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별 본고사에 출제된 수학 문제의 오류를 지적했다가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소송을 벌였지만 패소한 전직 대학교수의 법관 공격 사건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런데 살인미수죄로 기소될 가능성이 높은 이 교수에 대한 동정여론이 이상하리만치 높다. 물론 그의 행동은 용서받기 힘든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유언을 '악한 법관도 법관이다'라는 말로 바꾸어 해석하는 일에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 것 같다. 이제 얼마 후에는 대기업 일가의 증여세 포탈 사건에 대한 재판과 재벌 회장의 횡령 혐의에 관한 재판이 재개될 예정이다. 사실 재벌과 관련한 여러 재판들은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고의적으로 또 너무 오랫동안 연기되었다. 많은 국민들은 법원이 지나치게 기업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국민들의 의심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가엾은 대학교수에 대한 시선 역시 그러한 의심에서 나온 동정일 것이다.
2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며 잊혀졌던 탈옥수 지강헌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2006년 홀리데이라는 영화를 통해 다시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영화보다 더 생생한 뉴스를 통해 '유력무죄(有力無罪), 무력유죄(無力有罪)'라는 말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사법부와 재판관은 법과 법적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을 열고 판결을 내리면 그만이다. 사법부 스스로가 재벌 관련 재판에 대해 당당하다면 여론의 눈치를 볼 이유가 하등 없다. 그런데도 법원은 여전히 세간의 눈치를 보고 있다. 국민들의 시선이 예전만큼 곱지 않다는 것을 사법부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기업의 심기를 건드리는 판결 역시 부담스럽다.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존의 판결이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고 국민들은 믿고 있다. 그리고 사법부 스스로도 이러한 과거의 불공정성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에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물론 재판 결과가 어찌 나오건 사회적으로 많은 파장이 일 것은 자명해 보인다. 재판부의 말 못할 고뇌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사법부가 자기의 권리이자 의무를 방기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는 곤란하다. 사법부는 지금 큰 역사적 선택 앞에 선 것 같다. 앞으로 이루어질 여러 가지 판결들은 사법부가 법과 양심 앞에 떳떳한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 독재 하에서 사법부의 독립이 보장되지 못하고 군사 정권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시절, 재판관이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기는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국민 모두가 가혹한 정권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 사법부라고 예외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정부 독재 시절에도 사법부는 비교적 독립성을 잘 수호해왔고, 정권의 부당한 압력에 맞서 훌륭한 재판을 내린 판사들도 수없이 많았다. 많은 시련과 유혹 속에서도 판사들 스스로가 삼가고 정의를 지킨 결과였다. 그래서 과거사에 대한 이런 저런 분란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가 없었고 국민들 역시 사법부를 존중했다. 현재의 대통령과 수 많은 과거와 현재의 많은 대통령 후보들이 판사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간접적으로 입증해 준다. 또 판사 출신의 국회의원 중에 높은 평가를 받는 의원이 비교적 많다는 점도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높여주었다.
그런데 최근 사법부의 여러 판결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때가 많다. 예전처럼 외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법부의 권한은 과거에 비해 오히려 강화된 측면이 있다.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여러 문제와 갈등을 법적 수단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사법부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역할도 커지고 있는데, 사법부가 그러한 사회적 기대를 외면할 때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재판관들 스스로가 지나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는 점이 제일 커 보인다. 재판관 스스로 사회의 지도층, 지배층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편향적이 되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재판관이 우리 사회의 마지막 양심이라는 인식이 강한 대한민국이다. 다른 법조인들이 권력과 돈을 탐하더라도 판사들만은 민중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들은 여전히 믿고 있다. 그런 사법부가 힘 있는 자의 편을 들고 중립과 양심으로부터 등을 돌린다면, 국민들도 사법부로부터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수도 이전에 관한 특별법’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결을 받은 것을 놓고 여러 견해가 오간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헌재가 ‘서울이 수도인 사실’이 관습 헌법이라고 해석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헌법재판소가 사실상 헌법을 만들어 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것이다. 심판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떠나 헌법재판관과 사법부 재판관들이 점차 보수적이고 권위적이 되어 가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헌법재판소가 사법 권력을 정치보다 우위에 놓으려는 의도인 것 같아 매우 걱정스럽다. 우리나라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고 자질이 떨어지는 의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인의 도덕성과 자질이 떨어진다고 해서 법(法)이 정치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현상을 가지고 제도를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치인들 스스로가 입법 작용의 창조성과 자율성을 포기하고 사법부와 법에 기대려고만 하니 정치의 법에 대한 종속이 커지고 있다. 행정 수도를 이전해서 국토의 균형 발전을 꾀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정치적 상상력과 창조력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정치적 상상력과 합의를 법적으로 규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미국은 사법부 우위의 국가라는 주장을 한다. 영, 미 법의 특성상 판례가 사실상의 법규 창조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 등 여러 사법 절차에 대한 국민의 참여가 보장되기 때문에 사법부의 우위가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미국에서 조차도 대통령 선거와 잇단 스캔들 사건의 판결을 거치는 동안, 국민들이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해양법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재판관이 판례를 통해 법규를 창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판례를 존중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과 국민의 신뢰이익을 보장하기 위함일 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추진 중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국민이 사법 절차에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재판관들은 훨씬 더 신중해야 하고 중립적이어야 한다. 헌법재판소 역시 예외가 아니다. 헌법이라는 정치적 산물을 다루기 때문에 일반 법원보다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헌법이 기대하는 틀 내에서만 그 재량을 행사할 수 있다.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정도의 재량을 행사하고 강제력을 부여 하는 것은 재량의 남용이다.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아도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것이 관습 헌법’이라는 해석은 헌법 재판소가 해석 재량을 넘어서 권위를 남용한 것으로 보인다.
양심의 심판대 앞에 선 사법부
대학별 본고사에 출제된 수학 문제의 오류를 지적했다가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소송을 벌였지만 패소한 전직 대학교수의 법관 공격 사건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런데 살인미수죄로 기소될 가능성이 높은 이 교수에 대한 동정여론이 이상하리만치 높다. 물론 그의 행동은 용서받기 힘든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유언을 '악한 법관도 법관이다'라는 말로 바꾸어 해석하는 일에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 것 같다. 이제 얼마 후에는 대기업 일가의 증여세 포탈 사건에 대한 재판과 재벌 회장의 횡령 혐의에 관한 재판이 재개될 예정이다. 사실 재벌과 관련한 여러 재판들은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고의적으로 또 너무 오랫동안 연기되었다. 많은 국민들은 법원이 지나치게 기업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국민들의 의심은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가엾은 대학교수에 대한 시선 역시 그러한 의심에서 나온 동정일 것이다.
2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며 잊혀졌던 탈옥수 지강헌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2006년 홀리데이라는 영화를 통해 다시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영화보다 더 생생한 뉴스를 통해 '유력무죄(有力無罪), 무력유죄(無力有罪)'라는 말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사법부와 재판관은 법과 법적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을 열고 판결을 내리면 그만이다. 사법부 스스로가 재벌 관련 재판에 대해 당당하다면 여론의 눈치를 볼 이유가 하등 없다. 그런데도 법원은 여전히 세간의 눈치를 보고 있다. 국민들의 시선이 예전만큼 곱지 않다는 것을 사법부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기업의 심기를 건드리는 판결 역시 부담스럽다. 사법부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존의 판결이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고 국민들은 믿고 있다. 그리고 사법부 스스로도 이러한 과거의 불공정성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에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물론 재판 결과가 어찌 나오건 사회적으로 많은 파장이 일 것은 자명해 보인다. 재판부의 말 못할 고뇌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사법부가 자기의 권리이자 의무를 방기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서는 곤란하다. 사법부는 지금 큰 역사적 선택 앞에 선 것 같다. 앞으로 이루어질 여러 가지 판결들은 사법부가 법과 양심 앞에 떳떳한지를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 독재 하에서 사법부의 독립이 보장되지 못하고 군사 정권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시절, 재판관이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기는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국민 모두가 가혹한 정권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 사법부라고 예외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행정부 독재 시절에도 사법부는 비교적 독립성을 잘 수호해왔고, 정권의 부당한 압력에 맞서 훌륭한 재판을 내린 판사들도 수없이 많았다. 많은 시련과 유혹 속에서도 판사들 스스로가 삼가고 정의를 지킨 결과였다. 그래서 과거사에 대한 이런 저런 분란에도 불구하고 사법부에 대해서는 별 이야기가 없었고 국민들 역시 사법부를 존중했다. 현재의 대통령과 수 많은 과거와 현재의 많은 대통령 후보들이 판사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간접적으로 입증해 준다. 또 판사 출신의 국회의원 중에 높은 평가를 받는 의원이 비교적 많다는 점도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높여주었다.
그런데 최근 사법부의 여러 판결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때가 많다. 예전처럼 외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법부의 권한은 과거에 비해 오히려 강화된 측면이 있다.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여러 문제와 갈등을 법적 수단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사법부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역할도 커지고 있는데, 사법부가 그러한 사회적 기대를 외면할 때가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재판관들 스스로가 지나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는 점이 제일 커 보인다. 재판관 스스로 사회의 지도층, 지배층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편향적이 되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재판관이 우리 사회의 마지막 양심이라는 인식이 강한 대한민국이다. 다른 법조인들이 권력과 돈을 탐하더라도 판사들만은 민중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들은 여전히 믿고 있다. 그런 사법부가 힘 있는 자의 편을 들고 중립과 양심으로부터 등을 돌린다면, 국민들도 사법부로부터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수도 이전에 관한 특별법’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결을 받은 것을 놓고 여러 견해가 오간 적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헌재가 ‘서울이 수도인 사실’이 관습 헌법이라고 해석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헌법재판소가 사실상 헌법을 만들어 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것이다. 심판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떠나 헌법재판관과 사법부 재판관들이 점차 보수적이고 권위적이 되어 가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헌법재판소가 사법 권력을 정치보다 우위에 놓으려는 의도인 것 같아 매우 걱정스럽다. 우리나라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고 자질이 떨어지는 의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인의 도덕성과 자질이 떨어진다고 해서 법(法)이 정치보다 우위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현상을 가지고 제도를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치인들 스스로가 입법 작용의 창조성과 자율성을 포기하고 사법부와 법에 기대려고만 하니 정치의 법에 대한 종속이 커지고 있다. 행정 수도를 이전해서 국토의 균형 발전을 꾀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정치적 상상력과 창조력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정치적 상상력과 합의를 법적으로 규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미국은 사법부 우위의 국가라는 주장을 한다. 영, 미 법의 특성상 판례가 사실상의 법규 창조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 등 여러 사법 절차에 대한 국민의 참여가 보장되기 때문에 사법부의 우위가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미국에서 조차도 대통령 선거와 잇단 스캔들 사건의 판결을 거치는 동안, 국민들이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해양법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재판관이 판례를 통해 법규를 창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판례를 존중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과 국민의 신뢰이익을 보장하기 위함일 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추진 중에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국민이 사법 절차에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재판관들은 훨씬 더 신중해야 하고 중립적이어야 한다. 헌법재판소 역시 예외가 아니다. 헌법이라는 정치적 산물을 다루기 때문에 일반 법원보다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헌법이 기대하는 틀 내에서만 그 재량을 행사할 수 있다.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정도의 재량을 행사하고 강제력을 부여 하는 것은 재량의 남용이다.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아도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것이 관습 헌법’이라는 해석은 헌법 재판소가 해석 재량을 넘어서 권위를 남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