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죄가 아니다

김광열200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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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어떻게 보면 그만큼 지독한 형벌도 없다.

SK 채병룡(20)은 어린 시절 몸서리치는 가난을 경험했다.대물림으로 내려온 가난이 어린 가슴을 멍들게 했다.야구회비를 내지 못할 만큼 쪼들려 눈칫밥을 먹으며 야구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성장했다.지난해 SK에 입단한 뒤 단 한번도 1군 마운드에 선 적이 없었으나 올 시즌 혜성처럼 등장해 일약 신인왕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16일 현재 7승7패 5세이브를 기록하고 있다.

●텅빈 주머니

채병룡은 어렸을 때 가난이 운명인 줄 알았다.어머니가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며 4남매를 키웠다.그는 3남1녀중 막내였다.주머니는 항상 동전 한푼 없이 비어 있었다.하교길에 친구들이 과자와 떡볶이를 사먹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어쩌다 불러주면 눈물이 날 정도로 달려갔다.때로는 가게 앞에 친구들이 보이면 두 눈 질끈 감고 능구렁이처럼 끼어들 때도 있었다.

●슬라이딩에 반해 시작한 야구

그가 야구를 시작한 건 군산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 또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덩치도 좋았다.달리기도 잘 하고 멀리던지기도 잘했다.이를 눈여겨 본 야구부 감독이 야구를 권했다.그는 친구들과 야구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막상 야구선수가 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며칠 동안 감독과의 실랑이가 계속됐다.그런데 어느날 야구부 선수들이 슬라이딩 훈련을 하고 있었다.그게 그렇게 멋있어 유니폼을 입겠다고 결심했다.

●100대 맞고 그만둘래?

어머니는 아들이 다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여전히 반대했다.그도 야구를 안하겠다며 몇번씩이나 도망을 다녔다.어느날 아침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가야 하는데 어머니가 빨래를 해놓지 않았다.야구를 하지 말라고 했다.그도 야구를 그만 둘 요량으로 사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감독이 달려와 “야구 하든지,몽둥이로 100대를 맞고 그만두든지 결정하라”며 호통을 쳤다.그는 맞고 말겠다며 엎드렸다.오기였다.그러나 10대도 못맞고 다시 야구를 하겠노라고 말하고 말았다.

●똥 싸는 기계냐

중학교 때도 여전히 가난은 그를 옥죄었다.덩치는 산만했지만 잦은 빈혈로 고생했다.운동선수가 부실하게 먹다보니 당연했다.야구회비도 낼 수 없었다.다른 학부형들이 “저 놈은 회비도 안내는데 왜 저리 많이 처먹느냐”며 궁시렁거렸다.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꾸역꾸역 밥을 밀어넣었다.오기로 더 먹었다.감독은 ‘똥싸는 기계’라는 별명을 붙여주면서도 그를 보듬어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돈

그는 돈에 한이 맺혔다.철 없을 때는 몰랐지만 서서히 가난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느껴갔다.세상에서 제일 크고 무서운 건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어느날 어머니가 몇달치 밀린 야구회비를 어렵게 마련해줬다.그러나 그는 학교에 가다가 그것을 잃어버렸다.그 돈이 어떤 돈인데.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았다.집에도 못 들어갔다.나중에 감독이 그 사실을 알고는 “회비 못내도 좋으니까 계속 야구를 하라”며 그를 다독거렸다.대신 그를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군산에서 서울로

채병룡은 군산중 시절부터 대물로 평가받았다.서울 한서고로 진학했다.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신일고로 옮겼다.그의 재능을 높이 산 학교들이 스카우트한 것이지만 그가 선택한 조건은 야구회비를 안 내고 잘먹여준다는 말 때문이었다.

●꿈을 이룬 스무살의 청년

중학교 1학년 때였다.95년 한국시리즈에서 OB(현 두산) 김상진과 권명철을 보고 언젠가는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그때부터 목표의식을 갖고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그는 이제 꿈을 이뤘다.대선배들이라 아직 말은 하지 못했지만 김상진과 권명철을 팀 선배로 두고 있어 행복하다.채병룡은 “나는 이미 꿈을 이뤘다.이젠 내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도전하고 싶을 뿐”이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소박한 스무살의 청년 채병룡.그가 마운드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지는 것은 어쩌면 공이 아니라 지난날의 가난과 설움인지도 모른다.

채병룡 "택시 타본적이 있어야죠"

채병룡은 지난 2000년 SK에 계약금 8000만원을 받고 입단했다.그해 1월 5일 첫 훈련이 시작된다는 통보를 받고 난생 처음 지하철을 타고 인천구장을찾아갔다.그러나 도원역에 내린 그는 길을 몰라 2시간 이상을 헤매다 한참이나 떨어진 신포동까지 갔다.

하는 수 없이 진상봉 스카우트에게 전화를 건 그는 이내 혼쭐이 나고 말았다.“거기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가 “택시타면 되는데 어느 세월에 걸어올 거냐”는 호통을 들은 것.채병룡은 그제서야 속으로 택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가난에 찌들었던 그가 택시를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찾아간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이미 훈련이 끝났기 때문이었다.이를 본 김바위 스카우트는 “날샜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껄껄 웃었다.

채병룡의 첫 인천 나들이는 그랬다.


채병룡의 살빼기 전쟁

지난 2000년 잔류군 코치였던 최계훈 코치는 채병룡을 처음 만나 “투수와타자 중 어느쪽을 하겠느냐”며 물었다.그는 “투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최 코치는 그 자리에서 무조건 몸무게를 95㎏까지 빼라고 명령했다.당시 채병룡은 몸무게가 108㎏이었다.

그날부터 채병룡은 ‘살빼기 전쟁’에 들어갔다.인천구장에서 숙소까지 매일 뛰었다.다른 선수들은 차를 타고 구장과 숙소를 오갔지만 그는 예외였다.눈이 오고 찬바람이 불어도 최코치는 매정하게 내몰았다.도로가 빙판이 돼 뛸 수 없으면 걸어서라도 가야했다.다른 선수들은 야간훈련 끝나고 피자등 야식을 먹었지만 그는 침을 삼키며 숙소로 뛰어갔다.

최 코치는 그에게 공을 주지 않았다.새벽에 불러내 투구폼을 가다듬고 야간에는 섀도피칭만 했다.그러나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지긋지긋했던가난을 생각하면 그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몸무게를 93㎏까지 줄이고 시즌 막판에야 겨우 2군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2경기에서 3이닝을 던진 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