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다닐 때 여름방학 끝나자마자 "살태우기 콘테스트" 같은게 있어서 그걸 위해서 여름방학 기간 동안 밖에 나가 놀면서 필사적으로 살을 태웠어. 우승해서 메달을 받았을때는 기뻤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이기고 싶었을까?'싶지만 말이야.
그 떄의 유치원 담임이 스즈키 선생님이었었어. "よい子の味方"(착한 아이의 친구 - 신입보육사 이야기. 니혼테레비계.03년 1월~3월 방송. 쇼군 주연 드라마. 눈물많은 열혈신입보육사 타이요 선생님을 연기했다. 주제가는 嵐의 'とまどいながら')에서 내가 연기했던 타이요 선생도 성이 스즈키 였었으니까 조금 인연같은 걸 느껴.
물론 여자 선생님이셨지만.
소학교는 버스를 2대 갈아타고 다녔어.
특별히 힘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나한테 있어서 그게 보통의 일이었으니까.
단지 동네에 친구가 없으니까 조금은 소외감을 느꼈을지도 몰라.
방과후, 부모님의 일이 끝날때까지 동네의 학동보육(부모가 맞벌이 등으로 보호자가 없을 때, 방과 후 일정 시간 동안 대신 돌봐 주는 일) 같은 곳에 갔었지만, 모르는 녀석들 뿐이었고, 교복같은 거 입고 있는 건 나 혼자 뿐.
학교 친구집에 놀러가는 것도,
버스를 타거나 부모님차를 타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서 말이야.
그렇지만 배울 게 잔뜩 있었으니까 (피아노, 검도, 수영, 축구, 유화 외에도 학원에도 다녔다. 그때 그렸던 유화를 지금도 할아버지 집에 있다고.'그림은 서툴다'라고 하며 취재나 TV에서도 완강히 거부하는 쇼군. 그떄의 그림을 보고 '저런 걸 그렸다니 놀라워.지금이라면 절대 생각할수도 없어'라고.)놀 시간도 그렇게 없었지만서도.
그 대신에 아침에는 엄청 일찍 학교에 갔었어.
7시 반 정도에 가지 않았었나. 고등학생이 되어서 부터 였지만,
축구 하기 위해서. 축구가 너무 좋았었으니까.
아마 소학교 5학년때 J 리그가 시작되었었어.
장래에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어.
그 전에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블랙잭"이라든가 읽었었어.
그치만 바로 '난 무리야'라는 걸 깨달아버렸어 (웃음)
나에게 있어서는 학교가 전부였었어.
게다가 소학교 6년간 반을 안바뀌었으니까 반끼리
연결고리가 굉장히 강했어.
각 반마다 고유의 색깔 같은 것이 있어서,
지금도 미묘하게 나오는 정도니까.
그 중에서도 우리반은 특별히 강하게 이어져 있었다고 생각해.
수학여행 밤에 '우리반은 부패하고 있어!'라고
뜨겁게 의논하거나 했어.'이지메라든가 그만둬'라고.
청춘이었지-(웃음) 난 그때부터 금방 열받는 타입이었어.
’お山の大?(새상 물정도 모르고 좁은 사회.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우쭐해하는 사람)’ 적인 면도 있었다고 생각해.
기본적으로 난폭하다구. 나는.
최근에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콘트롤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자주 싸움도 했었는걸.
"큐피 마요네즈"(쇼군의 대표적인 닉네임.'사쿠쇼'도 소학생때부터 브라스밴드 부의 1년 선배가 붙여준 것. 현재도 학교 관계의 친구들은 그렇게 부른다. 후배들은 '사쿠쇼상'이라든가)라고 별명이 붙었을때에는 그게 싫어서.
큐-피 같았나봐.
끈질기게"큐피 큐피-"라고 말하는 녀석에게
엄청 열받았던 적이 있어.
그녀석이랑 지금 제일 사이가 좋긴 하지만.
지금도 한소리 들어.
"이녀석, '큐피-'라고 말하면 엄청 화냈었어-"라고 (웃음)
소학교는 공학이었으니까 발렌타인초콜렛을 받은 적이 있었어.
엄청 기억나는건 소학교 5학년 때.
좋아했던 여자애한테서 本命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초코를 받아서
그애한테는 제대로 보답을 해줘야지 하고 생각했었어.
그게 대 실패! 너무 고민해서 화이트데이를 지나쳐버렸어.
결국 나고야 그랑파스에이트의 머그컵이 되어버렸어.
나 그랑파스에이트를 좋아했었어.
그치만 암만 생각해도 필요없는 거였어.
그 여자애의 반응도 기억안나.
그래도 첫사랑은 중1. 국제교류합창대회로 일본에 방문했던 헝가리인이었던 가브리에라짱. 정말로 깜짝 놀랄 정도로 예뻤어.
그렇게 절박하게 좋아했었던 건 처음이었어.
동급생 남자 다섯명이서 각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었으니까.
그 상승효과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정말 열심히 헝가리말을 외워서 필사적으로 말을 걸거나 했었어.
그래도 2주 후에 돌아가버렸어. 허무한 사랑이었어.(웃음)
★ ジャニ-ズJrになる 쟈니즈 주니어가 되다.
사무소에 사진을 보냈던 건 중2.친구가
"너 한번 해봐." "오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거의 농담조였어.
만약 오디션에 갈 수 있게 된다면 얘깃거리가 되겠구나 정도였어. 그게 이렇게 될줄은 정말로 생각도 못했어.
어느날, '오디션에 와주세요.'라는 편지가 왔어.
그것도 오디션 바로 전날에 도착해서.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벌써 어머니가 보셨더라구.
어머니는 웃었지만 아버지는 '가지마라'라고 하셨어.
그래도 다음날 오디션 회장까지 차로 데려다주셨어.
오디션에는 50~60명정도가 왔었어.
춤은 어캐저캐 출 수 있었지만 정신없이 끝나버렸다는 느낌.
그때부터 매주 렛슨하러 가게 되었어.
그래도 '합격'이라는 의식은 전혀 없었어.
단순히 불러주니까 가는 것 뿐.
그렇게 1달 정도,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느슨하게 하면 아무 쓸모도 없으니 정말 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결정해라'하고 하셔서.
'나 정말로 하고 싶다'라고 깨달은 건 그때였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니까 나, 히카루 겐지를 엄청 좋아했었어.
롤러 스케이트를 신고 흉내냈었어.
그래도 내가 자란 환경은 그런 세계를 부정하고 있는 듯한 곳이었으니까. 동경하는 한편 '저런 사람은 되면 안된다'라는 의식도 있었어.
그래도 실제로 지금, 그떄 동경했던 것들이 손에
닿는 곳에 서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네.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으셨어.
"하고싶은대로 해라"라고.
아버지는 기본적으로는 반대하는 것 같았지만
직접 말하지 않으셨고. 물론 지금은 엄청 응원해주시지만.
그래도 그런식으로 마음을 굳히긴 했지만 내 입장은 어중간했어. "합격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한다면 자각할
수 있겠지만 갑자기 그쪽에서 날 부르지 않을 일도 있을 테니까.
실제로 오디션때부터 함께 있었던 "합격風"이었던 녀석들도
점점 사라지게 되어버렸으니까.
동기 중에서 최종적으로 남았던 건
나랑 요네하나(MA의 요네하나 쯔요시군)정도인걸.
쟈니즈 주니어라는 건 언제까지나 오디션 중이라고 생각해.
굉장히 어중간한 존재야.
첫 일은 "아이돌 온 스테이지"주니어로서 "スシ食いね?”를 부르게 되어서 그 뒤에서 춤췄었어.
굉-장히 긴장했었어. 안무를 외우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의상도 엄청 컸었어.
나 쪼끄맸으니까. 엄청 헐렁헐렁 (웃음) 그 방송은 녹화했었을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다지 찍히진 않았었지만.
★ 學生かJrか 학생인가 주니어인가
그래도 쟈니즈 주니어와 학생 중 어느쪽이냐는 말을 들으면
난 완전히 학생이었어. 시험 한달 전 부터는 일을 쉬었으니까.
그건 스스로 정했어. 학교보다 주니어로서의 활동을
우선시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어.
나에게 있어서 주니어 활동은, 학교에 제대로 가고
좋은 성적을 받은 뒤에 해도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주니어 중 내가 있을 곳이 사라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고 .
고등학교 1학년을 시작으로 매월 잡지에 실리거나
센터에서 춤출 수 있게되었을때 1개월 쉬고나니까 갑작스럽게
구석에서 춤추게 하고 잡지일도 전혀 들어오지 않았어.
그래도 그런 건 그런거구나 하고 생각했었어.
억울하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게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었어.
단지 나, 춤추는 게 엄청 좋았었으니까.
굉장히 열심히 연습해도 안무 조차도 완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녀석이 나보다 앞에서 춤추고 있는 상태가 계속되자 의문이 생겼어. '그런 식이라면'라며 학교 1살 위의 선배랑
댄스 그룹 같은 걸 만들어서 춤추거나 했어.
당시 "뮤직점프"의 오프닝에서 매주
나와 야랏찌(MA의 야라 토모유키) 둘이서 춤추는 부분이 있었어.그 부분을 "저희들 안부 필요없습니다"라며,
매주 둘이서 고민하며 만들었어.
8카운트였었으니까 10초 정도였지만서도 댄스 비디오를
사기도 하고 매일 보면서 연습해서.
쟈니즈식의 춤과는 다른 최신의 춤을
얼만큼 보여줄 수 있는가에 목숨을 걸었었어.
그곳이 유일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장소였었어.
전원이 춤출때는 뒤로 가게 했으니까.
★ 嵐デビュ-아라시 데뷔
그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하면 쟈니즈 그만둘까나'하고 생각했었어. 계속 센터에 있어서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면
그런건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선배들 뒤에서 카메라에 찍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춤추고 있는 것 뿐. 이라는 상태가 1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니까.
장래를 생각해보니 "언제까지고 쟈니즈 주니어를
계속 하는 건 어렵겠구나"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만약 월드컵(4년에 한번 개최되는 배구 셰계 대회.99년 11월의 개최에 맞춰서 아라시 결성. 참고로 95년 대회에는 V6가 03년 대회에는 NEWS가 결성되어 이미지 캐릭터를 담당했다) 개최가 1년 늦어져서 아라시 결성이 1년 늦어졌다면,
나 사무소를 그만두고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을거라고 생각해.
쟈니상으로부터 "월드컵 이미지 캐릭터 하지 않을래?"라는
전화가 걸려온 건 고등학교 3학년 6월.
그때는 시험 전이라 일을 쉬고 있었어.
그때 주니어 내에는 여러가지 유닛이 있었으니까 그거랑 같은
거라고 일시적으로 생각해서 "좋아요. 할께요."라고 대답했었어.
그 이후 레코딩이랑 안무 연습이 시작됐어.
나 다음해 1월에 고등학교 시험이 끝나면 4월에 대학 입학때까지
해외 유학할까라고 생각했었어. 당시 매니저 상에게 그렇게 말하니까 "그건 좀 어렵겠는데"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뭔가 이상하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월드컵이 끝나면 끝'인 그룹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때는 멤버도 지금의 5명이 모여버려서
바로 도망갈 수는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어.
멤버들도 거의 그런 상태였으니까 맨 처음에는 따로따로.
스탭들에게서 "너네들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듣기도 하고 취재에서도 "쇼군이 열심히 정리해야죠" 라는 말을
들을 때가 많았어. 그래도 그런 건 싫지 않았어.
그런거구나 하고 생각했어.
지금이라면 멤버 전원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처음에는 확실히 연상멤버와 연하 멤버사이에 상하 관계도 있었고. 오노군은 생각하는 게 있어도 그다지 말을 꺼내지 않은 사람이잖아.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했었어.
데뷔 발표 부터가 정말로 큰일이었어.
특히 월드컵개최중. 경기장이 지방에 있거나 하면
모두가 그곳에서 묵어도 나혼자만 도쿄에 돌아가서
다음 날 학교에 갔었으니까. 학교가 끝나면
나 혼자서 신칸센을 타고 경기장에 가서.
다시 한밤중에 돌아온다고 하는.
어디에 내가 있는 건가 파악안되는 상태.
기억도 거의 없을 정도였어.
그래도 솔직히 내 안에서도 "아라시 ,좋은 걸지도."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건 그 다음해 봄에 있었던 1st콘서트 때였어.
반년이나 걸렸네.그룹이 되어서 모였다고 하지만 갑작스럽게
각자의 거리를 좁힐 수는 없는 거잖아.
나 아이바 짱이랑은 그때까지 얘기한 적도 없었는걸.
콘서트 리허설을 할때도 톱니바퀴 굴러가듯이
잘 되진 않았다고 생각해.
그게 콘서트 맨 마지막에 5명이서 손을 잡고
"우리들 아라시!!!"라고 말하잖아.
그건 관객들에게 말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들에게 들려주는게 될떄도 있어서.
크지 않더라도 내 안에서는 스테이지에서
그렇게 부를 떄마다 "5명이서 아라시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되는 느낌이 들어.
그때 나는 솔로곡으로 "君の瞳に?してる”를 했었는데,
곡의 진행이 고조될때 멤버 전원이 등장한다는 연출이었어.
그게 엄청 인상깊었어. 지금도 그래. 왜 그럴까?
한가지 더 말하자면,
팬이라는 사람에게 대하는 기분이 정리되었던 것도 이 때.
계속 내 안에서는 딜레마였어.
'왜 이 사람들은 사쿠라이 쇼라는 인간이 좋은 것일까,
쟈니즈 주니어니까 좋아하는 걸까 어떻게 된걸까.' 라든가.
꺄꺄- 라는 소리를 듣는것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었어.
그게 그 콘서트에서 그 정도의 사람이 모여준 것을 보고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구나.라고.
그런 옵션 전부를 합쳐서 "사쿠라이 쇼"라는 거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
★ ?機 전환기
아마도 멤버 전원이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
"HERE WE GO! 투어"(02년 8월 6일 ~9월 8일까지 전국 7개소에서 행해진 아라시 5번쨰 콘서트) 는 굉장히 감격했었던 적이 있어.
그때 처음으로 5명이서 여러가지를 이야기 했었어.
아라시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 가 그걸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서로서로 "우리다움" 이란 건 무엇이다. 라든가.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 매일, 그것도 다음날 아침까지.
생각해보면 불안했었던거야.
그때까지 기세만으로 해왔던 것이, 조금은 자신들을
관객의 입장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시기에.
거기서 보고 있으려니 "어?"라거나.
"그다지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건 아닐까?"라고.
그 해에는 우리들의 레이블인 "제이스톰"이 생겨서
가을에는 영화 "피칸치"가 공개될 예정이었고,
내가 "키사라즈 캐츠아이"에 나오거나 마츠준이 "고쿠센"에 출연.
아라시로서 "겨우 파도에 올라타기 시작했구나"라는 시기였었어."
그 파도라는 건 말이야.
주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본인들이 더
잘 알 수 있는 거야.
예를 들어 스케쥴표 하나만 봐도 일목요연하잖아.
채워져 있는가 백지 상태인가.
난 백지인데 다른 녀석은 채워져있다.든가.
그렇게보면 그때는 굉장히 좋은 느낌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중요한 우리들이 의식하지 못했었어.
각자 혼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을꺼라고 생각하지만.
아라시로서 생각하는 부분까지는 여유가 없었을꺼야.
그래도 그러면 안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각자 불안하기도 하고 그때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되는
형태가 되었을꺼라고 생각해.
조금은 오바해서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 안에서는 그 투어를 시작으로 아라시가 아라시답게 된거 같아.
5명의 생각이 같은 방향.
그것도 높은 곳을 향해서 하나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어.
앨범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들의 의견을 이야기 해서
'이렇게 되었는데. 어때?'라는 식이 된 것도 같은 해.
그건 제이스톰이 되었으니까 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들 속에서 '이렇게 하고 싶다'라는 무언가가
생길 수 있게 된것이 중요했다고 생각해.
겨우, 라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랩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변천이 있었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어. 데뷔곡인 "A.RA.SHI"에서 랩 파트가 나 혼자라는걸 들었을때는 "잘됐다-"하고 생각했었지만서도.(웃음) 얏잡아본거였어.
실제로 해보니까 굉장히 형편없어서. 꽤 풀이 죽어 있었어.
TV에서 노래하고 있는 모습 같은 거 보는 것도 싫었어.
노래하는 것. 몸의 움직임. 목소리.
어떤 것도 제대로 된 형태가 되지 않았잖아?
뭔가 "시키니까 하는 구나"라는 느낌이었다고 생각해.
그때부터 여러 사람의 랩을 들었어. 비디오도 엄청 봤어.
m-flo의 VERVAL상이라든가.
랩 관계의 사람들이랑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셨어.
그때 '모처럼 랩을 하는 거니까, 스스로 쓸 수 있으면 좋겠네' 라는 말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어.
나 스스로도 "쓰고 싶다"라고 하는 어필은 했었어.
1st콘서트의 솔로 간주부분이라든가 "태풍 제너레이션"의 간주라든가, 조금씩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어서.
"a Day in Our Life"에서는 내가 좋아해서 해봤던 부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어.
이제야 "아라시의 랩은 내가 쓴다"라는 스타일이 정착되었지만서도, 그렇게 되기까지 나 스스로 작은 어필을 반복해왔다고 생각해.
랩의 표현 방법에 대해서도 아마도 "How's it going?"정도였을꺼야. 그때까지 필사적으로 "랩퍼스러움"을 찾고 있었지만
"나 다운 것"으로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
소위 랩퍼라는 사람이 하는 랩과 아라시에게 필요한 랩이라는 건
서로 다른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
예를 들어 "피칸치"때과 같은 "소리지르는"랩.
이른바 랩퍼라는 사람들은 소리를 지를 꺼면 소리지르는 계열,
고음이라면 고음계라고 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캐릭터를
하나로 결정하거든.
그렇지만 우리들은 록 같은 노래도 있자면
팝스라든가 발라드같은 것도 해.
각각 필요로 하는 랩이라는 것도 당연히 다를 것이기때문에
나는 어떤 곡이 오더라도 거기에 대응해서 음을 바꿀 수 있게
해두지 않으면 안돼 라고 생각했어.
아라시에게 필요한 랩,
내가 찾고 있는 랩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어.
★ 5周年 5주년
04년은 아라시 5주년의 해였어.
우리안에서는 5주년이라고 해도 특별하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것보다도 4주년때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어.
다시 월드컵이 시작되어서, TV에서 NEWS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아 그떄부터 4년이 지났구나"라고.
그게 잡지에서도 "5주년 특집"이라든가 포니캐년 재적때의
스탭으로부터도 "5주년 축하해"라는 메일이 오거나 해서.
나 스스로도 중요한 해처럼 생각하게 되어버렸어.
생각해보면 5년이라는 건 날짜로치면 긴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리들이 보냈던 5년은 전혀 짧지 않았어.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하고 거기서
여러가지 변화를 했어.
그 해 여름, 아라시로 "24시간 테레비"를 했잖아?
그 24시간 동안 계속 'Dの嵐"스탭이
우리들 한명한명과 함께해주었어.
모르는 스탭들이 많이 모여있는 중에서 계속 함께
방송을 만들었던 스탭이 단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했어.
내 자신이 그런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도 기뻤지만
"24시간 테레비"의 마지막에 아이바짱이
우리들 앞에서 편지를 읽었잖아.
그걸 들으면서 "디노 아라시!"의 스탭들 모두 울었다고 해.(웃음)
"왜?"라고 물어보니까 '"Cの嵐"의 제 1회 떄가 생각이 나서.'라고. 뭔가 굉장히 기뻤어.
그런 관계, 하나씩 하나씩 쌓아나가지 않으면 만들 수 없잖아.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들의 5년간은
절대 짧지 않았다고 생각해.
솔직히 24시간 테레비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떄는 불안했었어.
언젠가는 꼭 하고싶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아닐꺼라고
생각했었으니까."지금의 우리들이 하는 것으로 방송 전체가
작게 보이는 건 싫어"하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실제로 해보니까, 굉장히 자신이 생겼어.
이렇게 아라시에 자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해에 콘서트 MC를 했을때도 느꼈었는데
5명의 역할 분담이 굉장히 깔끔하게 나뉘어졌어.
그때까지 계속 MC할때의 이야깃거리를 생각하는 게 큰일이었어. 본방 전에 샤워하면서도 언제나 "뭘 얘기하지?"라고.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계속 재미있을 만한 이야기의
흐름같은 걸 생각하거나 했어.
그런걸 이제 거의 하지 않다도 좋게 되었어.
아이바짱 답게 오노군 답게 매듭을 지어줘.
단지 5명이서 이야기하는게 굉장히 즐거워졌어.
데뷔떄부터 1년 후 쯤에 소년대의 니시키오리상과
특별 방송을 했었던 적이 있었어.
그때 사무소 사람에게 혼났었어.
"너네들은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텐션이 올라가지도 않고,
어필이 되지도 않아."라고. 정말로. 맨 처음에 우리는 그랬었어.
음악 방송에서 카메라가 클로즈업 하려고 하고 있는데도
시선을 피하거나 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게 꽤 바뀌었구나- 하고 생각해.
다시 니시키오리상과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때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의지했던 분량 만큼 다른 형태로 돌려드렸으면 좋겠다.라고.
★ 大學卒業 대학졸업
04년은 대학을 졸업하는 해이기도 했어.
02년 가을부터 학교에는 여러가지 기업의 설명회가 시작되어서,
친구들에게 "넌 안가니?"라는 말을 듣거나 했어.
"너 취직한다는 거 진짜야?"라는 메일이 오기도 하고.
"아니. 난 쟈니즈 사무소로 결정되었어."라고 말하긴 했지만서도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망설임 같은 건 없었어.
그래도 나, 동네에 친구들이 없었으니까,
학교만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였었으니까.
일이 바빠지더라도 학교에 가면 모두를 만날 수 있다.
그게 수트를 입고 취직한 친구들을 보니까
"이제 곧 그런 시간도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쓸쓸했어. 04년이 되어서 졸업까지 라스트 스퍼트라고 할까.
일이 끝나면 매일매일 연락해서 많을 떄는
6~7명이 모여서 아침까지 이야기했어.
소학교때의 이야기를 하거나 일에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나, 그때까지 친구들에게 일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었지만,
4월부터는 같은 사회인이라는 라인에 서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먼저 일을 하고 있는 만큼,
나의 경험이 만약 친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서
매일밤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었어.
그러는 중에, 22살의 생일을 맞아서, 친구들이 비디오 레터를 줬어. 도리카무의 노래가 흐르고 여러 스냅 사진이 펼쳐지고,
그 후에 친구 한명한명이 메시지를 넣어주었어.
소학교 떄의 선생까지 나오셔서 놀랐어.
"난 역시 데뷰곡인 "NEWS 닛뽄"이 제일 좋아"라고 하는
녀석도 있거나 해서."그건 NEWS의 데뷔곡이란 말이다!"(웃음)
그런 비디오를 만들고 있었던거, 나 전혀 몰랐었어.
매일 얼굴마주치고 있었는데도. 그게 너무나 기뻤어.
여담이지만 그 비디오를 방에 놓아두었더니,
어머니가 "축 생일 교우 비디오"라고 맘대로 라벨을 붙여놔서.
거기에도 놀랬었어."언제 한거야?"라고 (웃음)
그 친구들끼리서 졸업여행을 갔었어. 한국에 갈 생각이었는데,
전원 여권 기한이 끝나 있어서 (웃음)
결국 스키타러 갔었어. 남자 4명이서.
나 비디오 가져가서 계속 촬영했어.
아버지 같이. 처음이었어. 그렇게 친구들이랑 여행하는 거.
굉장히 즐거웠어.
★ 芝居について 연기에 대해서
연기는 아직까지도 너무 어려워.
"WEST SIDE STORY"에서도 여러가지를 배웠어.
단지 대본 연습이 끝나고 나서 컴퍼니 모두 밥을 먹으러 가서
"이렇게 하는 편이 좋지 않아?"라든가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거나 모두가 하나의 무엇을 만들어간다고 하는
그 공기가 굉장히 좋았었어.
다시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커다란 것이라고 하면 "키사라즈 캐츠아이"일까나.
"피칸치"에서 양키인 츄를 연기했었을때는
'"키사라즈~"를 하지 않았었다면
이런 식으로 할 수 없었을꺼야' 라고 생각했었고.
"키사라즈~"는 연기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준 첫 일이었어.
단지 대사를 말하는 것 뿐이 아니라.
역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재미.
움직임 한가지에 있어서도 그 캐릭터에 따라서 다른 걸.
그걸 밤비를 처음으로 연기하고 "즐겁다"고 생각했었어.
작품자체도 엄청 좋아하고.
지금도 길에서 "밤비다~"라는 소리를 들어.
특히 남자들한테서.
그런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건 즐거운 일이야.
"이제 그만 이름 좀 외워주시지" 라고 조금은 생각하지만 (웃음)
그렇게 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까
"착한 아이의 친구"의 섭외가 들어왔을떄는 망설이지 않고
'하고 싶어'라고 생각해버렸어.
그때, 시험에 콘서트 리허설에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말로 잠잘 시간이 없었어.
샤워를 하면서도 자버리고. 앉은 순간에 자버리곤 했어.
그래도 그런 상태에서도 해냈다는 것이 조금은 자신이 붙었고,
내 안에서 양식을 넓혀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게 다시 다른 일이 생기게 되고.
이제부터 그런 양식을 늘려나가고 싶다고 생각했어.
연기뿐만이 아니라 나, 음악에 대해서도 버라이어티에 대해서도
꽤 병렬적이야. 어떤게 제일 좋다라는게 없어.
각각 다른 즐거움이 있으니까.
각각에 대해서 힘을 내서 할 수 있을 만큼 할 생각이야.
2년 전에 사랑니를 뺐을때,
얼굴이 빵빵하게 부어올라서 4일이 지나도 전혀 안가라앉는 거야. "계속 안가앉으면 어떻하지?"하고 생각했어.
"이 상태로 내가 일을 계속한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뭘 할 수 있는 걸까?"라고.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연기도 노래도 댄스도.
"자신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것이 무엇 하나도 없어서.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까지 확인하는게 무서워서 피하고 있었던 것이
거기서 또렷하게 보였던거야. 장래에 대해서 무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이 갖고 싶다 라고 생각했어.
이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확실한 것"이란 무엇일까.
라는게 되어버렸지만서도. 인기도 확실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실력이 있다고 성공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쿠라이 쇼 1만字 인터뷰
★ 熱血小學生時代 열혈소학생시절
어렸을때부터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어.
집은 도심이었지만 근처에는 공원도 있었고, 매미도 잡았었어.
유치원 다닐 때 여름방학 끝나자마자 "살태우기 콘테스트" 같은게 있어서 그걸 위해서 여름방학 기간 동안 밖에 나가 놀면서 필사적으로 살을 태웠어. 우승해서 메달을 받았을때는 기뻤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이기고 싶었을까?'싶지만 말이야.
그 떄의 유치원 담임이 스즈키 선생님이었었어. "よい子の味方"(착한 아이의 친구 - 신입보육사 이야기. 니혼테레비계.03년 1월~3월 방송. 쇼군 주연 드라마. 눈물많은 열혈신입보육사 타이요 선생님을 연기했다. 주제가는 嵐의 'とまどいながら')에서 내가 연기했던 타이요 선생도 성이 스즈키 였었으니까 조금 인연같은 걸 느껴.
물론 여자 선생님이셨지만.
소학교는 버스를 2대 갈아타고 다녔어.
특별히 힘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나한테 있어서 그게 보통의 일이었으니까.
단지 동네에 친구가 없으니까 조금은 소외감을 느꼈을지도 몰라.
방과후, 부모님의 일이 끝날때까지 동네의 학동보육(부모가 맞벌이 등으로 보호자가 없을 때, 방과 후 일정 시간 동안 대신 돌봐 주는 일) 같은 곳에 갔었지만, 모르는 녀석들 뿐이었고, 교복같은 거 입고 있는 건 나 혼자 뿐.
학교 친구집에 놀러가는 것도,
버스를 타거나 부모님차를 타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서 말이야.
그렇지만 배울 게 잔뜩 있었으니까 (피아노, 검도, 수영, 축구, 유화 외에도 학원에도 다녔다. 그때 그렸던 유화를 지금도 할아버지 집에 있다고.'그림은 서툴다'라고 하며 취재나 TV에서도 완강히 거부하는 쇼군. 그떄의 그림을 보고 '저런 걸 그렸다니 놀라워.지금이라면 절대 생각할수도 없어'라고.)놀 시간도 그렇게 없었지만서도.
그 대신에 아침에는 엄청 일찍 학교에 갔었어.
7시 반 정도에 가지 않았었나. 고등학생이 되어서 부터 였지만,
축구 하기 위해서. 축구가 너무 좋았었으니까.
아마 소학교 5학년때 J 리그가 시작되었었어.
장래에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어.
그 전에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블랙잭"이라든가 읽었었어.
그치만 바로 '난 무리야'라는 걸 깨달아버렸어 (웃음)
나에게 있어서는 학교가 전부였었어.
게다가 소학교 6년간 반을 안바뀌었으니까 반끼리
연결고리가 굉장히 강했어.
각 반마다 고유의 색깔 같은 것이 있어서,
지금도 미묘하게 나오는 정도니까.
그 중에서도 우리반은 특별히 강하게 이어져 있었다고 생각해.
수학여행 밤에 '우리반은 부패하고 있어!'라고
뜨겁게 의논하거나 했어.'이지메라든가 그만둬'라고.
청춘이었지-(웃음) 난 그때부터 금방 열받는 타입이었어.
’お山の大?(새상 물정도 모르고 좁은 사회.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우쭐해하는 사람)’ 적인 면도 있었다고 생각해.
기본적으로 난폭하다구. 나는.
최근에는 밖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콘트롤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자주 싸움도 했었는걸.
"큐피 마요네즈"(쇼군의 대표적인 닉네임.'사쿠쇼'도 소학생때부터 브라스밴드 부의 1년 선배가 붙여준 것. 현재도 학교 관계의 친구들은 그렇게 부른다. 후배들은 '사쿠쇼상'이라든가)라고 별명이 붙었을때에는 그게 싫어서.
큐-피 같았나봐.
끈질기게"큐피 큐피-"라고 말하는 녀석에게
엄청 열받았던 적이 있어.
그녀석이랑 지금 제일 사이가 좋긴 하지만.
지금도 한소리 들어.
"이녀석, '큐피-'라고 말하면 엄청 화냈었어-"라고 (웃음)
소학교는 공학이었으니까 발렌타인초콜렛을 받은 적이 있었어.
엄청 기억나는건 소학교 5학년 때.
좋아했던 여자애한테서 本命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초코를 받아서
그애한테는 제대로 보답을 해줘야지 하고 생각했었어.
그게 대 실패! 너무 고민해서 화이트데이를 지나쳐버렸어.
결국 나고야 그랑파스에이트의 머그컵이 되어버렸어.
나 그랑파스에이트를 좋아했었어.
그치만 암만 생각해도 필요없는 거였어.
그 여자애의 반응도 기억안나.
그래도 첫사랑은 중1. 국제교류합창대회로 일본에 방문했던 헝가리인이었던 가브리에라짱. 정말로 깜짝 놀랄 정도로 예뻤어.
그렇게 절박하게 좋아했었던 건 처음이었어.
동급생 남자 다섯명이서 각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었으니까.
그 상승효과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정말 열심히 헝가리말을 외워서 필사적으로 말을 걸거나 했었어.
그래도 2주 후에 돌아가버렸어. 허무한 사랑이었어.(웃음)
★ ジャニ-ズJrになる 쟈니즈 주니어가 되다.
사무소에 사진을 보냈던 건 중2.친구가
"너 한번 해봐." "오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거의 농담조였어.
만약 오디션에 갈 수 있게 된다면 얘깃거리가 되겠구나 정도였어. 그게 이렇게 될줄은 정말로 생각도 못했어.
어느날, '오디션에 와주세요.'라는 편지가 왔어.
그것도 오디션 바로 전날에 도착해서.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벌써 어머니가 보셨더라구.
어머니는 웃었지만 아버지는 '가지마라'라고 하셨어.
그래도 다음날 오디션 회장까지 차로 데려다주셨어.
오디션에는 50~60명정도가 왔었어.
춤은 어캐저캐 출 수 있었지만 정신없이 끝나버렸다는 느낌.
그때부터 매주 렛슨하러 가게 되었어.
그래도 '합격'이라는 의식은 전혀 없었어.
단순히 불러주니까 가는 것 뿐.
그렇게 1달 정도,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느슨하게 하면 아무 쓸모도 없으니 정말 하고 싶은지 확실하게 결정해라'하고 하셔서.
'나 정말로 하고 싶다'라고 깨달은 건 그때였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니까 나, 히카루 겐지를 엄청 좋아했었어.
롤러 스케이트를 신고 흉내냈었어.
그래도 내가 자란 환경은 그런 세계를 부정하고 있는 듯한 곳이었으니까. 동경하는 한편 '저런 사람은 되면 안된다'라는 의식도 있었어.
그래도 실제로 지금, 그떄 동경했던 것들이 손에
닿는 곳에 서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네.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으셨어.
"하고싶은대로 해라"라고.
아버지는 기본적으로는 반대하는 것 같았지만
직접 말하지 않으셨고. 물론 지금은 엄청 응원해주시지만.
그래도 그런식으로 마음을 굳히긴 했지만 내 입장은 어중간했어. "합격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한다면 자각할
수 있겠지만 갑자기 그쪽에서 날 부르지 않을 일도 있을 테니까.
실제로 오디션때부터 함께 있었던 "합격風"이었던 녀석들도
점점 사라지게 되어버렸으니까.
동기 중에서 최종적으로 남았던 건
나랑 요네하나(MA의 요네하나 쯔요시군)정도인걸.
쟈니즈 주니어라는 건 언제까지나 오디션 중이라고 생각해.
굉장히 어중간한 존재야.
첫 일은 "아이돌 온 스테이지"주니어로서 "スシ食いね?”를 부르게 되어서 그 뒤에서 춤췄었어.
굉-장히 긴장했었어. 안무를 외우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의상도 엄청 컸었어.
나 쪼끄맸으니까. 엄청 헐렁헐렁 (웃음) 그 방송은 녹화했었을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다지 찍히진 않았었지만.
★ 學生かJrか 학생인가 주니어인가
그래도 쟈니즈 주니어와 학생 중 어느쪽이냐는 말을 들으면
난 완전히 학생이었어. 시험 한달 전 부터는 일을 쉬었으니까.
그건 스스로 정했어. 학교보다 주니어로서의 활동을
우선시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어.
나에게 있어서 주니어 활동은, 학교에 제대로 가고
좋은 성적을 받은 뒤에 해도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주니어 중 내가 있을 곳이 사라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고 .
고등학교 1학년을 시작으로 매월 잡지에 실리거나
센터에서 춤출 수 있게되었을때 1개월 쉬고나니까 갑작스럽게
구석에서 춤추게 하고 잡지일도 전혀 들어오지 않았어.
그래도 그런 건 그런거구나 하고 생각했었어.
억울하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게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었어.
단지 나, 춤추는 게 엄청 좋았었으니까.
굉장히 열심히 연습해도 안무 조차도 완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녀석이 나보다 앞에서 춤추고 있는 상태가 계속되자 의문이 생겼어. '그런 식이라면'라며 학교 1살 위의 선배랑
댄스 그룹 같은 걸 만들어서 춤추거나 했어.
당시 "뮤직점프"의 오프닝에서 매주
나와 야랏찌(MA의 야라 토모유키) 둘이서 춤추는 부분이 있었어.그 부분을 "저희들 안부 필요없습니다"라며,
매주 둘이서 고민하며 만들었어.
8카운트였었으니까 10초 정도였지만서도 댄스 비디오를
사기도 하고 매일 보면서 연습해서.
쟈니즈식의 춤과는 다른 최신의 춤을
얼만큼 보여줄 수 있는가에 목숨을 걸었었어.
그곳이 유일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장소였었어.
전원이 춤출때는 뒤로 가게 했으니까.
★ 嵐デビュ-아라시 데뷔
그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하면 쟈니즈 그만둘까나'하고 생각했었어. 계속 센터에 있어서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면
그런건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선배들 뒤에서 카메라에 찍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춤추고 있는 것 뿐. 이라는 상태가 1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니까.
장래를 생각해보니 "언제까지고 쟈니즈 주니어를
계속 하는 건 어렵겠구나"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만약 월드컵(4년에 한번 개최되는 배구 셰계 대회.99년 11월의 개최에 맞춰서 아라시 결성. 참고로 95년 대회에는 V6가 03년 대회에는 NEWS가 결성되어 이미지 캐릭터를 담당했다) 개최가 1년 늦어져서 아라시 결성이 1년 늦어졌다면,
나 사무소를 그만두고 평범한 대학생이 되었을거라고 생각해.
쟈니상으로부터 "월드컵 이미지 캐릭터 하지 않을래?"라는
전화가 걸려온 건 고등학교 3학년 6월.
그때는 시험 전이라 일을 쉬고 있었어.
그때 주니어 내에는 여러가지 유닛이 있었으니까 그거랑 같은
거라고 일시적으로 생각해서 "좋아요. 할께요."라고 대답했었어.
그 이후 레코딩이랑 안무 연습이 시작됐어.
나 다음해 1월에 고등학교 시험이 끝나면 4월에 대학 입학때까지
해외 유학할까라고 생각했었어. 당시 매니저 상에게 그렇게 말하니까 "그건 좀 어렵겠는데"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뭔가 이상하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월드컵이 끝나면 끝'인 그룹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때는 멤버도 지금의 5명이 모여버려서
바로 도망갈 수는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어.
멤버들도 거의 그런 상태였으니까 맨 처음에는 따로따로.
스탭들에게서 "너네들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듣기도 하고 취재에서도 "쇼군이 열심히 정리해야죠" 라는 말을
들을 때가 많았어. 그래도 그런 건 싫지 않았어.
그런거구나 하고 생각했어.
지금이라면 멤버 전원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처음에는 확실히 연상멤버와 연하 멤버사이에 상하 관계도 있었고. 오노군은 생각하는 게 있어도 그다지 말을 꺼내지 않은 사람이잖아.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했었어.
데뷔 발표 부터가 정말로 큰일이었어.
특히 월드컵개최중. 경기장이 지방에 있거나 하면
모두가 그곳에서 묵어도 나혼자만 도쿄에 돌아가서
다음 날 학교에 갔었으니까. 학교가 끝나면
나 혼자서 신칸센을 타고 경기장에 가서.
다시 한밤중에 돌아온다고 하는.
어디에 내가 있는 건가 파악안되는 상태.
기억도 거의 없을 정도였어.
그래도 솔직히 내 안에서도 "아라시 ,좋은 걸지도."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건 그 다음해 봄에 있었던 1st콘서트 때였어.
반년이나 걸렸네.그룹이 되어서 모였다고 하지만 갑작스럽게
각자의 거리를 좁힐 수는 없는 거잖아.
나 아이바 짱이랑은 그때까지 얘기한 적도 없었는걸.
콘서트 리허설을 할때도 톱니바퀴 굴러가듯이
잘 되진 않았다고 생각해.
그게 콘서트 맨 마지막에 5명이서 손을 잡고
"우리들 아라시!!!"라고 말하잖아.
그건 관객들에게 말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들에게 들려주는게 될떄도 있어서.
크지 않더라도 내 안에서는 스테이지에서
그렇게 부를 떄마다 "5명이서 아라시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되는 느낌이 들어.
그때 나는 솔로곡으로 "君の瞳に?してる”를 했었는데,
곡의 진행이 고조될때 멤버 전원이 등장한다는 연출이었어.
그게 엄청 인상깊었어. 지금도 그래. 왜 그럴까?
한가지 더 말하자면,
팬이라는 사람에게 대하는 기분이 정리되었던 것도 이 때.
계속 내 안에서는 딜레마였어.
'왜 이 사람들은 사쿠라이 쇼라는 인간이 좋은 것일까,
쟈니즈 주니어니까 좋아하는 걸까 어떻게 된걸까.' 라든가.
꺄꺄- 라는 소리를 듣는것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었어.
그게 그 콘서트에서 그 정도의 사람이 모여준 것을 보고
그런 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구나.라고.
그런 옵션 전부를 합쳐서 "사쿠라이 쇼"라는 거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
★ ?機 전환기
아마도 멤버 전원이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
"HERE WE GO! 투어"(02년 8월 6일 ~9월 8일까지 전국 7개소에서 행해진 아라시 5번쨰 콘서트) 는 굉장히 감격했었던 적이 있어.
그때 처음으로 5명이서 여러가지를 이야기 했었어.
아라시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 가 그걸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서로서로 "우리다움" 이란 건 무엇이다. 라든가.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 매일, 그것도 다음날 아침까지.
생각해보면 불안했었던거야.
그때까지 기세만으로 해왔던 것이, 조금은 자신들을
관객의 입장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시기에.
거기서 보고 있으려니 "어?"라거나.
"그다지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건 아닐까?"라고.
그 해에는 우리들의 레이블인 "제이스톰"이 생겨서
가을에는 영화 "피칸치"가 공개될 예정이었고,
내가 "키사라즈 캐츠아이"에 나오거나 마츠준이 "고쿠센"에 출연.
아라시로서 "겨우 파도에 올라타기 시작했구나"라는 시기였었어."
그 파도라는 건 말이야.
주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본인들이 더
잘 알 수 있는 거야.
예를 들어 스케쥴표 하나만 봐도 일목요연하잖아.
채워져 있는가 백지 상태인가.
난 백지인데 다른 녀석은 채워져있다.든가.
그렇게보면 그때는 굉장히 좋은 느낌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중요한 우리들이 의식하지 못했었어.
각자 혼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었을꺼라고 생각하지만.
아라시로서 생각하는 부분까지는 여유가 없었을꺼야.
그래도 그러면 안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각자 불안하기도 하고 그때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되는
형태가 되었을꺼라고 생각해.
조금은 오바해서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 안에서는 그 투어를 시작으로 아라시가 아라시답게 된거 같아.
5명의 생각이 같은 방향.
그것도 높은 곳을 향해서 하나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어.
앨범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들의 의견을 이야기 해서
'이렇게 되었는데. 어때?'라는 식이 된 것도 같은 해.
그건 제이스톰이 되었으니까 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들 속에서 '이렇게 하고 싶다'라는 무언가가
생길 수 있게 된것이 중요했다고 생각해.
겨우, 라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랩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변천이 있었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어. 데뷔곡인 "A.RA.SHI"에서 랩 파트가 나 혼자라는걸 들었을때는 "잘됐다-"하고 생각했었지만서도.(웃음) 얏잡아본거였어.
실제로 해보니까 굉장히 형편없어서. 꽤 풀이 죽어 있었어.
TV에서 노래하고 있는 모습 같은 거 보는 것도 싫었어.
노래하는 것. 몸의 움직임. 목소리.
어떤 것도 제대로 된 형태가 되지 않았잖아?
뭔가 "시키니까 하는 구나"라는 느낌이었다고 생각해.
그때부터 여러 사람의 랩을 들었어. 비디오도 엄청 봤어.
m-flo의 VERVAL상이라든가.
랩 관계의 사람들이랑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셨어.
그때 '모처럼 랩을 하는 거니까, 스스로 쓸 수 있으면 좋겠네' 라는 말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어.
나 스스로도 "쓰고 싶다"라고 하는 어필은 했었어.
1st콘서트의 솔로 간주부분이라든가 "태풍 제너레이션"의 간주라든가, 조금씩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어서.
"a Day in Our Life"에서는 내가 좋아해서 해봤던 부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어.
이제야 "아라시의 랩은 내가 쓴다"라는 스타일이 정착되었지만서도, 그렇게 되기까지 나 스스로 작은 어필을 반복해왔다고 생각해.
랩의 표현 방법에 대해서도 아마도 "How's it going?"정도였을꺼야. 그때까지 필사적으로 "랩퍼스러움"을 찾고 있었지만
"나 다운 것"으로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
소위 랩퍼라는 사람이 하는 랩과 아라시에게 필요한 랩이라는 건
서로 다른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
예를 들어 "피칸치"때과 같은 "소리지르는"랩.
이른바 랩퍼라는 사람들은 소리를 지를 꺼면 소리지르는 계열,
고음이라면 고음계라고 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캐릭터를
하나로 결정하거든.
그렇지만 우리들은 록 같은 노래도 있자면
팝스라든가 발라드같은 것도 해.
각각 필요로 하는 랩이라는 것도 당연히 다를 것이기때문에
나는 어떤 곡이 오더라도 거기에 대응해서 음을 바꿀 수 있게
해두지 않으면 안돼 라고 생각했어.
아라시에게 필요한 랩,
내가 찾고 있는 랩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어.
★ 5周年 5주년
04년은 아라시 5주년의 해였어.
우리안에서는 5주년이라고 해도 특별하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것보다도 4주년때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어.
다시 월드컵이 시작되어서, TV에서 NEWS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아 그떄부터 4년이 지났구나"라고.
그게 잡지에서도 "5주년 특집"이라든가 포니캐년 재적때의
스탭으로부터도 "5주년 축하해"라는 메일이 오거나 해서.
나 스스로도 중요한 해처럼 생각하게 되어버렸어.
생각해보면 5년이라는 건 날짜로치면 긴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리들이 보냈던 5년은 전혀 짧지 않았어.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하고 거기서
여러가지 변화를 했어.
그 해 여름, 아라시로 "24시간 테레비"를 했잖아?
그 24시간 동안 계속 'Dの嵐"스탭이
우리들 한명한명과 함께해주었어.
모르는 스탭들이 많이 모여있는 중에서 계속 함께
방송을 만들었던 스탭이 단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했어.
내 자신이 그런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도 기뻤지만
"24시간 테레비"의 마지막에 아이바짱이
우리들 앞에서 편지를 읽었잖아.
그걸 들으면서 "디노 아라시!"의 스탭들 모두 울었다고 해.(웃음)
"왜?"라고 물어보니까 '"Cの嵐"의 제 1회 떄가 생각이 나서.'라고. 뭔가 굉장히 기뻤어.
그런 관계, 하나씩 하나씩 쌓아나가지 않으면 만들 수 없잖아.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들의 5년간은
절대 짧지 않았다고 생각해.
솔직히 24시간 테레비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떄는 불안했었어.
언젠가는 꼭 하고싶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아닐꺼라고
생각했었으니까."지금의 우리들이 하는 것으로 방송 전체가
작게 보이는 건 싫어"하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실제로 해보니까, 굉장히 자신이 생겼어.
이렇게 아라시에 자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해에 콘서트 MC를 했을때도 느꼈었는데
5명의 역할 분담이 굉장히 깔끔하게 나뉘어졌어.
그때까지 계속 MC할때의 이야깃거리를 생각하는 게 큰일이었어. 본방 전에 샤워하면서도 언제나 "뭘 얘기하지?"라고.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계속 재미있을 만한 이야기의
흐름같은 걸 생각하거나 했어.
그런걸 이제 거의 하지 않다도 좋게 되었어.
아이바짱 답게 오노군 답게 매듭을 지어줘.
단지 5명이서 이야기하는게 굉장히 즐거워졌어.
데뷔떄부터 1년 후 쯤에 소년대의 니시키오리상과
특별 방송을 했었던 적이 있었어.
그때 사무소 사람에게 혼났었어.
"너네들은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텐션이 올라가지도 않고,
어필이 되지도 않아."라고. 정말로. 맨 처음에 우리는 그랬었어.
음악 방송에서 카메라가 클로즈업 하려고 하고 있는데도
시선을 피하거나 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게 꽤 바뀌었구나- 하고 생각해.
다시 니시키오리상과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때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의지했던 분량 만큼 다른 형태로 돌려드렸으면 좋겠다.라고.
★ 大學卒業 대학졸업
04년은 대학을 졸업하는 해이기도 했어.
02년 가을부터 학교에는 여러가지 기업의 설명회가 시작되어서,
친구들에게 "넌 안가니?"라는 말을 듣거나 했어.
"너 취직한다는 거 진짜야?"라는 메일이 오기도 하고.
"아니. 난 쟈니즈 사무소로 결정되었어."라고 말하긴 했지만서도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망설임 같은 건 없었어.
그래도 나, 동네에 친구들이 없었으니까,
학교만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였었으니까.
일이 바빠지더라도 학교에 가면 모두를 만날 수 있다.
그게 수트를 입고 취직한 친구들을 보니까
"이제 곧 그런 시간도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쓸쓸했어. 04년이 되어서 졸업까지 라스트 스퍼트라고 할까.
일이 끝나면 매일매일 연락해서 많을 떄는
6~7명이 모여서 아침까지 이야기했어.
소학교때의 이야기를 하거나 일에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나, 그때까지 친구들에게 일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었지만,
4월부터는 같은 사회인이라는 라인에 서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먼저 일을 하고 있는 만큼,
나의 경험이 만약 친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서
매일밤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었어.
그러는 중에, 22살의 생일을 맞아서, 친구들이 비디오 레터를 줬어. 도리카무의 노래가 흐르고 여러 스냅 사진이 펼쳐지고,
그 후에 친구 한명한명이 메시지를 넣어주었어.
소학교 떄의 선생까지 나오셔서 놀랐어.
"난 역시 데뷰곡인 "NEWS 닛뽄"이 제일 좋아"라고 하는
녀석도 있거나 해서."그건 NEWS의 데뷔곡이란 말이다!"(웃음)
그런 비디오를 만들고 있었던거, 나 전혀 몰랐었어.
매일 얼굴마주치고 있었는데도. 그게 너무나 기뻤어.
여담이지만 그 비디오를 방에 놓아두었더니,
어머니가 "축 생일 교우 비디오"라고 맘대로 라벨을 붙여놔서.
거기에도 놀랬었어."언제 한거야?"라고 (웃음)
그 친구들끼리서 졸업여행을 갔었어. 한국에 갈 생각이었는데,
전원 여권 기한이 끝나 있어서 (웃음)
결국 스키타러 갔었어. 남자 4명이서.
나 비디오 가져가서 계속 촬영했어.
아버지 같이. 처음이었어. 그렇게 친구들이랑 여행하는 거.
굉장히 즐거웠어.
★ 芝居について 연기에 대해서
연기는 아직까지도 너무 어려워.
"WEST SIDE STORY"에서도 여러가지를 배웠어.
단지 대본 연습이 끝나고 나서 컴퍼니 모두 밥을 먹으러 가서
"이렇게 하는 편이 좋지 않아?"라든가 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거나 모두가 하나의 무엇을 만들어간다고 하는
그 공기가 굉장히 좋았었어.
다시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커다란 것이라고 하면 "키사라즈 캐츠아이"일까나.
"피칸치"에서 양키인 츄를 연기했었을때는
'"키사라즈~"를 하지 않았었다면
이런 식으로 할 수 없었을꺼야' 라고 생각했었고.
"키사라즈~"는 연기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준 첫 일이었어.
단지 대사를 말하는 것 뿐이 아니라.
역의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재미.
움직임 한가지에 있어서도 그 캐릭터에 따라서 다른 걸.
그걸 밤비를 처음으로 연기하고 "즐겁다"고 생각했었어.
작품자체도 엄청 좋아하고.
지금도 길에서 "밤비다~"라는 소리를 들어.
특히 남자들한테서.
그런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건 즐거운 일이야.
"이제 그만 이름 좀 외워주시지" 라고 조금은 생각하지만 (웃음)
그렇게 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까
"착한 아이의 친구"의 섭외가 들어왔을떄는 망설이지 않고
'하고 싶어'라고 생각해버렸어.
그때, 시험에 콘서트 리허설에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말로 잠잘 시간이 없었어.
샤워를 하면서도 자버리고. 앉은 순간에 자버리곤 했어.
그래도 그런 상태에서도 해냈다는 것이 조금은 자신이 붙었고,
내 안에서 양식을 넓혀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게 다시 다른 일이 생기게 되고.
이제부터 그런 양식을 늘려나가고 싶다고 생각했어.
연기뿐만이 아니라 나, 음악에 대해서도 버라이어티에 대해서도
꽤 병렬적이야. 어떤게 제일 좋다라는게 없어.
각각 다른 즐거움이 있으니까.
각각에 대해서 힘을 내서 할 수 있을 만큼 할 생각이야.
2년 전에 사랑니를 뺐을때,
얼굴이 빵빵하게 부어올라서 4일이 지나도 전혀 안가라앉는 거야. "계속 안가앉으면 어떻하지?"하고 생각했어.
"이 상태로 내가 일을 계속한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뭘 할 수 있는 걸까?"라고.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연기도 노래도 댄스도.
"자신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것이 무엇 하나도 없어서.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까지 확인하는게 무서워서 피하고 있었던 것이
거기서 또렷하게 보였던거야. 장래에 대해서 무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이 갖고 싶다 라고 생각했어.
이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확실한 것"이란 무엇일까.
라는게 되어버렸지만서도. 인기도 확실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실력이 있다고 성공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라는 걸 알게되면서 그러니까 더욱더
실력만은 다른 사람이 불만을 가질 수 없게
갖춰 질 수 있는 상태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 10年後の嵐 10년 후의 아라시.
앨범 "One"은 처음으로 멤버 각자의 솔로 넘버가 들어가있잖아.
아라시도 5주년으로 각자의 구역이 생겨서
새로운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는 시기구나 하고 생각했어.
얼마전에 우리들 5명이 서로 이유도 없이 모였어.
거기서 **(뭔말인지 모르겠음) .
단지 이름뿐이었던 "아라시"를, 우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지금의
"아라시"로 만들어나갔던 거라고 생각해.
10주년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는 내가 27살이구나.
아직 그정도구나.
바라는게 있다면 지금보다도 좀더 개인활동이 늘어서 5명이서
모일 기회가 적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오랜만에 5명이 모이면 굉장히 재미있어.
서로서로 말하고 싶은게 잔뜩 쌓여서
원거리연애중인 연인사이같이.(웃음)
"드디어 만났다!"라는 느낌으로. 텐션 엄청 올라가니까 말야.
그리고, 1번정도는 싸움하는 것도 좋을지도.
싸움한다고 해서 나쁜 방향으로
가지 않을 꺼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반대로 새로운 좋은 면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