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푸른 숲, 그 깊은 곳의 응달을 포착하다... <캐러멜 팝콘>

백혁현200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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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푸른 숲, 그 깊은 곳의 응달을 포착하다... <캐러멜 팝콘>

 

  어지간해서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요시다 슈이치의 2006년 소설이다. 카메라를 들고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고, 그렇게 도시에 사는 일본인들의 일상 생활에 포커스를 맞추는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도 여지없이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다.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넌지시 건네는 작가가 이번에는 우리들의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뒤안에 살짝 감추어진 그림자를 이야기한다.

 

  소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치면서 네 명의 인물이 겪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한때 여중생 불량 클럽의 맴버였으며 야쿠자에 가까운 두 오빠와 양아치스러운 부모가 있지만 현재 꽤 유명한 패션 회사의 홍보부에 근무하는 (그래서 도무지 과거와 연결이 되지 않는 듯한) 신도 레이, 현재 신도 레이와 사귀고 있으며 굉장히 번잡스러운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그래서 아슴프레 존재하는 듯하던 과거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는) 오지 나오즈미, 유능한 편집자로 야근과 출장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시부모와 한 집에서 살기를 고집하는 며느리이면서도 옛 연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러브호텔을 들락거리기도 하는 (그러니까 과거와의 결연한 단절에 매번 실패하고마는) 오지 게이코, 나오즈미의 형이면서 게이코의 남편이고 은행원이면서 주말마다 연극 연습을 해 일년에 한 편 정도 공연을 하는가하면 동성애적인 감정을 숨긴 채 다나베라는 친구와 아슬아슬한 우정을 지속시키고 있는 (그렇게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로 연결되는) 오지 고이치가 네 명의 주인공이다. 여기에 나오즈미와 고이치의 부모와 신도 레이의 가족, 게이코의 옛 연인, 나오즈미의 과거를 알고 있는 남자가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진행을 돕는다.

 

  자기 자신의 생활에 매우 만족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별탈이 있는 것도 아닌 이들 네 명이지만 좀더 가까운 거리에서 들여다보면 뚜렷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베일이 쳐져 있는 것만 같다.

 

  “우리 집만의 독특한 냄새가 났다. 어떤 냄새라고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젖먹이가 자라 흙투성이가 되어 뛰노는 소년 소녀로 성장하고, 그 후 색기를 풍기며 향수 따위를 몸에 뿌리게 된, 그런 사람의 냄새가 모두 축적되어 있는 듯한…….”

 

  신도 레이가 자신의 집과 가족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현재 사귀고 있는 오지 나오즈미의 가족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재의 생활이 싫지는 않지만 그녀의 과거는 지금과 너무 다르다. 오지 나오즈미는 사실 고이치와 배다른 형제이다. 그는 열 다섯 살 생일날 자신의 엄마가 실은 이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보다 더욱 복잡한 과거를 알게 된다.

 

  “도노라는 남자는 만나면 만날수록 싫어지는 사람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싫어져야 나는 이 남자와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까. 만나고 싶어도 필사적으로 참아내는 것과 만나고 싶지 않을 때까지 상대를 계속 만나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이 남편과 가족을 더 배신하는 일일까.”

 

  그런가 하면 오지 게이코는 옛 연인과의 만남을 계속하고 있다. 야근과 출장이 자유로운 그녀는 그걸 핑계로 도노라는 옛 연인을 만난다. 모든 것에 실패하고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려는 이 남자를 쉽사리 떼내지 못하고 있다. 불륜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열정도 의미도 없는 만남인데도 그녀는 그것을 그만두지 못한다.

 

  “그날 밤의 어색함을 잘 넘긴 덕분에 다나베와의 사이는 이상하리만치 훨씬 더 깊어지고 말았다. 말로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예전에는 애정을 우정으로 감춘 관계였다고 한다면, 그날 밤 이후로는 우정을 과거의 애정으로 지탱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예를 들자면 예전에 사귀던 연인들이 헤어진 후 결과적으로 좋은 친구 사이가 되어버린 듯한……, 어쨌거나 그런 묘한 친밀감이 생겨난 것이다.”

 

  게이코의 남편인 오지 고이치 또한 친한 친구인 다나베와 묘한 관계를 유지한다. 아내와 이혼을 하고 이제는 아예 한 집에서 살고 있는 친구 다나베와의 동성애적인 감정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게 될지 (소설에 등장하지 않으니...) 알 수 없는 형편이다.

 

  가족으로서 또는 연인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네 명과 그 주변인물들은 커다란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닌데도 어딘지 위태로와 보인다. 소설의 초반부 '봄'이 주던 안정된 느낌은 '여름'과 '가을'을 거치면서 조금씩 흔들린다. 활짝 핀 봄에는 알아차리지 못하던 것들은 계절이 지나면서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뿌리째 흔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과거의 통증은 그렇게 조금씩 현재로 스며든다.

 

  그리고 ‘겨울’... 소설이 많은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처음처럼 그렇게 네 명의 인물들의 생활을 조용히 바라본다. 무심코 하는 행동, 무심코 내뱉는 말을 보여줄 따름이지만 그것이 의외로 섬세하다. 길지 않은 문장들, 툭툭 끊어지는 대사들, 계속해서 변경되는 (네 명의 주인공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시점들, 별다른 묘사없이 흘러가는 계절들이 읽는 이의 감정을 흐트러뜨리기에 충분한데도 작가는 오히려 이러한 요소들을 역으로 이용한다. 편집이 잘된 영화를 볼 때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쾌감을 요시다 슈이치는 소설을 통해 제공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