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스 타노비치 <랑페르 L"Enfer>

강정석200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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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스 타노비치 <랑페르 L"Enfer>


 

 

 랑페르. 언뜻 보기에는 세련된 불어 제목처럼 보이지만, 원래의 뜻은 ‘지옥’이다. 굉장히 강렬한 제목인 셈이다. 도대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길래 영화의 제목이 ‘지옥’일까. 감독은 다니스 타노비치, 보스니아 출신의 감독으로 2001년 를 연출하고 깐느 영화제 각본상을 움켜쥔 사람이다. 특히 그 전에 다큐멘터리를 주로 다룬 감독이니만큼, 내전으로 인한 생생한 지옥도를 충분히 경험한 사람이 분명 할 텐데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를 프랑스 파리로 끌어와서 풀어놓는 생경함을 보여준다. 지옥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는 뜻일까.

 

 원래 이 영화는 폴란드의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화 되지 않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마치 스필버그가 큐브릭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만든 예에서 보듯이, 이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키에슬롭스키의 짙은 그림자를 지워야 한다. 물론 치밀한 구성의 시나리오에서 의 영화적 완성도가 시작한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지만, 키에슬롭스키가 시나리오를 쓸 때의 목적과 타노비치 감독의 연출의 목적은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키에슬롭스키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타노비치는 그것에 한참 못 미치네’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시나리오의 연관성에서 어느 정도 키에슬롭스키를 떠올리는 것은 좋지만, 그것 때문에 타노비치의 연출력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타노비치의 영화 는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구조를 취하고 있다. 첫 시작은 빠른 카메라워킹과 함께 걷는 여자아이의 다리 클로즈업으로 시작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체의 소년과 그를 만지고 있는 남자와 마주치고 빠른 줌 인으로 그 상황 속 인물들의 표정들에 집중한다. 그 다음으로, 매우 인상적인 오프닝 타이틀이 등장한다. 뻐꾸기가 알에서 태어난 과정과, 갓 태어난 뻐꾸기 새끼가 다른 알을 밀어내다가 자신이 실수해서 둥지에서 떨어져버리는 상황을 불안정한 복사 효과와 역시 불안한 음악으로 점철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새끼 뻐꾸기의 몸 동작이 인간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없애야만 하는 강박관념과 그 속에 빠진 자승자박. 과연 지옥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숨막히는 불안함이 엄습한다. 그리고 이 오프닝의 끝과 물려있는 본격적인 영화의 시작은 교도소에서 나온 한 남자가 떨어진 새끼 뻐꾸기를 다시 둥지에 넣어주는 장면에서부터다. 이 묘한 아이러니, 생명을 구해준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딜레마적 상황. 이제 관객은 앞의 여자아이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점과 뻐꾸기 에피소드에 대한 궁금증을 머릿속에 기억하게 된다. 과연, 누가 뻐꾸기의 운명에 처하고 누가 뻐꾸기를 구해준 남자의 운명에 처할 것인가 (나체의 소년을 만지는 남자가 나중에 교도소에서 나오는 남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눈치가 빠른 관객이라면 알아챌 수 있겠지만,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욱 낫다. 그 부분이 일종의 반전처럼 나중에 밝혀지기 때문이다) . 이는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이러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처럼 봐 달라는 주문과도 같지 않을까?

 

 일단 영화는 앞의 에피소드와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분위기로 시작한다. 전체적인 큰 줄기는 세 자매들이 각각 겪는 아픔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노비치의 뛰어난 연출감각이 돋보이는 것은 각기 다른 세 자매의 연결성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모습, 다른 공간, 다른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다. 여러 가지 연출적 장치들 –문을 닫는 동작 같은 것-과 편집으로 부드럽게 이어 붙인 기술적 능력도 뛰어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감정선까지 거의 비슷한 상황으로 이어간다는 것이다. 세 인물의 각각 복잡한 이야기 구성을 거의 비슷한 감정으로 이어 붙이는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순간이다.

 

 오프닝과 세 자매의 연관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세 자매가 경험하는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관찰이 필요하다. 우선 큰언니 소피부터 살펴보면, 소피는 잘 나가는 사진작가를 남편으로 두고 아들 딸 두 자식이 있는 아름다운 여자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영화 속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거의 편집증적인 남편에 대한 의심과 애증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바람난 남편에 대한 배신과 사랑이 섞인 감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는 직접 남편을 미행하여 호텔방에서 다른 여자를 발견한 순간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 증오스러운 표정과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는 감정. 이렇게 복잡한 감정은 그 여자의 몸에 자신의 얼굴을 기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장면의 당연한 다음의 ‘영화적’ 결과는 살인이겠지만, 소피는 그러한 결말을 택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소피의 에피소드는 후반부에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대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앤이 말하는 메데이아 신화에서 보여지듯, 남편에 대한 (하지만 오해였다!) 증오 때문에 아이를 죽이고 마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그들 세 자매의 어머니를 노골적으로 연상케 한다. 그리고 소피는 자신의 어머니를 따라 그대로 실현하려는 듯 한 인물로 보여지기 때문에 관객은 항상 소피에게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후반부의 소피가 아이들과 그네를 타고 있을 때 비가 내리는 순간과 앤이 오디션에서 설명하는 메데이아 신화의 보이스 나레이션이 겹쳐지는 것은 단순한 효과가 아니다. 이렇듯 항상 소피에게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소피는 궁극적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아니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남편을 오해했지만 소피는 오해가 아닌 직접적인 증거물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피와 어머니 사이에서는 분명한 연관성이 있지만 결코 반복되지는 않는다. 불안감 조성은 일종의 맥거핀이며, 결국 소피는 남편을 떠나도, 남편이 정성들여 키우던 화초의 잎사귀를 전부 잡아 뜯어도 아이들을 버리지(살해하지) 않는다(못한다).

 

 그 다음으로, 막내인 앤을 살펴보자. 앤은 비극적이게도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와 사랑에 빠졌다. 심지어 임신까지 해버린다. 대학 교수인 애인이자 친구 아버지 프레데릭은 그녀를 떠나고, 앤은 너무나도 괴로워한다. 결국 앤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프레데릭을 ‘자살’로 몰고 간다. 과연 프레데릭이 자살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모호할 수 있지만,. 프레데릭의 집에서 벌어지는 굉장히 아이러니한 상황과 그녀의 편지와 임신 테스트 기구가 프레데릭에게 전해진 상황, 이 두 장면의 중첩은 프레데릭의 자살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앤은 그 사건이 있은 후 청순해보이는 여성적 이미지를 탈피하고 머리를 싹둑 자른 중성적인 이미지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묘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지만, 일단 앤은 소피와 마찬가지로 아픔을 어느 정도 해결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셀린을 살펴보자. 셀린은 세 자매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셀린은 세 자매중 유일하게 어머니를 모시면서 살고 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잘생긴 젊은이 세바스티안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 착각하고 집으로 초대했다가 예전에 숨겨졌던 비밀을 알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영화 첫 시작의, 여자아이와 나체의 소년, 그리고 소년을 만지던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눈치빠른 관객은 이미 알았겠지만!). 남자는 바로 그녀들의 아버지였고, 소녀와 함께 있는 여자는 그녀들의 어머니였다. 소녀는 셀린 자신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성추행으로 신고했고, 아버지가 출소한 날에 벌어진 끔찍한 싸움으로 인해 어머니는 말을 잃고 아버지는 자살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세바스티안이 아버지를 유혹해서 생긴 일이며, 아버지는 그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결국 어머니는 착각으로 인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일종의 반전으로 작용하는 이 고백은 결국 세 자매의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관객들은 셀린을 통해 비로소 세 자매의 어린 시절 끔찍한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되고, 그 동안 기억해두었던 소피와 앤의 경험과 빠르게 비교하게 된다.

 

 하지만 관객들이 아는 과거 역시 제한적일 뿐이다. 심지어 세 자매가 알고 있는 과거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전부터 어머니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국 고백 역시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소피과 앤, 그리고 셀린의 경험이 합쳐진다면 어머니의 감정에 대한 지도가 희미하게나마 그려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어머니는 소피가 그의 남편을 증오한 것과 비슷한 이유로 증오한 것 일수도 있다. 그리고 앤이 프레데릭을 자살로 몰고 간 것과 비슷하게 남편을 자살로 몰아갔고, 셀린이 세바스티안을 맨 처음 봤을 때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했듯 어머니도 남편을 성추행범으로 착각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가정’이며 관객들 나름대로 틀릴 수 있는 자의적 ‘해석’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을 보면 이러한 가정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이제 사실을 알게 된 세 자매는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들은 어머니의 착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어머니의 대답이 걸작이다.

 

‘난 후회 안 해’

 

 후회 안 한다는 강한 선언은 그 전부터 남편, 즉 세 자매의 아버지를 증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언이다. 이 순간, 세 자매와 어머니가 앉은 테이블이 오프닝의 뻐꾸기 둥지와 비슷한 불안정한 복사 효과로 변한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되지 않는 효과는 결국 이들의 경험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표현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젠 누가 뻐꾸기 신세고 누가 떨어진 뻐꾸기를 다시 둥지 위로 올려주는 사람이 되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있다. 뻐꾸기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알들을 둥지에서 밀어내는 처절한 몸짓 자체가 의 주인공들의 처절함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뻐꾸기 역할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고(소피가 남편을 밀어낼 때, 혹은 프레데릭이 앤을 밀어낼 때), 또한 떨어지는 알 신세가 되어 좌절하기도 한다(소피가 남편의 내연녀를 발견했을 때, 앤이 프레데릭의 죽음을 알았을 때). 또한 서로가 구원을 바라기도 한다(마지막에 모여서 어머니를 찾아갈 때). 결국 뻐꾸기 둥지 안에서 벌어진 사생결단의 싸움은 우리의 현실과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모습이 지옥도이며, 타노비치 감독이 직접 경험했던 보스니아의 내전을 담지 않아도 충분히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