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를 초래한 1차,2차,3차 투기

변성찬2007.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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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내용은 박태견 저서 (참여정부,뱀파이어와 손잡다)의 내용입니다.

 

 IMF사태후 한국의 양극화는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세 차례의 투기판이 만들어낸 필연적 귀결이다. 1차 투기판은 1997~1998년 벌어졌고,2차 투기판은 1999~2000년,3차 투기판은 2001년이래 현제까지 진행형이다.

1차 (1997~1998년) 투기판의 주 동인은 살인적 고금리정책이었다.

2차 (1999~2000년)의 주 동인은 주식거품이었다.

3차(2001~2005년 현재)의 주 동인은 부동산투기였다.

1차 투기판이 전개되는 과정부터 살펴보자.1997년12월3일, 우리 정부는 IMF로부터 긴급 구제금융 5백80억3천5백만 달러를 차입하는 약정서에 서명하는 대가로 경제운영권을 IMF로 넘겼다.IMF는 즉각 '경제 피식민지' 한국에 대해 '고리대'수준의 살인적 고금리 정책을 강행했다. 명분은 금리를 감당 못할 부실기업은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때 40%를 넘었던 콜금리를 감당할 기업은 없었다. 무수한 기업이 쓰러졌고, 이들 기업은 외국자본에게 헐값으로 넘어갔다. 살인적 고금리 정책을 강요하던 IMF가 연쇄 기업도산과 무더기 실업 발생으로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지자'점진적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여 콜금리 인하를 용인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4월말부터였고, 콜금리는 그해 10월 들어 한자리 숫자로 낮아졌다.

 이 기간 동안 살인적 고금리의 최대 수혜자는 외국자본이었다. 고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기업과 금융기관, 부동산 등을 헐값에 사들여 천문학적 차익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지부지를 보는 국내 세력도 있었다.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고 있었던 국내의 '현금 보유자'들이 그들로 그들은 가만히 앉아 막대한 불로소득을 거둘 수 있었다. 반면에 은행 돈 등을 빌려 집을 샀거나 장사를 하던 이들은 고리대 수준의 이자를 수탈당해야 했다. 돈을 빌린 이의 주머니에서 돈을 빌려준 이의 주머리로 돈이 옮겨가는 수탈적 국면이 전개되며, 1차 양극화가 완료됐다.

1차 양극화의 주범은 엄격히 말해 IMF였으나, "고금리 정책은 한국에게 독약이 될 것"이라던 국내외 전문가들의 경고 및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IMF정책을 추종한 정부에게도 2차적 책임이 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2차 투기판은 한국은행의 콜금리 인하와 함께 시작됐다. 금리가 낮아지자 돈이 증시로 몰리기 시작했다. 우선 1998년 후반기 종합주가지수가 2백대이던 증시에 외국계가 몰려들면서 엄청난 차익을 거둘었다. 그 뒤를 이어 1999년초부터 IMF직후 살인적 고금리로 부를 불린 현금 보유자들이 외국인 뒤를 좇아 증시로 몰려가면서 그 유명한 '묻지마 투자'가 시작됐다. 2000년 3월 미국의 나스닥 거품이 꺼지기 전까지 2년간 현금 보유자들은 증시에서 천문학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반면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잔치를 보면서도 돈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대다수는 뒤늦게 은행 돈 등을 빌려 참가했으나, 결과는 막판 '상투잡기'였고 돈을 벌기는 커녕 그나마 있던 몇푼 안되던 돈마저 털려야 했다. 이렇게 해서 2차 양극화가 완료됐다.

 이 기간중 IMF 신탁통치 조기졸업을 추구해온 정부는 각종 지원책을 통해 묻지마 투자를 부추겼으며, 여기에 거치지 않고 '플라스틱 거품'을 양산한 신용카드 촉진책까지 병행해 경제를 한층 골병 들게 만들었다.

 양극화가 회복불능의 치명적 형태로 진해된 것은 200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된 3차 투기판이었다.3단계 양극화의 첨병은 아파트 투기였다. 아파트 투기의 동인은 주가가 연일 폭락을 거듭하던 2000년 8월 취임한 진념 경제부총리가 서둘러 취한 부동산규제 완화,금리 인하 등 일련의 건설경기 부양책이었다.

 경제부총리에 취임한 진념이 가장 먼저 취한 정책은 건설경기 부양 '올인'이었다 그는 우선 아파트 미분양분을 해소하기 위해 그래 9월부터 2001년말까지 한시적으로 1년 이상 보유한 기존주택을 판 뒤 신축 분양주택을 구입할 때는 양도소득세 세율을 종전의 20~40%에서 10%로 대폭 낮추고,2001년 사회간적자본 (SOC) 예산도 당초 11조원에서 14조원 수준으로 늘렸다 또한 아파트를 지을 공공택지 개발물량을 8백50만평에서 1천만평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취득세 중과세제도도 폐지했다. 이와 함께 임대사업자가 임대주택을 구입할 때의 대출 한도를 현행 최고 3천만원에서 6천만원으로 늘려주고, 임대주택을 담보로 발행된 자산담보부증권(ABS)에 대해서도 이자소득세 감면혜택을 주기로 했다. 지념 경제팀의 '부동산경기 올인'은 IMF사태 발발직후인 1998년11월 건설교통부가 집값 폭락 및 건설업체 연쇄도산에 놀라 취했던 아파트 분양권 전매 전면허용등의 조치와 맞물리면서 2001년 본격적으로 아파트값 폭등을 초래했다.

  이에 앞서 건교부는 1998년 11월12일 주택경기 침체 및 아파트 미분양 해소를 위해 1999년 4월부터 존전의 전매제한 기간을 없애고 아파트 계약후 등기없이 언제라도 분양권을 매매할 수 있게 했다. 건교부는 동시에 1999년1월부터 공공개발택지에 건설된 민영주택의 재당첨제한기간(2년)을 없애 청약을 통해 주택을 이미 공급받은 사람도 아무 제한없이 다른 주책을 청약할 수있게 했다. 이와 함께2가구 이상 주택 소유자도 민영주택 분양신청에서 청약 1쉰위 자격을 가질 수있게 했고, 민영주택의 무주택 우선 분양제와 장기간 청약통장가입자에게 우선 청약권을 주던 청약배수제도도 철폐했다.

  이밖에 의무화돼 있던 아파트단지내 공중화상실.유치원. 약국설치. 재개발사업회계감사, 대지안의 공지확보의무, 택지환매 등도 폐지했다. 또한 일조권 확보를 위해 옆 건물과 띄어야 하는 거리를 종전의 건물높이의 0.8배에서 입지여건에 따라 0.4~0.8배로 축소했고, 건축허가 없이 지을 수 있는 건물 연면적도 15평에서 45평으로 확대했다. 이와 함께 아파트 분양가도 풀었고, 2000년 3월에는 1가구 1통장으로 제한해온 청약예금 가입자격을 20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가능하도록 고쳤다. 아파트 투기를 부채질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이미 모든 규제를 패제한 마당에 진념 부총리가 위임해 추가로 노골적인 '부동산 올인 정책'을 펴니, 아서 '묻지마 투자'에서 단단히 한몫 챙긴 4백조원대 부동자금들이 아파트시장으로 몰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어싸. 금융권에서 빠져나온 부동자금들은 일헤히 강남으로 집중됐고 2001년 후반부터 아파트값 폭등이 시작됐다. 특히 2001년 가을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공격을 당하는 '9.11사태'가 발발해 세계경제가 출렁이면서,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필두로 세계 중앙은행들이 잇따라 금리를 내리고 한국은행도 여기에 편승해 세 차례 금리인하를 단행하면서 아파트 투기는 결정적 계기를 맞이했다. 미국을 겨냥한 9.11테러가 '나비효과' 이론에 따라 한국에 아파트거품을 일으키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정부가 아파트 경기부양책이라는 독약을 쓴 결과는 너무 뚜렷하게 나타났다. 2001년 3.4분기의  경우 수출과 설비투자는 계속 부진했지만 유독 건설업만은 호조를 보여,3.4분기의 건설업의 성장기여율은 2.4분기의 3.3%에서34.1%로 급증했고,2004년말 현재 건설업이 한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17%로 급증했다. 또한 건설경기 부양은 그후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변함없는 핵심 경기부양책으로 군림하며 양극화를 극한적 형태로 확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