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홍군(紅軍)의 뛰어난 여성 지휘관이자 여성해방 및 아동보육에 공적을 남긴 강극청(康克淸, 1911~1992)은 「강 따지에」(康大姐, 해석하면 ‘강 언니’인데, ‘따지에’란 연상의 여자에 대한 일종의 존칭)란 애칭으로도 불리지만, 그의 인생은 그렇게 따뜻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먼저 군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강극청은 1920년대 중국내전 시기 홍군에 투신했는데, 곧 홍군 사령관 주덕(朱德 1886~1976)과 결혼하게 된다. 이후 홍군 여자의용대 대장으로 직접 부대를 이끌었고, 여사령(女司令)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전투 지휘능력이 출중했다. 1934년 장개석의 5차 초공(剿共)이 시작되자 홍군의 퇴각을 따라 유명한 2만5천리의 장정(長征)에 참여했다.
군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후기의 정치적 행보도 중량감이 있다. 1934년 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 제2차 집행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됐고, 1945년 4월 연안(延安)의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군 대표로 참석했다. 여러 직책을 거치다가 1949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회의에 참가하여 건국대계를 협상했고, 이후 중국공산당대회 대표(7․8차)와 중앙위원(11․12차),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1․2․3․6차) 및 상임위원(4․5차), 전국정협(全國政協) 위원(2․3차)과 상임위원(4차), 부주석(5․6차)을 역임했다.
그는 또 1949년 3월 제1차 중국부녀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게 되는데, 이 회의를 계기로 일생을 군인으로 종사하겠다는 목표을 바꿔 사회와 정치, 부녀․아동을 위해 일하게 됐다. 이후 전국부련(全國婦聯) 상임위원(1차~5차)을 역임하고, 아동복리부(兒童福利部) 부장 부주임, 중국인민보위아동전국위원회(中國人民保衛兒童全國委員會) 비서장 부주석 주석, 송경령기금회 회장(宋慶齡基金會 會長)을 지냈다. 특히 아이들을 위해서 중국아동 및 소년기금회(中國兒童和少年基金會) 회장, 전국아동소년공작협조위원회(全國兒童少年工作協調委員會) 주임을 지냈다.1)
이처럼 강극청은 오랜 기간 군과 공직에 있으면서 홍군 지휘관과 공산당 지도자로서 공헌하였고, 신중국이 성립하자 여성해방운동과 아동보육활동에 힘써서 뛰어난 업적을 이뤘다. 그럼에도 말년의 문화혁명 기간에는 남편과 함께 고초를 겪는 등 생애 자체가 중국공산주의 운동사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풍운의 여호걸이었다.
중국의 여성은 좋은 가정 출신이라도 태어나면서부터 「부무공사(婦無公事)」(여자는 공직에 나갈 수 없다) 2)라 하여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공적인 일에서 완전히 제외되었고, 방적이나 술과 음식을 보살피는 것이 임무였다. 또 「삼종사덕(三從四德)」3)이 여성의 행위 규범이었는데, 이는 무능과 순종을 조장하기 위한 기능이었다. 가난한 집의 딸들은 「부무공사」「삼종사덕」등 전통의 굴레만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남에게 주어지거나 버려지는 등 일생을 학대와 노동으로 비참하게 살았다. 노신(魯迅)의 소설 「축복」의 주인공 아줌마처럼 “굴욕적으로 살고 처량하게 죽어갔다”.
강극청은 강서성 만안현(江西省 万安縣)의 동양식(童養媳, 望郞媳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의 민며느리)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공산당간부인 양부의 이야기와 자신의 환경을 통해 사회의 불평등을 이해하고 계급의식을 품으면서 성장했다. 15세 때부터 공산당 부녀협회에 참여했고 공산당 봉기에도 참가했다. 봉기 실패 후에는 숨어 지내다가 1928년 정강산(井岡山)에 가서 홍군에 투신, 정강산 혁명근거지의 홍군 병사가 됐다.
강극청은 주덕과의 결혼으로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 등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또 홍군대학(紅軍大學) 등 홍군 내의 교육기관을 통해서 공산혁명지도자들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육받았다. 주지하듯이 초기 중국공산혁명 지도자들은 코민테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들의 여성관 역시 코민테른의 혁명이론과 투쟁전술의 영향을 받았다.4) 그리고 이 코민테른의 공산주의 여성운동의 지침은 초기 중국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모택동의 부녀정책5)에 그대로 나타난다.
따라서 강극청의 여성해방사상은 코민테른의 지침과 모택동의 여성해방사상6)을 그대로 학습한 것이었다. 생산 자료가 사유제인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계급과 계급투쟁의 관점으로 부녀문제를 생각했다. 그는 “‘중국에서 여성은 봉건정권과 함께 신권(神權) 족권(族權) 부권(夫權)의 압박을 받고 있다. 부녀가 억압 받는 근원은 생산자료 사유제와 착취계급의 압박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투쟁에서의 승리만이 여성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다ꡓ고 믿었다.7) 그리고 그것을 실천했다. 초기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여성해방사상, 곧 모택동의 여성해방사상을 강극청은 자신을 해방하는 사상8)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인에게 새겨진 강극청에 대한 기억은 공산주의자이자 스스로를 해방시킨 여인이라는 인상과 함께 불굴의 정신과 휴머니즘 실현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동양식, 여자홍군병사, 부대의 교육으로 성장한 홍군의 모범인물, 보통 어머니이자 위대한 어머니9), 추구․ 분투․봉사․헌신의 생애10), 강직함과 엄격한 공사(公私)구분, 특권의식이 없고 소박 검소한 태도의 노(老)공산당원 11), 주덕의 정신을 이어받은 「강따지에」(康大姐)12)로 남아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간고분투(艱苦奮鬪), 노동존중, 인민사랑, 실사구시의 공산주의자로서의 생을 살면서, 「공이 크지만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덕이 높지만 드러내지 않고, 지위가 높지만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던」(功高不自居, 德高不自顯 位高不自私) 인간 강극청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불굴의 정신과 노력, 봉사와 배려, 노동존중, 절약과 검소 등은 변함 없는 인간적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덕목을 잃어버리고 황금이 종교가 된 이 시대에 초기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이상으로 여겼던 덕목-공산주의적 이상과 유교의 덕목이 합해진 것-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강극청의 삶을 추적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2. 동양식 강계수(童養媳 康桂秀)
1). 공산당원 양부(養父)의 가정
강극청은 1911년 9월7일(음력 7월15일) 강서성 만안현 나당만 대옥장(江西省 万安縣 羅塘灣 大屋場)의 가난한 어부 강연순(康年荀)의 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가 10명으로,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출생 40여일 만에 나기규(羅奇圭)에게 동양식(童養媳)으로 주어졌다. 강극청(어릴 때 이름 강계수 康桂秀)은 동양식이었지만 이 집에서 딸처럼 성장했다.
양부 나기규는 나당만 최초의 공산당원으로 농민협회의 주석이었는데, 집에서 당 집회를 가졌다. 양부는 옛날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어서, 계수에게도 자주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어린 계수는 이야기를 통해 여자들 중에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과 인간 세상에 너무나 많은 불공평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러한 가정환경 때문에 철 들면서부터 계급의식과 부자에 대한 증오감을 가지게 됐다.
양부의 가정 역시 가난해서 생활은 어려웠지만, 다른 동양식에 비해서 계수는 행운아였다. 욕 먹고 매를 맞기도 했지만, 양부모와 할머니는 후덕한 사람이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계수를 친자식처럼 대해주었다. 그도 다른 가난한 집 아이들처럼 6~7세가 되었을 때부터 나무를 줍고 소에게 풀을 먹이는 등 잡다한 가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아이들은 어려서 전족(纏足)을 했는데, 보통의 가정에서는 4, 5세부터 전족을 시작했다. 전족은 인위적으로 발을 작게 하는 것으로, 두 발을 옷감으로 꽁꽁 감싸서 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족은 정조 보전과 남자의 성적 도구화, 그리고 외모의 의미로 시작됐는데, 발이 큰 여자는 남에게 놀림을 당했다.
계수가 10세가 되었을 때 할머니가 전족을 시켰다. 그러나 계수는 할머니가 나가자마자 발을 싸맨 옷감을 풀어버리곤 했다. 할머니는 화를 냈지만, 양모가 나서서 전족을 하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할 수도 없고, 집안에서 일을 시키기도 곤란하다고 설득했다. 강극청은 이렇게 전족의 재난을 피했기 때문에 후에 공산혁명에 참가하여 남으로 북으로 종횡하면서 종군하였고, 2만5천리의 장정을 완수한 홍군 전사가 될 수 있었다.14)
어느날 광주리를 메고 동네의 학교를 지날 때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계수는 집에 돌아와서 양모에게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양모는 고개를 흔들면서ꡒ지주나 부자집 도련님 아가씨가 학교 갈 수 있다. 너처럼 가난한 집 아이가 어떻게 학교를 가겠느냐?ꡓ고 말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그는 다시는 학교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인 사춘기 소녀들은 환경을 비관했다.ꡒ이렇게 하루 종일 벌받듯이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해ꡓ라는 친구의 말에 계수는ꡒ우리 일생은 죽기 위해서 사는 거야. 설마 살 길이 없겠어? 어딘가 우리가 갈 길이 있을거야ꡓ라고 말했다. 계수는 광동혁명군이 북벌을 시작해서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한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ꡒ북벌군에는 여자부대(女兵隊)가 있어서 훈련도 받고 글자도 배우고 사상교육도 받는다는데, 그곳이 우리가 갈 길이 아닌가ꡓ라고 말했다. 이 말은 친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면 어떻게 병사가 될 수 있을까? 아는 사람도 없고 방법도 모르지만 계수는 이때부터 병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2). 부녀협회 등 초기 활동과 봉기 참여
1924년 겨울 공산당원 증천우(曾天宇) 장세희(張世熙) 등 10여명의 청년들이 만안현에 만안청년학회(万安靑年學會)를 조직했다. 그들은 잡지 「청년」(靑年)을 창간하고, 야학(평민야교, 平民夜校)을 세우고 여러 모임을 만들어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사회문제를 조사했다. 또 청년들을 모아 『인력거군의 혼사』(車夫的婚事) 등 몇 개의 연극을 공연했다. 이것을 통해 신사상을 선전하고 남녀평등, 혼인자주를 제창하고 전통 예교에 반대했다.
거의 모든 공연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계수는 강연과 야학에도 참여했다. 거기서 소련의 10월혁명을 알게 됐고, 10월혁명에서 지주․자본가를 타도하고,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를 건설했다는 것을 배웠다. 또 빈민이 들고일어나서 혁명을 일으킨다면, 세상이 바뀌고 새롭게 나아갈 길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14세였던 계수는 자신이 동양식이라는 인식과 환경 때문에 당원들이 말하는 공산혁명의 의미를 진리로 받아들였고, 공산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북벌군의 승리 소식은 곧 만안까지 들려왔다. 이 시기 강서와 호남은 공산혁명운동의 와중에 있었는데, 나당만에서는 증천우의 지도 하에 공산당의 활동이 활발했다. 이 때 계수는 나당만 부녀협회를 조직, 상임비서가 되어 각 곳을 다니면서 선전활동을 하였다. 1926년에는 구부협 선전위원(區婦協宣傳委員)으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혹한이나 우천시에도 부녀선전대원들을 이끌고 나당만 일대에서 활동했다. 부녀를 동원해서 토호열신(土豪劣紳)을 타도하고 동시에 여자 학대, 동양식 학대, 매매혼에 반대하고, 남녀평등․아편금지․도박금지를 제창했다. 또 여자들에게는 전족을 풀고 단발할 것을 권유했다.
습관을 고치는 것은 지주를 타도하는 공산혁명보다 어려웠다. 거기다 유동적인 상황이라 더욱 어려웠다. 후에 국민당군이 마을을 다시 점령했을 때 단발한 여자들을 공산당원으로 여겼기 때문에 단발한 여자들 가발을 만들어 쓰거나 옷감으로 머리를 싸매야 했다.
1928년 1월 초 만안현 농민군은 정강산에 가서 모택동․주덕의 홍4군(紅四軍)과 합류, 해방전쟁을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만안 부근의 수천현(遂川縣)을 점령하고, 4만 명의 병력을 모아 만안현성을 공격했다. 국민당군은 농민군의 위력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승리한 농민군은 만안현 소비에트정부의 성립을 선언했으나 이 소비에트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민당군이 몇배의 병력으로 만안현을 공격해 왔고,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현위원회와 현소비에트정부는 현성에서 철수하여 유격대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
이 전투의 실패로 나당만의 공산당은 큰 어려움에 처했다. 공산당원과 농민군은 돌아온 국민당군과 토호열신들에게 체포돼 살해됐다. 계수도 왕가촌의 외가로 피했다. 외할아버지는 계수를 장작더미 안에 숨겨주었고, 장작을 쌓아 외부인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감추었다.
양부 나기규는 공산당원이자 나당현 농민협회 주석으로 역시 몸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양부는 계수가 체포될 것을 걱정하여 그를 결혼시키려 했다. 계수는 밖에서는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는 국민당군에게, 집안에서는 결혼시키려는 양부의 압박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계수는 홍군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정강산은 만안으로부터 몇 백리나 멀리 있었다. 더구나 여자 아이가 어디 가서 홍군을 찾을 것인가? 그러나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1928년 음력 8월 만안현성에 대한 공격준비차 홍군 몇 명이 나당만에 왔다. 그들은 정강산의 홍4군이었는데, 정강산에 이미 공농(工農)혁명근거지가 건립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만안 농민들에게 홍군 참여를 권유했다. 계수는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증화영(曾華英, 증천우의 여동생) 장량(張良) 나항수(羅恒秀) 유계수(劉桂秀) 주정란(朱挺蘭) 장경수(張庚秀)와 함께 정강산으로 출발했다.
계수에게 홍군이 된다는 것은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국민당군의 추격과 체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었다. 또 빈곤한 생활과 동양식의 고난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3. 홍군 전사로서의 생활
1). 모택동의 여성해방론 학습
정강산에 오기 전부터 계수는 모택동과 주덕의 명성을 듣고 있었지만, 모․주(毛․朱)가 한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정강산에 온 후 직접 그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마음속으로부터 존경심을 가지게 됐다. 어느날 주덕 군장(軍長)을 보았는데, 중 정도의 키에 체격은 건장했고, 위엄 있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회백색의 군복을 입고 풀로 엮은 신발을 신었고, 몸은 야윈 편이었으며,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위엄과 자상함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가 일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계수가 본 주덕의 첫인상은 편안한 시골농민이었다. 이 때문에 한 홍군전사와 위엄과 명성을 갖춘 사령관(軍長) 간의 거리가 단축되었다. 당시 계수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주덕의 독특한 기질이었고 위대한 점이었다. 행군도중 계수는 전사들이 하는 ꡒ우리 홍군전사의 생활과 전투는 고난의 길이지만, 주군장도 우리와 똑 같이 한다ꡓ는 이야기도 들었다.
부대가 민가에 숙영할 때면 주덕은 농민들과 고향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그들을 위해 청소하고 농사일을 도와주는 등 자기 가족처럼 대했다. 그의 행동은 무의식 중에 많은 전투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군과 민을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 만들었다. 또 전투 중에도 주덕은 항상 적의 정세를 미리 알아보고 지형을 살피고 병력 배치를 연구하고, 진지하고 세밀하게 전략을 세웠다.
정강산에 온 이후로 계수는 홍군전사로 단련되었다. 포성을 듣거나 포탄이 주변에서 폭발해도 긴장하지 않았다. 대담해졌을 뿐 아니라 다리도 튼튼해졌다. 계수는 원래 힘이 강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등에 메거나 넘어진 동지를 부축해 주었다. 숙영지에 가면 다른 사람들은 피곤해 했지만 계수는 촌민을 도와 물을 길어주거나 장작을 패주었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촌민들의 생활을 조사했다.
어떤 때는 정찰대에 합류했는데, 모택동과도 몇 차례 조사를 간 적이 있었다. 조사한 주요 내용은 그 곳의 계급투쟁의 정황, 주변의 교통, 지형, 강의 흐름, 산림, 풍토와 인정 등이었다. 모택동은 직접 조사표를 작성했다.
"모 위원(모택동)은 내가 총과 배낭을 매고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이 훌륭하다고 나를 칭찬했다. 나는 좀 쑥스러웠다. 모 위원은 이름이 뭐냐, 어디서 왔으며, 몇 살이냐, 집에 가족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는데, 모 위원은 다른 사람은 어머니가 한사람인데 너는 어째서 두 명의 어머니가 계시냐고 물었다. 나는 한 분은 생모이며 한 분은 양모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모 위원은 둘 중에서 누가 더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생모는 좋지 않습니다. 내가 태어난 지 40일만에 나를 남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양모가 좋습니다. 나를 때리고 욕했지만 그래도 돌보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얘기하다가 저절로 양모가 나를 때리고 욕했던 일을 말하게 됐다"
모택동은 그에게 부녀가 억압받는 근원과 사유제(私有制)와 착취계급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그것을 분석을 해주었다.
ꡒ모 위원은ꡐ생모가 너를 다른 사람에게 보낸 것을 원망하지 말아라. 그것은 지주나 부자들 때문이다. 너의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살 수가 없어서였다. 또 양모도 원망하지 말아라. 양모 역시 압박 받고 착취 받는 노동하는 인민이다. 양모가 너를 때리고 욕한 것은 봉건 사회의 독해이다ꡑ. 여기서 나는 나와 생모, 양모 모두 같은 등나무 위의 쓴 오이, 같은 계급의 전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처럼 고난을 겪는 부녀들이 전 중국에 1천만명에 그치겠는가.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는 우리 노동하는 부녀들의 진정한 적이다. 이 세 개의 큰 산과 네 개의 굴레를 전복하지 않고, 착취 계급과 사유제를 소멸하지 않고는 노동 부녀는 해방될 수 없다. 당시 모 주석은 ꡐ노동 부녀의 해방과 계급 투쟁에서의 승리는 불가분의 것으로, 계급투쟁에서 승리해야만 부녀들은 진정한 해방을 얻을 수 있다ꡑ고 말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서 계수는 모택동의 인식을 그대로 학습했고, 모택동의 신봉자가 됐다.
이 무렵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안원현(安遠縣)을 공격하다가 주덕의 아내 오약란(伍若蘭)15)이 중상을 입고 적에게 체포된 것이다. 오약란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처형당했다. 그녀는 처형되기 직전 고통 속에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고, 그 때문에 더 분노한 국민당군은 그녀의 목을 잘라 장대에 걸고, ‘공비(共匪)수령 주덕의 처 오약란’ 이라고 써서 대나무로 만든 상자 위에 세워서 강에 버려 흘러가게 했다.
오약란은 부녀조(婦女組) 간부였다. 홍군병사로서 많은 일을 했고 계수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실천적이었고, 좋은 품성을 가졌다. 오약란의 희생은 계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녀의 희생으로 계수는 혁명에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2). 주덕 군장(軍長)과 결혼
국민당군과의 전쟁중에서도 주덕은 시간이 있으면 부녀조에 와서 여군들과 이야기했다. 어느날 부녀조 조장 증지(曾志)가 계수에게 주군장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계수는 ꡒ그런 군장 드물죠, 사실은 높은 분이지만 관료 풍이 없고 전사와 똑 같이 전투하고 잘 싸우고 또 학문이 있고… ꡓ라고 말했다. 조장은 “주군장이 너를 아주 좋아해. 조직에서도 네가 그와 결혼하기를 바래. 오약란의 희생 이후 그는 정신적으로 아주 고통스러워 해ꡓ라고 말했다.
그는 주덕이 훌륭한 사령관이고 좋은 영도자이지만, 자신의 남편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러 면에서 차이가 너무 컸다. 계수는 17세가 안되었는데, 그는 이미 43세의 중년이었다. 수준으로 따지면 차이는 더 컸다. 계수는 이제 겨우 문자를 대충 아는 정도이고 사상도 유치하고 이론과 문화지식 수준도 낮지만, 주군장은 최고의 전략가이며 정치가였다. 지위로 따져도 주덕은 군장이고, 계수는 일개 여전사일 뿐이었다. 계수는 피하고 싶었다.
어느날 주덕이 부녀조로 계수를 찾아 왔다.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ꡒ우리들은 모두 혁명동지이다. 봉건적 사상은 없다. 홍군은 관리이건 병사이건 모두 평등하다. 군장도 병사이다. 모두 같다. 평등에 의해서 우리는 단결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해야 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는 공부하고 싶어하고, 일을 할 때도 열심히 하는 등 많은 장점이 있다. 전도가 밝은 동지이다. 너하고 결혼하고 싶다. 비록 우리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장애가 될 수 없다. 결혼하면 나는 너를 도울 것이고, 너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들은 아주 좋은 혁명반려가 될 수 있을 것이다ꡓ
군장인 주덕이 간절하게 청혼을 하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이후 주덕과 몇 번 만나고 나서 간단한 혼례를 거행했다. 주덕에게는 네 번째 부인이었다. 전쟁이라는 긴급한 환경에서 군인끼리의 결혼이었다. 계수와 같이 정강산에 온 친구들은 혼례에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후에 친구들에게 물으니"좀 쑥스러웠다"고 대답했다. 결혼 당일 계수는 주덕에게 다짐했다.
"나는 내 일이 있어요. 시간을 아껴서 공부해야 해요. 내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마세요ꡓ
주덕은 애초부터 아내의 내조를 바라지 않았다.ꡒ혁명은 관리의 사모님이 하는 것이 아니다. 관리의 사모님은 혁명을 할 수가 없다. 나는 경호원이 돌봐주고 있고, 많은 일을 내 스스로 할 수 있다. 생활하는 것은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너는 다만 열심히 책임 맡은 일을 하고 공부해라"
결혼 전 애정에 대해 말해본 적이 없었지만, 서로 이해하는 마음과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우정은 결혼 이후 점점 커져 갔다. 물론 사상, 정치, 이론, 문화, 일에서 주덕은 계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통적으로 보면 17세의 동양식 출신 문맹 소녀가 사령관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신분상승이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나이 차이도 너무 컸다. 마치 봉건왕조시대 왕후장상에게 선택된 홍안의 미인과도 비유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 이후 주덕과 강극청은 혁명동지 사이가 되었다. 미모 때문에 간택되어 신분상승하고,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날마다 외모치장 만을 일로 삼는 의존적인 여성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들에게 결혼은 쾌락이나 자녀 생산의 도구 수단이 아니었다.
강극청은 결혼을 통해서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3개의 큰산(三座大山: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의 억압을 겪으면서 자란 노동하는 여자였다. 또 자신을 해방하고 중국의 가난한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홍군 병사였다. 끝까지 홍군 병사이고자 했던 계수는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고 스스로 실천과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홍군 전사로서의 길은 강극청 스스로 택한 삶의 지표였다. 강극청은 빠르게 걸출한 홍군 지휘관으로, 또 공산주의 혁명가로 성장했다.
계수의 다방면에 걸친 진보에는 모두 「인간 주덕」의 협조와 가르침 덕이 컸다. 물론 「사령관 주덕」의 후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덕이 그를 점 찍었을 때 했던 말처럼, 강극청은 끝없이 공부하고 싶어했고, 일을 열심히 했다. 부단히 노력하고 발전하여 당당한 주덕의 혁명동지로 스스로 성장했다.
혼인 후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 주덕은 밤낮으로 혁명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나갔고, 주로 최전방에 있었다. 강극청도 때로는 주덕을 따라 같은 전선에서 교전했고, 어떤 때는 다른 곳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시간을 아껴서 공부해 훌륭한 홍군전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서금(瑞金)에 있을 때부터 자신에게 배분된 여러 가지 업무를 차례로 수행했다. 그러나 그녀는 불평 한마디 없이 항상 기분 좋게 임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자리에서 열심히 일했고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 가장 먼저 고려된 것은 혁명적 수요이지, 주덕의 내조자가 아니었다. 사령관 주덕도 이 성실한 홍군여전사가 수행한 업무를 보고 받으면서 공산주의자의 품격을 가르쳤다. 물론 결혼 후 둘 사이에 사소한 다툼도 있었고 작은 충돌도 있었지만, 곧 해결되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일에 바빴다.
강극청은 주덕과의 결혼으로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혁명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군대라는 특수한 공동생활에서 그녀는 주덕에게 동지이자 전우, 그리고 반려였다. 그녀는 주덕의 인격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계발해갔다. 무산계급혁명가의 넓은 마음, 혁명에 대한 탁월한 식견, 공동체를 위한 일관된 노력, 당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배웠다. 뿐 만아니라 주덕은 끊임없이 그녀를 지지하고 도왔고 대견하게 여겼다.
혁명 과정에서 강극청은 또 채창(蔡暢) 등영초(鄧穎超) 오약란(伍若蘭) 하자진(賀子珍) 이백쇄(李伯釗) 등의 많은 여성 동지들을 만나게 됐다. 그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교육을 받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따뜻하고 유쾌했다.
그녀는 스스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흙담에 붙은 선전표어를 이용하여 읽기 쓰기를 익혔다. 또 행군도중 걸으면서 글을 배웠다. 부단한 노력 끝에 곧 신문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레닌주의 입문』『레닌주의 원칙』등 정치 군사 관련 서적도 읽을 수 있게 됐다. 1937년 홍군대학(후의 抗日軍政大學)에 입학했고, 중앙당교(中央黨校 1942~45)에서 더 공부했다.
또 실천활동을 통해서 문화수준을 높이고 재능을 키우고, 이러한 학습을 통해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만들어갔다. 또 실천을 통해서 피압박부녀의 해방은 혁명사업의 발전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16)
주덕의 입장에서 강극청은 어떠했을까? 먼저 홍군 사령관의 입장에서 보면 금녀의 벽을 깬 여군, 최전선의 포화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범적인 병사였다.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강극청은 경제적 신분적으로 착취받고 억압받던 동양식 출신으로, 성분 좋은 당원이자 열심히 실천하는 공산주의자였다. 주덕이 평생을 바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었다. 그런 강극청이 실천을 통해서 자신을 해방하고 혁명대열의 최선봉에 서서 인민을 해방시키려고 싸우고 있었다. 또 연장자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건강하고 성실한 젊은이였다. 항대(抗大) 교수입장에서도 하나를 배워서 열을 알려고 노력하는 성적 좋은 모범생이었다. 이러한 아내가 얼마나 대견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웠을까? 강극청은 결코 미인이 아니었지만, 주덕의 안목에서 강극청은 아름다운 아내였다.
장정을 끝내고 1937년 강극청이 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서 문화의 수준과 정치이론의 수준이 향상되어가자, 주덕은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부대의 교육으로 성장한 꾸냥, 홍군이 낳은 모범 인물”17)이라고 칭찬했다. 남편으로서 주덕의 관심은 그의 아내가 어떻게 하면 빨리 성장하여 혁명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것인가 였다. 또 그것은 홍군총사령관으로서 병사에 대한 막중한 임무이기도 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항대의 생활은 유쾌했다. 방과후 자유활동시간에 여학생들은 남학생들과 같이 농구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덕도 농구를 좋아했다. 여학생대에 와서 같이 농구를 했다. 경기가 시작되어 다른편인 주덕에게 공이 전달되는 것을 보면, 강극청은 ꡒ라오중(老總), 패스!ꡓ라고 소리쳤다. 주덕은 보지도 않고 강극청에게 공을 패스했다. 주덕과 한 팀인 사람들은 ꡒ강극청은 우리 팀이 아니다ꡓ라고 불평했다. 그러면 주덕은 ꡒ내가 잊어버렸어. 앞으로 주의할게ꡓ라고 민망한 듯이 대답했지만, 정작 시합 때는 다시 강극청에게 공을 패스해 주었다. 주덕이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공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팀은 선수 한 명이 부족한 셈이 되어 질 수밖에 없었다. 18)
「낙안」(落雁)은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는 말이다. 「침어」(沈魚)는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 앉았다는 말이다. 농구하던 주덕이 사랑스러운 아내 강극청에게 홀려서 공을 자꾸 빼앗기는 것이 이와 흡사하지 않을까?
님 웨일즈가 연안을 방문하고 난 뒤 이 두 사람이 남의 칭송과 부러움을 받는 부부였다고 말했다. 님 웨일즈는 연안에서 주덕 강극청 주은래와 함께 총사령부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강극청이 장난스럽게 주덕의 팔을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홍군 총사령관 주덕은 웃음띈 얼굴로 젊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바라보는데, 마음 속에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기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강극청은 주덕에 대해서 말할 때나 그를 부를 때 부부 간에 쓰는 호칭을 쓰지 않고 제삼자인 「동지」라고 불렀다. 님 웨일즈의 표현에 의하면 두 사람의 관계는 혁명동지적 부부관계였다19). 후에 강극청도 주덕과의 결혼에 대해서 “두 사람의 감정은 점점 발전하였고, 같이 산 몇십년을 돌아보니 세상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인연이었다”20)고 회고하였다.
3). 여자의용대와 장정(長征)
몇 번의 전투에 참여했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홍군에 남기를 원했다. 중앙군사위원회와 지방당위원회는 그들을 여자의용대로 편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방업무 또는 전쟁을 수행 할 수 있는 여자 간부로 육성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 계수와 오중렴(吳仲廉)이 여자의용대 업무에 배치됐다. 여자의용대는 180여명으로 계수가 대장, 오중렴이 지도원이 됐다. 여자의용대는 홍군학교에 부속되어 학교의 한 부대가 되었다.
주덕은 항상 계수에게 군을 다스릴 때 엄격하게 해야 좋은 병사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높은 열이 금을 만들고, 엄격함이 정병을 키운다고 했다. 계수는 이 정신에 따라서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군사대훈련 뿐 아니라 내무반의 위생, 일상의 휴식, 당직, 보초, 야간순찰도 엄격하게 했다. 어떠한 위반행위도 허용하지 않았다.
1개월의 훈련 끝에 여자의용대는 주목할 부대가 되었다. 학교 안에서 조직한 각종 활동과 분배된 임무도 여자의용대는 모두 빠르고 능숙하게 해내 표창을 받았다. 여자의용대는 반년동안 학습, 졸업시험을 거쳐 졸업을 했다. 홍군 병원 간호원 근무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강서성 소비에트의 각 현, 구, 향에서 지방업무에 종사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곧 그 지방의 공산당 간부가 되었다.
1934년 그녀는 홍군 전사를 지휘하여 국민당군에 승리, 여사령(女司令)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제5차 초공이 시작되자 홍군은 중앙소비에트를 버리고 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정이 시작될 때는 호남의 서쪽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천한 홍군(紅軍)전사 강극청(康克淸) ]
[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천한 홍군(紅軍)전사 강극청(康克淸) ]
1. 서론
중국 홍군(紅軍)의 뛰어난 여성 지휘관이자 여성해방 및 아동보육에 공적을 남긴 강극청(康克淸, 1911~1992)은 「강 따지에」(康大姐, 해석하면 ‘강 언니’인데, ‘따지에’란 연상의 여자에 대한 일종의 존칭)란 애칭으로도 불리지만, 그의 인생은 그렇게 따뜻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먼저 군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강극청은 1920년대 중국내전 시기 홍군에 투신했는데, 곧 홍군 사령관 주덕(朱德 1886~1976)과 결혼하게 된다. 이후 홍군 여자의용대 대장으로 직접 부대를 이끌었고, 여사령(女司令)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전투 지휘능력이 출중했다. 1934년 장개석의 5차 초공(剿共)이 시작되자 홍군의 퇴각을 따라 유명한 2만5천리의 장정(長征)에 참여했다.
군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후기의 정치적 행보도 중량감이 있다. 1934년 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 제2차 집행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됐고, 1945년 4월 연안(延安)의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 군 대표로 참석했다. 여러 직책을 거치다가 1949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회의에 참가하여 건국대계를 협상했고, 이후 중국공산당대회 대표(7․8차)와 중앙위원(11․12차),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1․2․3․6차) 및 상임위원(4․5차), 전국정협(全國政協) 위원(2․3차)과 상임위원(4차), 부주석(5․6차)을 역임했다.
그는 또 1949년 3월 제1차 중국부녀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게 되는데, 이 회의를 계기로 일생을 군인으로 종사하겠다는 목표을 바꿔 사회와 정치, 부녀․아동을 위해 일하게 됐다. 이후 전국부련(全國婦聯) 상임위원(1차~5차)을 역임하고, 아동복리부(兒童福利部) 부장 부주임, 중국인민보위아동전국위원회(中國人民保衛兒童全國委員會) 비서장 부주석 주석, 송경령기금회 회장(宋慶齡基金會 會長)을 지냈다. 특히 아이들을 위해서 중국아동 및 소년기금회(中國兒童和少年基金會) 회장, 전국아동소년공작협조위원회(全國兒童少年工作協調委員會) 주임을 지냈다.1)
이처럼 강극청은 오랜 기간 군과 공직에 있으면서 홍군 지휘관과 공산당 지도자로서 공헌하였고, 신중국이 성립하자 여성해방운동과 아동보육활동에 힘써서 뛰어난 업적을 이뤘다. 그럼에도 말년의 문화혁명 기간에는 남편과 함께 고초를 겪는 등 생애 자체가 중국공산주의 운동사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풍운의 여호걸이었다.
중국의 여성은 좋은 가정 출신이라도 태어나면서부터 「부무공사(婦無公事)」(여자는 공직에 나갈 수 없다) 2)라 하여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공적인 일에서 완전히 제외되었고, 방적이나 술과 음식을 보살피는 것이 임무였다. 또 「삼종사덕(三從四德)」3)이 여성의 행위 규범이었는데, 이는 무능과 순종을 조장하기 위한 기능이었다. 가난한 집의 딸들은 「부무공사」「삼종사덕」등 전통의 굴레만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남에게 주어지거나 버려지는 등 일생을 학대와 노동으로 비참하게 살았다. 노신(魯迅)의 소설 「축복」의 주인공 아줌마처럼 “굴욕적으로 살고 처량하게 죽어갔다”.
강극청은 강서성 만안현(江西省 万安縣)의 동양식(童養媳, 望郞媳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의 민며느리)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공산당간부인 양부의 이야기와 자신의 환경을 통해 사회의 불평등을 이해하고 계급의식을 품으면서 성장했다. 15세 때부터 공산당 부녀협회에 참여했고 공산당 봉기에도 참가했다. 봉기 실패 후에는 숨어 지내다가 1928년 정강산(井岡山)에 가서 홍군에 투신, 정강산 혁명근거지의 홍군 병사가 됐다.
강극청은 주덕과의 결혼으로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 등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또 홍군대학(紅軍大學) 등 홍군 내의 교육기관을 통해서 공산혁명지도자들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육받았다. 주지하듯이 초기 중국공산혁명 지도자들은 코민테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들의 여성관 역시 코민테른의 혁명이론과 투쟁전술의 영향을 받았다.4) 그리고 이 코민테른의 공산주의 여성운동의 지침은 초기 중국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모택동의 부녀정책5)에 그대로 나타난다.
따라서 강극청의 여성해방사상은 코민테른의 지침과 모택동의 여성해방사상6)을 그대로 학습한 것이었다. 생산 자료가 사유제인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계급과 계급투쟁의 관점으로 부녀문제를 생각했다. 그는 “‘중국에서 여성은 봉건정권과 함께 신권(神權) 족권(族權) 부권(夫權)의 압박을 받고 있다. 부녀가 억압 받는 근원은 생산자료 사유제와 착취계급의 압박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투쟁에서의 승리만이 여성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다ꡓ고 믿었다.7) 그리고 그것을 실천했다. 초기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여성해방사상, 곧 모택동의 여성해방사상을 강극청은 자신을 해방하는 사상8)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인에게 새겨진 강극청에 대한 기억은 공산주의자이자 스스로를 해방시킨 여인이라는 인상과 함께 불굴의 정신과 휴머니즘 실현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동양식, 여자홍군병사, 부대의 교육으로 성장한 홍군의 모범인물, 보통 어머니이자 위대한 어머니9), 추구․ 분투․봉사․헌신의 생애10), 강직함과 엄격한 공사(公私)구분, 특권의식이 없고 소박 검소한 태도의 노(老)공산당원 11), 주덕의 정신을 이어받은 「강따지에」(康大姐)12)로 남아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간고분투(艱苦奮鬪), 노동존중, 인민사랑, 실사구시의 공산주의자로서의 생을 살면서, 「공이 크지만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덕이 높지만 드러내지 않고, 지위가 높지만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던」(功高不自居, 德高不自顯 位高不自私) 인간 강극청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불굴의 정신과 노력, 봉사와 배려, 노동존중, 절약과 검소 등은 변함 없는 인간적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덕목을 잃어버리고 황금이 종교가 된 이 시대에 초기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이상으로 여겼던 덕목-공산주의적 이상과 유교의 덕목이 합해진 것-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강극청의 삶을 추적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2. 동양식 강계수(童養媳 康桂秀)
1). 공산당원 양부(養父)의 가정
강극청은 1911년 9월7일(음력 7월15일) 강서성 만안현 나당만 대옥장(江西省 万安縣 羅塘灣 大屋場)의 가난한 어부 강연순(康年荀)의 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가 10명으로,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출생 40여일 만에 나기규(羅奇圭)에게 동양식(童養媳)으로 주어졌다. 강극청(어릴 때 이름 강계수 康桂秀)은 동양식이었지만 이 집에서 딸처럼 성장했다.
양부 나기규는 나당만 최초의 공산당원으로 농민협회의 주석이었는데, 집에서 당 집회를 가졌다. 양부는 옛날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어서, 계수에게도 자주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어린 계수는 이야기를 통해 여자들 중에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과 인간 세상에 너무나 많은 불공평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러한 가정환경 때문에 철 들면서부터 계급의식과 부자에 대한 증오감을 가지게 됐다.
양부의 가정 역시 가난해서 생활은 어려웠지만, 다른 동양식에 비해서 계수는 행운아였다. 욕 먹고 매를 맞기도 했지만, 양부모와 할머니는 후덕한 사람이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계수를 친자식처럼 대해주었다. 그도 다른 가난한 집 아이들처럼 6~7세가 되었을 때부터 나무를 줍고 소에게 풀을 먹이는 등 잡다한 가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아이들은 어려서 전족(纏足)을 했는데, 보통의 가정에서는 4, 5세부터 전족을 시작했다. 전족은 인위적으로 발을 작게 하는 것으로, 두 발을 옷감으로 꽁꽁 감싸서 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족은 정조 보전과 남자의 성적 도구화, 그리고 외모의 의미로 시작됐는데, 발이 큰 여자는 남에게 놀림을 당했다.
계수가 10세가 되었을 때 할머니가 전족을 시켰다. 그러나 계수는 할머니가 나가자마자 발을 싸맨 옷감을 풀어버리곤 했다. 할머니는 화를 냈지만, 양모가 나서서 전족을 하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할 수도 없고, 집안에서 일을 시키기도 곤란하다고 설득했다. 강극청은 이렇게 전족의 재난을 피했기 때문에 후에 공산혁명에 참가하여 남으로 북으로 종횡하면서 종군하였고, 2만5천리의 장정을 완수한 홍군 전사가 될 수 있었다.14)
어느날 광주리를 메고 동네의 학교를 지날 때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계수는 집에 돌아와서 양모에게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양모는 고개를 흔들면서ꡒ지주나 부자집 도련님 아가씨가 학교 갈 수 있다. 너처럼 가난한 집 아이가 어떻게 학교를 가겠느냐?ꡓ고 말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그는 다시는 학교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인 사춘기 소녀들은 환경을 비관했다.ꡒ이렇게 하루 종일 벌받듯이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해ꡓ라는 친구의 말에 계수는ꡒ우리 일생은 죽기 위해서 사는 거야. 설마 살 길이 없겠어? 어딘가 우리가 갈 길이 있을거야ꡓ라고 말했다. 계수는 광동혁명군이 북벌을 시작해서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한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ꡒ북벌군에는 여자부대(女兵隊)가 있어서 훈련도 받고 글자도 배우고 사상교육도 받는다는데, 그곳이 우리가 갈 길이 아닌가ꡓ라고 말했다. 이 말은 친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면 어떻게 병사가 될 수 있을까? 아는 사람도 없고 방법도 모르지만 계수는 이때부터 병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2). 부녀협회 등 초기 활동과 봉기 참여
1924년 겨울 공산당원 증천우(曾天宇) 장세희(張世熙) 등 10여명의 청년들이 만안현에 만안청년학회(万安靑年學會)를 조직했다. 그들은 잡지 「청년」(靑年)을 창간하고, 야학(평민야교, 平民夜校)을 세우고 여러 모임을 만들어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사회문제를 조사했다. 또 청년들을 모아 『인력거군의 혼사』(車夫的婚事) 등 몇 개의 연극을 공연했다. 이것을 통해 신사상을 선전하고 남녀평등, 혼인자주를 제창하고 전통 예교에 반대했다.
거의 모든 공연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계수는 강연과 야학에도 참여했다. 거기서 소련의 10월혁명을 알게 됐고, 10월혁명에서 지주․자본가를 타도하고,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를 건설했다는 것을 배웠다. 또 빈민이 들고일어나서 혁명을 일으킨다면, 세상이 바뀌고 새롭게 나아갈 길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14세였던 계수는 자신이 동양식이라는 인식과 환경 때문에 당원들이 말하는 공산혁명의 의미를 진리로 받아들였고, 공산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북벌군의 승리 소식은 곧 만안까지 들려왔다. 이 시기 강서와 호남은 공산혁명운동의 와중에 있었는데, 나당만에서는 증천우의 지도 하에 공산당의 활동이 활발했다. 이 때 계수는 나당만 부녀협회를 조직, 상임비서가 되어 각 곳을 다니면서 선전활동을 하였다. 1926년에는 구부협 선전위원(區婦協宣傳委員)으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혹한이나 우천시에도 부녀선전대원들을 이끌고 나당만 일대에서 활동했다. 부녀를 동원해서 토호열신(土豪劣紳)을 타도하고 동시에 여자 학대, 동양식 학대, 매매혼에 반대하고, 남녀평등․아편금지․도박금지를 제창했다. 또 여자들에게는 전족을 풀고 단발할 것을 권유했다.
습관을 고치는 것은 지주를 타도하는 공산혁명보다 어려웠다. 거기다 유동적인 상황이라 더욱 어려웠다. 후에 국민당군이 마을을 다시 점령했을 때 단발한 여자들을 공산당원으로 여겼기 때문에 단발한 여자들 가발을 만들어 쓰거나 옷감으로 머리를 싸매야 했다.
1928년 1월 초 만안현 농민군은 정강산에 가서 모택동․주덕의 홍4군(紅四軍)과 합류, 해방전쟁을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만안 부근의 수천현(遂川縣)을 점령하고, 4만 명의 병력을 모아 만안현성을 공격했다. 국민당군은 농민군의 위력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승리한 농민군은 만안현 소비에트정부의 성립을 선언했으나 이 소비에트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민당군이 몇배의 병력으로 만안현을 공격해 왔고,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현위원회와 현소비에트정부는 현성에서 철수하여 유격대로 전환할 것을 결정했다.
이 전투의 실패로 나당만의 공산당은 큰 어려움에 처했다. 공산당원과 농민군은 돌아온 국민당군과 토호열신들에게 체포돼 살해됐다. 계수도 왕가촌의 외가로 피했다. 외할아버지는 계수를 장작더미 안에 숨겨주었고, 장작을 쌓아 외부인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감추었다.
양부 나기규는 공산당원이자 나당현 농민협회 주석으로 역시 몸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양부는 계수가 체포될 것을 걱정하여 그를 결혼시키려 했다. 계수는 밖에서는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는 국민당군에게, 집안에서는 결혼시키려는 양부의 압박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계수는 홍군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정강산은 만안으로부터 몇 백리나 멀리 있었다. 더구나 여자 아이가 어디 가서 홍군을 찾을 것인가? 그러나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1928년 음력 8월 만안현성에 대한 공격준비차 홍군 몇 명이 나당만에 왔다. 그들은 정강산의 홍4군이었는데, 정강산에 이미 공농(工農)혁명근거지가 건립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만안 농민들에게 홍군 참여를 권유했다. 계수는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증화영(曾華英, 증천우의 여동생) 장량(張良) 나항수(羅恒秀) 유계수(劉桂秀) 주정란(朱挺蘭) 장경수(張庚秀)와 함께 정강산으로 출발했다.
계수에게 홍군이 된다는 것은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국민당군의 추격과 체포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었다. 또 빈곤한 생활과 동양식의 고난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3. 홍군 전사로서의 생활
1). 모택동의 여성해방론 학습
정강산에 오기 전부터 계수는 모택동과 주덕의 명성을 듣고 있었지만, 모․주(毛․朱)가 한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정강산에 온 후 직접 그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마음속으로부터 존경심을 가지게 됐다. 어느날 주덕 군장(軍長)을 보았는데, 중 정도의 키에 체격은 건장했고, 위엄 있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회백색의 군복을 입고 풀로 엮은 신발을 신었고, 몸은 야윈 편이었으며, 얼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위엄과 자상함이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가 일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계수가 본 주덕의 첫인상은 편안한 시골농민이었다. 이 때문에 한 홍군전사와 위엄과 명성을 갖춘 사령관(軍長) 간의 거리가 단축되었다. 당시 계수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주덕의 독특한 기질이었고 위대한 점이었다. 행군도중 계수는 전사들이 하는 ꡒ우리 홍군전사의 생활과 전투는 고난의 길이지만, 주군장도 우리와 똑 같이 한다ꡓ는 이야기도 들었다.
부대가 민가에 숙영할 때면 주덕은 농민들과 고향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그들을 위해 청소하고 농사일을 도와주는 등 자기 가족처럼 대했다. 그의 행동은 무의식 중에 많은 전투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군과 민을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 만들었다. 또 전투 중에도 주덕은 항상 적의 정세를 미리 알아보고 지형을 살피고 병력 배치를 연구하고, 진지하고 세밀하게 전략을 세웠다.
정강산에 온 이후로 계수는 홍군전사로 단련되었다. 포성을 듣거나 포탄이 주변에서 폭발해도 긴장하지 않았다. 대담해졌을 뿐 아니라 다리도 튼튼해졌다. 계수는 원래 힘이 강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등에 메거나 넘어진 동지를 부축해 주었다. 숙영지에 가면 다른 사람들은 피곤해 했지만 계수는 촌민을 도와 물을 길어주거나 장작을 패주었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촌민들의 생활을 조사했다.
어떤 때는 정찰대에 합류했는데, 모택동과도 몇 차례 조사를 간 적이 있었다. 조사한 주요 내용은 그 곳의 계급투쟁의 정황, 주변의 교통, 지형, 강의 흐름, 산림, 풍토와 인정 등이었다. 모택동은 직접 조사표를 작성했다.
"모 위원(모택동)은 내가 총과 배낭을 매고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이 훌륭하다고 나를 칭찬했다. 나는 좀 쑥스러웠다. 모 위원은 이름이 뭐냐, 어디서 왔으며, 몇 살이냐, 집에 가족이 몇 명이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는데, 모 위원은 다른 사람은 어머니가 한사람인데 너는 어째서 두 명의 어머니가 계시냐고 물었다. 나는 한 분은 생모이며 한 분은 양모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모 위원은 둘 중에서 누가 더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생모는 좋지 않습니다. 내가 태어난 지 40일만에 나를 남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양모가 좋습니다. 나를 때리고 욕했지만 그래도 돌보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얘기하다가 저절로 양모가 나를 때리고 욕했던 일을 말하게 됐다"
모택동은 그에게 부녀가 억압받는 근원과 사유제(私有制)와 착취계급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그것을 분석을 해주었다.
ꡒ모 위원은ꡐ생모가 너를 다른 사람에게 보낸 것을 원망하지 말아라. 그것은 지주나 부자들 때문이다. 너의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살 수가 없어서였다. 또 양모도 원망하지 말아라. 양모 역시 압박 받고 착취 받는 노동하는 인민이다. 양모가 너를 때리고 욕한 것은 봉건 사회의 독해이다ꡑ. 여기서 나는 나와 생모, 양모 모두 같은 등나무 위의 쓴 오이, 같은 계급의 전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처럼 고난을 겪는 부녀들이 전 중국에 1천만명에 그치겠는가.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는 우리 노동하는 부녀들의 진정한 적이다. 이 세 개의 큰 산과 네 개의 굴레를 전복하지 않고, 착취 계급과 사유제를 소멸하지 않고는 노동 부녀는 해방될 수 없다. 당시 모 주석은 ꡐ노동 부녀의 해방과 계급 투쟁에서의 승리는 불가분의 것으로, 계급투쟁에서 승리해야만 부녀들은 진정한 해방을 얻을 수 있다ꡑ고 말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서 계수는 모택동의 인식을 그대로 학습했고, 모택동의 신봉자가 됐다.
이 무렵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안원현(安遠縣)을 공격하다가 주덕의 아내 오약란(伍若蘭)15)이 중상을 입고 적에게 체포된 것이다. 오약란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처형당했다. 그녀는 처형되기 직전 고통 속에서도 혁명 구호를 외쳤고, 그 때문에 더 분노한 국민당군은 그녀의 목을 잘라 장대에 걸고, ‘공비(共匪)수령 주덕의 처 오약란’ 이라고 써서 대나무로 만든 상자 위에 세워서 강에 버려 흘러가게 했다.
오약란은 부녀조(婦女組) 간부였다. 홍군병사로서 많은 일을 했고 계수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실천적이었고, 좋은 품성을 가졌다. 오약란의 희생은 계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녀의 희생으로 계수는 혁명에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2). 주덕 군장(軍長)과 결혼
국민당군과의 전쟁중에서도 주덕은 시간이 있으면 부녀조에 와서 여군들과 이야기했다. 어느날 부녀조 조장 증지(曾志)가 계수에게 주군장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계수는 ꡒ그런 군장 드물죠, 사실은 높은 분이지만 관료 풍이 없고 전사와 똑 같이 전투하고 잘 싸우고 또 학문이 있고… ꡓ라고 말했다. 조장은 “주군장이 너를 아주 좋아해. 조직에서도 네가 그와 결혼하기를 바래. 오약란의 희생 이후 그는 정신적으로 아주 고통스러워 해ꡓ라고 말했다.
그는 주덕이 훌륭한 사령관이고 좋은 영도자이지만, 자신의 남편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러 면에서 차이가 너무 컸다. 계수는 17세가 안되었는데, 그는 이미 43세의 중년이었다. 수준으로 따지면 차이는 더 컸다. 계수는 이제 겨우 문자를 대충 아는 정도이고 사상도 유치하고 이론과 문화지식 수준도 낮지만, 주군장은 최고의 전략가이며 정치가였다. 지위로 따져도 주덕은 군장이고, 계수는 일개 여전사일 뿐이었다. 계수는 피하고 싶었다.
어느날 주덕이 부녀조로 계수를 찾아 왔다. 그는 다정하게 말했다.
ꡒ우리들은 모두 혁명동지이다. 봉건적 사상은 없다. 홍군은 관리이건 병사이건 모두 평등하다. 군장도 병사이다. 모두 같다. 평등에 의해서 우리는 단결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해야 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너는 공부하고 싶어하고, 일을 할 때도 열심히 하는 등 많은 장점이 있다. 전도가 밝은 동지이다. 너하고 결혼하고 싶다. 비록 우리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장애가 될 수 없다. 결혼하면 나는 너를 도울 것이고, 너도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들은 아주 좋은 혁명반려가 될 수 있을 것이다ꡓ
군장인 주덕이 간절하게 청혼을 하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이후 주덕과 몇 번 만나고 나서 간단한 혼례를 거행했다. 주덕에게는 네 번째 부인이었다. 전쟁이라는 긴급한 환경에서 군인끼리의 결혼이었다. 계수와 같이 정강산에 온 친구들은 혼례에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후에 친구들에게 물으니"좀 쑥스러웠다"고 대답했다. 결혼 당일 계수는 주덕에게 다짐했다.
"나는 내 일이 있어요. 시간을 아껴서 공부해야 해요. 내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마세요ꡓ
주덕은 애초부터 아내의 내조를 바라지 않았다.ꡒ혁명은 관리의 사모님이 하는 것이 아니다. 관리의 사모님은 혁명을 할 수가 없다. 나는 경호원이 돌봐주고 있고, 많은 일을 내 스스로 할 수 있다. 생활하는 것은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너는 다만 열심히 책임 맡은 일을 하고 공부해라"
결혼 전 애정에 대해 말해본 적이 없었지만, 서로 이해하는 마음과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우정은 결혼 이후 점점 커져 갔다. 물론 사상, 정치, 이론, 문화, 일에서 주덕은 계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통적으로 보면 17세의 동양식 출신 문맹 소녀가 사령관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신분상승이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나이 차이도 너무 컸다. 마치 봉건왕조시대 왕후장상에게 선택된 홍안의 미인과도 비유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 이후 주덕과 강극청은 혁명동지 사이가 되었다. 미모 때문에 간택되어 신분상승하고, 남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날마다 외모치장 만을 일로 삼는 의존적인 여성의 모습과는 달랐다. 이들에게 결혼은 쾌락이나 자녀 생산의 도구 수단이 아니었다.
강극청은 결혼을 통해서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3개의 큰산(三座大山: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의 억압을 겪으면서 자란 노동하는 여자였다. 또 자신을 해방하고 중국의 가난한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는 홍군 병사였다. 끝까지 홍군 병사이고자 했던 계수는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고 스스로 실천과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홍군 전사로서의 길은 강극청 스스로 택한 삶의 지표였다. 강극청은 빠르게 걸출한 홍군 지휘관으로, 또 공산주의 혁명가로 성장했다.
계수의 다방면에 걸친 진보에는 모두 「인간 주덕」의 협조와 가르침 덕이 컸다. 물론 「사령관 주덕」의 후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덕이 그를 점 찍었을 때 했던 말처럼, 강극청은 끝없이 공부하고 싶어했고, 일을 열심히 했다. 부단히 노력하고 발전하여 당당한 주덕의 혁명동지로 스스로 성장했다.
혼인 후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 주덕은 밤낮으로 혁명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나갔고, 주로 최전방에 있었다. 강극청도 때로는 주덕을 따라 같은 전선에서 교전했고, 어떤 때는 다른 곳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시간을 아껴서 공부해 훌륭한 홍군전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서금(瑞金)에 있을 때부터 자신에게 배분된 여러 가지 업무를 차례로 수행했다. 그러나 그녀는 불평 한마디 없이 항상 기분 좋게 임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자리에서 열심히 일했고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 가장 먼저 고려된 것은 혁명적 수요이지, 주덕의 내조자가 아니었다. 사령관 주덕도 이 성실한 홍군여전사가 수행한 업무를 보고 받으면서 공산주의자의 품격을 가르쳤다. 물론 결혼 후 둘 사이에 사소한 다툼도 있었고 작은 충돌도 있었지만, 곧 해결되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일에 바빴다.
강극청은 주덕과의 결혼으로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혁명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로부터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군대라는 특수한 공동생활에서 그녀는 주덕에게 동지이자 전우, 그리고 반려였다. 그녀는 주덕의 인격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계발해갔다. 무산계급혁명가의 넓은 마음, 혁명에 대한 탁월한 식견, 공동체를 위한 일관된 노력, 당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배웠다. 뿐 만아니라 주덕은 끊임없이 그녀를 지지하고 도왔고 대견하게 여겼다.
혁명 과정에서 강극청은 또 채창(蔡暢) 등영초(鄧穎超) 오약란(伍若蘭) 하자진(賀子珍) 이백쇄(李伯釗) 등의 많은 여성 동지들을 만나게 됐다. 그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교육을 받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따뜻하고 유쾌했다.
그녀는 스스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흙담에 붙은 선전표어를 이용하여 읽기 쓰기를 익혔다. 또 행군도중 걸으면서 글을 배웠다. 부단한 노력 끝에 곧 신문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레닌주의 입문』『레닌주의 원칙』등 정치 군사 관련 서적도 읽을 수 있게 됐다. 1937년 홍군대학(후의 抗日軍政大學)에 입학했고, 중앙당교(中央黨校 1942~45)에서 더 공부했다.
또 실천활동을 통해서 문화수준을 높이고 재능을 키우고, 이러한 학습을 통해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만들어갔다. 또 실천을 통해서 피압박부녀의 해방은 혁명사업의 발전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16)
주덕의 입장에서 강극청은 어떠했을까? 먼저 홍군 사령관의 입장에서 보면 금녀의 벽을 깬 여군, 최전선의 포화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범적인 병사였다.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강극청은 경제적 신분적으로 착취받고 억압받던 동양식 출신으로, 성분 좋은 당원이자 열심히 실천하는 공산주의자였다. 주덕이 평생을 바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었다. 그런 강극청이 실천을 통해서 자신을 해방하고 혁명대열의 최선봉에 서서 인민을 해방시키려고 싸우고 있었다. 또 연장자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건강하고 성실한 젊은이였다. 항대(抗大) 교수입장에서도 하나를 배워서 열을 알려고 노력하는 성적 좋은 모범생이었다. 이러한 아내가 얼마나 대견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웠을까? 강극청은 결코 미인이 아니었지만, 주덕의 안목에서 강극청은 아름다운 아내였다.
장정을 끝내고 1937년 강극청이 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서 문화의 수준과 정치이론의 수준이 향상되어가자, 주덕은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녀는 부대의 교육으로 성장한 꾸냥, 홍군이 낳은 모범 인물”17)이라고 칭찬했다. 남편으로서 주덕의 관심은 그의 아내가 어떻게 하면 빨리 성장하여 혁명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것인가 였다. 또 그것은 홍군총사령관으로서 병사에 대한 막중한 임무이기도 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항대의 생활은 유쾌했다. 방과후 자유활동시간에 여학생들은 남학생들과 같이 농구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덕도 농구를 좋아했다. 여학생대에 와서 같이 농구를 했다. 경기가 시작되어 다른편인 주덕에게 공이 전달되는 것을 보면, 강극청은 ꡒ라오중(老總), 패스!ꡓ라고 소리쳤다. 주덕은 보지도 않고 강극청에게 공을 패스했다. 주덕과 한 팀인 사람들은 ꡒ강극청은 우리 팀이 아니다ꡓ라고 불평했다. 그러면 주덕은 ꡒ내가 잊어버렸어. 앞으로 주의할게ꡓ라고 민망한 듯이 대답했지만, 정작 시합 때는 다시 강극청에게 공을 패스해 주었다. 주덕이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공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팀은 선수 한 명이 부족한 셈이 되어 질 수밖에 없었다. 18)
「낙안」(落雁)은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는 말이다. 「침어」(沈魚)는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 앉았다는 말이다. 농구하던 주덕이 사랑스러운 아내 강극청에게 홀려서 공을 자꾸 빼앗기는 것이 이와 흡사하지 않을까?
님 웨일즈가 연안을 방문하고 난 뒤 이 두 사람이 남의 칭송과 부러움을 받는 부부였다고 말했다. 님 웨일즈는 연안에서 주덕 강극청 주은래와 함께 총사령부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강극청이 장난스럽게 주덕의 팔을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홍군 총사령관 주덕은 웃음띈 얼굴로 젊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바라보는데, 마음 속에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기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강극청은 주덕에 대해서 말할 때나 그를 부를 때 부부 간에 쓰는 호칭을 쓰지 않고 제삼자인 「동지」라고 불렀다. 님 웨일즈의 표현에 의하면 두 사람의 관계는 혁명동지적 부부관계였다19). 후에 강극청도 주덕과의 결혼에 대해서 “두 사람의 감정은 점점 발전하였고, 같이 산 몇십년을 돌아보니 세상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인연이었다”20)고 회고하였다.
3). 여자의용대와 장정(長征)
몇 번의 전투에 참여했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홍군에 남기를 원했다. 중앙군사위원회와 지방당위원회는 그들을 여자의용대로 편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을 지방업무 또는 전쟁을 수행 할 수 있는 여자 간부로 육성하기로 결정했다. 이 때 계수와 오중렴(吳仲廉)이 여자의용대 업무에 배치됐다. 여자의용대는 180여명으로 계수가 대장, 오중렴이 지도원이 됐다. 여자의용대는 홍군학교에 부속되어 학교의 한 부대가 되었다.
주덕은 항상 계수에게 군을 다스릴 때 엄격하게 해야 좋은 병사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높은 열이 금을 만들고, 엄격함이 정병을 키운다고 했다. 계수는 이 정신에 따라서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군사대훈련 뿐 아니라 내무반의 위생, 일상의 휴식, 당직, 보초, 야간순찰도 엄격하게 했다. 어떠한 위반행위도 허용하지 않았다.
1개월의 훈련 끝에 여자의용대는 주목할 부대가 되었다. 학교 안에서 조직한 각종 활동과 분배된 임무도 여자의용대는 모두 빠르고 능숙하게 해내 표창을 받았다. 여자의용대는 반년동안 학습, 졸업시험을 거쳐 졸업을 했다. 홍군 병원 간호원 근무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강서성 소비에트의 각 현, 구, 향에서 지방업무에 종사하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곧 그 지방의 공산당 간부가 되었다.
1934년 그녀는 홍군 전사를 지휘하여 국민당군에 승리, 여사령(女司令)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제5차 초공이 시작되자 홍군은 중앙소비에트를 버리고 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정이 시작될 때는 호남의 서쪽으로 갈 계획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