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 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2. 중국의 '중국 고금 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 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 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 있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 되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 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많이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 있어야한다.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 있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되어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 밖에 없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직전에 여진족이 부족국가 형태일때의 추장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여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의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라는 고문헌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슬프다!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 죽어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한국사 미스테리](1)안압지 출토 목제男根 기본 문헌의 부족은 한국사, 특히 우리 고대사를 숱한 논쟁거리로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일제 식민사학의 뿌리마저 워낙 깊고 재야사학의 이설(異說)까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등 올바른 한국사의 기틀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향신문은 지난 30년간 무령왕릉을 비롯, 천마총·황남대총·안압지·경주 월성해자·감은사지 등 현장발굴을 주도한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본 한국사 미스터리’를 장기 시리즈로 기획했습니다. 월 3회씩 펼쳐지는 조유전 선생의 역사기행은 풍부한 현장경험을 토대로 수천년간 잠들어있던 한곳 한곳의 유적, 한점 한점의 유물을 단서로 펼칠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편집자주〉
1974년 11월 경북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바닥 준설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후반 문무왕 때에 만들어진 연못. 그런데 물이 맑지 않고 날로 주변의 논밭에서 흘러 들어가는 흙이 바닥에 쌓이고 있어 바닥을 긁어내는 준설작업이 필요했다.
이 준설작업은 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에서 직접 주관한 경주 고도 관광개발 10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실로 1,300여년 만에 못 바닥을 청소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작업을 시작하자 작업인부의 삽날에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작업은 즉시 중단되었다. 급히 조사계획이 마련되고 이듬해 3월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서둘게 되었던 것이다.
-1974년 연못 준설작업하던중 발견-
그런데 출토된 유물 가운데 발굴조사시 발굴단을 놀라게 한 목제의 양물 즉 남근 모조품이 있었다. 발굴조사가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남근은 그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설만 무성한 편이다.
남근 모조품이 출토될 당시 이 유물을 처음 수습한 여성조사원은 작업도중 뻘층에 묻혀있는 이 유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나무편에 글자를 써놓은 목간(木簡)이려니 하고 발굴조사 팀장에게 가져갔다. 팀장은 이를 받아보고 한눈에 목제의 발기된 남근 모조품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여성조사원이 수치스러워할까봐 아무말 하지 않고 현장으로 보내고 자신이 스스로 세척을 했다. 이로써 1,300여년간 안압지연못의 바닥 뻘층에 묻혀있던 남근 모조품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길이 17.5㎝의 이 발기된 형태의 남근 모조품을 본 여성조사원들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크기에서 뿐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기 곤란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신라의 역대 임금 가운데 음경이 가장 길었던 왕은 지증왕인데 한자 다섯치였다 하니 40㎝가 넘어 단연 챔피언이었고 다음으로 경덕왕인데 여덟치였다고 하니 20㎝가 넘어 랭킹 2위인 셈이다. 그런데 안압지에서 출토된 이 남근은 17㎝가 넘었으니 남근을 다듬을 때 자신 스스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인지 몰라도 신라시대 양물로서는 랭킹 3위인 셈이지만 실물 모습으로 남은 것은 단연 챔피언이다. 아무튼 이 양물이 처음 출토되고 이어서 형태는 똑같지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양물이 2점 더 출토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나고 어언 30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이 남근 모조품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조각된 모습을 보면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작품이나 다름없다. 누구 손에 만들어졌고 누구의 것이 모델이었는지, 또한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용도에 대해서만 몇몇 설만 무성한 편이다. 신앙으로서의 성기숭배 사상적인 견해와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기구용’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남근숭배·놀이기구說등 용도 분분-
남근신앙의 기원은 선사시대부터로 볼 수 있다. 이 때는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로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울산 반구대 바위에 새긴 암각화(岩刻畵) 가운데 커다란 남근을 노출시킨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뭔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수렵어로인(狩獵漁撈人)들의 의식(儀式)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남근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벌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한편 기록에 보이는 남근숭배 신앙의 예는 고구려에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이 남근을 신좌(神坐)위에 놓는다고 했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시는데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불교 도입전 신라 성문화 개방적-
그렇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 역시 신앙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이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이 있었던 곳이고 한편으로는 임해전(臨海殿)이 마련되어 임금이 정사를 논하고 신하들에게 향연을 베풀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은 일단 신분이 높은 여성이거나 그들에 속해있는 여성들 가운데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도는 무엇인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인들의 성생활문화는 대체적으로 개방되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적당히 빚어만든 토우(土偶) 가운데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정도이고 커보았자 10㎝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공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위가 높은 분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 신라시대 상류층의 성문화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 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했던 것이 처용설화에서 보이는 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성 개방의 결과라 생각된다.
이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용도에 대해 결론을 내려볼까 한다. 물론 가설에 지나지 않고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긴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 신라시대 유물에 나타난 성행위의 토우가 6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신라는 당시 삼국 가운데 고급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고구려나 백제보다 무려 2세기 늦은 6세기에 들어와 법흥왕이 국가종교로 공인하고 있는데 이후 아직까지 신라토기나 출토된 유물에 앞서의 성기나 성행위의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기로 봐서 ‘內室 자위용’ 유력-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토속적인 다신신앙이 성행했겠지만 일단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금욕 등 사회규범이 생활문화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성 모럴이 형성되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마련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은 분명 실용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6세기를 풍미했던 ‘미실의 애정행각’에서 볼 수 있듯, 고 신라시대에만 해도 비교적 개방되었던 성문화가 폐쇄적으로 변하자 엄밀하게 행해지거나 아니면 자위행위로 만족을 찾아야 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이유를 더하면 소나무를 가지고 다듬어 만든 남근 모조품에서 볼 수 있다. 즉 음경부분에 옹이를 이용해서 3개의 돌기가 마련된 것이다. 단순한 성기숭배신앙에서 본다면 돌기까지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자위로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왕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궁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어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다.
◇조유전씨 약력
▲1942년 경남 마산생 ▲66년 서울대 고고학과 졸업 ▲69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촉탁(임시직) ▲71년 무령왕릉 발굴 ▲77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 시절 안압지·황룡사지·감은사지·월성·황남대총·천마총 등 주요 발굴 조사 주도한 뒤 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유적조사연구실장을 지냄 ▲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취임, 2002년 정년퇴직 ▲현 문화재위원 3·6분과 위원 겸임
[한국사 미스테리]신라판 희대의 요부 ‘미실’ 신라왕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동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무려 8명을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을 좌지우지했던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미실이었다.
화랑세기는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있고 세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는 기록으로 미실(549~606)의 용모를 극찬했다.
대원신통(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전문여성집단)인 미실은 어머니 옥진으로부터 ‘남자를 죽이는’ 방사(房事)술을 배웠다. 미실의 첫번째 남자는 6세 풍월주인 세종이었다. 어찌나 천부적인 방사술로 세종을 혼내놨는지 화랑세기는 ‘세종이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왕실 여인들의 세력다툼에 밀린 미실은 궁에서 쫓겨나고 만다. 곧 사다함(5세 풍월주)을 만난다. 둘은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사다함이 대가야 정벌전에 출전한 사이, 그를 왕실에서 쫓아냈던 지소태후가 다시 입궁을 명한다. 원 남편인 세종이 그만 상사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떠난 것을 알고는 상심한 나머지 그만 상사병으로 죽고 만다.
미실은 이때부터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아들인 동륜태자를 꾀어 아이를 임신했으며 진흥왕마저 사랑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동생인 미생랑(10세 풍월주)과 설화랑(7세 풍월주)마저 성의 노예로 만들었다. 미실이 설화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보종은 16세 풍월주였다.
미실은 개에게 물려 죽은 동륜태자의 뒤를 이어 태자가 된 금륜(훗날 진지왕·재위 576~578)과 정을 통했으며 진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진평왕(재위 578~632)에게도 이른바 신국의 도, 즉 성교육을 시켰다.
‘신라 여인천하의 상징’인 미실은 수기 700편을 남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으며 전장으로 떠나는 애인 사다함을 위한 향가 ‘출정가’를 짓기도 했다.
[한국사 미스테리](1)안압지 출토 목제男根 한국사 미스테리 | 한국사 미스테리 기본 문헌의 부족은 한국사, 특히 우리 고대사를 숱한 논쟁거리로...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등 올바른 한국사의 기틀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구소장)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본 한국사 미스터리’를 장기 시리즈로 기획했습니다....
요즈음 TV드라마 주몽을 보면 부여국은 한나라와의 소금교역문제로 심각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보게 되며, 부여는 바다가 없어서 소금을 조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부여국의 영역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지도상의 부여국은 분명히 바다를 접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소금을 생산하지 못할 리가 없다. 따라서 아래의 한국사 미스테리를 보게 되면 여러가지 의구심이 들게 되는 것 처럼, 부여국 은 중국대륙의 중간에 위치한 나라여야만이 바다와 단절 될 수 있다. 그리고 고산국이라는 나라는 아마 지금의 티벳지역이 아닐까 싶다. TV에서도 소개 되었듯이 바닥 없는 티벳지역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있는것을 보지 않았는가? 고산국의 소금을 부여로 가져오려면 대륙을 횡단하여 가져 올 수 없는 일이다. 다시한번 숨겨지고 은페된 한국사의 미스테리를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의 해방 이후 근대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하고 왔으며 일제와 깊이 개입되어 있었으므로 숨겨진 역사를 들추어 내기가 어렵지 않나? 싶다.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가 사실인지 여부를 떠나서 한반도 역사의 상당부분이 숨겨지고 은폐된것은 사실이다. 한민족은 지구상에 그 유례를 찿아보기 어려운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 그리고 뛰어난 민족 임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안 일제는 이를 은폐하는데 혼신을 다 했을 것이다.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
한국사미스테리 한국사 미스테리! 한국사의 미스테리 60가지
한국사미스테리
한국사 미스테리 정말 미스테리네요..
몇개는 아는것도 있지만
정말 미스테리 해요 이조시대를 비교해서 개화한 글이라는데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끝까지 읽어보시길...)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 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2. 중국의 '중국 고금 지명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 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 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 있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 되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 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많이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있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16.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연구에 의해 삼국사기의 천체관측기록이 한반도가 아닌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이 증명되었다.
17.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반만년이 아닌 일만년이라고 주장하는 고문헌이다. 현재 학계에서 무시당하고 있지만 박창범 교수에 의해 한단고기의 천체관측기록이 정확하다고 밝혀졌다.
18. 백제의 인구가 고려나 조선초의 인구보다 많다.
19. 고구려 수도를 묘사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평양으로는 턱없이 작다. 현 중국대륙의 장안(시안)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20. 당 13만 군에 의해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에도 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200여개의 성을 기반으로 당에게 저항해 당은 40만군을 증원한다. 만약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성으로 뒤덮여 있어야한다.
21. 조선 초 인구가 37만명인데 1000년전의 국가인 백제나 고구려의 군인만 100만이었다.
22. 현재의 요동 요서 개념과 과거의 요동 요서 개념은 완전히 틀린다. 요동이 고구려 영토라 함은 현재의 요동반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 중국 대륙 내륙의 요동을 이야기한다.
23. 18~19c 외국인 선교사 또는 탐험가들이 작성한 지도에는 조선이 만주는 물론 중국대륙의 일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24.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과 산동성 즉묵시의 향토사학자들이나 향토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이 곳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25. 현 중국대륙의 강소성 숙천 근처에는 성터가 있는데 이 곳 주민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26. 현 중국 대륙의 베이징 근처에는 고려영진이라는 지명이 있다.
27. 고구려 고씨가 아직도 중국 대륙에 살고있다. 특히 장수왕 후손인 사람은 고구려 유리왕의 묘가 베이징 근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베이징 근처에 유리왕묘가 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 유리국의 왕의 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28. 중국대륙에 있는 수많은 성들이 현지인들에게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고려성, 또는 고구려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29. 백제의 의자왕, 흑치상지에 관련된 지명들이 중국대륙에만 존재한다.
30. 백제가 패망할 당시 지명이 한반도에는 없다. 그러나 중국대륙에는 모두 있다.
31.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중 김부식이 모른다고 한 지명이 359개나 된다. 이들 모두가 중국대륙에는 존재한다.
32. 한단고기외에 한민족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는 위서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규원사화 진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 되어있다.
33. 중국의 고문헌에 나와있는 발음법으로 정확하게 한자를 읽는 민족은 우리민족 밖에 없다.
34. 신라 수도에 있다는 토함산의 이름은 화산이라는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에도 토함산의 화산활동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현 경주의 토함산은 공교롭게도 화산이 아니다.
35. 한국 국사에서는 고조선이 망한 후 漢나라에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국의 문헌에서는 한사군을 설치하려다가 고구려 동명왕에게 참패해서 漢군의 수장들이 모두 육시(몸을 6등분하는 참형)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6. 청나라 황제들의 성씨인 애신각라 는 신라를 잊지않고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37.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 지료 라고 발음된다.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신라의 왕족은 금(金)씨이다. 청나라의 원래 이름은 금(金)나라 이다.
38. 임진왜란 때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조선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쥐 같은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다.
39.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 를 보면 금 태조는 고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40. 청나라 황실 역사서인 만주원류고에는 금 태조가 나라 이름을 신라의 왕의 성씨에서 따왔다고 기록되어있다.
41.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 건국직전에 여진족이 부족국가 형태일때의 추장이 신라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42. 현재 우리나라 부안 김씨의 족보에 금 태조의 이름이 나와있다.
43. 백제 온조왕 13년 (BC 6),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편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노하여 오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고 하였다. 지금 국사에서 배우는 상식으로는 백제 북쪽은 고구려로 막혀 있어야한다.
44.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 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북경일대를 말한다.
45. 중국의 역사서인 남제서에는 북위가 백제를 치려고 수십만의 기병을 파견했다가 패배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북위에서 백제를 치려면 바다를 건너야한다. 기병은 바다를 건널 수 없다.
46.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강역은 동서 너비가 2천여 리, 남북 길이 1천 5백여리, 신라, 백제를 병합하니 고려의 동북(東北)쪽이 넓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송사(宋史),.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들을 보더라도 역사서 원전에 의한 조선의 선조 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은 모두 동서(東西)가 넓고 남북이 짧은 지역을 통치 영역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송인이자 외국(外國)인 서긍이 직접 고려로 가서 보고 온 고려의 통치 영역의 지형구조가 동서(東西)가 넓은 구조였다고 했다. 현재의 한반도는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지형이다.
47. 몽고에서는 징기츠칸의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고구려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48.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명사, 선조실록, 난중일기, 이순신전서, 임진전란사, 은봉야사별록 등) 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명, 상황전개, 위치, 방위, 거리 및 전후사정이 한반도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49.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에 나오는 지명들은 중국에는 모두 존재한다.
50. 난중일기의 원문을 직접 번역한 현역 해군 중령 최두환씨(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는 난중일기 번역을 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명을 추적하여 임진왜란의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놓자 쉽게 풀려나갔다고 한다.
51. 임진왜란 당시 기록을 보면 왜가 침입해오자 조선의 왕은 서쪽으로 피신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상식적으로는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52. 어제신도비명 에 보면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눠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반도라면 당연히 북상 하는 것이 옳다.
53. 지도는 측량학, 수학, 천체학, 광학 등을 두루섭렵하고 있어야 제대로 만들 수있다. 한반도 전역을 3차례 둘러보고 정교한 대동여지도를 김정호가 만들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54. 김정호는 일제시대에 일제가 만든 교과서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여지도가 공개된 것 역시 일제시대이다.
55. 대동여지도에 씌여있는 글에는 분명 조선의 강역이 1만 9백리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글옆의 지도, 즉 한반도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56. 조선의 중심지는 낙양이라고 쓰고있다. 한반도에는 낙양이라는 지명은 단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낙양은 중국의 천년고도의 도시이다.
57. 세스페데스라는 포르투갈 신부가 16c 에 쓴 책에 의하면 꼬라이 또는 꼬리아라는 왕국은 일본에서 10일정도 걸리며 왕국의 끝은 티벳까지 달한다고 씌여있다. 또한 조선의 북쪽에 타타르가 있었는데 그것도 조선땅이다 라고 씌여있다. 타타르는 내몽고에서 활동하는 종족이다. 그리고 조선대륙의 강들은 수량이 풍부한데 강의 폭이 3레구아에 달한다고 씌여있다.
58. 루이스 프로이스 라는 신부가 쓴 조선의 강역에 대한 글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과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고 씌여있다.
59.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불태운 우리 역사서가 약 20만권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딱 두 권만 남겨두었다.
60. 한국의 국사의 기초와 체계는 모두 일제시대때 일본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 역시 일제시대에 일본에 의해 씌여진 '조선사' 라는 책과 내용이 거의 똑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의 일만년 역사를 주장하는 '규원사화'라는 고문헌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슬프다!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 죽어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한국사 미스테리](1)안압지 출토 목제男根
기본 문헌의 부족은 한국사, 특히 우리 고대사를 숱한 논쟁거리로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일제 식민사학의 뿌리마저 워낙 깊고 재야사학의 이설(異說)까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등 올바른 한국사의 기틀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향신문은 지난 30년간 무령왕릉을 비롯, 천마총·황남대총·안압지·경주 월성해자·감은사지 등 현장발굴을 주도한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본 한국사 미스터리’를 장기 시리즈로 기획했습니다. 월 3회씩 펼쳐지는 조유전 선생의 역사기행은 풍부한 현장경험을 토대로 수천년간 잠들어있던 한곳 한곳의 유적, 한점 한점의 유물을 단서로 펼칠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편집자주〉
1974년 11월 경북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바닥 준설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후반 문무왕 때에 만들어진 연못. 그런데 물이 맑지 않고 날로 주변의 논밭에서 흘러 들어가는 흙이 바닥에 쌓이고 있어 바닥을 긁어내는 준설작업이 필요했다.
이 준설작업은 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에서 직접 주관한 경주 고도 관광개발 10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실로 1,300여년 만에 못 바닥을 청소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작업을 시작하자 작업인부의 삽날에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작업은 즉시 중단되었다. 급히 조사계획이 마련되고 이듬해 3월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서둘게 되었던 것이다.
-1974년 연못 준설작업하던중 발견-
그런데 출토된 유물 가운데 발굴조사시 발굴단을 놀라게 한 목제의 양물 즉 남근 모조품이 있었다. 발굴조사가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남근은 그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설만 무성한 편이다.
남근 모조품이 출토될 당시 이 유물을 처음 수습한 여성조사원은 작업도중 뻘층에 묻혀있는 이 유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나무편에 글자를 써놓은 목간(木簡)이려니 하고 발굴조사 팀장에게 가져갔다. 팀장은 이를 받아보고 한눈에 목제의 발기된 남근 모조품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여성조사원이 수치스러워할까봐 아무말 하지 않고 현장으로 보내고 자신이 스스로 세척을 했다. 이로써 1,300여년간 안압지연못의 바닥 뻘층에 묻혀있던 남근 모조품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길이 17.5㎝의 이 발기된 형태의 남근 모조품을 본 여성조사원들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크기에서 뿐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기 곤란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신라의 역대 임금 가운데 음경이 가장 길었던 왕은 지증왕인데 한자 다섯치였다 하니 40㎝가 넘어 단연 챔피언이었고 다음으로 경덕왕인데 여덟치였다고 하니 20㎝가 넘어 랭킹 2위인 셈이다. 그런데 안압지에서 출토된 이 남근은 17㎝가 넘었으니 남근을 다듬을 때 자신 스스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인지 몰라도 신라시대 양물로서는 랭킹 3위인 셈이지만 실물 모습으로 남은 것은 단연 챔피언이다. 아무튼 이 양물이 처음 출토되고 이어서 형태는 똑같지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양물이 2점 더 출토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나고 어언 30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이 남근 모조품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조각된 모습을 보면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작품이나 다름없다. 누구 손에 만들어졌고 누구의 것이 모델이었는지, 또한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용도에 대해서만 몇몇 설만 무성한 편이다. 신앙으로서의 성기숭배 사상적인 견해와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기구용’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남근숭배·놀이기구說등 용도 분분-
남근신앙의 기원은 선사시대부터로 볼 수 있다. 이 때는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로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울산 반구대 바위에 새긴 암각화(岩刻畵) 가운데 커다란 남근을 노출시킨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뭔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수렵어로인(狩獵漁撈人)들의 의식(儀式)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남근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벌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한편 기록에 보이는 남근숭배 신앙의 예는 고구려에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이 남근을 신좌(神坐)위에 놓는다고 했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시는데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불교 도입전 신라 성문화 개방적-
그렇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 역시 신앙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이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이 있었던 곳이고 한편으로는 임해전(臨海殿)이 마련되어 임금이 정사를 논하고 신하들에게 향연을 베풀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은 일단 신분이 높은 여성이거나 그들에 속해있는 여성들 가운데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도는 무엇인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인들의 성생활문화는 대체적으로 개방되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적당히 빚어만든 토우(土偶) 가운데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정도이고 커보았자 10㎝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공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위가 높은 분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 신라시대 상류층의 성문화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 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했던 것이 처용설화에서 보이는 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성 개방의 결과라 생각된다.
이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용도에 대해 결론을 내려볼까 한다. 물론 가설에 지나지 않고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긴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 신라시대 유물에 나타난 성행위의 토우가 6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신라는 당시 삼국 가운데 고급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고구려나 백제보다 무려 2세기 늦은 6세기에 들어와 법흥왕이 국가종교로 공인하고 있는데 이후 아직까지 신라토기나 출토된 유물에 앞서의 성기나 성행위의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기로 봐서 ‘內室 자위용’ 유력-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토속적인 다신신앙이 성행했겠지만 일단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금욕 등 사회규범이 생활문화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성 모럴이 형성되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마련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은 분명 실용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6세기를 풍미했던 ‘미실의 애정행각’에서 볼 수 있듯, 고 신라시대에만 해도 비교적 개방되었던 성문화가 폐쇄적으로 변하자 엄밀하게 행해지거나 아니면 자위행위로 만족을 찾아야 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이유를 더하면 소나무를 가지고 다듬어 만든 남근 모조품에서 볼 수 있다. 즉 음경부분에 옹이를 이용해서 3개의 돌기가 마련된 것이다. 단순한 성기숭배신앙에서 본다면 돌기까지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자위로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왕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궁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어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다.
◇조유전씨 약력
▲1942년 경남 마산생 ▲66년 서울대 고고학과 졸업 ▲69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촉탁(임시직) ▲71년 무령왕릉 발굴 ▲77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 시절 안압지·황룡사지·감은사지·월성·황남대총·천마총 등 주요 발굴 조사 주도한 뒤 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유적조사연구실장을 지냄 ▲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취임, 2002년 정년퇴직 ▲현 문화재위원 3·6분과 위원 겸임
[한국사 미스테리]신라판 희대의 요부 ‘미실’
신라왕 3명(진흥·진지·진평)과 태자(동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무려 8명을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을 좌지우지했던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미실이었다.
화랑세기는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있고 세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는 기록으로 미실(549~606)의 용모를 극찬했다.
대원신통(왕에게 색을 제공하는 전문여성집단)인 미실은 어머니 옥진으로부터 ‘남자를 죽이는’ 방사(房事)술을 배웠다. 미실의 첫번째 남자는 6세 풍월주인 세종이었다. 어찌나 천부적인 방사술로 세종을 혼내놨는지 화랑세기는 ‘세종이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왕실 여인들의 세력다툼에 밀린 미실은 궁에서 쫓겨나고 만다. 곧 사다함(5세 풍월주)을 만난다. 둘은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사다함이 대가야 정벌전에 출전한 사이, 그를 왕실에서 쫓아냈던 지소태후가 다시 입궁을 명한다. 원 남편인 세종이 그만 상사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사다함은 미실이 떠난 것을 알고는 상심한 나머지 그만 상사병으로 죽고 만다.
미실은 이때부터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아들인 동륜태자를 꾀어 아이를 임신했으며 진흥왕마저 사랑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동생인 미생랑(10세 풍월주)과 설화랑(7세 풍월주)마저 성의 노예로 만들었다. 미실이 설화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보종은 16세 풍월주였다.
미실은 개에게 물려 죽은 동륜태자의 뒤를 이어 태자가 된 금륜(훗날 진지왕·재위 576~578)과 정을 통했으며 진지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진평왕(재위 578~632)에게도 이른바 신국의 도, 즉 성교육을 시켰다.
‘신라 여인천하의 상징’인 미실은 수기 700편을 남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으며 전장으로 떠나는 애인 사다함을 위한 향가 ‘출정가’를 짓기도 했다.
[한국사 미스테리](1)안압지 출토 목제男根 한국사 미스테리 | 한국사 미스테리
기본 문헌의 부족은 한국사, 특히 우리 고대사를 숱한 논쟁거리로...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등 올바른 한국사의 기틀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구소장)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본 한국사 미스터리’를 장기 시리즈로 기획했습니다....
요즈음 TV드라마 주몽을 보면 부여국은 한나라와의 소금교역문제로 심각한 상황에 놓이는 것을 보게 되며, 부여는 바다가 없어서 소금을 조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부여국의 영역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지도상의 부여국은 분명히 바다를 접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소금을 생산하지 못할 리가 없다.
따라서 아래의 한국사 미스테리를 보게 되면 여러가지 의구심이 들게 되는 것 처럼, 부여국
은 중국대륙의 중간에 위치한 나라여야만이 바다와 단절 될 수 있다.
그리고 고산국이라는 나라는 아마 지금의 티벳지역이 아닐까 싶다.
TV에서도 소개 되었듯이 바닥 없는 티벳지역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있는것을 보지 않았는가?
고산국의 소금을 부여로 가져오려면 대륙을 횡단하여 가져 올 수 없는 일이다.
다시한번 숨겨지고 은페된 한국사의 미스테리를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의 해방 이후 근대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하고 왔으며 일제와 깊이
개입되어 있었으므로 숨겨진 역사를 들추어 내기가 어렵지 않나? 싶다.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가 사실인지 여부를 떠나서 한반도 역사의 상당부분이 숨겨지고
은폐된것은 사실이다.
한민족은 지구상에 그 유례를 찿아보기 어려운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 그리고 뛰어난 민족
임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안 일제는 이를 은폐하는데 혼신을 다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