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호랑이는 17세기 철화백자에서 만날 수 있는 민화의 흔적이다. 이쁘게 추켜올린 속눈썹, 밖으로 삐져나온 이빨, 간략하게 묘사한 줄 무늬, 솜방망이처럼 거세된 발톱 등은 19세기 민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를 닮았다. 민화는 19세기에 유행하였지만, 그것이 오랜 전통 속에서 숙성된 장르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중 호랑이 그림.
철화백자에 펼쳐진 민화세계
조선의 5백년 역사 가운데 허리쯤에 해당하는 17세기는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에서 매우 흥미진진한 시기다. 왜냐하면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 때, 천 명이 넘는 조선의 뛰어난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갔다. 여기에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전쟁이 이어졌으니, 17세기 전반의 도자산업은 쑥밭이나 다름없이 피폐해졌다. 연거푸 일어난 전쟁으로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조선을 침범한 청나라에 대한 감정까지 나빠져서,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청화 대신에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산화철을 백자의 무늬를 그리는 안료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만든 것이 철화백자다. 이처럼 17세기는 철화백자의 시대이다. 궁중에서조차 청화백자가 아닌 철화백자를 애용하였을 정도이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선택한 철화백자이지만, 이 시기에 오히려 우리나라 도자사를 화려하게 빛내는 최고 명품들이 창출된 것이다. 199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우리나라 미술 가운데 최고가를 경신했던 도자기가 바로 17세기에 제작된 철화백자인 이고, 2006년 교수신문의 설문조사에서 전문가들이 한국 도자기의 최고 명품으로 선정한 것도 이 시기 철화백자인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다.
17세기 철화백자로는 궁중용으로 관요에서 제작한 것과 민간용으로 민간가마에서 제작한 것이 있다. 궁중용은 도자기에 그려진 철화의 그림은 세련된 운치가 흐른 그림이 많은 반면, 민간 가마의 그림에는 해학적이고 분방한 흥치로 가득 차 있는 그림이 대부분이다. 궁중용 철화백자는 수묵화에 비유한다면, 민간용 철화백자는 민화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는 대체적인 흐름일 뿐, 실제는 궁중용 철화백자에도 민화풍의 그림이 등장하기도 한다.
관요에서 궁중용으로 제작된 철화백자. 199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팔려 화제가 되었던 철화백자다. 거래가는 841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70억원)로 알려졌다. 17세기, 높이 48cm.(도판출처 : Christie's Korean Works of Art Oct. 31st)
의 뒷모습과 옆모습은 더욱 매력적이다.
만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용그림이다. 17세기, 높이 36.2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도판출처 : 호암미술관명품도록)
가 바로 크리스티 경매로 화제가 되었던 도자기다. 좌우동형의 건장하고 잘 생긴 몸매, 위아래에 두른 장식, 그리고 깔끔하게 처리된 유약에서 관요(官窯)에서 궁중요으로 생산된 도자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공간을 조화롭게 활용하고 수묵의 농담을 살린 표현 등에서 상품 도자기의 기품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궁중용임에도 불구하고 용의 표정을 다소 해학적으로 나타낸 점에서 이 시기 장인의 여유로운 심성을 엿보게 한다.
이에 비하면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는 민간 가마에서 제작한 철화백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회백색의 울퉁불퉁한 유약과 거친 그릇의 모양에서 관요에서 제작된 말끔한 항아리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더우기 이 항아리에 그려진 용은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용이 아무리 상상의 동물이라 하지만, 이 도자기에 그려진 용의 모습은 우수꽝스럽기 그지없다. S자의 용틀임을 한 용의 형세는 그릇 모양처럼 강하지만, 정면으로 그려진 눈과 옆면으로 그려진 입, 작고 동그란 눈, 그 위를 둘러쌓은 세 가닥의 갈기에서는 위용보다는 웃음이 앞선다. 게다가 구름도 마치 만화에서 그리는 자동차 매연처럼 검은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다. 위의 관요 제작 항아리에서 보인 해학과는 차이가 난다. 웃음으로 비유하자면, 위의 도자기는 빙그레 웃는 미소라면, 이 도자기는 깔깔대고 웃는 함박웃음이다.
관요에서 제작된 철화백자로서, 격조 높은 매화그림이 그려져 있다. 보물 1425, 17세기, 높이 36.9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도판출처 : 호암미술관명품도록)
관요에서 제작된 도자기이지만, 민화풍의 꽃그림이 그려져 있다. 민화풍의 무늬는 민간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선호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높이 34.0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도판출처 : Soul of Simplicity)
보물 1425호로 지정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은 17세기 관요에서 궁정용으로 제작된 철화백자다. 당당한 어깨에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몸체의 대비는 매우 강렬하다. 급작스런 몸체의 변화를 어느 정도 높이를 갖는 굽이 받아주고 있다. 위에는 삼각형의 산악무늬와 연꽃무늬, 아래에는 산악무늬로 장식되고, 이들 장식 사이에는 매화와 대나무가 여유로운 공간을 향유하고 있다. 운치있고 격조높은 화풍으로 보아, 당시 궁중 화원이 그린 그림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17세기에는 궁중에 진상하는 그릇에도 민화적 표현으로 그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가 그러한 예이다. 동근 몸체와 바튼 목에서 17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형태가 바르고 백색의 맑은 유약색으로 보아 관요의 제작임을 알 수 있는데, 항아리의 표면을 가득 채운 꽃무늬는 속도 빠른 필치로 간략하게 나타내었다. 특히 꽃 모양을 용수철모양으로 빠르게 그린 것에서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표현이 두드러진다.
사슴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구름 위를 달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이상적인 세계로 표현되었다. 중 사슴 그림. 17세기, 높이 28.6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아타카 에이치 기증). (도판출처 : Soul of Simplicity)
살찌고 마른 붓질의 변화를 통해 나름대로 입체감 있는 호랑이의 형상을 나타내었다. 중 호랑이 그림.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도판출처 : Soul of Simplicity)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는 한 면에 호랑이, 반대 면에 사슴이 뛰어노는 그림을 배치한 철화백자다. 주판알처럼 가슴이 튀어나온 모양의 항아리에 호랑이와 사슴을 꽉 들어차게 그렸다. 호랑이나 사슴은 비록 백자항아리에 철사로 그린 것이지만, 17세기의 민화나 다름없는 그림이다. 호랑이는 여성스럽게 속눈썹을 추켜올리고, 코에는 수줍은 듯 두 줄기의 선이 그려져 있다. 발톱은 거세되어 솜방망이처럼 부드럽다. 송곳니를 비롯하여 윗니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빼놓고는 어느 한곳도 백수의 왕다운 맹수성을 느낄 수 없다. 사슴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구름 위를 달리는 모습으로 이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발톱을 솜방망이처럼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은 조선 호랑이 그림의 중요한 특징으로, 우리의 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도판출처 : 꿈과 사랑)
주목할 만한 점은 이 항아리의 호랑이 표현이 17세기 작품이지만, 그 도상이 19세기 민화에 그래도 전해진다는 점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호랑이 표현을 보면, 추켜올린 속눈썹, 평행선이 그려진 코, 솜방망이처럼 거세된 발톱, 윗니를 밖으로 드러낸 모습, 그리고 간략한 선으로 묘사한 줄무늬 등에서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민화는 이처럼 오랜 전통 속에서 숙성된 장르임을 알 수 있다.
17세기 백자철화에 당시 민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17세기에는 민화가 민간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사랑받았을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물흐르듯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고 여기기 때문에 민화도 궁중회화의 영향이라는 일방적인 루트만 생각하기 쉽상이다. 그러나 이 시기 청화백자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민간의 미의식이 궁중에서 사랑을 받았다고. @ 정병모
철화백자에 펼쳐진 민화세계 / 민화와 상상력 22
이 호랑이는 17세기 철화백자에서 만날 수 있는 민화의 흔적이다. 이쁘게 추켜올린 속눈썹, 밖으로 삐져나온 이빨, 간략하게 묘사한 줄 무늬, 솜방망이처럼 거세된 발톱 등은 19세기 민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를 닮았다. 민화는 19세기에 유행하였지만, 그것이 오랜 전통 속에서 숙성된 장르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중 호랑이 그림.
철화백자에 펼쳐진 민화세계
조선의 5백년 역사 가운데 허리쯤에 해당하는 17세기는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에서 매우 흥미진진한 시기다. 왜냐하면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 때, 천 명이 넘는 조선의 뛰어난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갔다. 여기에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전쟁이 이어졌으니, 17세기 전반의 도자산업은 쑥밭이나 다름없이 피폐해졌다. 연거푸 일어난 전쟁으로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조선을 침범한 청나라에 대한 감정까지 나빠져서,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청화 대신에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산화철을 백자의 무늬를 그리는 안료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만든 것이 철화백자다. 이처럼 17세기는 철화백자의 시대이다. 궁중에서조차 청화백자가 아닌 철화백자를 애용하였을 정도이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선택한 철화백자이지만, 이 시기에 오히려 우리나라 도자사를 화려하게 빛내는 최고 명품들이 창출된 것이다. 199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우리나라 미술 가운데 최고가를 경신했던 도자기가 바로 17세기에 제작된 철화백자인 이고, 2006년 교수신문의 설문조사에서 전문가들이 한국 도자기의 최고 명품으로 선정한 것도 이 시기 철화백자인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다.
17세기 철화백자로는 궁중용으로 관요에서 제작한 것과 민간용으로 민간가마에서 제작한 것이 있다. 궁중용은 도자기에 그려진 철화의 그림은 세련된 운치가 흐른 그림이 많은 반면, 민간 가마의 그림에는 해학적이고 분방한 흥치로 가득 차 있는 그림이 대부분이다. 궁중용 철화백자는 수묵화에 비유한다면, 민간용 철화백자는 민화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는 대체적인 흐름일 뿐, 실제는 궁중용 철화백자에도 민화풍의 그림이 등장하기도 한다.
관요에서 궁중용으로 제작된 철화백자. 199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팔려 화제가 되었던 철화백자다. 거래가는 841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70억원)로 알려졌다. 17세기, 높이 48cm.(도판출처 : Christie's Korean Works of Art Oct. 31st)
의 뒷모습과 옆모습은 더욱 매력적이다.
만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용그림이다. 17세기, 높이 36.2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도판출처 : 호암미술관명품도록)
가 바로 크리스티 경매로 화제가 되었던 도자기다. 좌우동형의 건장하고 잘 생긴 몸매, 위아래에 두른 장식, 그리고 깔끔하게 처리된 유약에서 관요(官窯)에서 궁중요으로 생산된 도자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공간을 조화롭게 활용하고 수묵의 농담을 살린 표현 등에서 상품 도자기의 기품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궁중용임에도 불구하고 용의 표정을 다소 해학적으로 나타낸 점에서 이 시기 장인의 여유로운 심성을 엿보게 한다.
이에 비하면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는 민간 가마에서 제작한 철화백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회백색의 울퉁불퉁한 유약과 거친 그릇의 모양에서 관요에서 제작된 말끔한 항아리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더우기 이 항아리에 그려진 용은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용이 아무리 상상의 동물이라 하지만, 이 도자기에 그려진 용의 모습은 우수꽝스럽기 그지없다. S자의 용틀임을 한 용의 형세는 그릇 모양처럼 강하지만, 정면으로 그려진 눈과 옆면으로 그려진 입, 작고 동그란 눈, 그 위를 둘러쌓은 세 가닥의 갈기에서는 위용보다는 웃음이 앞선다. 게다가 구름도 마치 만화에서 그리는 자동차 매연처럼 검은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다. 위의 관요 제작 항아리에서 보인 해학과는 차이가 난다. 웃음으로 비유하자면, 위의 도자기는 빙그레 웃는 미소라면, 이 도자기는 깔깔대고 웃는 함박웃음이다.
관요에서 제작된 철화백자로서, 격조 높은 매화그림이 그려져 있다. 보물 1425, 17세기, 높이 36.9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도판출처 : 호암미술관명품도록)
보물 1425호로 지정된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은 17세기 관요에서 궁정용으로 제작된 철화백자다. 당당한 어깨에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몸체의 대비는 매우 강렬하다. 급작스런 몸체의 변화를 어느 정도 높이를 갖는 굽이 받아주고 있다. 위에는 삼각형의 산악무늬와 연꽃무늬, 아래에는 산악무늬로 장식되고, 이들 장식 사이에는 매화와 대나무가 여유로운 공간을 향유하고 있다. 운치있고 격조높은 화풍으로 보아, 당시 궁중 화원이 그린 그림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17세기에는 궁중에 진상하는 그릇에도 민화적 표현으로 그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가 그러한 예이다. 동근 몸체와 바튼 목에서 17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형태가 바르고 백색의 맑은 유약색으로 보아 관요의 제작임을 알 수 있는데, 항아리의 표면을 가득 채운 꽃무늬는 속도 빠른 필치로 간략하게 나타내었다. 특히 꽃 모양을 용수철모양으로 빠르게 그린 것에서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표현이 두드러진다.
사슴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구름 위를 달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이상적인 세계로 표현되었다. 중 사슴 그림. 17세기, 높이 28.6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아타카 에이치 기증). (도판출처 : Soul of Simplicity)
살찌고 마른 붓질의 변화를 통해 나름대로 입체감 있는 호랑이의 형상을 나타내었다. 중 호랑이 그림.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도판출처 : Soul of Simplicity)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는 한 면에 호랑이, 반대 면에 사슴이 뛰어노는 그림을 배치한 철화백자다. 주판알처럼 가슴이 튀어나온 모양의 항아리에 호랑이와 사슴을 꽉 들어차게 그렸다. 호랑이나 사슴은 비록 백자항아리에 철사로 그린 것이지만, 17세기의 민화나 다름없는 그림이다. 호랑이는 여성스럽게 속눈썹을 추켜올리고, 코에는 수줍은 듯 두 줄기의 선이 그려져 있다. 발톱은 거세되어 솜방망이처럼 부드럽다. 송곳니를 비롯하여 윗니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빼놓고는 어느 한곳도 백수의 왕다운 맹수성을 느낄 수 없다. 사슴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구름 위를 달리는 모습으로 이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였다.
발톱을 솜방망이처럼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은 조선 호랑이 그림의 중요한 특징으로, 우리의 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도판출처 : 꿈과 사랑)
주목할 만한 점은 이 항아리의 호랑이 표현이 17세기 작품이지만, 그 도상이 19세기 민화에 그래도 전해진다는 점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호랑이 표현을 보면, 추켜올린 속눈썹, 평행선이 그려진 코, 솜방망이처럼 거세된 발톱, 윗니를 밖으로 드러낸 모습, 그리고 간략한 선으로 묘사한 줄무늬 등에서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민화는 이처럼 오랜 전통 속에서 숙성된 장르임을 알 수 있다.
17세기 백자철화에 당시 민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17세기에는 민화가 민간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사랑받았을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일반적으로 문화는 물흐르듯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고 여기기 때문에 민화도 궁중회화의 영향이라는 일방적인 루트만 생각하기 쉽상이다. 그러나 이 시기 청화백자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민간의 미의식이 궁중에서 사랑을 받았다고. @ 정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