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인천인권영화제에서 집행위원을 하면서 만났던 이 이야기를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상영을 했었구요. 당시 푸른영상 감독이셨던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척 존경하는 김태일 선생님의 작품인데요 .. 꽤 긴 시간이었음에도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으며 봤던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이 거의 5~6년 되었는데요 .. 참 감개무량합니다. 억울해서 저 역시도 참 많이도 울었었는데 .. 당연히 무죄이지만 그것이 밝혀진게 32년 만이네요. 너무 긴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긴 시간 ..
인민혁명당사건 [人民革命黨事件]
인민혁명당(약칭 인혁당)이라는 대규모 지하조직에 의한 국가전복기도가 있었다고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
언제 1964년 8월 14일
누가 인민혁명당
무엇을 대규모 지하조직에 의한 국가 전복기도
어떻게 중앙정보부가 발표
약칭 인혁당사건이라고 한다.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포섭, 당조직을 확장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것"으로 발표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직후 한국인권옹호협회가 무료변호를 맡고 피고인에게 가해진 고문내용을 폭로하여, 1965년 1월 20일 선거공판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도예종(都禮鍾), 양춘우(楊春遇)는 각각 징역 3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판결에 대하여 검찰은 불복, 항소심을 제기하였고, 그 해 5월 29일 열린 항소심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고, 도예종·양춘우 외에도 박현채를 비롯한 6명에게 징역 1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이후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투쟁을 주도하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배후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했고, 1975년 4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이 구속되었다. 이 중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등 8명은 사형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불과 20시간 만인 4월 9일 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해외에도 알려져, 국제법학자협회가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인혁당 사건은 1964년과 1974년 두번 있었습니다. 그 중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건 1974년 4월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1차 인혁당 사건에서는 북괴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지하조직이 국가를 변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구속하고 조사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수사를 맡앗던 서울지검 공안부는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 검사들이 약20일간의 수사 끝에 "양심상 도저히 기소를 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고 기조장의 서명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무죄라는 담당 검사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국가보안법 대신 반공법을 적용하여 65년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전원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잇는 2차 인혁당 사건은 1974년 4.3 긴급조치 4호 선포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구속되진 3주 후인 4월 25일 발생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신직수는 10년전의 1차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씌워 관련자들을 구속했었습니다.
당시 황산덕 법무장관이 밝힌 사건의 내용은 "인력당은 '남한에 강력한 지하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북괴간첨 김상한이 재남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1962년 1월에 조직한 지하당이다. 인혁당의 조직과 활동 상황은 1964년 6.3사태 배후조종자로 인혁당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처음으로 드러났는데 당시 김상한과 재정책 김배영이 1962년 5월, 월북하고 없었기 때문에 검거된 자들을 고문에 의한 조작설을 유포, 법정투쟁을 통해 극히 경미한 형을 받았다. 인혁당은 그 뒤 지하로 잠복했다가 1972년 7월 4일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지하활동을 강화, 1973년 10월 이후의 학원소요와 유류파동, 개헌 청원 서명운동이 일어나자 제2의 4.19로 사회혼란을 조장, 민중 봉기로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적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속단, 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을 선동, 폭력에 으한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검거된 것이다." 입니다.
이후 정부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하면서 이 사건 관련자 서도원, 도예종, 김용원, 우홍선, 송상건, 여정남, 김한덕, 유진건, 나경일, 전재권 등 23명을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이들은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 대법원확정판결에 이르기까지 3심을 거치는 동안 형량을 거의 변함이 없었고, 특히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건, 여정남 등 8명의 피고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형이었습니다. 당시 인혁당사건을 둘러싸고 또다시 고문에 의한 조작설이 나돌았습니다. 피고인들의 법정진술과 가족들에 의해 고문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고문과 조작설을 대담하게 터뜨리면서 항의하고 나선 것은 외국인 조지 오글 목사와 제이스 시노트 신부였습니다. 이들은 인혁당은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밝혓다가 얼마 후 한국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인혁당사건의 고문과 조작설에 대해 박통과 황법무장관은 이를 부인하면서 4월 8일 대법원은 8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확정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날이 4월9일 이들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습니다. 확정판결 다음날 사형을 집행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 이었고, 시체를 유족들에게 인도하는 과정에서도 고문흔적으로 없애기 위해 불법적으로 화장을 하는 등 의혹의 소지를 남겼습니다.
여기까지는 김상웅 선생님 께서 쓰신 책에서 추렸습니다.
간단히 사건을 말씀드리자면 1972년 유신체제의 출범 후 긴급조치1,2,3,4호 등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데모가 잠잠했없습니다. 하지만 1974년 초부터 학원가를 중심으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박통의 독재 유지를 위한 유신 이후, 그 전보다 정권자체의 정당성이나 도덕성은 취약해졌습니다. 만약 학원가의 움직임을 그대로 놔둘 경우, 더 큰 반정권 투쟁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74년 처음 조작한 사건이 민청학련 사건이었습니다. 혐의 내용은 다른 사건과 거의 동일합니다. 민청학련 사건의 경우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정권의 도덕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민청학련 이후 박통 정부는 민주화 운동 투쟁에 있어서 지도권을 와해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다시 한번 법을 가지고 조작한 사건이 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부정적 움직임이 있었지만, 군사정부의 사법체계하에서 헌법과, 법률에 따른 정당한 절차를 요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문과 허위에 의한 조작으로 8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 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은 군사정부가 학생시위가 절정에 올랐을 때 정권안보용으로 삼은 스케이고트(제물로 바치는 산양)였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은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하나의 기폭제 , 흐름으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 네이버에 있는 답변중에서
[미디어 칸] 2007년 01월 23일 11:28:48
‘인혁당 재건위 사건’ 32년만에 무죄
‘사법 살인’으로 논란을 빚어온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희생자 8명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문용선 부장판사)는 23일 ‘인혁당 재건위’사건에 연루돼 지난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이 집행돼 숨진 우홍선씨 등 8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32년 만에 법정에서 다시 오른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의 명예가 뒤늦게나마 회복됐다.
재판부는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사안을 제외한 모든 사안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또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당시 경찰 수사과정, 중앙정보부 수사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조서 등에 대해서는 혹독한 가혹행위와 고문, 장기간 구금과정에서 이뤄진 것이 인정된다”며 증거 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군사법정에서 이뤄진 공판 조서에 보면 일부 피고인의 진술이 공소 사실에 부합하는 게 조금씩 있지만 그 자체가 앞뒤 모순되는 부분이 상당히 있어 신빙성을 인정하기 힘들어 유죄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그러나 여정남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중 ‘반독재 구국선언’ 혐의 부분은 다른 재판에 병합돼 유죄 판결이 확정됐고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사실을 그대로 인정,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최악의 공안날조…사법 살인”-
인혁당 사건은 두차례 있었다. 대일 굴욕외교 반대시위가 거셌던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노린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1차 인혁당 사건때는 41명이 구속돼 징역형을 받았다. 10여년 뒤 유신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군사정권은 남한내 지하조직으로 암약 중인 인혁당이 학생운동권의 배후라며 반(反)유신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구속자 중 8명은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기소돼 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된 지 20여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형이 집행됐다.
국내외 인권단체로부터 ‘유신시대 최악의 공안날조 사례’로 꼽혀왔으며 당시 재야 법조계는 이를 ‘사법 살인’으로 규정했다. 게다가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까지 했다.
그 후 30여년 동안 당사자와 가족,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천주교 인권위원회 산하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등 관계자와 관련단체들은 이 사건에 대해 수차례 진상규명 작업을 벌여왔다.
‘잘못된 판결’ 인정…피고인 명예회복-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고문과 피의자 신문조서 및 진술조서 위조 등을 통한 중정의 조작극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유족들은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그 해 12월 법원에 재심청구를 냈다. 2005년 12월27일 법원에서 재심 결정이 내려졌다. 앞서 그 해 12월7일 국정원 과거사위는 이 사건을 “권위주의 정부 시절 중정이 자행한 권력 오용과 남용으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지난해 12월에는 검찰이 ‘인혁당 사건’ 재심 공판에서 이례적으로 구형하지 않고 재판을 끝내 과거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잘못이 있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검찰은 “과거 기록이나 재심 공판에서 당시 수사기관의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나타났고 적법절차가 준수되지 않았다는 증인 진술도 있었다”고 말했다. 검찰이 구형을 하지 않고 유·무죄에 대한 입장 표명조차 없이 재판을 끝냈다는 것 자체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인혁당 사건은 재심 결정에 3년, 재심 선고에 1년 가량이 소요된 끝에 무죄 선고로 끝을 맺었다. 유신정권 시절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법원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인정하고 피고인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인혁당 사건 재심 재판은 유인태 의원과 이철 한국철도공사 사장, 시인 김지하씨 등 유명인사와 40여명이라는 많은 증인이 나와 당시 상황을 생생히 증언해 눈길을 끌었다.
[사설] 무죄..무죄..무죄..
피고인석에는 피고인들이 없었다. 이미 32년 전 억울하고 원통한 가슴을 부여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신 그 자리는 기나긴 인고와 신산의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이 메우고 있었다. 피고인들에 대한 사형집행 당시 이들은 홍안흑발(紅顔黑髮)의 청·장년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주름살 가득한 백발노인이 되었다. 이윽고 재판장의 무죄선고가 내려지자 유족들은 기쁨과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고, 방청객들도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법정은 환희와 눈물의 바다로 변했다. 그러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 피고인들은 죽어 한 줌 흙이 됐고, 유족들의 몸과 마음도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유신독재정권 치하였던 1975년 당시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돼 숨진 고 (故) 우홍선씨 등 8명에게 32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은 어제 열린 인혁당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협박 등이 인정되고 검찰조서 등의 증거능력이 없다”면서 긴급조치·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가 위법한 수사·재판의 제물이 됐던 피고인 8명은 죽어서나마 명예회복을 하게 됐다. 또 피고인들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던 법원도 자신이 행한 재판의 오류를 최종적으로 자인(自認)함으로써 지난날의 오점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 시절 자행된 ‘사법살인’의 대표적 인 사건이자 정권에 예속된 사법부의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으로 손꼽혀왔다. 특히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비난을 받았고, 대한민국이 ‘반문명국가’ 대열에 합류하게 된 주요한 계기가 됐던 것이다. 이 같은 굴레를 32년이 지난 지금에서나마 벗어버리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특히 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피고인들의 명예회복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온몸을 다 바쳐 싸워온 유족들에게 거듭 경의를 표한다. 또 유족들을 도와 사법 정의 실현에 헌신해온 인혁당 사건 대책위원회와 천주교 인권위원회 등 여러단체들의 노력도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인혁당 사건 재심 무죄선고를 계기로 우리는 고문과 조작으로 점철된 지난날의 공안사건들에 대해 법원의 재심이 더욱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무죄 선고도 유족과 시민단체들이 재심을 청구한 지 무려 4년2개월 만에 이뤄졌고,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진 것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수사·재판의 불법행위를 밝혀냈기에 가능했다. 아직도 재심의 문턱은 높다는 얘기이며, 따라서 법원과 검찰이 적극적인 의지만 갖는다면 우리 현대사의 그늘진 구석을 어렵잖게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 이래 기회 있을 때마다 지난날 사법부가 저지른 과오의 매듭을 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사법부 수장의 이 같은 대국민 언약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고 믿으며, 이를 위해서는 지나치게 까다로운 현행 재심개시요건을 대폭 개정하는 등의 구체적인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차제에 사형제 폐지작업에도 더욱 속도가 붙기를 희망한다. 사형제 폐지의 당위성은 또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미 국회에는 여야 의원 175명의 이름으로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이 제출돼 있다. 국회는 하루 빨리 법안을 통과시켜 우리나라를 문명국(文明國)으로 진입시켜야 한다. 만일 사형제가 없었다면 인혁당 피고인들은 비록 호호백발 노년에서나마 가족·친지들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문·조작사건의 재심을 확대하고, 사형제를 없애는 것, 그것이 억울하게 죽은 여덟명의 혼을 달래고 유족들에게 보상하는 길이다.
인혁당 사건이란 ..
저는 인천인권영화제에서 집행위원을 하면서 만났던 이 이야기를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상영을 했었구요. 당시 푸른영상 감독이셨던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척 존경하는 김태일 선생님의 작품인데요 .. 꽤 긴 시간이었음에도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으며 봤던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이 거의 5~6년 되었는데요 .. 참 감개무량합니다. 억울해서 저 역시도 참 많이도 울었었는데 .. 당연히 무죄이지만 그것이 밝혀진게 32년 만이네요. 너무 긴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긴 시간 ..
인민혁명당사건 [人民革命黨事件]
인민혁명당(약칭 인혁당)이라는 대규모 지하조직에 의한 국가전복기도가 있었다고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
언제 1964년 8월 14일
누가 인민혁명당
무엇을 대규모 지하조직에 의한 국가 전복기도
어떻게 중앙정보부가 발표
약칭 인혁당사건이라고 한다.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한의 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반국가단체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포섭, 당조직을 확장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것"으로 발표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직후 한국인권옹호협회가 무료변호를 맡고 피고인에게 가해진 고문내용을 폭로하여, 1965년 1월 20일 선거공판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도예종(都禮鍾), 양춘우(楊春遇)는 각각 징역 3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나머지 1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판결에 대하여 검찰은 불복, 항소심을 제기하였고, 그 해 5월 29일 열린 항소심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선고를 내리고, 도예종·양춘우 외에도 박현채를 비롯한 6명에게 징역 1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이후 유신반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투쟁을 주도하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배후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했고, 1975년 4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이 구속되었다. 이 중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등 8명은 사형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지 불과 20시간 만인 4월 9일 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건으로 해외에도 알려져, 국제법학자협회가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인혁당 사건은 1964년과 1974년 두번 있었습니다. 그 중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건 1974년 4월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1차 인혁당 사건에서는 북괴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지하조직이 국가를 변란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구속하고 조사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수사를 맡앗던 서울지검 공안부는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 검사들이 약20일간의 수사 끝에 "양심상 도저히 기소를 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고 기조장의 서명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무죄라는 담당 검사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국가보안법 대신 반공법을 적용하여 65년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전원 유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잇는 2차 인혁당 사건은 1974년 4.3 긴급조치 4호 선포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구속되진 3주 후인 4월 25일 발생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신직수는 10년전의 1차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를 씌워 관련자들을 구속했었습니다.
당시 황산덕 법무장관이 밝힌 사건의 내용은 "인력당은 '남한에 강력한 지하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북괴간첨 김상한이 재남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1962년 1월에 조직한 지하당이다. 인혁당의 조직과 활동 상황은 1964년 6.3사태 배후조종자로 인혁당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처음으로 드러났는데 당시 김상한과 재정책 김배영이 1962년 5월, 월북하고 없었기 때문에 검거된 자들을 고문에 의한 조작설을 유포, 법정투쟁을 통해 극히 경미한 형을 받았다. 인혁당은 그 뒤 지하로 잠복했다가 1972년 7월 4일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지하활동을 강화, 1973년 10월 이후의 학원소요와 유류파동, 개헌 청원 서명운동이 일어나자 제2의 4.19로 사회혼란을 조장, 민중 봉기로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적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속단, 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을 선동, 폭력에 으한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검거된 것이다." 입니다.
이후 정부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하면서 이 사건 관련자 서도원, 도예종, 김용원, 우홍선, 송상건, 여정남, 김한덕, 유진건, 나경일, 전재권 등 23명을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이들은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 대법원확정판결에 이르기까지 3심을 거치는 동안 형량을 거의 변함이 없었고, 특히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건, 여정남 등 8명의 피고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형이었습니다. 당시 인혁당사건을 둘러싸고 또다시 고문에 의한 조작설이 나돌았습니다. 피고인들의 법정진술과 가족들에 의해 고문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고문과 조작설을 대담하게 터뜨리면서 항의하고 나선 것은 외국인 조지 오글 목사와 제이스 시노트 신부였습니다. 이들은 인혁당은 수사기관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밝혓다가 얼마 후 한국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인혁당사건의 고문과 조작설에 대해 박통과 황법무장관은 이를 부인하면서 4월 8일 대법원은 8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확정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날이 4월9일 이들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습니다. 확정판결 다음날 사형을 집행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 이었고, 시체를 유족들에게 인도하는 과정에서도 고문흔적으로 없애기 위해 불법적으로 화장을 하는 등 의혹의 소지를 남겼습니다.
여기까지는 김상웅 선생님 께서 쓰신 책에서 추렸습니다.
간단히 사건을 말씀드리자면 1972년 유신체제의 출범 후 긴급조치1,2,3,4호 등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데모가 잠잠했없습니다. 하지만 1974년 초부터 학원가를 중심으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박통의 독재 유지를 위한 유신 이후, 그 전보다 정권자체의 정당성이나 도덕성은 취약해졌습니다. 만약 학원가의 움직임을 그대로 놔둘 경우, 더 큰 반정권 투쟁을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74년 처음 조작한 사건이 민청학련 사건이었습니다. 혐의 내용은 다른 사건과 거의 동일합니다. 민청학련 사건의 경우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한마디로 당시 정권의 도덕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민청학련 이후 박통 정부는 민주화 운동 투쟁에 있어서 지도권을 와해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다시 한번 법을 가지고 조작한 사건이 2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부정적 움직임이 있었지만, 군사정부의 사법체계하에서 헌법과, 법률에 따른 정당한 절차를 요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문과 허위에 의한 조작으로 8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 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은 군사정부가 학생시위가 절정에 올랐을 때 정권안보용으로 삼은 스케이고트(제물로 바치는 산양)였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은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하나의 기폭제 , 흐름으로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 네이버에 있는 답변중에서
[미디어 칸] 2007년 01월 23일 11:28:48
‘인혁당 재건위 사건’ 32년만에 무죄
‘사법 살인’으로 논란을 빚어온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희생자 8명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문용선 부장판사)는 23일 ‘인혁당 재건위’사건에 연루돼 지난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이 집행돼 숨진 우홍선씨 등 8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32년 만에 법정에서 다시 오른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의 명예가 뒤늦게나마 회복됐다.
재판부는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사안을 제외한 모든 사안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또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당시 경찰 수사과정, 중앙정보부 수사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조서 등에 대해서는 혹독한 가혹행위와 고문, 장기간 구금과정에서 이뤄진 것이 인정된다”며 증거 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군사법정에서 이뤄진 공판 조서에 보면 일부 피고인의 진술이 공소 사실에 부합하는 게 조금씩 있지만 그 자체가 앞뒤 모순되는 부분이 상당히 있어 신빙성을 인정하기 힘들어 유죄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그러나 여정남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중 ‘반독재 구국선언’ 혐의 부분은 다른 재판에 병합돼 유죄 판결이 확정됐고 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사실을 그대로 인정,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최악의 공안날조…사법 살인”-
인혁당 사건은 두차례 있었다. 대일 굴욕외교 반대시위가 거셌던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노린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1차 인혁당 사건때는 41명이 구속돼 징역형을 받았다. 10여년 뒤 유신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군사정권은 남한내 지하조직으로 암약 중인 인혁당이 학생운동권의 배후라며 반(反)유신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구속자 중 8명은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기소돼 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된 지 20여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형이 집행됐다.
국내외 인권단체로부터 ‘유신시대 최악의 공안날조 사례’로 꼽혀왔으며 당시 재야 법조계는 이를 ‘사법 살인’으로 규정했다. 게다가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까지 했다.
그 후 30여년 동안 당사자와 가족,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천주교 인권위원회 산하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등 관계자와 관련단체들은 이 사건에 대해 수차례 진상규명 작업을 벌여왔다.
‘잘못된 판결’ 인정…피고인 명예회복-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고문과 피의자 신문조서 및 진술조서 위조 등을 통한 중정의 조작극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유족들은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그 해 12월 법원에 재심청구를 냈다. 2005년 12월27일 법원에서 재심 결정이 내려졌다. 앞서 그 해 12월7일 국정원 과거사위는 이 사건을 “권위주의 정부 시절 중정이 자행한 권력 오용과 남용으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지난해 12월에는 검찰이 ‘인혁당 사건’ 재심 공판에서 이례적으로 구형하지 않고 재판을 끝내 과거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잘못이 있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검찰은 “과거 기록이나 재심 공판에서 당시 수사기관의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나타났고 적법절차가 준수되지 않았다는 증인 진술도 있었다”고 말했다. 검찰이 구형을 하지 않고 유·무죄에 대한 입장 표명조차 없이 재판을 끝냈다는 것 자체가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인혁당 사건은 재심 결정에 3년, 재심 선고에 1년 가량이 소요된 끝에 무죄 선고로 끝을 맺었다. 유신정권 시절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법원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인정하고 피고인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인혁당 사건 재심 재판은 유인태 의원과 이철 한국철도공사 사장, 시인 김지하씨 등 유명인사와 40여명이라는 많은 증인이 나와 당시 상황을 생생히 증언해 눈길을 끌었다.
[사설] 무죄..무죄..무죄..
피고인석에는 피고인들이 없었다. 이미 32년 전 억울하고 원통한 가슴을 부여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신 그 자리는 기나긴 인고와 신산의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이 메우고 있었다. 피고인들에 대한 사형집행 당시 이들은 홍안흑발(紅顔黑髮)의 청·장년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주름살 가득한 백발노인이 되었다. 이윽고 재판장의 무죄선고가 내려지자 유족들은 기쁨과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고, 방청객들도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법정은 환희와 눈물의 바다로 변했다. 그러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 피고인들은 죽어 한 줌 흙이 됐고, 유족들의 몸과 마음도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유신독재정권 치하였던 1975년 당시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선고돼 숨진 고 (故) 우홍선씨 등 8명에게 32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은 어제 열린 인혁당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협박 등이 인정되고 검찰조서 등의 증거능력이 없다”면서 긴급조치·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가 위법한 수사·재판의 제물이 됐던 피고인 8명은 죽어서나마 명예회복을 하게 됐다. 또 피고인들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던 법원도 자신이 행한 재판의 오류를 최종적으로 자인(自認)함으로써 지난날의 오점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 시절 자행된 ‘사법살인’의 대표적
인 사건이자 정권에 예속된 사법부의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으로 손꼽혀왔다. 특히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비난을 받았고, 대한민국이 ‘반문명국가’ 대열에 합류하게 된 주요한 계기가 됐던 것이다. 이 같은 굴레를 32년이 지난 지금에서나마 벗어버리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특히 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의 멍에 속에서도 피고인들의 명예회복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온몸을 다 바쳐 싸워온 유족들에게 거듭 경의를 표한다. 또 유족들을 도와 사법 정의 실현에 헌신해온 인혁당 사건 대책위원회와 천주교 인권위원회 등 여러단체들의 노력도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인혁당 사건 재심 무죄선고를 계기로 우리는 고문과 조작으로 점철된 지난날의 공안사건들에 대해 법원의 재심이 더욱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이번 무죄 선고도 유족과 시민단체들이 재심을 청구한 지 무려 4년2개월 만에 이뤄졌고,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진 것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수사·재판의 불법행위를 밝혀냈기에 가능했다. 아직도 재심의 문턱은 높다는 얘기이며, 따라서 법원과 검찰이 적극적인 의지만 갖는다면 우리 현대사의 그늘진 구석을 어렵잖게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 이래 기회 있을 때마다 지난날 사법부가 저지른 과오의 매듭을 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사법부 수장의 이 같은 대국민 언약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고 믿으며, 이를 위해서는 지나치게 까다로운 현행 재심개시요건을 대폭 개정하는 등의 구체적인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차제에 사형제 폐지작업에도 더욱 속도가 붙기를 희망한다. 사형제 폐지의 당위성은 또다시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미 국회에는 여야 의원 175명의 이름으로 사형제 폐지 특별법안이 제출돼 있다. 국회는 하루 빨리 법안을 통과시켜 우리나라를 문명국(文明國)으로 진입시켜야 한다. 만일 사형제가 없었다면 인혁당 피고인들은 비록 호호백발 노년에서나마 가족·친지들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문·조작사건의 재심을 확대하고, 사형제를 없애는 것, 그것이 억울하게 죽은 여덟명의 혼을 달래고 유족들에게 보상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