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BED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 src=http://dory.mncast.com/mncHMovie.swf?movieID=10013268120061124150808&skinNum=1 width=420 height=37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always"> 잉글랜드1부리그가 프리미어리그에 접어든 이후 첫번째 레전드로 불리우는 에릭 칸토나.
그는 누구보다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영광스러운 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흠이 간 천재와 같은 이미지로 남겨져있다. 잉글랜드에서 5년동안 선수생활을 한 칸토나는 짧은 기간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팬들의 상상력과 마음을 휘어잡았지만 동시에 현란하고 물의를 일으키는 그의 스타일로 인해 많은 논쟁들이 발생했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1992년 초,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입단테스트를 받고 리즈 유나이티드와 계약을 하면서 영국 축구계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칸토나의 등장은 매우 강렬했다. 그는 92-93 프리미어리그 시즌 개막에 앞서 벌어진 리버풀과의 Charity Shield(※원문 인용. 채러티 쉴드는 정규리그 우승팀과 FA컵 우승팀이 단판제로 벌이는 경기로서 일종의 슈퍼컵과 같은 대회)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우승컵을 안겨줬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리즈 유나이티드는 프라미어 리그에서 매우 고전중이었고 결국 칸토나는 120만 파운드를 받고 맨유로 이적했다.
칸토나의 이적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진행한 그 어떤 트레이드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피터 슈마이헬을 칸토나의 반값을 주고 데려왔던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칸토나의 이적은 리즈의 단장인 하워드 윌킨슨이 퍼거슨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데니스 어윈을 리즈로 트레이드 할 수 있을 것인지 묻던 상황에서 결정되었다.
퍼거슨 감독은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며 오히려 뻔뻔스럽게도 칸토나를 리즈에서 데려오기 위한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리즈 팬들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윌킨슨은 지체없이 퍼거슨 감독의 요청을 공식적으로 받아 들였다.
칸토나의 맨유 데뷔전은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서 열렸던 '맨체스터 더비'였다. 그 경기는 67년 리그 우승 후 26년만의 챔피언 등극을 노리던 맨유에 칸토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 지 알려주는 첫 신호탄이었다. 칸토나는 마크 휴즈와 강력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그가 기록한 골과 어시스트는 맨유가 애스턴빌라를 제치고 우승을 일구어 내는 데 크게 이바지 했다. 다음 시즌에서도 칸토나는 숨막힐 만한 멋진 득점과 기술들을 선보이며, 맨유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첼시전이었다. 칸토나가 센터서클에서 높이 띄운 공이 골키퍼를 넘어 바운스 된 후 골 크로스바를 맞고 튀어나와 안타깝게 득점과 연결시키지 못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의 창조성 만큼은 대단했다. 하지만, 칸토나는 스윈돈 타운전과 아스널전서 연속으로 퇴장당하며 어두운 불행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스널전의 퇴장은 운이 없는 결과였지만, 스윈돈 타운전에서 상대선수인 존 몬커스의 가슴을 발로 밟았던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불평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토나는 시즌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정상 컨디션을 찾아 맨유가 다시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는데 공헌했고, 또한 첼시와의 FA컵 결승전 경기에서 두개의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팀이 4-0으로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칸토나는 93-94 시즌 'PFA Player'(※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의회(PFA) 소속 선수들이 직접 선정하는 상)에 선정되며 동료 선수들에게서도 존경과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 시즌은 칸토나에게 맨유 시절 최고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그의 성격적인 결함을 퍼거슨 감독과 칸토나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었던 때이기도 했다. 칸토나가 만약 부드러운 매너를 가졌었다면 칸토나답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 마치 지금 맨유의 영웅인 웨인 루니에 대해 사람들이 말 하듯이- 그의 몇가지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있다.
그의 가장 심각한 판단 오류는 95년 1월에 발생했다. 셀허스트 파크에서 열린 크리스탈 팰리스전에서 상대 수비수인 리처드 쇼를 걷어차는 바보같은 행동으로 퇴장당한 칸토나는 터치라인을 따라 터널(라커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축구 팬이 달려와 펜스 앞쪽에서 칸토나를 향하여 욕을 하자 그는 그 축구 팬을 향하여 추하고 창피한 '쿵푸 발차기'를 날리고 말았다. 전대미문의 사고에 칸토나 자신은 영영 다시는 경기에 설 수 없다는 판결을 받게 된다. 칸토나는 이 사고로 8개월 동안 구금되었으며, 감옥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 간신히 법원으로부터 '사회봉사 명령'을 받게 된다. 칸토나는 이 사건 직후 "갈매기들이 배를 뒤쫓아 오는 이유는 생선들이 바다에 던져질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는 기괴한 명언을 남긴다. 사실 그 누구도 칸토나가 꼭 그렇게까지 추방당하고 격리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파괴적인 본능으로 인해 칸토나는 축구인생의 큰 오점을 남겼고 맨유의 성적은 추락해야했다. 맨유는 그 시즌에서 블랙번 로버스에게 단지 1점 차로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자리를 내주고 말았으며(※그 시진은 칸토나가 맨유 소속으로 뛰는 동안 유일하게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시즌이 되고 말았다) FA컵 결승전에서도 에버튼에게 0-1로 연달아 패하고 말았다. 95년 10월. 퍼거슨감독의 도움으로 팀에서 퇴출될 위기를 넘긴 칸토나가 리버풀과의 경기에 돌아왔을 때 그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흥분을 불러왔다. 경기 시작 2분만에 칸토나는 팀 동료 니키 버트의 첫 골을 어시스트했고 후반전에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2-2 무승부를 이끌었다. 맨유 팬들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으며 칸토나는 재기했다.
맨유는 이 무렵 무려 12점 차로 뉴캐슬을 따돌리며 우승을 향해 질주했다. 칸토나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멋진 발리슛으로 팀을 1-0 승리로 이끈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결정적인 골들을 작렬시켰다. 결국 칸토나는 맨유를 시즌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FA컵 결승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유일한 결승골을 넣으며, 3년간 맨유를 2관왕으로 만들어냈다. 96-97시즌 그는 서른 한 번째 생일을 몇 주 앞두고 다시 한번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맨유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홀연히 은퇴했다. 칸토나의 시대는 지났지만 그의 위대한 유산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가 맨유에 공헌한 것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는 맨유에서 5년간 활약하며, 4차례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2차례 FA컵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으며, 191경기에 출전해 88골을 뽑아냈다. 그 당시 그 어떤 선수보다 칸토나의 기술과 볼을 다루는 능력은 우수했다. 그가 경기전 몸을 푸는 것만으로도 팬들에게 행복을 전해줄 만큼 그는 경기장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그러나 칸토나가 맨유에게 유래없는 큰 성공을 안기는 동안에도 이상하리만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큰 성공을 얻지 못했다. 특히 1997년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독일)와의 경기 후반, 아깝게 득점기회를 놓쳐 패했던 때는 더욱 그랬다. 이를 두고 몇몇 사람들은 칸토나가 진정 천재의 능력을 지녔는지 의구심을 갖지만 타고난 능력에 관한 한 그와 비교될 수 있는 선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맨유 팬들은 칸토나를 지난 2001년 '세기의 선수'로 선정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조지 베스트와 보비 찰튼경도 맨유의 역사에서 중요한 길목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그 어떤 선수도 칸토나보다 이 유명하고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클럽(맨유)에 드라마틱하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자부한다.
프리미어리그의 첫번째 영웅, 에릭 칸토나(영상포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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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보다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영광스러운 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흠이 간 천재와 같은 이미지로 남겨져있다. 잉글랜드에서 5년동안 선수생활을 한 칸토나는 짧은 기간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팬들의 상상력과 마음을 휘어잡았지만 동시에 현란하고 물의를 일으키는 그의 스타일로 인해 많은 논쟁들이 발생했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1992년 초,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입단테스트를 받고 리즈 유나이티드와 계약을 하면서 영국 축구계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칸토나의 등장은 매우 강렬했다. 그는 92-93 프리미어리그 시즌 개막에 앞서 벌어진 리버풀과의 Charity Shield(※원문 인용. 채러티 쉴드는 정규리그 우승팀과 FA컵 우승팀이 단판제로 벌이는 경기로서 일종의 슈퍼컵과 같은 대회)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우승컵을 안겨줬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리즈 유나이티드는 프라미어 리그에서 매우 고전중이었고 결국 칸토나는 120만 파운드를 받고 맨유로 이적했다.
칸토나의 이적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진행한 그 어떤 트레이드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피터 슈마이헬을 칸토나의 반값을 주고 데려왔던 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칸토나의 이적은 리즈의 단장인 하워드 윌킨슨이 퍼거슨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데니스 어윈을 리즈로 트레이드 할 수 있을 것인지 묻던 상황에서 결정되었다.
퍼거슨 감독은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며 오히려 뻔뻔스럽게도 칸토나를 리즈에서 데려오기 위한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리즈 팬들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윌킨슨은 지체없이 퍼거슨 감독의 요청을 공식적으로 받아 들였다.
칸토나의 맨유 데뷔전은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서 열렸던 '맨체스터 더비'였다. 그 경기는 67년 리그 우승 후 26년만의 챔피언 등극을 노리던 맨유에 칸토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 지 알려주는 첫 신호탄이었다. 칸토나는 마크 휴즈와 강력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그가 기록한 골과 어시스트는 맨유가 애스턴빌라를 제치고 우승을 일구어 내는 데 크게 이바지 했다. 다음 시즌에서도 칸토나는 숨막힐 만한 멋진 득점과 기술들을 선보이며, 맨유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첼시전이었다. 칸토나가 센터서클에서 높이 띄운 공이 골키퍼를 넘어 바운스 된 후 골 크로스바를 맞고 튀어나와 안타깝게 득점과 연결시키지 못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의 창조성 만큼은 대단했다. 하지만, 칸토나는 스윈돈 타운전과 아스널전서 연속으로 퇴장당하며 어두운 불행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스널전의 퇴장은 운이 없는 결과였지만, 스윈돈 타운전에서 상대선수인 존 몬커스의 가슴을 발로 밟았던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불평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토나는 시즌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정상 컨디션을 찾아 맨유가 다시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는데 공헌했고, 또한 첼시와의 FA컵 결승전 경기에서 두개의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팀이 4-0으로 승리하는데 기여했다.
칸토나는 93-94 시즌 'PFA Player'(※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의회(PFA) 소속 선수들이 직접 선정하는 상)에 선정되며 동료 선수들에게서도 존경과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 시즌은 칸토나에게 맨유 시절 최고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그의 성격적인 결함을 퍼거슨 감독과 칸토나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었던 때이기도 했다. 칸토나가 만약 부드러운 매너를 가졌었다면 칸토나답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 마치 지금 맨유의 영웅인 웨인 루니에 대해 사람들이 말 하듯이- 그의 몇가지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있다.
그의 가장 심각한 판단 오류는 95년 1월에 발생했다. 셀허스트 파크에서 열린 크리스탈 팰리스전에서 상대 수비수인 리처드 쇼를 걷어차는 바보같은 행동으로 퇴장당한 칸토나는 터치라인을 따라 터널(라커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 축구 팬이 달려와 펜스 앞쪽에서 칸토나를 향하여 욕을 하자 그는 그 축구 팬을 향하여 추하고 창피한 '쿵푸 발차기'를 날리고 말았다. 전대미문의 사고에 칸토나 자신은 영영 다시는 경기에 설 수 없다는 판결을 받게 된다. 칸토나는 이 사고로 8개월 동안 구금되었으며, 감옥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 간신히 법원으로부터 '사회봉사 명령'을 받게 된다. 칸토나는 이 사건 직후 "갈매기들이 배를 뒤쫓아 오는 이유는 생선들이 바다에 던져질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는 기괴한 명언을 남긴다. 사실 그 누구도 칸토나가 꼭 그렇게까지 추방당하고 격리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파괴적인 본능으로 인해 칸토나는 축구인생의 큰 오점을 남겼고 맨유의 성적은 추락해야했다. 맨유는 그 시즌에서 블랙번 로버스에게 단지 1점 차로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자리를 내주고 말았으며(※그 시진은 칸토나가 맨유 소속으로 뛰는 동안 유일하게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시즌이 되고 말았다) FA컵 결승전에서도 에버튼에게 0-1로 연달아 패하고 말았다. 95년 10월. 퍼거슨감독의 도움으로 팀에서 퇴출될 위기를 넘긴 칸토나가 리버풀과의 경기에 돌아왔을 때 그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흥분을 불러왔다. 경기 시작 2분만에 칸토나는 팀 동료 니키 버트의 첫 골을 어시스트했고 후반전에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2-2 무승부를 이끌었다. 맨유 팬들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으며 칸토나는 재기했다.
맨유는 이 무렵 무려 12점 차로 뉴캐슬을 따돌리며 우승을 향해 질주했다. 칸토나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멋진 발리슛으로 팀을 1-0 승리로 이끈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결정적인 골들을 작렬시켰다. 결국 칸토나는 맨유를 시즌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FA컵 결승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유일한 결승골을 넣으며, 3년간 맨유를 2관왕으로 만들어냈다. 96-97시즌 그는 서른 한 번째 생일을 몇 주 앞두고 다시 한번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맨유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홀연히 은퇴했다. 칸토나의 시대는 지났지만 그의 위대한 유산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가 맨유에 공헌한 것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는 맨유에서 5년간 활약하며, 4차례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2차례 FA컵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으며, 191경기에 출전해 88골을 뽑아냈다. 그 당시 그 어떤 선수보다 칸토나의 기술과 볼을 다루는 능력은 우수했다. 그가 경기전 몸을 푸는 것만으로도 팬들에게 행복을 전해줄 만큼 그는 경기장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그러나 칸토나가 맨유에게 유래없는 큰 성공을 안기는 동안에도 이상하리만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큰 성공을 얻지 못했다. 특히 1997년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독일)와의 경기 후반, 아깝게 득점기회를 놓쳐 패했던 때는 더욱 그랬다. 이를 두고 몇몇 사람들은 칸토나가 진정 천재의 능력을 지녔는지 의구심을 갖지만 타고난 능력에 관한 한 그와 비교될 수 있는 선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맨유 팬들은 칸토나를 지난 2001년 '세기의 선수'로 선정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조지 베스트와 보비 찰튼경도 맨유의 역사에서 중요한 길목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그 어떤 선수도 칸토나보다 이 유명하고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클럽(맨유)에 드라마틱하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