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흥(紹興)은 중국의 대 문호 노신(魯迅)을 낳은 지역이다. 소흥 시내에 들어서면 노신과 관련된 유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노신의 옛집, 노신이 공부하던 삼미서옥(三味書屋), 노신 기념관, 소설 ꡔ공을기(孔乙己)ꡕ(1919)의 배경 함형주점(咸亨酒店) 등이 대표적 명소이다. 소흥의 북쪽은 항주만(杭州灣)에 닿아 있는데 이 곳으로 전당강(錢唐江)․부춘강(富春江)․포양강(浦陽江) 등 세 강이 합류하고 있다. 아름다운 ‘물의 도시(水鄕)’ 소흥은 중국의 8대 명주 가운데 하나인 소흥주(紹興酒)로도 유명하다. 성내에는 운하가 그물 망처럼 종횡으로 흘러 모두 교외의 감호(鑒湖)로 통하는데, 추근의 호 ‘감호여협(鑒湖女俠)’의 감호는 이곳을 이르는 말이다.
소흥의 옛 이름은 회계(會稽)이다. 회계는 멀리 춘추시대 월(越) 왕조의 수도인데, 월 왕조의 마지막 왕 구천(勾踐)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잘 알려진 대로 와신상담은 오(吳) 왕조의 왕 부차(夫差)와 월 왕조의 왕 구천 간의 복수에 관한 고사이다. 소흥에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난정(蘭亭)은 진(晉) 나라의 대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왕희지는 소흥 출신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관직을 지내면서 유명한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지었다. 하(夏) 왕조의 시조 우(禹)의 능, 양명학을 창시한 대 사상가 왕양명(王陽明)의 묘도 소흥에 있다.
반골의 고향, 월왕 구천의 후예인 추근(秋瑾. 1875~1907)은 광서황제가 즉위한 1875년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추씨 집안은 전통적으로 과거에 합격한 관리의 가계로 조부와 부친, 그리고 추근의 오빠도 향시(鄕試)에 합격한 거인(擧人) 출신이다. 모친 단씨(單氏) 역시 관료 집안 출신으로 교양을 갖춘 재녀였다. 오빠 추예장(秋譽章)을 따라 추근도 어린 나이에 경서를 배우고 고전 시문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모친 역시 추근에게 시문을 가르쳐주었다. 이런 연후로 추근은 10세를 전후하여 시작(詩作)을 시작할 수 있었다.
1890년 추근의 나이 16세, 조부가 관직을 그만두자 고향 소흥의 산음현(山陰縣)에 돌아온 추씨 일가는 명(明) 왕조 말기 대 관료의 별장이었던 화창당(和暢堂)을 사들였다. 화창당은 현재 추근의 옛집(秋瑾故居)으로 남아있다. 추근은 결혼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고,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소흥의 대통사범학교(大通師範學校)에서 일할 때 이곳에서 혁명 준비를 위한 비밀회의를 하였다.
추근은 남자와 동등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문, 무를 겸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권법을 공부하고 훈련하였다. 그러나 이미 관례대로 5세의 나이에 전족을 한 추근이 무술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남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를 보다 못한 모친은 추예장과 추근을 데리고 무술의 명수였던 사촌 오빠에게 가르침을 부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추근은 권법, 봉술과 검술 외에 승마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혁명에 뛰어든 뒤로 평생 남장을 즐겨하고, 그 열정을 시문으로 표현하고 있음은 바로 그녀의 이같은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다.1)
추근은 스스로 많은 저술과 시문을 남겼다. 희생 이후 추근 일가와 추근을 알고 있던 사람들도 문장을 서술하였다. 물론 청조의 공식 문건이 존재하지만, 추근의 저작과 동시대인의 저술을 검토하는 것이 추근과 그의 시대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 데 훨씬 유용하다.2)
이하 19세기 후반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조 말기, 아직 ‘혁명’이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던 때, 혁명과 여성 해방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추근과 그의 시대를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2. 불행한 결혼 생활과 노라의 탈출
추근의 불행은 22세에 부모의 뜻에 따라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의 부유한 상인 자제 왕정균(王廷鈞. 字는 子芳)과 결혼하면서 시작된다. 추근의 부친은 1895년 호남성 상담의 이금국(釐金局) 총판(總辦)으로 재직하면서 왕정균의 부친을 알게 되었다. 왕씨 집안은 호남의 명문 증국번(曾國藩)과 친척으로 태평천국을 막기 위한 의용군 상군(湘軍)을 편성하자 상군의 자금원이었던 이금(釐金. 내지 통행세)을 관리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1896년 22세의 추근은 왕정균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당시 왕정균은 추근 보다 4살 어린 18세였다. 그러나 시문과 경서에 능한 추근과 교양인과는 거리가 먼 왕정균은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부부였다. 추근의 표현에 따르면, 남편은 ‘신의가 없고 인정도 없으며 도박을 좋아하고 타인을 기만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사람이었다.3)
추근이 불행한 결혼으로 고통받고 있을 당시 중국의 정치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다. 1898년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망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 등은 무술변법을 일으켰으나 100여 일 만에 실패하였다. 2년 뒤 중국 전역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의화단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8개국 열강 연합군은 중국의 반(反)기독교 운동을 진압하고 기독교민과 선교사 및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중국과 전쟁을 선포하였다.
남편 왕정균은 1899년 백은(白銀) 1만 냥을 주고 호부주사(戶部主事)의 관직을 얻어 북경에 와 있었다.4) 결혼 1년 후 낳은 어린 아들 왕원덕(王沅德)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북경에 와 있던 추근은 전란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재능 있는 시인이었던 그녀는 이 때 구국을 위한 강한 열망을 시로 표현하였다.
추근은 이 시문을 통해 국가와 조정에 위난이 닥쳤을 때 백성도 이를 피하기 어렵다는 노 나라 여인의 고사를 인용하여, 국가 존망의 위기에 자신이 전쟁에 나서지는 못하나 우국의 심정은 어쩔 수 없음을 토로하였다.6)
추근 가족은 의화단 전쟁을 피해 귀향하였다. 1901년 호남의 상담에서 딸 왕찬지(王燦芝)를 낳은 추근은 1903년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온 혁명 팜플렛을 읽게 되었다. 그 중에서 ꡔ맹회두(猛回頭)ꡕ와 ꡔ경세종(警世鐘)ꡕ을 쓴 진천화(陳天華)는 추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추근은 이처럼 청조를 비난하고 민중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격렬한 어조의 글을 접하면서 혁명을 생각하게 되었다.
추근의 실천은 5세부터 계속된 자신의 전족을 스스로 풀면서 시작되었다. 1903년 남편 왕정균의 복직으로 다시 북경에 온 추근은 자신의 전족을 풀었고, 자신의 딸에게도 전족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대담하게 남장을 하였고, 자신의 호를 남자와 자웅을 겨룬다는 의미에서 ‘경웅(競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남편과의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7)
북경에서 추근은 자신의 생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추근의 이웃집에 역시 남편을 따라 북경에 와 있던 오지영(吳芝瑛)이다. 오지영은 안휘성(安徽省) 동성(桐城) 출신으로 무술변법 시기 만들어진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북경대학의 전신)의 총교습(總敎習. 학장) 오여륜(吳汝綸)의 조카였다. 오여륜은 청대 고문학파의 대가로 그 조카인 오지영 역시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추근은 그녀의 집에서 수많은 장서에 감탄하고 그 중에서 당시의 새로운 서적과 신문 등을 접하게 된다. 또한 오지영을 중심으로 조직된 「불전족회(不纏足會)」, 「상층 부녀 담화회」 등에 참여하였다.
추근 보다 나이가 7살 연상인 오지영은 추근과 의기투합하여 의자매의 맹세를 하였다. 추근이 희생된 후 언니격인 오지영은 추근의 유해를 수습하여 묘를 세우고 추근 추모 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추근과 의자매의 맹세를 철저하게 지킨 셈이다.8) 훗날 오지영의 회고에 따르면, 추근은 의협심이 많고 언변이 좋아 좌중을 압도하였다고 한다. 평소에 추근은 ‘여자는 당연히 학문을 배워 자립을 구해야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혁명, 혁명을 외치는 데 혁명은 당연히 가정에서 시작해야 하며, 소위 남녀의 평등 권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하였다.9)
추근은 오지영을 통해 일본 도쿄(東京) 제국대학 교수 출신으로 경사대학당에 초빙된 후꾸베(服部卯之吉)의 처 시게코(繁子)를 알게 되었다. 시게코는 추근을 처음 만나서 남장을 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추근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힘을 기르기 위해 우선 겉모습부터 남자의 모습을 하고 마음으로 남자가 되려고 한다면서, 중국 남자의 복장은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라 변발을 한 만주족의 풍속이므로 양복을 입었다고 응답하였다. 추근과의 응답에서 시게코는 추근의 과격한 사상에 놀라게 된다. 이후 시게코는 추근을 위해 영어와 일본어 교사를 소개해주고, 그녀의 일본 유학에 동행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10)
남편 왕정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근은 어린 자식 둘과 남편을 남겨두고 일본 유학을 결행하게 된다. 일본 유학을 준비하면서 전 예부주사(禮部主事) 왕희(王熙)가 무술정변에 연좌되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유학 자금의 일부를 무기명으로 감옥에 넣어주었다. 왕희는 석방 후 이 사실을 알고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하였으나 추근은 이미 일본으로 떠난 상황이었다고 한다. 추근의 타고난 의협심을 알 수 있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11)
1904년 5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본행에서 그녀는 서른의 인생 여정을 이렇게 시로 남겼다.
당시 일본 도쿄는 중국 유학생의 집합소였다. 중국 유학생들은 새로운 사상과 경험의 물결 속에서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우수성과 청조의 후진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대다수 유학생들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저지한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를 감탄하였는데, 추근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13) 그러나 일본이 중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를 침략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준 사건이 러일전쟁의 본질임은 인식하지 못했다.
추근은 청국 유학생회관에 설립된 일본어강습소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우는 한편, 급진적인 유학생들의 글을 접하면서 혁명의 길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유학생들과도 교류하였지만, 여성이면서 혁명을 외치는 그녀가 겪는 고충은 매우 컸다. 당시 관비유학생으로 거인(擧人) 출신인 43세의 호도남(胡道南)은 혁명과 남녀 평등에 반대하였는데, 추근은 그를 ‘죽일 놈’이라고 욕하였다. 호도남은 이에 대해 앙심을 품고 1907년 추근을 혁명당원으로 밀고하게 된다.14) 추근은 또한 동향 출신 도성장(陶成章)을 통해 반청 비밀결사인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였지만, 처음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그녀는 일본 유학 기간 중에 공애회(共愛會. 1903년 러시아의 만주 점령에 항의하며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여자유학생 20명이 도쿄에서 결성한 조직)를 개조하여 ‘실행공애회(實行共愛會)’를 조직하였다. 추근은 실행공애회의 장정(章程)을 작성하여 여학교의 진흥을 목표로 삼고, 호남 제일여학당(第一女學堂)에 보내는 편지를 써서 여학생들의 유학을 권유하였다. 그녀는 편지에서, 남자의 속박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자립해야 하고 자립하고자 하면 배움을 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15)
동시에 그녀는 돈이 들지 않고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 연설을 중시하여, 연설연습회와 그 부속 조직으로 표준어연구회를 조직하고 표준어로 혁명 연설을 해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당시 방언의 문제는 심각하여 북경인에게 상해 방언과 광동 방언은 영어보다 알기 어려운 언어였다. 그녀 자신도 절강의 소흥 방언을 사용하였기에 북경 관화(官話. 표준어)를 연습하였다. 추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연설이 매우 정열적이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16) 추근은 또한 청국 유학생회관에서 발행된 월간지 ꡔ백화(白話)ꡕ의 편집에 관여하였는데, ‘감호여협’이라는 서명을 사용하여, 구어체로 「2억 여성 동포에게 고하는 글」, 「우리 동포에게 고하는 글」 등을 통해 여성의 전족 반대, 유학 장려, 남녀 평등을 호소하였다.17)
추근은 남편의 고향인 호남 동향회에서 왕시택(王時澤)을 알게 되었다. 왕시택은 1904년 정월 자비유학생으로 도쿄에 와서 홍문학원(弘文學院) 보통반 중 호남반에 편입하였다. 그는 당시 호남 동향회에 참가하면서 유도일(劉道一)을 만났고, 반 년 뒤 추근을 알게 되었다. 추근은 호남 동향회에 참여하면서 9살 어린 왕시택과 의기투합하였다. 곧 이어 왕시택과 추근은 요꼬하마(橫濱)에서 개최된 삼합회(三合會)의 입회식에 참여하였다. 이번 입회에서 추근은 ‘백선〔白扇. 속칭 군사(軍師)〕으로 봉해졌다. 1904년 조직된 요코하마 삼합회는 삼점회(三點會)라고도 하는데, 유도일은 1차 입회자였고 추근과 왕시택은 2차 입회자였다. 당시 손문이 해외에서 동지를 모아 비밀 회당(會黨. 비밀결사의 일종) 삼합회의 형식을 이용하여 만든 단체이다.18)
추근은 이후 동향인 도성장을 알게 되었다. 도성장은 신해혁명 시기 절강과 강소(江蘇) 일대 혁명 활동의 중심 인물로 상해에서 반청 혁명 단체인 광복회를 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혁명에 비밀결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여 유명한 ꡔ교회원류고(敎會源流考)ꡕ라는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19)
광복회의 회장은 채원배(蔡元培)였으나, 실질적인 영수는 도성장이었다. 추근은 도성장에게 광복회에 가입하겠다는 요청을 하였으나, 도성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검도와 승마술을 훈련하는 추근을 보고 감복하여, 상해의 채원배와 소흥의 또 다른 광복회원 서석린(徐錫麟)에게 보내는 입회 추천서를 써주었다.
추근은 1905년 초 잠시 귀국하여 학비 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도성장의 추천장을 가지고 채원배와 서석린을 만났다. 채원배는 당시 상해의 애국여학교(愛國女學校) 교장이었다. 추근과 동향인 채원배는 진사(進士) 출신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한림원(翰林院)에 재직하였고, 신해혁명 이후 북경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북경대학을 5․4 신문화운동의 거점으로 변모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역시 동향인 서석린은 견직물 점포를 운영하는 상인의 자제였다. 그는 소흥부학교(紹興府學校)에 재직하던 중 일본 오오사카(大阪)에서 열린 박람회 시찰을 명분으로 관비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서석린은 추근보다 2살 위로 권총의 명수였으며 고도 근시로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채원배는 추근의 입회를 반대하였지만, 서석린은 추근과 의기투합하였다. 결국 도성장과 서석린의 추천으로 추근은 상해에서 입회식을 거행한 뒤 광복회 회원이 되었다.20)
추근은 일본에 돌아와서 실천여학교(實踐女學校) 부설 사범반에 입학하였다. 얼마 후 7월 20일(양력 8월 20일) 손문의 주관으로 중국 동맹회가 창립되었다. 손문을 만난 그녀는 동맹회에 가입하면서 ‘소흥산음출신 추경웅(紹興山陰出身 秋競雄)’이라고 서명하였다. 추근은 곧 이어 절강 지역 분회장이 되었다.21)
앞서 서술한대로 추근은 공애회 개조에 적극적 역할을 하는데, 실행공애회의 회장은 진힐분(陳擷芬)이었다. 진힐분은 1902년 상해에서 중국 최초의 여성잡지 ꡔ여학보(女學報)ꡕ를 창간한 지식인이었다. 진힐분의 부친 진범(陳範)은 상해의 급진적 잡지 ꡔ소보(蘇報)ꡕ 편집인으로, ꡔ소보ꡕ에 실린 혁명파의 글이 문제가 되어 일어난 사건 때문에 일본으로 도망하였다. 그의 일본행에는 절강 출신 두 명의 첩과 진힐분도 동행하였다. 그런데 진범은 진힐분을 광동의 부유한 상인에게 첩으로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추근은 일본 유학 여학생들을 모아, 이 사건을 전체 여학생의 명예에 관계되는 일로 규정하고 반대 운동을 단행하였다. 결국 진힐분의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또한 진범의 두 첩은 모두 절강인이었는데 추근은 동향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동향 학생들과 자금을 모아 두 명의 첩을 독립시켰다.22) 또한 왕시택이 잠시 귀국하여 그 모친과 같이 도쿄에 왔을 때, 추근은 왕시택의 모친에게 남녀평등을 역설하고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추근의 권유로 왕시택의 모친은 43세의 늦은 나이로 일본에서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후에 왕시택의 모친은 귀국하여 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23)
그녀의 혁명적 열정과 강경한 여성해방론은 일본 유학 시절에 더욱 확고해졌다. 추근은 일본에서 청조 만주족 복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연유로 일본 옷을 입고 일본도를 차고 다녔으며, 도쿄의 무술회관에서 사격술을 연습하고 폭약 제조술을 익혔다. 또한 청조 관리의 암살을 기도하다 처형된 오월(吳樾)을 찬양하였다.24)
4. 고국에서의 생애
1905년 10월 일본 유학생의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청조의 요청으로 일본 문부성은 중국 유학생의 집회 결사와 언론 자유를 금지하는 규칙을 발표하였다. 유학생들은 이에 반대하여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추근도 중국에서 접한 바 있는 강렬한 혁명 선전물 ꡔ맹회두ꡕ와 ꡔ경세종ꡕ의 저자 진천화는 울분 속에서 오오모리(大森) 해안에 빠져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일본의 중국유학생 수는 약 7~8천명에 이르렀는데, 퇴학하여 귀국하자는 부류와 인내심을 갖고 학업을 계속하자는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추근은 귀국파였고, 왕시택은 잔류파였다. 당시 관비유학생으로 절강 동향회에서 추근을 한 두 번 보았던 노신도 귀국 반대파였다. 추근은 진천화의 추도식을 주도하고, 삼합회 회원인 유도일 등 9명의 동지와 십인단(十人團)을 조직하여 유학생 귀국을 주도하였다.
왕시택은 귀국 반대파였는데, 추근은 귀국 후 왕시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자년(庚子年.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난 해)이래 나는 나의 생명을 돌보지 않았다. 만일 성공하지 못하고 죽는다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썼다. 또한 남자로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많으나 여자로 희생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여성계의 수치라고 하였다.25) 귀국 후 추근의 행보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06년 초 중국으로 돌아온 추근은 상해에서 오지영과 재회하였다. 이어 소흥의 화창당을 방문하여 이복동생을 만나고, 사진관에서 양복 남장 모습을 한 자신의 기념 사진을 촬영한 뒤 시를 남겼다.
이 시는 남장을 하고 남자의 기개에 못지 않은 혁명가로서 자신을 거울에 비춰본 모습을 보고 감개를 읊은 것이다. 혁명 활동에 대한 투신이 늦었음을 후회하고 신념을 더욱 다지는 내용이지만, 그 이면에는 남녀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저항도 담겨있다. 마지막 구절 ‘속된 기운(浮塵)’은 봉건 예교가 여성에게 가한 속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27)
추근은 소흥의 한 학교에서 임시 체육 교사로 있다가 지인의 소개로 2월 초에 절강 호주(湖州)에 있는 심계여학교(潯溪女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심계여학교의 교장 서자화(徐自華. 字는 寄塵)는 명망이 높은 현지 유력 가문 출신으로 재능 있는 시인이었고, 서자화의 여동생 서온화(徐蘊華. 字는 小淑 혹은 雙韻)는 이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추근의 감화로 이 자매는 동맹회와 광복회에 가입하여 혁명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서자화는 추근의 맹우(盟友)가 되었다. 서자화는 후에 추근이 희생되었을 때 오지영과 더불어 추근의 유해를 수습하고 추근의 업적을 기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추근은 보수적 학교 당국과의 마찰로 사직하였으며, 서자화도 추근과 같이 행동하였다. 동생 서온화는 추근의 권유로 상해 애국여학교에서 계속 공부를 하였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추근은 광복회 회원들과 장강 일대의 회당을 혁명에 끌어들이는 데 노력하였다. 상해에서 폭약 제조를 하다가 부상을 당하는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1906년 겨울(양력 1907년 1월), 추근은 상해에서 ꡔ중국여보(中國女報)ꡕ를 창간하였다. 서씨 자매는 이 잡지의 창간을 위해 거액의 돈을 기부하였다. 추근은 권두에 「중국여보 발간사」를 개재하고, 「삼가 자매에게 고함」에서 여성의 계몽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서적 잡지와 신문을 중시하고 ꡔ중국여보ꡕ가 기존의 잡지와 달리 구어를 중심으로 문어를 병용하여 여성들도 읽기 쉽게 하였다는 취지를 설명하였다. 2개월 뒤 발행된 제2호에는 귀국 직전 일본 옷을 입고 일본도를 차고 도쿄에서 찍은 추근 자신의 사진을 실었다.28) 또 자신이 쓴 시 「면여권가(勉女權歌)」를 게재하였다.
이 시는 오지영과 술을 마시고 검무를 출 때 읊은 것이라고 하는데, 강렬한 수사로 여권의 독립을 강조하고 있다.
ꡔ중국여보ꡕ의 발간을 위해 노력하던 그녀에게, 다시 한번 인생의 전기가 찾아왔다. 추근은 서석린이 세운 대통사범학당(大通師範學堂)을 이어받아 혁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원래 대통사범학당은 혁명을 목적으로 1905년 서석린의 발의로 만들어졌는데, 소흥부 아문의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건립되었다. 그런데 서석린이 안휘성(安徽省) 안경(安慶)의 경찰학교 회판(會辦)과 육군학교 감독직을 맡아 소흥을 떠나게 되면서, 추근이 이 일을 맡게 되었다.
1907년 초 소흥에 온 추근은 대통사범학교를 주관하면서, 여자체육회를 창설하여 보병 교련을 가르치고 여국민군(女國民軍)의 편성을 계획하였으나 자금 조달의 어려움과 지역 유지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대통사범학교는 소흥부의 승인을 받은 학교로 개학식에 소흥부 지부 귀복(貴福), 산음현 지현 이종악(李鐘岳) 등이 출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특히 귀복은 추근을 추켜세우며 추근의 호 ‘경웅’으로 대련(對聯)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의식이 끝난 뒤 참석자 전원은 기념 촬영을 하였다. ‘경쟁천연, 웅관지구(競爭天演, 雄冠地球. 진화를 다투어 세계에 으뜸이 되네)’라고 쓴 대련은 학당 중앙의 정면에 있는 예당(禮堂) 내부 좌우 기둥에 걸렸다. 이들은 후에 추근을 체포하여 추근이 혁명당원임을 추궁하게 되지만, 추근은 개학식의 일을 거론하며 오히려 반론을 펴게 된다.30)
당시 서석린과 추근은 광복군(光復軍)을 조직하여 안휘와 절강의 혁명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은 사전에 알려졌고, 다급해진 서석린은 경찰학교의 졸업식장에서 의례를 주관하던 안휘성 최고의 장관인 안휘순무(安徽巡撫) 은명(恩銘)을 저격 살해하였지만,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청조 고위 관리가 혁명당원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은 모든 신문에 알려졌다. 혁명당에 대한 청조의 수색이 이어졌고, 서석린이 창설한 대통사범학교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소흥의 지역 인사들은 추근이 남장을 하고 말을 타며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또한 당시 소흥부 학무처(學務處) 총판(總辦)이었던 호도남 등은 소흥부 지부 귀복에게 추근을 혁명당의 용의자로 밀고하였다. 호도남은 도쿄에서 추근에게 ‘죽일 놈’이라는 욕을 먹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러나 신해혁명 직전 광복회 회원으로 추근의 혁명 동지였던 회당 출신 왕금발(王金發)은 도성장의 명을 받아 호도남을 살해함으로써 추근의 복수를 실행한다.31)
추근은 안경 사건의 보도를 신문을 통해 들었지만 도피하지 않았다. 추근의 친구와 학교의 학생들은 도주를 권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추근은 체포되어 개학식에 참석했던 소흥부 지부 귀복에게 배후를 추궁 받았지만, 오히려 개학식에 귀복이 참석한 일을 거론하며 귀복 이야말로 같은 동지라고 반격을 가했다. 이어 산음현 지현 이종악은 추근을 일반 죄인이 아니라 현 아문의 객실에서 빈객의 예로 초대하여 공술서를 쓰도록 했다. 추근은 단지 ‘추풍추우수오인(秋風秋雨愁熬人. 가을비 가을 바람 애간장을 태우는구나)’이라는 일곱 글자의 절명시를 남겼다.32) 1907년 6월 6일 추근은 33살의 불꽃같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5. 희생 이후
추근의 희생 이후 전국의 여론이 들끓었다. 유학생들은 청조의 행위를 비난하였고, 상해의 신문들도 청조를 질책하였다. 추근의 가족들은 모두 도피하였기 때문에, 추근의 유체는 지역의 선당(善堂)에서 수습하였다. 얼마 후 오빠 추예장이 몰래 소흥으로 옮겼다. 1908년 초, 서자화는 ‘만일 불행하게도 희생된다면 서냉(西冷)에 유골이 묻히기를 원한다’는 추근의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오지영과 의논하여 토지를 사서 추근의 묘지를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서냉교(西冷橋)로 이장하고 자신은 묘표(墓表)를 썼다.33) 또한 수십 명의 광복회 회원을 모아 추도식을 거행하고, 추사(秋社)를 조직하여 자신이 사장(社長)이 되었다. 아울러 6월 6일을 ‘추근 열사 성인 기념일’로 정하였다.
그런데 이 해 겨울 청조의 관원 가운데 추근의 묘를 없애고 오지영과 서자화를 추근의 무리라고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서자화와 오지영은 몸을 피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추근의 묘지는 항주에 두지 못하고 다시 소흥으로 옮겨져야만 했다. 이후 호남 상담에 있는 남편 왕정균의 묘와 합장되었다. 1912년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추근의 묘는 추사(秋社)의 요구에 따라 다시 호남 상담에서 항주로 옮겨졌다.
항주를 방문한 손문은 추근을 최고의 동지로 칭송하고 기념시문을 썼다. 그리고 추근을 추도하여 ‘감호여협천고 건괵영웅(鑑湖女俠千古, 巾幗英雄)’이라고 휘호하였다. 또한 손문은 추근을 기념하기 위해 상해에 학교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추근의 호를 교명으로 사용하는 ‘경웅여학(競雄女學)’은 1913년부터 서자화에 의해 운영되었다.34)
추근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이들은 모친의 희생 얼마 후에 부친 왕정균의 사망으로 부모 없는 고아가 되었다. 아들 왕원덕은 1897년 생으로 상해 정풍대학(正風大學)를 졸업한 뒤 신문사 사장, 중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이후 호남 문사연구관(文史硏究館) 비서로 일하다가 1955년에 사망하였다.35)
추근의 딸 왕찬지는 4세에 추근의 일본 유학으로 모친과 헤어지고, 모친이 희생되었을 때 겨우 7세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집안의 친척들에 의해 부양되었으나 추근의 피를 이어받아 15세를 전후하여 시작(詩作)을 하였다. 또한 무술을 좋아하여 유명한 스승에게서 권술과 검술을 익혔다. 임협의 기상을 가지고 있어 타인을 구제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고, 상무진덕회(尙武進德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런 여유로 모친 추근이 ‘여협(女俠)’이라면, 딸 왕찬지는 ‘소협(小俠)’으로 불렸다. 왕찬지는 1926년에 추근의 유작을 모아 출판하였으며, 1927년에 서자화가 운영하던 상해의 경웅여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8년 남경(南京) 국민정부가 혁명 열사의 유족에게 지급한 보상금을 기반으로,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가서 항공술과 조종술을 배웠다. 당시 미국인사들은 그를 중국 최초의 여성 파일럿으로 ‘동방의 여기장’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추근이 최초의 여성 혁명가라면, 왕찬지는 최초의 여기장이 된 것이다.36) 추근은 희생되었지만 남은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살아 있었다.
6. 추근의 시대
추근은 칼을 좋아하여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오지영의 회고에 의하면, 추근은 귀국 후 오지영을 만나 유학 생활의 어려웠던 점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추근은 일본도를 내보이면서 ‘저는 약한 여자로 만리에서 학문을 하였고, 왕복을 몇 번하였으나 선박은 단지 3등 칸을 이용하였고 쿨리와 같이 있었습니다. 믿는 바는 자위(自衛)이므로 오직 이 칼만이 나의 그림자와 같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37)라고 말하였다. 추근에게 칼은 자위의 수단이자 혁명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녀의 대표적 시 「보도가(寶刀歌)」는 그녀가 얼마나 혁명을 위한 개인주의적 자기 희생과 영웅주의적 이상에 매료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 청 말 혁명과 여성 해방운동의 선구자, 추근(秋瑾) ]
[ 청 말 혁명과 여성 해방운동의 선구자, 추근(秋瑾) ]
1. 반골의 고향 2. 불행한 결혼 생활과 노라의 탈출
3. 일본 유학과 혁명 활동 4. 고국에서의 생애
5. 희생 이후 6. 추근의 시대
1. 반골의 고향
소흥(紹興)은 중국의 대 문호 노신(魯迅)을 낳은 지역이다. 소흥 시내에 들어서면 노신과 관련된 유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노신의 옛집, 노신이 공부하던 삼미서옥(三味書屋), 노신 기념관, 소설 ꡔ공을기(孔乙己)ꡕ(1919)의 배경 함형주점(咸亨酒店) 등이 대표적 명소이다. 소흥의 북쪽은 항주만(杭州灣)에 닿아 있는데 이 곳으로 전당강(錢唐江)․부춘강(富春江)․포양강(浦陽江) 등 세 강이 합류하고 있다. 아름다운 ‘물의 도시(水鄕)’ 소흥은 중국의 8대 명주 가운데 하나인 소흥주(紹興酒)로도 유명하다. 성내에는 운하가 그물 망처럼 종횡으로 흘러 모두 교외의 감호(鑒湖)로 통하는데, 추근의 호 ‘감호여협(鑒湖女俠)’의 감호는 이곳을 이르는 말이다.
소흥의 옛 이름은 회계(會稽)이다. 회계는 멀리 춘추시대 월(越) 왕조의 수도인데, 월 왕조의 마지막 왕 구천(勾踐)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잘 알려진 대로 와신상담은 오(吳) 왕조의 왕 부차(夫差)와 월 왕조의 왕 구천 간의 복수에 관한 고사이다. 소흥에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난정(蘭亭)은 진(晉) 나라의 대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왕희지는 소흥 출신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관직을 지내면서 유명한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지었다. 하(夏) 왕조의 시조 우(禹)의 능, 양명학을 창시한 대 사상가 왕양명(王陽明)의 묘도 소흥에 있다.
반골의 고향, 월왕 구천의 후예인 추근(秋瑾. 1875~1907)은 광서황제가 즉위한 1875년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추씨 집안은 전통적으로 과거에 합격한 관리의 가계로 조부와 부친, 그리고 추근의 오빠도 향시(鄕試)에 합격한 거인(擧人) 출신이다. 모친 단씨(單氏) 역시 관료 집안 출신으로 교양을 갖춘 재녀였다. 오빠 추예장(秋譽章)을 따라 추근도 어린 나이에 경서를 배우고 고전 시문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모친 역시 추근에게 시문을 가르쳐주었다. 이런 연후로 추근은 10세를 전후하여 시작(詩作)을 시작할 수 있었다.
1890년 추근의 나이 16세, 조부가 관직을 그만두자 고향 소흥의 산음현(山陰縣)에 돌아온 추씨 일가는 명(明) 왕조 말기 대 관료의 별장이었던 화창당(和暢堂)을 사들였다. 화창당은 현재 추근의 옛집(秋瑾故居)으로 남아있다. 추근은 결혼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고,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소흥의 대통사범학교(大通師範學校)에서 일할 때 이곳에서 혁명 준비를 위한 비밀회의를 하였다.
추근은 남자와 동등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문, 무를 겸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권법을 공부하고 훈련하였다. 그러나 이미 관례대로 5세의 나이에 전족을 한 추근이 무술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남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를 보다 못한 모친은 추예장과 추근을 데리고 무술의 명수였던 사촌 오빠에게 가르침을 부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추근은 권법, 봉술과 검술 외에 승마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혁명에 뛰어든 뒤로 평생 남장을 즐겨하고, 그 열정을 시문으로 표현하고 있음은 바로 그녀의 이같은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다.1)
추근은 스스로 많은 저술과 시문을 남겼다. 희생 이후 추근 일가와 추근을 알고 있던 사람들도 문장을 서술하였다. 물론 청조의 공식 문건이 존재하지만, 추근의 저작과 동시대인의 저술을 검토하는 것이 추근과 그의 시대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 데 훨씬 유용하다.2)
이하 19세기 후반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조 말기, 아직 ‘혁명’이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던 때, 혁명과 여성 해방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추근과 그의 시대를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서술해보고자 한다.
2. 불행한 결혼 생활과 노라의 탈출
추근의 불행은 22세에 부모의 뜻에 따라 호남성(湖南省) 상담(湘潭)의 부유한 상인 자제 왕정균(王廷鈞. 字는 子芳)과 결혼하면서 시작된다. 추근의 부친은 1895년 호남성 상담의 이금국(釐金局) 총판(總辦)으로 재직하면서 왕정균의 부친을 알게 되었다. 왕씨 집안은 호남의 명문 증국번(曾國藩)과 친척으로 태평천국을 막기 위한 의용군 상군(湘軍)을 편성하자 상군의 자금원이었던 이금(釐金. 내지 통행세)을 관리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1896년 22세의 추근은 왕정균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당시 왕정균은 추근 보다 4살 어린 18세였다. 그러나 시문과 경서에 능한 추근과 교양인과는 거리가 먼 왕정균은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부부였다. 추근의 표현에 따르면, 남편은 ‘신의가 없고 인정도 없으며 도박을 좋아하고 타인을 기만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사람이었다.3)
추근이 불행한 결혼으로 고통받고 있을 당시 중국의 정치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다. 1898년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망국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강유위(康有爲)․양계초(梁啓超) 등은 무술변법을 일으켰으나 100여 일 만에 실패하였다. 2년 뒤 중국 전역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의화단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8개국 열강 연합군은 중국의 반(反)기독교 운동을 진압하고 기독교민과 선교사 및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중국과 전쟁을 선포하였다.
남편 왕정균은 1899년 백은(白銀) 1만 냥을 주고 호부주사(戶部主事)의 관직을 얻어 북경에 와 있었다.4) 결혼 1년 후 낳은 어린 아들 왕원덕(王沅德)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북경에 와 있던 추근은 전란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재능 있는 시인이었던 그녀는 이 때 구국을 위한 강한 열망을 시로 표현하였다.
북경 지방의 전쟁이 언제나 끝날까
중국과 서양간에 아직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네
부질없이 노(魯) 나라 여인처럼 우국의 한을 품지만
두건을 투구로 바꾸기는 쉽지 않도다5)
추근은 이 시문을 통해 국가와 조정에 위난이 닥쳤을 때 백성도 이를 피하기 어렵다는 노 나라 여인의 고사를 인용하여, 국가 존망의 위기에 자신이 전쟁에 나서지는 못하나 우국의 심정은 어쩔 수 없음을 토로하였다.6)
추근 가족은 의화단 전쟁을 피해 귀향하였다. 1901년 호남의 상담에서 딸 왕찬지(王燦芝)를 낳은 추근은 1903년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온 혁명 팜플렛을 읽게 되었다. 그 중에서 ꡔ맹회두(猛回頭)ꡕ와 ꡔ경세종(警世鐘)ꡕ을 쓴 진천화(陳天華)는 추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추근은 이처럼 청조를 비난하고 민중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격렬한 어조의 글을 접하면서 혁명을 생각하게 되었다.
추근의 실천은 5세부터 계속된 자신의 전족을 스스로 풀면서 시작되었다. 1903년 남편 왕정균의 복직으로 다시 북경에 온 추근은 자신의 전족을 풀었고, 자신의 딸에게도 전족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대담하게 남장을 하였고, 자신의 호를 남자와 자웅을 겨룬다는 의미에서 ‘경웅(競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남편과의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7)
북경에서 추근은 자신의 생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추근의 이웃집에 역시 남편을 따라 북경에 와 있던 오지영(吳芝瑛)이다. 오지영은 안휘성(安徽省) 동성(桐城) 출신으로 무술변법 시기 만들어진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북경대학의 전신)의 총교습(總敎習. 학장) 오여륜(吳汝綸)의 조카였다. 오여륜은 청대 고문학파의 대가로 그 조카인 오지영 역시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추근은 그녀의 집에서 수많은 장서에 감탄하고 그 중에서 당시의 새로운 서적과 신문 등을 접하게 된다. 또한 오지영을 중심으로 조직된 「불전족회(不纏足會)」, 「상층 부녀 담화회」 등에 참여하였다.
추근 보다 나이가 7살 연상인 오지영은 추근과 의기투합하여 의자매의 맹세를 하였다. 추근이 희생된 후 언니격인 오지영은 추근의 유해를 수습하여 묘를 세우고 추근 추모 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추근과 의자매의 맹세를 철저하게 지킨 셈이다.8) 훗날 오지영의 회고에 따르면, 추근은 의협심이 많고 언변이 좋아 좌중을 압도하였다고 한다. 평소에 추근은 ‘여자는 당연히 학문을 배워 자립을 구해야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혁명, 혁명을 외치는 데 혁명은 당연히 가정에서 시작해야 하며, 소위 남녀의 평등 권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하였다.9)
추근은 오지영을 통해 일본 도쿄(東京) 제국대학 교수 출신으로 경사대학당에 초빙된 후꾸베(服部卯之吉)의 처 시게코(繁子)를 알게 되었다. 시게코는 추근을 처음 만나서 남장을 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추근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힘을 기르기 위해 우선 겉모습부터 남자의 모습을 하고 마음으로 남자가 되려고 한다면서, 중국 남자의 복장은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라 변발을 한 만주족의 풍속이므로 양복을 입었다고 응답하였다. 추근과의 응답에서 시게코는 추근의 과격한 사상에 놀라게 된다. 이후 시게코는 추근을 위해 영어와 일본어 교사를 소개해주고, 그녀의 일본 유학에 동행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10)
남편 왕정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근은 어린 자식 둘과 남편을 남겨두고 일본 유학을 결행하게 된다. 일본 유학을 준비하면서 전 예부주사(禮部主事) 왕희(王熙)가 무술정변에 연좌되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유학 자금의 일부를 무기명으로 감옥에 넣어주었다. 왕희는 석방 후 이 사실을 알고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하였으나 추근은 이미 일본으로 떠난 상황이었다고 한다. 추근의 타고난 의협심을 알 수 있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11)
1904년 5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본행에서 그녀는 서른의 인생 여정을 이렇게 시로 남겼다.
해와 달이 빛이 없으니 천지가 어두운데
캄캄한 여성 세계 누가 구해줄까
바다 건너 일본에 유학하려고 장식품 팔고
골육과 헤어져 옥문관(玉門關)을 떠났다네
전족을 없애 천년의 해독을 씻고
열정적으로 백만 여성의 정신을 일깨우자
예쁜 비단 손수건 하나
반은 핏물, 반은 눈물이라네12)
3. 일본 유학과 혁명 활동
당시 일본 도쿄는 중국 유학생의 집합소였다. 중국 유학생들은 새로운 사상과 경험의 물결 속에서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우수성과 청조의 후진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대다수 유학생들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저지한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를 감탄하였는데, 추근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13) 그러나 일본이 중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를 침략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준 사건이 러일전쟁의 본질임은 인식하지 못했다.
추근은 청국 유학생회관에 설립된 일본어강습소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우는 한편, 급진적인 유학생들의 글을 접하면서 혁명의 길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유학생들과도 교류하였지만, 여성이면서 혁명을 외치는 그녀가 겪는 고충은 매우 컸다. 당시 관비유학생으로 거인(擧人) 출신인 43세의 호도남(胡道南)은 혁명과 남녀 평등에 반대하였는데, 추근은 그를 ‘죽일 놈’이라고 욕하였다. 호도남은 이에 대해 앙심을 품고 1907년 추근을 혁명당원으로 밀고하게 된다.14) 추근은 또한 동향 출신 도성장(陶成章)을 통해 반청 비밀결사인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였지만, 처음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그녀는 일본 유학 기간 중에 공애회(共愛會. 1903년 러시아의 만주 점령에 항의하며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여자유학생 20명이 도쿄에서 결성한 조직)를 개조하여 ‘실행공애회(實行共愛會)’를 조직하였다. 추근은 실행공애회의 장정(章程)을 작성하여 여학교의 진흥을 목표로 삼고, 호남 제일여학당(第一女學堂)에 보내는 편지를 써서 여학생들의 유학을 권유하였다. 그녀는 편지에서, 남자의 속박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자립해야 하고 자립하고자 하면 배움을 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15)
동시에 그녀는 돈이 들지 않고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 연설을 중시하여, 연설연습회와 그 부속 조직으로 표준어연구회를 조직하고 표준어로 혁명 연설을 해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당시 방언의 문제는 심각하여 북경인에게 상해 방언과 광동 방언은 영어보다 알기 어려운 언어였다. 그녀 자신도 절강의 소흥 방언을 사용하였기에 북경 관화(官話. 표준어)를 연습하였다. 추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연설이 매우 정열적이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16) 추근은 또한 청국 유학생회관에서 발행된 월간지 ꡔ백화(白話)ꡕ의 편집에 관여하였는데, ‘감호여협’이라는 서명을 사용하여, 구어체로 「2억 여성 동포에게 고하는 글」, 「우리 동포에게 고하는 글」 등을 통해 여성의 전족 반대, 유학 장려, 남녀 평등을 호소하였다.17)
추근은 남편의 고향인 호남 동향회에서 왕시택(王時澤)을 알게 되었다. 왕시택은 1904년 정월 자비유학생으로 도쿄에 와서 홍문학원(弘文學院) 보통반 중 호남반에 편입하였다. 그는 당시 호남 동향회에 참가하면서 유도일(劉道一)을 만났고, 반 년 뒤 추근을 알게 되었다. 추근은 호남 동향회에 참여하면서 9살 어린 왕시택과 의기투합하였다. 곧 이어 왕시택과 추근은 요꼬하마(橫濱)에서 개최된 삼합회(三合會)의 입회식에 참여하였다. 이번 입회에서 추근은 ‘백선〔白扇. 속칭 군사(軍師)〕으로 봉해졌다. 1904년 조직된 요코하마 삼합회는 삼점회(三點會)라고도 하는데, 유도일은 1차 입회자였고 추근과 왕시택은 2차 입회자였다. 당시 손문이 해외에서 동지를 모아 비밀 회당(會黨. 비밀결사의 일종) 삼합회의 형식을 이용하여 만든 단체이다.18)
추근은 이후 동향인 도성장을 알게 되었다. 도성장은 신해혁명 시기 절강과 강소(江蘇) 일대 혁명 활동의 중심 인물로 상해에서 반청 혁명 단체인 광복회를 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혁명에 비밀결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여 유명한 ꡔ교회원류고(敎會源流考)ꡕ라는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19)
광복회의 회장은 채원배(蔡元培)였으나, 실질적인 영수는 도성장이었다. 추근은 도성장에게 광복회에 가입하겠다는 요청을 하였으나, 도성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검도와 승마술을 훈련하는 추근을 보고 감복하여, 상해의 채원배와 소흥의 또 다른 광복회원 서석린(徐錫麟)에게 보내는 입회 추천서를 써주었다.
추근은 1905년 초 잠시 귀국하여 학비 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도성장의 추천장을 가지고 채원배와 서석린을 만났다. 채원배는 당시 상해의 애국여학교(愛國女學校) 교장이었다. 추근과 동향인 채원배는 진사(進士) 출신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만이 들어갈 수 있는 한림원(翰林院)에 재직하였고, 신해혁명 이후 북경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북경대학을 5․4 신문화운동의 거점으로 변모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역시 동향인 서석린은 견직물 점포를 운영하는 상인의 자제였다. 그는 소흥부학교(紹興府學校)에 재직하던 중 일본 오오사카(大阪)에서 열린 박람회 시찰을 명분으로 관비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서석린은 추근보다 2살 위로 권총의 명수였으며 고도 근시로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채원배는 추근의 입회를 반대하였지만, 서석린은 추근과 의기투합하였다. 결국 도성장과 서석린의 추천으로 추근은 상해에서 입회식을 거행한 뒤 광복회 회원이 되었다.20)
추근은 일본에 돌아와서 실천여학교(實踐女學校) 부설 사범반에 입학하였다. 얼마 후 7월 20일(양력 8월 20일) 손문의 주관으로 중국 동맹회가 창립되었다. 손문을 만난 그녀는 동맹회에 가입하면서 ‘소흥산음출신 추경웅(紹興山陰出身 秋競雄)’이라고 서명하였다. 추근은 곧 이어 절강 지역 분회장이 되었다.21)
앞서 서술한대로 추근은 공애회 개조에 적극적 역할을 하는데, 실행공애회의 회장은 진힐분(陳擷芬)이었다. 진힐분은 1902년 상해에서 중국 최초의 여성잡지 ꡔ여학보(女學報)ꡕ를 창간한 지식인이었다. 진힐분의 부친 진범(陳範)은 상해의 급진적 잡지 ꡔ소보(蘇報)ꡕ 편집인으로, ꡔ소보ꡕ에 실린 혁명파의 글이 문제가 되어 일어난 사건 때문에 일본으로 도망하였다. 그의 일본행에는 절강 출신 두 명의 첩과 진힐분도 동행하였다. 그런데 진범은 진힐분을 광동의 부유한 상인에게 첩으로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추근은 일본 유학 여학생들을 모아, 이 사건을 전체 여학생의 명예에 관계되는 일로 규정하고 반대 운동을 단행하였다. 결국 진힐분의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또한 진범의 두 첩은 모두 절강인이었는데 추근은 동향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동향 학생들과 자금을 모아 두 명의 첩을 독립시켰다.22) 또한 왕시택이 잠시 귀국하여 그 모친과 같이 도쿄에 왔을 때, 추근은 왕시택의 모친에게 남녀평등을 역설하고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추근의 권유로 왕시택의 모친은 43세의 늦은 나이로 일본에서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후에 왕시택의 모친은 귀국하여 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23)
그녀의 혁명적 열정과 강경한 여성해방론은 일본 유학 시절에 더욱 확고해졌다. 추근은 일본에서 청조 만주족 복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연유로 일본 옷을 입고 일본도를 차고 다녔으며, 도쿄의 무술회관에서 사격술을 연습하고 폭약 제조술을 익혔다. 또한 청조 관리의 암살을 기도하다 처형된 오월(吳樾)을 찬양하였다.24)
4. 고국에서의 생애
1905년 10월 일본 유학생의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청조의 요청으로 일본 문부성은 중국 유학생의 집회 결사와 언론 자유를 금지하는 규칙을 발표하였다. 유학생들은 이에 반대하여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추근도 중국에서 접한 바 있는 강렬한 혁명 선전물 ꡔ맹회두ꡕ와 ꡔ경세종ꡕ의 저자 진천화는 울분 속에서 오오모리(大森) 해안에 빠져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일본의 중국유학생 수는 약 7~8천명에 이르렀는데, 퇴학하여 귀국하자는 부류와 인내심을 갖고 학업을 계속하자는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추근은 귀국파였고, 왕시택은 잔류파였다. 당시 관비유학생으로 절강 동향회에서 추근을 한 두 번 보았던 노신도 귀국 반대파였다. 추근은 진천화의 추도식을 주도하고, 삼합회 회원인 유도일 등 9명의 동지와 십인단(十人團)을 조직하여 유학생 귀국을 주도하였다.
왕시택은 귀국 반대파였는데, 추근은 귀국 후 왕시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자년(庚子年.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난 해)이래 나는 나의 생명을 돌보지 않았다. 만일 성공하지 못하고 죽는다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썼다. 또한 남자로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은 많으나 여자로 희생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여성계의 수치라고 하였다.25) 귀국 후 추근의 행보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06년 초 중국으로 돌아온 추근은 상해에서 오지영과 재회하였다. 이어 소흥의 화창당을 방문하여 이복동생을 만나고, 사진관에서 양복 남장 모습을 한 자신의 기념 사진을 촬영한 뒤 시를 남겼다.
차림이 엄숙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 호협(豪俠)인 이 몸
생애 전반부를 평범하게 보낸 게 후회되네
현실 속의 세상을 사는 사람의 형체 원래가 몽환인 걸
미래의 이상세계가 오히려 진실인 듯
사진 속의 남자의 모습, 늦게 만나 감개가 교차하고
천장 바라보며 시국을 한탄하니 의기 더욱 솟구치도다
이후에 옛 친구 만나면
이미 속된 기운을 떨쳐버렸다고 해야지26)
이 시는 남장을 하고 남자의 기개에 못지 않은 혁명가로서 자신을 거울에 비춰본 모습을 보고 감개를 읊은 것이다. 혁명 활동에 대한 투신이 늦었음을 후회하고 신념을 더욱 다지는 내용이지만, 그 이면에는 남녀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저항도 담겨있다. 마지막 구절 ‘속된 기운(浮塵)’은 봉건 예교가 여성에게 가한 속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27)
추근은 소흥의 한 학교에서 임시 체육 교사로 있다가 지인의 소개로 2월 초에 절강 호주(湖州)에 있는 심계여학교(潯溪女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심계여학교의 교장 서자화(徐自華. 字는 寄塵)는 명망이 높은 현지 유력 가문 출신으로 재능 있는 시인이었고, 서자화의 여동생 서온화(徐蘊華. 字는 小淑 혹은 雙韻)는 이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추근의 감화로 이 자매는 동맹회와 광복회에 가입하여 혁명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서자화는 추근의 맹우(盟友)가 되었다. 서자화는 후에 추근이 희생되었을 때 오지영과 더불어 추근의 유해를 수습하고 추근의 업적을 기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추근은 보수적 학교 당국과의 마찰로 사직하였으며, 서자화도 추근과 같이 행동하였다. 동생 서온화는 추근의 권유로 상해 애국여학교에서 계속 공부를 하였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추근은 광복회 회원들과 장강 일대의 회당을 혁명에 끌어들이는 데 노력하였다. 상해에서 폭약 제조를 하다가 부상을 당하는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1906년 겨울(양력 1907년 1월), 추근은 상해에서 ꡔ중국여보(中國女報)ꡕ를 창간하였다. 서씨 자매는 이 잡지의 창간을 위해 거액의 돈을 기부하였다. 추근은 권두에 「중국여보 발간사」를 개재하고, 「삼가 자매에게 고함」에서 여성의 계몽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서적 잡지와 신문을 중시하고 ꡔ중국여보ꡕ가 기존의 잡지와 달리 구어를 중심으로 문어를 병용하여 여성들도 읽기 쉽게 하였다는 취지를 설명하였다. 2개월 뒤 발행된 제2호에는 귀국 직전 일본 옷을 입고 일본도를 차고 도쿄에서 찍은 추근 자신의 사진을 실었다.28) 또 자신이 쓴 시 「면여권가(勉女權歌)」를 게재하였다.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여
자유에 힘쓰며 술잔을 드네
남녀평등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어찌 소꼬리처럼 종속된 지위에 만족하겠는가
분연히 스스로 떨쳐 일어나
여태까지의 부끄러운 먼지 때를 씻기 바란다네
어떻게 하면 동지가 되어
강산을 회복하는 데 여성들 힘에 의지하게 될까
옛 풍습 중 가장 부끄러운 점은
여자들이 우마(牛馬)와 짝한다는 것이라네
서광이 새로 비치니 문명 세상이 기다리고
여성의 독립이 첫 번째라네
노예 같은 신분 뿌리째 뽑아
신지식과 학문으로 단련되기 바란다네
책임이 어깨 위에 지워졌으니
여걸들은 기대를 저버리면 안될 것이라네29)
이 시는 오지영과 술을 마시고 검무를 출 때 읊은 것이라고 하는데, 강렬한 수사로 여권의 독립을 강조하고 있다.
ꡔ중국여보ꡕ의 발간을 위해 노력하던 그녀에게, 다시 한번 인생의 전기가 찾아왔다. 추근은 서석린이 세운 대통사범학당(大通師範學堂)을 이어받아 혁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원래 대통사범학당은 혁명을 목적으로 1905년 서석린의 발의로 만들어졌는데, 소흥부 아문의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건립되었다. 그런데 서석린이 안휘성(安徽省) 안경(安慶)의 경찰학교 회판(會辦)과 육군학교 감독직을 맡아 소흥을 떠나게 되면서, 추근이 이 일을 맡게 되었다.
1907년 초 소흥에 온 추근은 대통사범학교를 주관하면서, 여자체육회를 창설하여 보병 교련을 가르치고 여국민군(女國民軍)의 편성을 계획하였으나 자금 조달의 어려움과 지역 유지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대통사범학교는 소흥부의 승인을 받은 학교로 개학식에 소흥부 지부 귀복(貴福), 산음현 지현 이종악(李鐘岳) 등이 출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특히 귀복은 추근을 추켜세우며 추근의 호 ‘경웅’으로 대련(對聯)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의식이 끝난 뒤 참석자 전원은 기념 촬영을 하였다. ‘경쟁천연, 웅관지구(競爭天演, 雄冠地球. 진화를 다투어 세계에 으뜸이 되네)’라고 쓴 대련은 학당 중앙의 정면에 있는 예당(禮堂) 내부 좌우 기둥에 걸렸다. 이들은 후에 추근을 체포하여 추근이 혁명당원임을 추궁하게 되지만, 추근은 개학식의 일을 거론하며 오히려 반론을 펴게 된다.30)
당시 서석린과 추근은 광복군(光復軍)을 조직하여 안휘와 절강의 혁명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은 사전에 알려졌고, 다급해진 서석린은 경찰학교의 졸업식장에서 의례를 주관하던 안휘성 최고의 장관인 안휘순무(安徽巡撫) 은명(恩銘)을 저격 살해하였지만,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청조 고위 관리가 혁명당원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은 모든 신문에 알려졌다. 혁명당에 대한 청조의 수색이 이어졌고, 서석린이 창설한 대통사범학교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소흥의 지역 인사들은 추근이 남장을 하고 말을 타며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또한 당시 소흥부 학무처(學務處) 총판(總辦)이었던 호도남 등은 소흥부 지부 귀복에게 추근을 혁명당의 용의자로 밀고하였다. 호도남은 도쿄에서 추근에게 ‘죽일 놈’이라는 욕을 먹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러나 신해혁명 직전 광복회 회원으로 추근의 혁명 동지였던 회당 출신 왕금발(王金發)은 도성장의 명을 받아 호도남을 살해함으로써 추근의 복수를 실행한다.31)
추근은 안경 사건의 보도를 신문을 통해 들었지만 도피하지 않았다. 추근의 친구와 학교의 학생들은 도주를 권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추근은 체포되어 개학식에 참석했던 소흥부 지부 귀복에게 배후를 추궁 받았지만, 오히려 개학식에 귀복이 참석한 일을 거론하며 귀복 이야말로 같은 동지라고 반격을 가했다. 이어 산음현 지현 이종악은 추근을 일반 죄인이 아니라 현 아문의 객실에서 빈객의 예로 초대하여 공술서를 쓰도록 했다. 추근은 단지 ‘추풍추우수오인(秋風秋雨愁熬人. 가을비 가을 바람 애간장을 태우는구나)’이라는 일곱 글자의 절명시를 남겼다.32) 1907년 6월 6일 추근은 33살의 불꽃같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5. 희생 이후
추근의 희생 이후 전국의 여론이 들끓었다. 유학생들은 청조의 행위를 비난하였고, 상해의 신문들도 청조를 질책하였다. 추근의 가족들은 모두 도피하였기 때문에, 추근의 유체는 지역의 선당(善堂)에서 수습하였다. 얼마 후 오빠 추예장이 몰래 소흥으로 옮겼다. 1908년 초, 서자화는 ‘만일 불행하게도 희생된다면 서냉(西冷)에 유골이 묻히기를 원한다’는 추근의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오지영과 의논하여 토지를 사서 추근의 묘지를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서냉교(西冷橋)로 이장하고 자신은 묘표(墓表)를 썼다.33) 또한 수십 명의 광복회 회원을 모아 추도식을 거행하고, 추사(秋社)를 조직하여 자신이 사장(社長)이 되었다. 아울러 6월 6일을 ‘추근 열사 성인 기념일’로 정하였다.
그런데 이 해 겨울 청조의 관원 가운데 추근의 묘를 없애고 오지영과 서자화를 추근의 무리라고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서자화와 오지영은 몸을 피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추근의 묘지는 항주에 두지 못하고 다시 소흥으로 옮겨져야만 했다. 이후 호남 상담에 있는 남편 왕정균의 묘와 합장되었다. 1912년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추근의 묘는 추사(秋社)의 요구에 따라 다시 호남 상담에서 항주로 옮겨졌다.
항주를 방문한 손문은 추근을 최고의 동지로 칭송하고 기념시문을 썼다. 그리고 추근을 추도하여 ‘감호여협천고 건괵영웅(鑑湖女俠千古, 巾幗英雄)’이라고 휘호하였다. 또한 손문은 추근을 기념하기 위해 상해에 학교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추근의 호를 교명으로 사용하는 ‘경웅여학(競雄女學)’은 1913년부터 서자화에 의해 운영되었다.34)
추근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이들은 모친의 희생 얼마 후에 부친 왕정균의 사망으로 부모 없는 고아가 되었다. 아들 왕원덕은 1897년 생으로 상해 정풍대학(正風大學)를 졸업한 뒤 신문사 사장, 중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이후 호남 문사연구관(文史硏究館) 비서로 일하다가 1955년에 사망하였다.35)
추근의 딸 왕찬지는 4세에 추근의 일본 유학으로 모친과 헤어지고, 모친이 희생되었을 때 겨우 7세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집안의 친척들에 의해 부양되었으나 추근의 피를 이어받아 15세를 전후하여 시작(詩作)을 하였다. 또한 무술을 좋아하여 유명한 스승에게서 권술과 검술을 익혔다. 임협의 기상을 가지고 있어 타인을 구제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고, 상무진덕회(尙武進德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런 여유로 모친 추근이 ‘여협(女俠)’이라면, 딸 왕찬지는 ‘소협(小俠)’으로 불렸다. 왕찬지는 1926년에 추근의 유작을 모아 출판하였으며, 1927년에 서자화가 운영하던 상해의 경웅여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8년 남경(南京) 국민정부가 혁명 열사의 유족에게 지급한 보상금을 기반으로,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가서 항공술과 조종술을 배웠다. 당시 미국인사들은 그를 중국 최초의 여성 파일럿으로 ‘동방의 여기장’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추근이 최초의 여성 혁명가라면, 왕찬지는 최초의 여기장이 된 것이다.36) 추근은 희생되었지만 남은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살아 있었다.
6. 추근의 시대
추근은 칼을 좋아하여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오지영의 회고에 의하면, 추근은 귀국 후 오지영을 만나 유학 생활의 어려웠던 점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추근은 일본도를 내보이면서 ‘저는 약한 여자로 만리에서 학문을 하였고, 왕복을 몇 번하였으나 선박은 단지 3등 칸을 이용하였고 쿨리와 같이 있었습니다. 믿는 바는 자위(自衛)이므로 오직 이 칼만이 나의 그림자와 같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37)라고 말하였다. 추근에게 칼은 자위의 수단이자 혁명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녀의 대표적 시 「보도가(寶刀歌)」는 그녀가 얼마나 혁명을 위한 개인주의적 자기 희생과 영웅주의적 이상에 매료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漢) 나라 궁궐에 석양 비껴 비치는데
오 천년 역사의 오랜 나라 망하려 하네
한 번 잠에 빠지자 몇 백년 동안이나 깊게 잠들었고
노예된 치욕을 알지 못하는도다
옛 우리 조상 이름 헌원(軒轅)이고
발상지가 곤륜(崑崙)임을 기억한다네
황하(黃河)와 장강(長江)을 개척하고
큰 칼 빛내며 중원에 자리잡았네
(明末 崇禎帝가 자살했던) 매산(梅山. 景山의 오류)에서 통곡한들 어쩔 것인가
동타(銅駝)는 가시덤불에 묻힌 것을
몇 번이고 고개 돌려 수도를 돌아보니
망국의 슬픈 노래 쏟아지는 눈물
북상하는 팔국연합군(八國聯合軍) 많기도 하여
우리 강산을 또 떼어 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