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공자의 제자 증자가 썼다고 송나라 때 성리학자이자 주희가 말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학문의 목적과 그 의미를 설명한 글로서 유학의 핵심 의미를 간결하게 나타내고 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에서 나온 말이다.
에서는 '삼강령'과 '팔조목'이 나온다. '삼강령'이란 학문의 목적과 학문을 하는 자세를 나타내는 3가지 항목으로 첫째가 '명명덕', 둘째가 '신민' 셋째가 '지어지선'이다. 그리고 '팔조목'이란 '삼강령'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평천하', '치국', '제가', '수신', '정심', '성의', '치지', '격물'을 말한다.
명명덕 - 밝은 덕을 밝히다.
신민 - 사람들을 새롭게 하다.
지어지선 - 지극히 훌륭함에 이르도록 처신한다.
평천하 -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
치국 - 나라를 다스린다.
제가 - 집안을 질서 있게 한다.
수신 - 자신을 닦는다.
정심 - 마음을 바르게 한다.
성의 -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
치지 - 앎을 지극히 발전시킨다.
격물 - 사물에 대하여 그 이치를 연구한다.
학문을 하는 이유가 평천하를 하기 위해서이고 평천하를 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태도는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인 바로 격물이다.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이치를 알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자 시대에는 천하는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 국은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 가는 지방토후가 다스리는 나라로 해석해야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천하는 세계로 국은 나라로 가는 집안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배움은 우리의 삶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세계와 나는 배움으로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배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심지어 대학원까지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좀 더 나은 직장을 얻고 좀 더 나은 지위를 얻어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아 좀 더 나은 집과 자동차와 옷을 가지고 싶어하고 나의 모습에 걸맞은 배우자를 만나 삶을 즐기면서 살고 싶어한다. 배움의 시선이 오로지 나에게로만 향해있다. 그러다보니 배움은 타인을 향한 칼이 되고 세계를 향한 총이 되어버린다. 사회는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이긴자는 승자로의 권익을 모두 누리며 심지어는 훌륭한 인간으로 존경까지 받는다. 그러나 진자는 온갖 수모를 당해도 어쩔 수 없는 별 볼일 없는 심지어는 게으르다는 오명까지 써야한다. 정말 이런 현실을 만들어내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목적인가?
은 이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격물에서 시작하여 평천하를 이루는 과정이 배움의 과정이고 배움의 목표다. 그것은 나홀로 행복하자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총, 칼로 누군가의 머리를 쑤셔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해야 하고 우리는 서로 나눔을 가져야 하고 우리는 서로 배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철학] 대학
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在格物
은 공자의 제자 증자가 썼다고 송나라 때 성리학자이자 주희가 말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학문의 목적과 그 의미를 설명한 글로서 유학의 핵심 의미를 간결하게 나타내고 있다.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에서 나온 말이다.
에서는 '삼강령'과 '팔조목'이 나온다. '삼강령'이란 학문의 목적과 학문을 하는 자세를 나타내는 3가지 항목으로 첫째가 '명명덕', 둘째가 '신민' 셋째가 '지어지선'이다. 그리고 '팔조목'이란 '삼강령'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평천하', '치국', '제가', '수신', '정심', '성의', '치지', '격물'을 말한다.
명명덕 - 밝은 덕을 밝히다.
신민 - 사람들을 새롭게 하다.
지어지선 - 지극히 훌륭함에 이르도록 처신한다.
평천하 -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
치국 - 나라를 다스린다.
제가 - 집안을 질서 있게 한다.
수신 - 자신을 닦는다.
정심 - 마음을 바르게 한다.
성의 -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
치지 - 앎을 지극히 발전시킨다.
격물 - 사물에 대하여 그 이치를 연구한다.
학문을 하는 이유가 평천하를 하기 위해서이고 평천하를 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태도는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인 바로 격물이다.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이치를 알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자 시대에는 천하는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 국은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 가는 지방토후가 다스리는 나라로 해석해야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천하는 세계로 국은 나라로 가는 집안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배움은 우리의 삶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세계와 나는 배움으로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배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심지어 대학원까지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 좀 더 나은 직장을 얻고 좀 더 나은 지위를 얻어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아 좀 더 나은 집과 자동차와 옷을 가지고 싶어하고 나의 모습에 걸맞은 배우자를 만나 삶을 즐기면서 살고 싶어한다. 배움의 시선이 오로지 나에게로만 향해있다. 그러다보니 배움은 타인을 향한 칼이 되고 세계를 향한 총이 되어버린다. 사회는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 되어버렸다. 이긴자는 승자로의 권익을 모두 누리며 심지어는 훌륭한 인간으로 존경까지 받는다. 그러나 진자는 온갖 수모를 당해도 어쩔 수 없는 별 볼일 없는 심지어는 게으르다는 오명까지 써야한다. 정말 이런 현실을 만들어내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목적인가?
은 이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격물에서 시작하여 평천하를 이루는 과정이 배움의 과정이고 배움의 목표다. 그것은 나홀로 행복하자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총, 칼로 누군가의 머리를 쑤셔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해야 하고 우리는 서로 나눔을 가져야 하고 우리는 서로 배려해야 함을 의미한다.
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