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미국에도 찾아 오고 빈둥거리는 내 삶에

신민경200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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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가 미국에도 찾아 오고 빈둥거리는

내 삶에 전환점을 주던 나의 그 많던 성탄절이

촛불 처럼 흔들 거리네.

꺼질듯 말듯 바람과 같은 사연에 희망의 한 단어였던,

겨울이 늘 함께 하던 기가막힌 사랑의 향기..

 

고드름이 처마를 따라 자고 나면 조금씩 늘어나 있던

우리집 문앞에는 언제나 커다란 명판이 내 걸려 있었고

그 향나무 냄새를 지나 마당을 따라 들어 오다 보면,

사천왕들이 무시 무시 하게 지켜 보고는 했던

도심 속의 무속인의 집이었으나,

난 5살 때 부터 성당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해

친구가 유치원에 가면 따라가서 뒷터에 있는 마리아 상을

보고 말을 걸고 앉아 있고,

팬티 속에 있는 부적을 보여 주기도 했었어.

 

시설이 좋은 수영장에는 누구나 놀러 와도 좋다는,

한 여름에 검은색이던가 아니면 회색이던가를 입고

물가에 지켜서 있던 수녀님들.

내 킹더가니 시절은 고만 고만한 평범한 문학의 밤

같은 것들에 눈을 떼지 못하는 아주 작고 순진한

꼬마 동무 였다.

자전거를 배울 무렵에 안전한 공터는 동네에 유일하게

성당안이 제일이었고 나무와 꽃이 계절 내내 있었던

그 뾰족한 내 마음의 성당에 겨울이 찾아 오면

실핏줄 같은 등이 반짝이는 데코레션에 유난히

현수막이 많이 내걸려

그 이쁜  모자이크가 잘 보이지도 않았었지.

 

사탕과 이것 저것에 밤 늦게 놀다 보면 크리스마스는

훌쩍 지나가고 집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는

그다지 화를 내거나 그러시지 않으셨고,

오히려 책을 많이 읽으라 하셨어.

그렇게 시작된 동화책 보다 더 재미있던 성경 공부,

불경 공부, 그리고 선택 되지 않았던 복음서들..

 

자라나는 동안에 내 안의 마리아는 내내 사막의 여인이

아니었고 어머니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아

7살 때 집을 나선 그 분을 대신 했었나 보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문을 열어 놓고 때로는 호통을

치시던 수녀님의 모습에서 난 종교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나 보고,

그저 아름다운 인생의 한자락을 시작 하도록 도와 주는

학교에서 배우는 '착한 사람들' 이었다고나 할까..

 

하늘이 무너져 내리던 날을 원망해 본적은 없지만

살면서 착하게 살지 않는 밑바닥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성경책은 읽는 것이 아니 구나..'

누군가 몸소 보여 주는 그것이야 말로 진실로 다가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왜 유독 한국인 만이 이율배반적인 예수쟁이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사회구제가 먼저 일까,

믿음이 먼저 일까.

 

30% 정도 믿음이 생긴 자는 남에 말을 안 들어.

70% 정도 믿음이 자란 사람은 그렇게 인자할 수가 없어.

그러다 욕심이 생겨

인생 자체가 믿음이 되면 마치 순교자 처럼

발악을 한다.

 

미국에 살아 보니 지식인들이 많이 사는 사회일수록

종교도 성숙해 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고,

우상 숭배니

교세 확장이니

부흥 대회니

예수 영접이니

해외 선교니 하는 것들에 메달리지 않더라.

 

약 100여년 전에 사라진 마녀재판..

 

무식했던 역사를 그 때에는 진실로 여기며 신의

뜻이라 외쳤지만 사실은

민간인 학살일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남을 위해 기도 하는 시간이 많아 질 수록

남을 도와 줄 수 있는 봉사의 시간이

그 만큼 짧아 지던 예전의 개척 교회 시절에는

누가 찾아 와도 사랑을 내어 주었어.

 

절에 갔는지 교회에 갔는지 모를 정도로

사람을 편하게 받아 주던 어린 시절의 성당의

기억에 극성 스런 교단이 내 마음에 상처를

주기만 했을까,

아니다.

 

난 아직도 해가 지지 않은 그 뒷 마당의

마리아와 함께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자장가를 불러 주던 어머니를 해달라며

감히 무릅을 베고 있을 지도 모르겠네.

 

다들 떠난 이 세상에 그리운 만남을 상상하며

이슬이 내리기만을 기다리던,

내 10 대..

 

난 사랑을 잃어버렸어..

 

언덕위에 널려 있던 그 많던 그 분들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