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기, 포도 그리고...

정문예2007.01.01
조회13
영화, 모기, 포도 그리고...

“정말 정말 보구 싶었던 영화가 있었어.

근데 시간이 너무 없어서 계속 볼 기회를 놓친 거야 .

예고편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손꼽아 기다린 영환데 말이야.

끝없는 기다림에 초조하고 화가 나고 슬프기도 하고...

나중에 보면 되겠지 하고 스스로 위안해 보기도 했었어.


그런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본 것 같고 행복한 거

같고 재밌어하고 즐거워하는 걸 보니까.

거기다 듣고 싶지 않은 반전 스토리까지 우연치 않게

한 두 번 들어버리고 나니까

화도 나고 허탈하고

지금까지 기다린 건 뭔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DVD 대여점에 가게 되면 그 영화 제목이랑 비슷한 것

만 봐도 피하게 되더라.

 

그런 식으로 보게 된다면

왠지 오랜 기다림에 설레였던 처음 그 느낌마저 완전히 없던

걸로 될거 같아서 두려웠거든..."


지나버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여전히 내고 있는

캐롤송이 흐르는 실내에서 솜으로 만든 눈과 반짝 거리는

플랜카드로 장식한 길고 짧은 머그 잔을 나란히 전시해 놓은

선반을 쳐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내 방에 모기가 있더라. 믿기지 않지?

12월이 가고 1월이 오는데 말이야... 한 여름도 아니고 모기가

있다니 말이 되니?

근데 그 모기는

그렇게 재빠르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내면서 짜증을 돋구는

모기가 아니더라.

마치 자기를 도와 달라고  내 눈앞에 서있는 거 같았어.

존재하지 않아야 할 시간에 존재하는 자신을

잊혀지게 할 수 있도록.

비틀거리면서 간신이 벽에 붙어있는 듯 했어.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니까 언제 먹었는지도 모르는

검 붉은색 피가 고름같이 꾸역꾸역 나오더라.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벽에 묻은 피를 깨끗이 없애려고

몇 번이나 닦아냈는지 몰라.

무척 성가신 일이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죽여야만 했거든.

 

나는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차갑게 식은 찻잔을 두 손으로 비벼대며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아 본다.

크림 맛이 난다.

 

“내가 포도 정말 좋아하고 있는 거 알지?

너무 좋아한 나머지 하루는 내가 먹을 양보다 훨씬 많이 가

져 간 거야.

그래서 나중에 먹으려고 생각하고 냉장고에 넣어뒀는데

한참 뒤에 생각나서 열어보니 조금 곰팡이가 피었더라,

민들레 씨처럼 새하얗고 보들보들해 보여서 왠지 먹으면

솜사탕처럼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아 곰팡이로 눈치 채기까진

꽤 시간이 걸렸어.

큰맘 먹고 비싸게 산거라 그 부분만 도려내고 먹어 볼까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다는 게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신선한 거였구나 하구 생각하니까 좀 위로가 되더라.

요즘엔 농약을 너무 많이 뿌려서 과일을 냉장고에 한 달을 넣

어놔도 썩지도 시들지도 않는다고 하잖아.


첨에는 몰랐지만,

그냥 겉모습만 보고 우연히 선택한 거였지만,

 

깨끗한 거였구나.

위선이 아니였구나.

거짓이 아니였구나.

 

하면서 안도했어.

 

물론 쓰레기통에 몽땅 버려버렸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제 예전의 모습이 없는걸...

그래도 고마웠어.

진실이 였으니까.

 

내가 선택했던 것이”


따뜻하고 향기로운 거품 우유와 커피 향기가 뒤섞여 만들어 낸

포근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밝고 선명한

조명이 그의 굳은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준다.

 

시끄럽지만 스타카토처럼 경쾌하게 끊어지는 옆 테이블의

여자들 웃음소리에 용기를 내어 천천히 입을 연다.

 

“나에게 

 

넌...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린 영화와 모기와 포도로

느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