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 좋아하시고들 있네

홍혜란200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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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 좋아하시고들 있네

"쿨 좋아하시고들 있네" [오마이뉴스 2006-03-27 11:00]     [오마이뉴스 조은미 기자] 평범한 직장인 조모씨는 밤이 으슥해지고, 부른 배도 뉘엿뉘엿 꺼지는 밤 10시 무렵이면 TV를 튼다. 지금껏 방안에 울려 퍼지며 각성을 외치던 라디오를 접고 TV를 튼다. 그는 생각한다. '사는 게 별 거냐? 배 부르고, 머리 안 아프면 되지.'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리모컨 부여잡고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은 없다.

그는 생각한다. '뭐 좀 재미있는 거 없나?' 아무 생각 없이 그는 소파에 털퍼덕 몸을 파묻는다. 몸이 추욱 소파 속으로 밀고 들어간다. 이렇게 앉으면 자세가 나쁘고, 자세가 나쁘면 허리가 아플 텐데라는 생각이 0.1초 정도 찾아오지만 무시한다. 자세는 둘째 치고 '편하다'란 본능이 생각 같은 걸 확실하게 없애준다.

널브러진 몸에서 엔도르핀대신 수면제가 자력갱생 모락모락 솟아난다. 졸다 떨어뜨린 리모컨이 방바닥과 부딪히며 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는 얼른 리모컨을 집어 든다. 리모컨을 부여잡고 빨간색 버튼을 꾹 누른다. TV의 작렬하는 빛은 조모씨의 낡은 몸뚱아리가 생성해낸 수면제를 불쑥 삼켜버린다. 조모씨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똥말똥하다.

어리고 어린 것까지 어쩌면 그리 심지 있게 구는지, 확 깨물어주고 싶을 만치 얄미운 KBS 2TV 수목드라마 때문이다. 아니다. 조모씨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저 말들 때문이다.

동글동글한 얼굴의 민호(천정명)가 조폭 호철(이재룡)에게   "형이 미리(김민희) 지켜주세요" "그래도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는 건 남자로서"라고 말했다가 호되게 당하는 꼴을 낄낄대며 구경한다. 화끈한 호철이'남자로서 여자 지켜주기'에 대해 화끈하게 말한다.

"미리를 대체 뭘로부터 어떻게 지켜? 걜 감기로부터 지켜? 암으로부터 지켜? 교통사고 날지도 모르니, 차로부터 걜 지켜? 감기나 암, 교통사고는 우리 모두 각자가 스스로 조심해야 되는 거야. 남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김민호, 가서 세상 남자들에게 말해라. 남자 지들이나 잘 살라고. 여잔 남자가 속만 안 썩이면 참으로 지 알아서 잘 사는 동물이야. 싸구려 소설 그만 읽어라. 대체 요즘 것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지구방위대도 아니고 뭘 지키란 거야, 대체."

이 드라마, 세상 물정에 대해 제대로 까는구나 생각하며 구경한다. 틈을 내주지 않아 투덜대는 미리에게 호철이 말한다.   "쿨하게. 우리 쿨하게 살자." 그걸 쳐다보던 영숙(배종옥)이 말한다. "개나 소나… 쿨. 쿨…, 좋아하시고들 있네.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이 언제나 쿨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본다, 나는."

역시 쿨한 거 좋아하는 조모씨는 뜨끔 한다. 조모씨에게 한 수 가르쳐주듯이 영숙이 말한다. "진짜 쿨한 건 뭐냐면, 진짜 쿨할 수 없단 걸 아는 게 진짜 쿨한 거야. 좋아서 죽네 사네 한 남자가 나 싫다고 하는데, 오케이, 됐어 한 방에 그러는 거, 쿨한 거 아니다. 미친 거지."

조모씨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조모씨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쿨하고 싶어 하는 건, 상처 받고 싶지 않고, 상처 받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서라도 센 척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닌가. 조모씨는 문득 저 말에 확실히 필이 확 꽂힌다.   "진짜 쿨할 수 없단 걸 아는 게 진짜 쿨한 거야."   하. 죽인다.

말만 쿨하지 전혀 쿨하지 않은 미리가 끝내 말한다. "내가 원하는 걸 하는 게 사랑이 아냐. 그가 원하는 걸 해주는 거 그게 사랑이지. 안 그래?" 양아치인 호철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식구들과 의절까지 한 마당인 미리가 말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지만, 저 말하기까지 미리가 얼마나 많은 아픔을 삭였나 생각하며, 조모씨는 하마터면 울 뻔한다. 아니 울 뻔할 만치 감동한다.

"세상에서 아버지랑 사이좋은 자식이 몇이나 될까?"

갈수록 조모씨는 이 드라마에 빠져든다. 조모씨는 '쿨파스'가 아니라 '핫파스' 같은 대사에 빠져든다.

부모 덕분에 상처투성이인 민호가 말한다. "진짜 부모들도 정신 차려야 돼. 자식들만 자기들 속 썩이는 줄 알지? 부모들도 만만찮아." 조모씨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민호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혼자 생각한다. "세상에서 아버지랑 사이좋은 자식이 몇이나 될까?" 역시 부모가 주는 상처를 아는 수희(윤소이)가 말한다.   "아버질 사랑하는 자식은 많아도 아버지랑 사이좋은 자식은 몇 안 될 걸."

조모씨는 문득 말없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특별히 사이 나쁘지도 않지만, 특별히 사이 좋아보지도 못하고 그와 다른 세상 사람이 돼버린 아버지를 떠올린다. 많은 드라마와 CF가 거짓으로 달콤한 부자관계, 부녀관계에 대해 말하던 걸 떠올린다. 아버지와 말 한 마디도 안 섞고 사는 친구 김모씨를 떠올린다.

지안(이한)이 처음 한 사랑이라는 수희에게 인생 9단인 영숙이 내지른다.    "첫사랑은 처음이란 뜻밖에 없는 건데, 텔레비전 보면 온통 첫사랑 땜에 목매다는 거 비현실적이라 싫었거든. 두 번 세 번 사랑한 사람을 헤퍼보이게 하잖아. 성숙해질 뿐인데."

남자친구 지안을 두고 정작 민호가 좋아진 바람에 당황한 미리에게 수희가 말한다. "사랑은 그 어떤 걸로도 설명 불능. 주둥이로 설명되는 건 절대, 사랑 아님. 굳이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냥 좋다."

짝사랑하던 수희와 서로 사랑하게 됐는데도 불안한 민호가 속삭인다. 사랑하는 수희의 웃는 모습을 옆에 두고 속삭인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지 못할 때는 사랑하고 싶어, 사랑을 할 때는 그 사랑이 깨질까봐 늘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우리는 어리석게 외롭다."

조모씨는 화들짝 놀란다. 조모씨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민호가 말한다. "나도 나이 들고 싶다. 나이 들면 누나처럼 그렇게 명쾌해지나?" 늘상 화끈한 말발을 자랑하는 영숙이 말한다. 너무나 시원시원해, 남편에게 저렇게 차인 게 믿기지 않는 영숙이 말한다. 겉으론 센 척해도 남보다 곱절로 상처투성이인 영숙이 말한다.    "지금, 이 순간, 이 인생이 두 번 다시 안 온다는 걸 알게 되지."

이 드라마, 정말 이상하다. 돈만 알고 심장은 없는 줄 알았던 아버지도 사람이다. 사람으로 읊조린다.

"억울하고, 나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너나 나나 사람 사는 모습이 다 궁색하고, 처량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여기 꽃이 언제나 필려나…. 아래 지방은 벌써 폈다던데…."

, 넌 왜 이리 짠하게 사람 가슴을 후벼 파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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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냥이 좋아하는, 노희경 작가의 수목드라마 "굿바이솔로"

사실 TV없고 안봐서 본적은 없지만, 리뷰(?) 등등의 대사가 너무 와닿아서 ;ㅁ;

이제 드라마야-,

신데렐라 놀이 파랑새잡기 놀이 그만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