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스타니슬라프 스크로바체프스키

조명근200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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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스타니슬라프 스크로바체프스키

 

 

<EMBED src="http://mediafile.paran.com/MEDIA_614862/BLOG/200612/1166950888_Songe dune nuit du Sabbat Ronde du Sabbat.wma" width=300 height=45 type=audio/x-ms-wma> 5악장 '악마의 축제날 밤의 꿈' - 스타니슬라프 스크로바체프스키 / 자르브뤼켄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잠시 기다리시면 나옵니다)  

 

'호랑이 없는 골짝에 여우가 왕 노릇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산골에서 대장 노릇하던 호랑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다음가는 여우가 호랑이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비록 속담 자체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만, 그래도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 뻔한 골짜기에서 여우나마 권력을 잡고 통치를 하게 되니 다행일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 여우가 덩치도 크고 힘도 세며 영리하기까지 하다면 호랑이만큼은 아니어도 꽤 괜찮은 왕이 될 수는 있을 겁니다.

 

골짜기를 통치하던 이전 세대의 호랑이들이 다들 늙어 죽은 상황에서, 스타니슬라프 스크로바체프스키는 -너무 늙긴 했지만- 그 골짜기를 그런대로 잘 다스릴 수 있는 똑똑한 여우라고 할 만 합니다. 올해로 83세인 이 할아버지의 경력은, 그 이름이 생소한 만큼이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잘 알려질 만큼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상임 지휘자로 있었던 오케스트라는 크라코프 필하모닉, 미니애폴리스 심포니, 미네소타 성 파울 체임버 오케스트라 정도인데, 하나같이 유명한 악단들은 아니지요. 그렇다고 유명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객원 지휘였습니다. 이쯤 되면 스크로바체프스키가 호랑이가 되기엔 부족하다는 감이 오지 않습니까?

 

[R]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스타니슬라프 스크로바체프스키하지만 거장-개나 소나 다 듣는 '젊은 거장'이나 '준비된 거장' 이런 건 제외하고 말이지요-이라 불릴만한 지휘자들이 다 저 세상으로 떠난 마당에, 그래서 '거장의 부재 시대'라 불리며, 은둔해서 살던 재야의 고수들이 메이저 무대로 화려하게 부상하고, 심지어는 관 속에 들어가 휴식을 맞은지 오래인 지휘자들의 레코딩마저 부활되어야 할 정도인 이 시대에, 스크로바체프스키 정도면 실력 면에서나 무게감 면에서나 월척은 아니어도 준척급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교활한 게 아니라- 영리한 늙은 여우는 꽤 멋지게 자신의 만년을 불태우고 있지요.

 

80이 넘은 스크로바체프스키가 갑작스럽게 우리의 이목을 끌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프로듀서 출신인 웸스 클래식의 사장, 디터 웸스입니다. BMG 산하의 아르테 노바 레이블을 이끌던 시절부터 스크로바체프스키에게 묵직한 레코딩을 선사하던 웸스는 자신의 레이블-욈스 클래식은 맑고 청명한 음질로 유명합니다-을 따로 차려 나간 이후에도 그와 함께 작업하며 그를 준척의 반열에 올려놓았지요. 그리고 그런 그의 레코딩이 일본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아마 구심점을 꼭 필요로 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지난 여름께부터 많은 양의 앨범이 수입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웸스의 그 많은 앨범들 중 상당수를 녹음한 스크로바체프스키 최대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여든이 넘은 노인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생동감과 생명력입니다. 대개 어떤 분야에서든 나이를 먹을 수록 기술이나 사상이 더 완숙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이 일반적인데-그래서 어르신들은 말씀도 직설적으로 하지 않는 편이지요-, 스크로바체프스키는 그와는 반대로, 마치 정열이 넘치는 30대 지휘자마냥 빠르고 힘찬 연주를 들려줍니다. 관악군과 타악군은 꽤 두터운 편이고, 현악군은 민활하기 짝이 없지요. 그야말로 노익장이 따로 없습니다.

 

[R]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스타니슬라프 스크로바체프스키표제음악의 시초격인 동시에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은 연주하기에나 듣기에나 녹록치 않은 곡입니다. 우선 작곡가가 제목을 정해놓았고, 그 제목을 염두에 두고 마치 소설처럼 진행되는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표제음악은 우리의 음악적 상상력에 가죽으로 된 틀을 씌워놓은 꼴이지요. 결국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작곡가가 정해놓은 제목과 스토리를 잘 파악하지 않고서는 음악을 이해할 수 없고, 듣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제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가운 분야가 아니지요-. 그래서 표제 음악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표제 음악은 쉽습니다. 작곡가가 이미 틀을 입혀놓았으니까요. 우리는 작곡가가 만들어 놓은 제목과 스토리를 따라가면 됩니다. 핵심만 파악한다면, 오히려 무슨 얘기인지 모를 때가 많은 비표제 음악들보다 쉬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해가며 들을 수도 있지요. 가죽으로 만든 틀은 뚫고 나갈 수는 없지만, 대신 그 안에서는 마음껏 뛰어놀 수 있거든요. 가죽을 때려서 마음대로 모양을 내볼 수도 있고 말이지요.

 

스크로바체프스키의 지휘는 아마도 그러한 표제음악의 특성을 최대한으로 잘 살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연주는 대역폭이 상당히 큰데, 아주아주 고요하고 고즈넉한 선율을 만들어내다가도 갑작스럽게 엄청난 화력을 내뿜어 대거든요. 오케스트레이션은 대단히 섬세하고 명철한 편이고, 웸스 레이블 특유의 선명한 음질감이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해줍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강렬하고 빠른 부분에서는 굉장히 호쾌한 진행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주 시원스런 느낌도 드는군요. 이러한 완급 조절은 듣는 이에게 음악의 장면과 색채를 명확하게 전달해주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감상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지만 이 음반에도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완급 조절 자체는 좋지만, 강약의 변환부분에서는 가끔씩 조절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변화가 급하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원래 스크로바체프스키의 지휘 스타일 자체가 좀 휘몰아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서서히 변화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변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오케스트라를 통제하는 데 애를 먹는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4악장에서는 긴장감이 많이 풀어져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꽉 조여져있지 못하고 약간 느슨합니다.

 

그렇지만 스크로바체프스키의 앨범은 제게 꽤 놀라운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우선 아름다운 오케스트레이션과, 꽤 웅혼한 사운드,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대단한 다이내믹은 '이런 사람이 다 있었다니'하는 감탄을 절로 내뱉게 합니다. 그래서 거장들이 모두 우리 곁에 없는 지금, 스크로바체프스키는 전설적인 감동을 안겨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오늘의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지휘자가 아닐까 합니다. 영감님, 오래오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