢰인들의 사연과 편지 10통.

그 편지들을 통해 사랑을 이루기도 하고

지난 날을 또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하는 그런 편지들.

 

편지 한 통으로 많은걸 이루고

만족을 느끼게하는 이 소설 읽으면서

진 가신 감독의 러브 레터 생각이 많이 낫다.

한 마을에 날아든 정열적인 러브 레터 한장이

온 마을 전체를 들뜨고 행복에 젖게한다는 내용의 그 영화.

DVD 구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한 번 보면 좋겠다.

 

 

p. 8

편지로밖에 전할 수 없는 마음이 있고, 또 편지이기 때문에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편지지나 엽서에는 스피드만을 요구하는 요즘의 시대 감각과는 정반대인 평온함과 그리운 손길도 있다. 편지에는 이제부터 마음을 전하겠다는 무게가 전해지며, 편지 봉투를 뜯는 사람은 다소의 차이는 있어도오로지 자신에게만 전달된 그 특별한 우편물에 얼마간의 기대와 흥분을 느낄 수 있다.

 

p. 17

쓰는 것보다 읽는 걸 좋아했던 나는 책을 읽는 장소에도 까다로웠다. 햇빛이 드는 벤치는 독서를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편쳐 든 책 위로 나뭇잎 상이에서 새어든 햇빛이 비치고, 빛을 따라 글씨를 쫓아가며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그 고요한 정신의 흔들림이 너무도 좋았다.

 

p. 21

그것이 어떤 기회였던, 만나기만 하면 그건 멋진 첫 출발이 됩니다. 부꺼러운 건 순간이니까 망설일 필요는 없겠죠. 어쩌면 이후의 인생을 뒤흔들지 모를 커다란 뭔가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p. 22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나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나 만난 적 있는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넓은 세상에서 당신을 찾아냈습니다.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을지의 여부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당신이 내일도 웃는 얼굴로 우리 가게에 들러준다면, 나는 이 기회의 다음 단계를 손에 놓게 됩니다. 작은 기회를 주세요. 최소한의 뭔가를.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무렵 나는 분명 가슴을 두근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내일은 보나 마나 눈이 빨갛게 돼서 일을 하겠지요.

내 마음이 당신에게 닿았나요?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적어둡니다. 이것이 내 이름입니다.

 

치노 다이스케, 19세

 

p. 40

슬펐던 일보다 어째서 즐겁고 아름답고 행복했던 기억만 나는지. 눈을 감으면 내게 너무도 다정했던 타쿠 모습이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매일 타쿠짱을 생각해요.

 

p. 102

"한 통 더 대필해두었습니다. 대필료는 필요 없어요. 그건 서비스죠."

히사미가 봉투에 써진 자기 이름을 보았다. 봉투 뒤의 보내는 ㅅ람 이름에도 자기 이름이 써 있었더. 히사미가 고개를 갸우뚱댔다.

"당신이 당신에게."

나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나카라이 히사미 님

 

나는 당신이 싫어요. 당신도 내가 싫은가요?

당신은 나를 변화시키고 싶지 않나요?

나는 당신을 변화시키고 싶어요.

지금이 변화시킬 기회인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당신이좋아요. 당신도 내가 좋은가요?

 

나카라이 히사미

 

p. 113

양지는 여기저기 널려있지. 가게 처마에도 있고, 남의 집 창가에도 있다. 주택가 골목이나 공원, 역앞, 버스 정거장, 슈퍼마켓 주차장 등 어딜 가나.

양지에서는 아련한 행복이 하늘거리고 있다. 시간은 정체되어 있지. 따뜻하고 한가로운 행복한 장소다. 햇볕이 찬란히 내리쬐어, 그것만이 드러나 부풀어 있는 장소, 거기가 양지란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넉넉한 시간이 흐르는 곳.

 

p. 116

네 행복을 마치 내 행복처럼 기뻐하는 무례를 용서해주길.

 

p. 118

편지에는 마법의 힘이 숨어 있어 제대로 그 힘을 활용할 수만 있다면, 마음은 몇 배나 아름답게 미화되어 상대에게 전해진다. 느낌이좋은 연애편지라면 받은 쪽은 보내는 이의 이미지를 좋은 쪽으로 키워갈 수 있을 것이고, 또 보내는 사람이 자신의 용모에 자신이 없다 할지라도 상대는 이름 좋은 쪽으로 오해해 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멋진 무언가를 가지고 있따. 그 무언가를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러브레터는 괴로운 마음을 대변하는 가장 듬직한 원군이 된다.

 

p. 122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단 하나의 열쇠가 필요하다. 이것이 연애편지의 철칙이다.

 

p. 151

노여움이 애정이란 걸 내게 가르쳐준 건 기억입니다. 그리고 시간입니다. 역사라고 해도 되겠지요. 그리고 당신입니다.

당신은 마치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나무 같습니다. 나는 그런 당신을 넘어뜨리려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보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결론은 나무의 승리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무는 그만큼 대지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고, 도 그만큼 유연하게 흔들어줬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람을 멈추면, 당신도 흔들리기를 그만두고 똑바로 섭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신이 크게 흔들렸던건 내가 거세게 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강풍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당연히 당신도 흔들리지 않았겠지요.

나는 화가 날 때마다 당신을 흔들고 그 잎을 모두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계절처럼 인생이 바뀔 때마다 금방 파란 싹을 다시 피워보였습니다.

승리나 패배란 것이 두 사람 사이에는 없습니다. 거짓 같은 감사나 그때만의 찬사는 필요 없겠지요. 분명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거기에 당신이 우뚝 서 있는 것 그 자체가 내게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65년이란 세월이 걸려 그것을 아게 해준 것도 역시 당신이었습니다. 아니오, 65년이란 세월이 있었기에 나는 이제 겨우 알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더 나는 당신을 흔들고 싶습니다. 나는 산들바람입니다. 부드럽게 산들거리는 바람으로 있고 싶습니다. 당신이 올해도 푸른 잎을 잔뜩 피울 것을 기대하면서.

 

여든여덟의 내가

 

p. 157

'중요重要'란 한자, 대단하지 않아? 말하고자 하는 뜻을 짐작하게 하잖아? 무거운 요소. 코오장은 내게 언제나 무거운 요소였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p. 168

실은 시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쿠도 씨가 말했어.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흐르는 건 사람이고, 시간은 언제나 이렇게 멈춰 있는 거라고.

 

p. 172

집을 나오다 얼핏 식탁이 눈에 들어왔어. 찻주전자 옆에 종이가 놓여 있었어. 라고 적혀 있었어.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어. 코오짱이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 놀라 주변을 둘러보고 말았어.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종이는 이미 노랗게 색이 바래 시간이 지났음을 말하고 있었어. 내가 집을 나간 직후에 쓴 거겠지.

음식 쓰레기 냄새가 나기에 그것을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내 집으로 돌아왔어. 그날은 가슴이 아파 아무것도 없는 좁은 방에서 혼자 엉엉 울었어.

코오짱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래도 난 아직 돌아갈 수가 없었어. 앚기 내 자신과 이야기가 끝나지 았았기 때문이야. 제대로 이야기를 해두고 싶었어.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어느 이룡일 기분 좋은 오후, 방의 창문이 열린 채였어. 코오짱이 혼자 밥을 먹고 있었어. 우물우물 밥을 먹는 코오짱 옆모습을 전신주에 몸을 숨기고 바라보았어. 코오짱이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어. 그렇게 늘 코오짱 못브을 목격했어. 왜일까.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했어.

코오짱은 자주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을 손에 들고 집으로 갔어. 오늘은 뭘 먹을까 상상하며 쭉 지켜보았지.

바로 내 앞을 코오짱이 지나간 적도 있어. 하마터면 들킬 뻔했지. 코오짱 앞으로 나서고 싶은 마음을 죽을힘을 다해 눌렀어. 코오짱은 포정 없는 얼굴로 바로 내 앞을 지나갔어. 코오짱, 난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널 보냈어.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어. 나는 다시 몰래 집으로 가 옷장에서 겨울옷을 몇 벌 가지고 나왔어. 부엌에 있는 쓰레기도 버려두었어. 라고 적힌 종이를 손에 들고 한동안 바라보았어.

코오짱 집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있는 카페, 알아? 레오나르도란 이름의 이상한 카페. 예날에 딱 한 번 둘이 들어간 적이 있었지. 함께 살던 때는 둘 다 그곳을 피했지. 우리는 도로 반대쪽에 있는 밝은 분위기의 카펠 다녔어. 그곳에 가면 코오짱을 만날것 같아, 난 일부러 레오나르도를 택했어.

여전히 실내는 어둡고 손님들은 모두가 지쳐보였어. 하지만 지금의 난 여기서 진한 커피를 마시는 게 좋아. 쓴 커피를 마시며 하나같이 독특한 개성을 가진 단골손님들은 바라보는 게 일과가 됐어.

이노가시라 고원에서 혼자 보트를 타고 벤텐사마에게 소원을 빌고, 호숫가에 있는 메밀집에서 어묵을 먹고 레오나르도에서 커피를 마셔. 거기 주인에게 코오짱 일을 의논했어. 정말 좋은 아저씬데 쿠도 씨와도 조금 닮았어. 얼굴이 새까많고 웃으면 눈가에 큰 주름이 잡혀. 주인 소개로 코오짱 집 근처 편의점에서 일을 하게 돼 선술집은 그만두어썽. 코오짱이 일 끝나면 들러 도시락을 사는 곳이야. 하지만 난 코오짱이 회사에 가 있는 시간에만 일을 해.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기로 했고. 그래서 가까이서 일을 하지만 코오짱과는 만나지 못하는 거야.

도시락을 고르는 코오짱 뒷모습을 상상해봐. 코오짱이 좋아하는 햄버거 도시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넉넉히 주문을 해서 점장한테 혼이 나기도 하고. 왜 이런 주문을 하느냐길래 젊은 사람들은 햄버거를 좋아하니까 라고 대답해뒀어.

계산기를 두드리며 가끔 밖을 봐. 공원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이 거리 안에 사이 좋았던 시절의 두 사람 모습이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눈가가 조금 뜨거워져. 집을 나온 지 벌써 일 년 이상이 지났어.

마음에는 경계라는 게 있어서 사람들은 그곳을 들어갔다 나왔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고 생각해. 난 마음의 국경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고 아직도 여행을 하고 있어. 마음의 경계란 복잡하고 다양한 지형을 그리고 있어. 내가 어느 날, 집에 돌아가지 않고 여행을 떠난 건, 좀 특별한 지형을 한 마음의 풍경에 발을 디뎠기 때문이야.

그 여행은 대단히 힘들었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었어. 집을 나간 이유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지만, 그래도 그것과는 전혀 다른 걸 깨달을 수 있었어. 내게 있어 뭐가 중요하고, 뭐가 보통이고, 뭐가 자연스러운 건지를.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만약 지금도 코오짱이 나를 기다려준다면, 나는 언제나 네가 도시락을 사는 편의점에서 평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을 하고 있어.

 

쿠로가네 리사

 

p. 187

뭔가를 기다린다는 건 사람에게 중요한 일이다. 기다리는 것이 온다고 믿는 동안은 신기하게도 힘이 나는 법이다.

의사인 친구가 예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병실을 장식하는 그림은 아름다운 풍경이나 꽃 그림이 아니라 뭘 그린 건지 생각하게 만드는 추상화 쪽이 좋다고. 그림에 담긴 뜻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 환자의 상상력을 자극해, 나아가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편지를 기다리는 행위에는 살아갈 희망이 잠재되어 있다.

 

p. 203

개봉한 편지의 감촉, 글씨의 친근함, 봉투에 붙인 우표의 스템프에 이르기까지 편지에는 곳곳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냄새가 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편지는 완전한 수제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지를 받으면 기쁘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만 보내진 메세지. 그것을 우체통에서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작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받게 된느 것이다.

무엇보다 우편 집배원을 통해 멀리서 배달되다는 것이 기쁘고, 거기에는 우체통이란 것이 존재해, 그 작은 상자를 여는 기쁨까지도 함께 딸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