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아이

이진우2007.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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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아이

만일 내가 저런 현장을 목겼했다면 아이를 먼저 구할까...사진 작가와 같이 했을까...누가 누구를 비판할 수 있을까... 수단 남부에 들어간 카터 아요르의 식량센터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것은 굶주림으로 힘을 다해 무릎을 끊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소녀가 쓸어지면 쓰러진 소녀를 먹이 감으로 삼으려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셔터를 누른 후 그는 바로 독수리를 내 쫓고 소녀를 구해 주었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전세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후 일부에서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케빈 카터 'Kevin Carter' 는 수상 후 3개월 뒤 1994년 7월 28일에 친구와 가족 앞으로 쓴 편지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퓰리처 상을 수상한 이 사진의 주인공인 ‘케빈 카터’에 관한 이 글은 흔히 ‘좋은 생각’유의 잡지들에 간간히 등장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곤 하는 글입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처음 ‘카터’라는 사람의 시선으로, 굶주림에 죽어가는 아이의 불행한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으로서의 감정적 안쓰러움을 가지게 되고 이내 그러한 시선은 ‘촬영보다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대중의 시선으로 교체되어 상에 눈이 먼 카터를 비판적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자살에 관한 글에 이르면 우리는 카터와 소녀를 동일한 시선, 동정적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동정적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쓰여진 이 글은 카터가 이 사진을 찍어야 했던 상황들인 ‘내전’과 이로 인해 이어진 수백만의 ‘기아’와 수단과 리비아, 그리고 이라크의 관계 및 미국의 경제원조 중단 등으로 이어지는 이성적 유추 가능한 사실들을 사진과 글의 조합을 통해서, 그리고 기사 원문에 등장하는 ‘내전 중인’ 이라는 명백한 사실 역시 제거함으로 인해서 ‘신파’의 효과를 끌어 들입니다. 그래서 잔인하게 말하자면 카터의 사진은 ‘살육’의 증언으로서 보다 큰 무게와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수단에서 벌어진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내전, 그리고 사라흐 외상의 리비아와 이라크 지지로 이어지고 ‘미국’에 대한 경제적 공격의 실마리를 제공하며 낮은 교육률과 IMF(명백한 미국의)의 압박 등의 경제적, 군사적 공격을 ‘신파’의 효과인 감동과 연민으로 치환하는 가공된 글과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1953년 한국전쟁의 종전 이후 북한의 공업시설은 85% 가량이, 대부분의 농경지는 ‘융단폭격’으로 황폐화 된 상태, 그리고 남한 인구의 절반밖에 미치지 못하는 인구를 가지고서 당시 36억 불의 경제원조를 받던 남한에 비해 1954년에서 1962년까지 남한의 연평균 경제성장률 4.7%에 비해 북한의 경우 22.1%, 1인당 국민 소득 증가율이 남한이 0.8%인데 비해 북한이 17.2%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중국의 대북 경제원조는 극히 미미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의 단지 원조와 비원조의 차이가 아니라 일종의 시스템의 차이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단지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들, 그러한 인류애적 발현은 ‘구호’라는 단어 속에서 드러나듯 ‘사람을 구원하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 못사는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가진 자의 오만’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행위들은 우리들의 담배 한 갑을 아낀다거나 점심식사를 좀더 싸게 먹고 남는 것들로 그들을 살릴 수 있다는 사고, 우리가 아니면 너희를 누가 구원하랴 는 ‘오만’의 행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카터가 찍은 사진의 힘은 그러한 ‘오만’을 꺼내기 위한 ‘신파’적 사진이 아니라 가진 자들의 힘겨루기에서 쓰러져 가는 민중들을 찍어낸, 그래서 ‘내전 중인 수단’의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는 사진이기에 그가 급히 들쳐 없고 갔으나 죽었던 소녀처럼 앞으로도 죽어갈 수많은 ‘소녀’들을 알리기 위한 사진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원조라는 형식으로 얻어왔던 빗으로 이 땅의 민중들이 피와 땀을 쏟으며 쌓아 올린 현재의 남한처럼 그들에 대한 원조의 형태는 가진 자의 교육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교육, 쌀과 빵을 생산해 내고 트랙터를 만들어 내고 전기를 생산해 내고 사람을 치료하고 살릴 수 있는 생존과 발전을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교육을 바탕으로 한 생존을 위한 ‘빵’이 보내져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적은 ‘눈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RS와 무통장 입금과 같은 이 시대의 기계적 이기는, 그러나 모두를 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의 매체들이 생산해 내고자 하는 것들은 이러한 ‘무기’로서의 눈물에 다름 아닙니다. 이성을 무디게 깎아내는 날카로운 ‘칼’로서의 ‘눈물’ 말이지요. 또한 국제 구호단체의 대부분이 기독교 단체로, 그리하여 선교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카터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전세계 지식인들을 뒤돌아 보게 만들었던 것처럼 이들 구호단체는 바로 지금 굶주린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단지 사람’만’을 구하는 것이고 그들이 행동하며 가르치고 지원하는 ‘의료’, ‘교육’, ‘문화’ 등이 이들 단어에 항상 따라붙는 ‘(자선)사업’이라는 특정(선교 등의)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이는 ‘동냥하는 자’를 돕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오만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식적 목적이 끼어드는 순간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사실이 아닌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생각이 그들의 역사적 삶을 파괴해 버릴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라다크’가 파괴된 바로 그것처럼 말이죠. 아무리 굶주리고 죽어가도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이어야 하며 우리는 단순한 조언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억압을 차마 보지 못하겠노라고 더 많은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국가가 바로 ‘미국’이기도 합니다. (이삼성, 노암 촘스키, 하워드 진, 박세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