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하는가, 개악하는가

순지은2007.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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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한의사 등 법률이 규정하는 의료인에 대한 면허 상호인증이 한-미 FTA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 뒤, 많은 사람들이 "그게 뭐 큰 문제냐", "다 열어젖혀서 망해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이것이 사람들이 의사와 한의사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이구나,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이 증오가 바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1. 의료면허 상호인증, 한-미 FTA의 새로운 쟁점

 


의료면허 상호인증(MRA)이란, 한국의 의료인 면허가 미국에서도 인정되고, 미국의 의료인 면허가 한국에서도 인정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의사 면허를 취득한 사람이 한국에서도 의사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구요. 의료면허 상호인증의 대원칙이 합의된 것은 지난 12월 6일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면허 상호인증은 상당한 위험성을 수반합니다. 의료인의 공급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데, 의료면허 상호인증은 국가 차원에서 통제되는 의료 시스템에 커다란 불확실성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의료인이 한국으로 유입될지, 한국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의료인이 미국으로 빠져나갈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너무도 불확실합니다.

 


2. 왜 의료인의 공급이 정부에 의해 제한되는가

 


한국 의료법에는 총 5개의 직종이 의료인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간호사, 조산사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 다섯 가지 직종은 법률에 의해 배타적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국가에 의해 그 공급이 조절됩니다. 의학과를 졸업하지 않으면 의사시험을 볼 수 없다든가, 한의학과를 졸업하지 않으면 한의사시험을 볼 수 없다든가 하는 방법을 통해서지요. 따라서 의료인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인정하는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역시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에 통과해야만 합니다.

 


다른 분야와 달리, 이처럼 법률이나 교육, 의료 등은 국가가 그 공급을 적절히 통제합니다. 엔간한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내용처럼, 정보의 비대칭성, 우량재의 성격, 그리고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 등에서 단순히 시장에 맡겼을 경우 시장 실패를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은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비의료인들은 의료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환자를 대상으로 한 병원실습을 거쳐야 합니다. 다른 분야에서처럼 사고실험을 한다거나, 기계장비로 실습을 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치료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거든요. 환자를 수요자, 의료인을 공급자로 볼 때, 수요(환자)가 있어야만 공급(실습을 마친 의료인)이 발생할 수 있는 의료분야의 특성은 다시 한 번 "왜 의료의 공급을 국가가 조절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제시해줍니다. 이 부분을 망각했기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학대학 개혁이 현재의 거대한 혼란상을 불러온 것입니다. 수요(대학병원 환자)는 없는데 공급(의과대학)을 억지로 늘리다보니, 그만큼 공급의 질이 낮아지고, 예비의료인들이 의료인이 되기 위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인명의 가치를 무엇으로도 재단하지 못한다는 철학적인 고민도 한 몫 할 것입니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공개한 편지에서 "인명의 가치는 무한대"라는 건강보험의 대원칙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 재화를 시장에 맡길 수는 없지요. 감히 경제학도분들께 가르침을 청하건데,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 재화가 60억 개 있는 시장"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경제학에 있는지요? 경제학적으로는 너무도 모순적인 시장이 아닌지요?

 


3. 미국의 한의사면허 상호인증 요구, 반대하는 한의협의 속내

 


한편 최근 알려진 바에 따르면, 미국은 미국의 ㎟말?Acupuncturist)와 한국의 한의사(韓醫師)간 면허 상호인정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미국에서 침구사 자격을 취득한 자가 한국에서 한의사 노릇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겠지요.

 


이는 한의사협회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과도 같습니다. 미국에서 침구사 자격을 획득한 한국 교포는 1만 6천여 명에 달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중 절반 정도만 한국의 한의학 시장으로 흘러들어오더라도 현재 공급 과잉으로 생각되고 있는 한의학 시장이 사실상 붕괴됩니다. 거기에 한-미 FTA에서 이러한 합의안이 통과된다면, 뒤이어 개시될 한-중 FTA 협상에서도 의료면허 상호인증이 추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3만여명의 미국 침구사, 중의사들이 한국으로 무더기로 흘러들어온다는 거지요.

 


거기에 더 큰 문제는 '역유학'입니다. 한국에서 한의대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미국의 한의대나 중국의 B급 중의대(일급 중의대는 한국 한의대 이상의 수준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입시 성적으로나 커리큘럼으로나 말이죠. '당연히' 이런 곳으로 진학해 진짜 열심히 공부하시는 열성적인 분들을 두고 얘기한 건 아닙니다.)로 도피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개업하는 경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이 경우 한의계는 총체적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료인의 수급, 보험 및 의료제도를 둘러싼 정부와의 커뮤니케이션, 협회 정책 등에서 완전한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사실상 '돈 있는 사람들'이 대강 도피유학을 통해 미국 침구사 자격증을 딴 뒤, 한국에 돌아와 의료인 노릇을 하는 - 전문직종의 세습 현상까지 일어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한국의 의료제도와 미국의 의료제도 사이의 차이점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한의사는 법적으로 보장된 의료인이며, 반드시 면허가 있어야만 한의사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면허'란 게 중요합니다. 면허란 보통 사람에게 금지된 행위를 특별히 허가한다는 개념이죠. 의료라고 하는, 인명과 직결된 중요한 분야를 다루기 때문에 '자격'이 아니라 '면허'를 발부하는 것입니다. 반면 미국은 다릅니다. 미국의 침구사는 의료인이 아닐 뿐더러, '면허'가 아니라 '자격'을 발부합니다. 그냥 이 사람이 침구를 쓸 만한 능력이 있다, 는 것을 인증해주는 수준이죠. 게다가 그 '자격'마저 국가가 주는 게 아니라, 주정부, 또는 민간 단체가 부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침구사 자격증과 한국의 한의사 면허증은 완전히 동떨어진 개념이며, 법적으로 그 위상이 확연히 다른 셈이죠. 어떻게 협상안에 이 얘기가 올라왔는지, 경악스럴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유의 근간에는, 사실 한의학이 아직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자체적인 판단도 깔려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한의학이 아직 하나의 학문으로써 충분히 정립되지 못한 상태라고 봅니다. 한의학계의 자체적인 노력 부족 탓이기도 하지만, 시대적인 흐름 때문이기도 합니다. '민족의학'이니 '반만 년 선조들의 건강을 지켜온......' 하는 말에 현혹되어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경우가 많은데, 제가 알기로 현대적인 의미의 학문으로써 한의학이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역사는 아주 짧습니다. 식민지 시대 때는 거의 멸살의 위기에 처했었고, 군부 때도 핍박을 받았었죠. 그나마 오늘날에도 한의학계에 지원되는 예산은 쥐꼬리만한 수준입니다. 저는 솔직히, 한의학이 지금 수준에서 세계 경쟁에 맞닥뜨려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습니다. 어쨌든 자본주의사회 하에서, 학문의 인프라는 곧 돈이잖아요.

 


4. 개혁하는가, 개악하는가

 


이것이 한의학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일례로 FTA를 계기로 한의학을 '글로벌 스탠다드' 수준으로 육성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있더군요. 하지만 제 생각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서 침술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고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연과학자들과 의학자들의 몫이지 미국의 침구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침구사들은 어디까지나 임상 의학가들이고, 커리큘럼상으로도 의료 '기술'을 배울 뿐 학문적인 내용은 거의 배우지 않는 걸로 압니다.

 


또한, 단순히 한의사들을 자유 경쟁의 틀 속에 넣으면 자연히 시장 원리가 작동해서 좋은 한의사들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신데, 이 역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단순한 논립니다. 한의사들을 자유 경쟁의 틀 속에 쳐넣는다고 해서 의료의 질이 좋아질까요? 만일 그랬다면, 애당초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의사 면허의 관리를 포기했을 겁니다. 이런 얼치기 시장주의자들의 사고는 이런 극단적인 결론까지 정당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이비 의사들이 있으면 뭐 어떻습니까? 경제학적이고 '현명한' 소비자들이 훌륭한 의사를 알아서 고를 것이며, 사이비 의사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될텐데요." 의료를 경제학적인 마인드로 바라보아선 안 됩니다. 사회를 경제학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유 경쟁을 통해 가격이 이동하고, 공급과 수요의 곡선이 춤을 추고, 경제학적 최적화를 이룰 수 있다 칩시다. 그러기까지의 과정은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그 과정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해고되는 사람들, 도태되는 사람들, 죽는 사람들, 절망하는 사람들, 돈의 저주에 걸린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시장이 이 '과정'도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시장 원리가 제대로 동작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되려 실력있고 양심적인 의료인이 죽고 비양심적이고 사이비같은 의료인들만 살아남을 가능성마저 있지요. 의료 시장인이 '가장 합리적인 경제인'이라고 가정해 보세요. 그럼 그는 당연히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겠지요. 하지만 의료 시장은 그 특성상 비용을 줄일 방법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이 때 합리적인 의료인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소비자를 속이는 것입니다. 의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들을 환자는 잘 모르며, 이 비대칭성은 그 어떤 노력을 경주하더라도 극복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의사는 적당히 환자를 속여 넣어야 할 것을 빼고, 불필요한 것을 요구함으로써 비용을 최소화하고 수익을 최대화할 수 있게 되지요. 시장에서 살아남는 것은 바로 이런, 효율적으로 순수익을 최대화한 사람들입니다. 의료에서 환자는 무슨 짓을 해도 약자일 뿐이며, 따라서 유일하게 환자가 의사에게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 손을 활용하는 대신 보이는 양 손을 가지고 멱살을 쥐는 것뿐이죠.

 


게다가 이 문제를 단순하게 바라봐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의료제도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는 셈이거든요. 한의사들은 법적으로 '면허'에 의해 특별히 허락되는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인데, 현재 보도된 내용처럼 FTA가 체결되어버리고 나면 이제 '자격'에 의해서도 의료 행위가 가능해져버리는 셈입니다. 초법적인 사태가 벌어지는거죠.

 


한의학계에 모순이 많다고 해서 이걸 자유경쟁의 틀 속에 집어넣겠다는 건 오히려 더 큰 모순을 불러오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의학, 바뀌어야 합니다. 모순도 너무 많고 사이비도 너무 많습니다. 점점 개혁을 이루고 있긴 하지만, 그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습니다. 한의학계 내부의 자정 작용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의학의, 민족의학의 개혁에 여러분의 손을 빌려주십시오. '비방' 문화를 까부수고, 한의학을 진정한 학문으로 정립하고자 하는 - 나의 존경하는 스승들과, 양심적인 학자들, 그리고 매진하는 학생들을 위해 칼을 빌려주십시오. 시장논리에 의료를 맡기자는, 더 큰 악을 불러오는 일을 원하시는 건 아니잖습니까?

 

글쓴이 : 상지대학교 한의대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