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CCM가수이자 작곡가이고 음악 프로듀서인 최덕신의 아내
김은희 입니다. 현재 저는 최덕신과 간통 고소로 인한 이혼 소송으로 법정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싸움을 선포하고 진행해 오면서,
저는 최덕신이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써 자신을 돌이켜 주기를 일말에 희망을 걸고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최덕신이란 사람의 인간성과 그의 행동들에 대하여 조용히 간과하고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까지 할 수밖에 없는 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덕신은 현재 간통 혐의로 마포 경찰서에 고소 되어있고, 서부 경찰서에서 수사 착수 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지않아
빠른 시일 안에 같은 혐의자인 ‘김앵’을 대동하고 소환 될 예정으로 대기 중입니다.
가수 최덕신은 한 가정의
남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이라 수년 동안 인정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그가 가족회복 운운하며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오지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며 마치 자신이
일방적으로 핍박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동정심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체 앞에서 자신을 거짓 포장하고 있습니다. 이혼 소송의 원인이
최덕신과 “김앵“의 불륜이라는 사실을 그도 압니다. 그렇기에 이 소송의 해결책은 그가 불륜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덕신은
현재 불륜을 청산하지도 않은 채 대중 앞에서만 가족회복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이혼을 선포하고 친정에
가있는 자신의 아내인 저 김은희를 집나간 여자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덕신의 거짓된 행동은 그 수위를 더해갔습니다. 최덕신은 주위
사람들과 매체에서는 본인이 가정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처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최덕신은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있던 제게 그가
‘김앵’과 소비하느라 진 카드 빚을 갚을 돈을 친정집에서 구해오라며 협박하고 죽이려했었습니다.
다시 한번 진실을
말씀드립니다.
최덕신은 지금까지 한번도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한 사역자의 아내로서,
그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싶었습니다. 전 제가 억울한 누명을 쓰더라도, 최덕신이 한 번 만이라도 “김앵”과의 불륜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면 저는 그를 용서하고 그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저의 친정식구들과 주위에 저희 가정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김앵과의 불륜관계를 유지 하였고, 주위사람들에게 가정이 회복되길 원하고, 불륜관계가
정리되었다며 자신을 은폐시켰습니다. 최덕신은 자신이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더욱더 주변 사람들과 대중들에게 동정과 위로를 구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마음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식적인 기도제목을 올려놓고 여러분을 속였습니다.
최덕신은 실제 간통 고소장에 대한 답변서에 "돈도 없고 이혼할 마음도 없다고,”기록하여, 자신의 죄를 시인하기보다 어떻게든
이 소송을 무마시키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역자란 어떤 사람이여야 합니까? 최덕신은 저와 결혼 시작부터 지금까지 방법만
달랐을 뿐 늘 이런 식으로 의도적인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사람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기 가족인 아내, 자녀들, 심지어 주위
사람들까지 이용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지금도 최덕신은 새로운 사람들과 여러 가지 일들을 진행중에 있습니다.
최덕신에게 “사역”이라는
명목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그 일들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일이 아닌 돈을 벌기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최덕신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진 돈들은 다시 여자들과의 향락을 위해 흥청망청 쓰여질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최덕신이라는 사람에게 속지 않으셔야 합니다.
최덕신은 이 일이 추진되는 동안 제가 있는 친정이 어딘지 뻔히
알고도 ,한번도 친정으로 전화한 적도, 찾아와 잘못을 구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잘못을 구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는 그 최덕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인격이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저는 주찬양 선교단 단장이었고, 복음성가 가수이며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 최덕신의 아내 김은희입니다.
저와
남동생이 초기 찬양하는 사람들로 활동할 때, 극동방송에서 최덕신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최덕신이 활동하고 있던 주찬양선교단은 그다지
명성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찬양단과 최덕신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덕신은 제 남동생을 통하여 저에게 관심을 보였고 끈질긴
데이트 신청을 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해 이루어진 만남속에 결국 2달 만에 친정식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님의 권유로 급작스럽게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1987년 2월 5일 오후2시 백주년 기념관)
결혼과 동시에 전 주찬양선교단에서 엘토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주찬양 멤버들은 시아주버님이신 최유신 전도사님과 K단장, Y양, 최덕신, 김은희 (본인).5명 이었습니다. 이들과 매일
모임을 갖고 교제할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도 멤버들이 최덕신과 저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특히 시 아주버님은
동생인 최덕신이 이야기하는 것마다 인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빈번하자 저는 같은 멤버인 Y양을 만나서 선교단속의 인격무시와 시
아주버님의 행동에 대한 원인들을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Y양은 저에게 최덕신에 대해 얼마만큼 서로에 대해 알고 결혼했냐고
반문하였습니다. 다른 주찬양 멤버들은 최덕신의 여자관계와 모든 사생활들을 제가 알고, 결혼 한 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밖에
Y양은 결혼 전에 주찬양선교단이 최덕신 때문에 두 번이나 해체 위기가 있었음을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최덕신과 팀
자매들 간의 복잡한 이성관계로 자매들 안에서 분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최덕신은 결혼하기 직전까지
선교단내의 자매와 교제 중이었으며 갑작스런 저와의 결혼 때문에 자연히 단원들이 탈퇴하여 5명으로 팀 멤버가 조정 되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신혼 초부터 남편인 최덕신이란 사람에 대하여 알게 된 사실들은 저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찬양 멤버들이 저희 부부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저는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 속 에서도 저는 시부모님을 모셔야만 했으며 매월 20회 이상 지방
순회공연을 다녔습니다.
첫아이를 임신 한 후, 열 달 동안은 입덧을 해가면서도 꾸준히 최덕신과 함께 주찬양선교단 활동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공식적인 단원공모에서 열 몇 명의 신입단원이 들어오고, 주찬양이 알려지면서 멤버들이 2,30명으로 늘어나고
선교활동도 바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1990년 둘째아이 의선이를 낳고 저는 주찬양 활동을 접게 되었습니다..
매달 20회 이상
지방 공연 활동을 했던 최덕신은 이무렵부터 앨범 녹음과 선교단일로 한달에 반 이상을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가끔 집에 들어오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계속적으로 반복 또 반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지금의 이러한 상황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가장 수치스럽고 말하기조차 창피하고 힘든 일을 쓰려고 합니다.
ccm가수 송정미씨가 1집을 만들 당시였습니다. 저는 남편의 권유로 친정집에 며칠간 머물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며칠 뒤 최덕신은 느닷없이 약 봉투를 제게 내밀면서.. 자신이 성병에 걸린 사실을
통보하였습니다..그리고 자신이 결혼하기 전부터 청량리 588을 수시로 다녔음을 시인하며 약을 같이 복용 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의사의 처방조치) 문란한 성생활과 무절제한 사창가 출입으로만 옮는다고 하는 병이 제 남편, 그것도 사역을 한다는 사람에게서 발견
되었을 때, 저는 그 사람과 같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수치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횟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졌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망연자실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최덕신이 사역자였기 때문에,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은혜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하나만 조용히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행각은 제주도에서 살 때도 해외로 사역(일본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을 나갈 때마다 계속되었습니다. 여행가방속에서
수차례 성병으로 인한 비뇨기과 약을 발견하였습니다. 최덕신은 약을 조제하는 과정에서 차마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어 제 남동생 이름으로 약을
지어왔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병적 성 도착증에 대하여 저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최덕신은 또다른 불륜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인가도 별로
없는 벽제 산속에 산장 집에서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차가 있어야 나갈 수 있고 밤이면 주변에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집에서 저와 어린
아이들은 꼼짝없이 갇혀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갇혀 산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정말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외부로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덕신은 연락두절로 며칠이고 외박을 감행했고 그때마다 저는 어린 아이들의 손을 붙잡으며 밤마다 두려움에 떨며 기도했습니다.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간신히 잠재우고, 남편인 최덕신을 기다리느라 밤을 세우기 일 수 였습니다. 정말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 없는 날들이었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가장에게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저는 최덕신이 어쩌다 집에
들어오면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가정을 돌봐줄 것과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줄 것을 권유 하였습니다.그러나 최덕신은 사역한다는 이유로
제 의견을 무시해 버리기 일 수 였습니다.
그러다가 여자문제가 부각 될때면 그때 마다 그는 아이들이 보고있는 상황에서 이성을 잃고
저를 죽일 듯이 목을 조르고 온 집안의 물건들을 부수며 사정없이 저를 폭행하고 입에담지못할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최덕신은 끝까지 여자문제를 헛소문으로 몰고갔습니다. 참을수 없는 가정폭력 속에서 전 그말을
거짓으로라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찬양 단원들의 자체적인 추적으로 최덕신과 여자멤버와의 불륜관계는
공식적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헛소문일 뿐이라며 내 목을 조르던 남편 최덕신은 이 일로인해 주찬양단팀을
해체하게 되었습니다.
.최덕신과 같이 무리를 일으켰던 여자 단원은(이름을 밝힐 수없음) 불륜사실이 드러난 직후 주변 목사님들의
권유를 받아 부모님이 있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덕신은 주위의 많은 목사님들의 권유로 근신기간을 갖게되었고, 이를
계기로 우리가정은 모두 하와이로 신앙연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와이에서 돌아온뒤 최덕신은 거처를 제주도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해외 사역시 수시로 사창가를 찾는 그의 변태적인 행동들은 가까스로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제게 더 큰 절망을 안겨줄
뿐이었습니다.
제주도는 비행기가 없으면 뭍으로 나올 수 없으므로 한번 지방집회를 떠나면 오랜시일이 걸 릴 수밖에 없음을 당연시
하며 ,최덕신은 지방의 집회를 거의 매주일 다녔습니다.
어디서 무슨 집회를 누구와 어떻게 하는지, 언제쯤 집에 오는지, 가족들에게
한번도 연락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최덕신이 오가는 일들을 관여하지 말아야 했고 어쩌다 조심스럽게 한번 숙소에 대해서 물어보면
윽박지르며 어디서 묵었는지조차 묻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최덕신이 혼자서 집회를 다니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집회가 끝나면 관계자들에게도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않고 홀로 호텔에 투숙하여 포르노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호텔방에서 포르노를 보며 자위행위를 즐겼고, 윤락녀와의 섹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최덕신의 그러한 행동은 늘 사역과
함께 이루어졌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이중적인 모습에 저는 최덕신을 남편으로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물론 기도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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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불륜사건 이후 다시 두 번째 불륜관계가 시작된 것은 제주도로 이사한지 2년도 못 되어 일어났습니다.
1998년 서울 숭실대학교에 CCM학과가 새로 개설되면서 최덕신은 그곳 강사로 강의를 맡게 되었는데, 학과 오디션때 지금의
간통고소가 돼있는 김앵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덕신과 김앵은 그의 12번째 앨범인 “갈망”의 10번째 곡인 “나의기도”를 함께 부르면서
그것을 계기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로인해 또다시 최덕신은 가정을 소홀히 하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최덕신에게
가정을 지켜달라고 수차례 권유하였으나 최덕신은 되려 저를 이상한 여자로 취급을 하였습니다. 저는 더 이상 가장이 없는 가정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잠시집을 나온 저는 몇분뒤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다시 들어간집은 조금전과 달리
조용하였고 저는 남편과 아이들이 없는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최덕신은 김앵과 함께 아이들과 놀이동산을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방에서 나오는 저를 보고 최덕신과 김앵은 모두 기겁을하며 당황하였습니다.
최덕신은 남편의 외도에 지친 제가 집에서 영원히 떠난줄
알았습니다. 저는 그 상황속에서 침착하게 김앵을 맞이하였으며 잘 돌려보냈습니다. 그날이 김앵과 저의 첫 대면이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무었보다도 저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남편인 최덕신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또다시 화를
내며 이성을 잃었습니다. 다시는 우리 가정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며 짐을 싸 가지고 나가버렸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울면서 가장인 최덕신을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집에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교회 관계자들을 속이고 지구촌
교회와 온누리교회에서 찬양집회를 계속하였습니다.
어쩌다 가끔 집에 들어오면 제가 누구와 통화했는지 ,전화국에서
통화내역을 조사라도 한 사람인양 협박하며 다구쳤고, 자신의 만행이 외부에 알려 질까봐 두려워하며, 저와 아무하고도 통화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한번은 찬양사역자 s양과 통화한 사실을 알아내어, 저를 죽일 듯이 몰아세운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s양과 그냥 안부통화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더욱더 기가 막힌건 김앵의 행패였습니다. 김앵은 저에게 며칠씩 새벽이고
밤이고 낮이고 몇 십번씩 전화벨을 울려댔습니다. 어쩌다 통화가 되면 김앵은 제게 최덕신을 포기하라며 반말과 함께 상스러운 갖은 욕과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조심하라는 협박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두려워서 식구들에게조차 자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느 곳에 나서야 할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렇게 겁에 질려, 어찌 할 바를 알 수 없는 무력한 생활 가운데 ,더 힘들었던 것은 생활비조차 전혀 없이 지내야 하는 가정 형편
이였습니다. 이렇게 5개월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갑자기 최덕신은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들어갈 상황이 생겼다고 하며 저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동안 받은 정신적인 쇼크로 깊게 생각할 시간도 없이, 전 또 다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반 강제적으로 ,무작정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조차 최덕신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았습니다. 매일 밤마다 작업을 핑계로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국에 있는 김앵에게 전화를 걸어 말로 표현하기 조차 거북한 언어들과 들어보지도 못한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가며 ***를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최덕신은 한국에 사역이 있다는 핑계로 가족만 남겨두고 미국을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이 몇 달간 있다가 비자가 끝날 무렵 다시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겨우 핸드폰 연락처를 알아내서 남편에게 안부전화를
하면, 김앵이 전화를 뺏어 받아 되려 최덕신의 부인인 저에게 마구 폭언을 하였습니다 .
김앵의 폭언은 계속해서 밤,낮이고
새벽2,3시고 미국 집으로 성이 찰 때까지 걸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는 전화 벨소리만 울리면 깜짝깜짝 놀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을 당시 L.A 교회에서 한국에서의 최덕신의 행각들이 알려져 교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켰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 성도들이 많이 교회를 떠나는등 ,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게 되자 최덕신은 새로운 거처를 뉴 저지로 옮겼으며,
뉴져지 열린문 장로교회에서 찬양예배 인도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최덕신은 그곳에 간지 한 달 만에 또 다시 한국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몇 달동안 가장인 최덕신의 행방도 모른체, 저와 아이들은 월세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구두 샵에 직원으로, 병원사무원으로, 음식점 주방원으로 일하며 겨우겨우 생활을 꾸려 나갔습니다. 두 아이를 여자의 몸으로
홀로 양육하고 생활하기에 너무도 힘들었기에 저는 여기저기 돈까지 꾸어야만 했습니다.
주변인들을 통해 들은 한국에
있는 최덕신은 그 당시 찬양집회를 계속 한 상태였으며, 그 후로도 “송명희와 친구들 ”앨범을 내는 등 꾸준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앵 또한 여전히 공갈 협박 전화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어쩌다 제 아이들이 전화를 받을 때면 전 너무도 당혹스러워 결국엔 아예 코드를 뽑아버야만 했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온 최덕신은 너무 잦은 한국행으로 인해 교회 일을 등한시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소문들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날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최덕신은
다시 자신의 무능력함을 핑계로 제게 이혼을 요구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정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살아가자고
애원했습니다.
이후 최덕신은 다시 테네시주에 있는 음악의도시 네쉬빌에 집을 얻었습니다.
그는 집안에 스튜디오를
만들고, 이혼하려했던 태도를 바꾸어 평생을 우리 가족을 위해 살 것처럼 제게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러한 그를 다시 한번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집에서도 밤낮없이 김앵의 전화가 매일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때그때 마다 최덕신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김앵이 스토커다. 싸이코다. 정신병자 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고는 혼자 밖으로 나가 다른 곳에서 핸드폰으로 몇 시간씩 김앵과
통화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최덕신은 다시 한국에 나갔다가 미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상습적인 비자 연장으로 결국
미국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하였습니다.
시애틀 공항에서 여권과 비자를 압류당한 최덕신은 곧바로 한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이 사건 당시 저와 아이들은 미국에 관광비자로 들어와 불법체류를 한 상태로 이미 미국에서 영주권 신청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에 한번 나가게 되면 다시는 미국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와 그동안의 수고들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최덕신에게 제가 미국에서 계속적으로 직장을 잡고, 집을 줄이고, 아이들 양육을 책임지고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덕신에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에서 다시 비자를 만들어 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최덕신은 한국에서 사역을 하면서
생기는 무수한 소문들과 자신을 향한 질타와 의심들을 모면 할 수 있는 가정이라는 방패가 가까이 있어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무척이나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최덕신은 저와 아이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또다시 가정과 가족들에게
충실하겠다고 저를 계속 설득 시켰습니다. 그 설득에 저는 마지막으로 남편을 믿고 아이들과 함께 미국에 간지 3년도 채 안 되어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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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들어와 보니 최덕신은 경기도 양수리 산속에 카페를 집으로 거의 얻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순간, 저는 옛날
벽제 산속에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최덕신의 약속을 믿고 꾹 참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얼마 안 되어 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집에는 가끔 사람들을 초대 할 때만 들어와서 일방적으로 제게 손님 접대를 준비해 줄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그럴
때 마다 아이들의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아무렇지 않은 듯이 2,30명의 손님들을 접대 하여야 했습니다.
손님 접대가 끝나면
최덕신은 그날 밤으로 다시 집을 나갔습니다.
가정은 버려둔 채 그는 계속해서 찬양집회를 하였고, 음반회사를 차려 운영하였으며,
그의 삶과 가정생활들이 아무문제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러한 이중성을 연극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최덕신은 이런 저와 함께 기독교 방송 프로인“ CCM다큐”를 촬영하고, 가끔 찬양 집회 때 함께 찬양을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거짓된 모습으로 사람들과 교제를 하였고 그때마다 제 마음은 항상 울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가정이 하나 되길 원하였는데, 계속되는
거짓된 가정생활과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저의 삶은 거의 절망 상태였습니다.
어쩌다 가끔
최덕신이 집안일때문에 집에 머물러 옷을 갈아 입는 때의 일입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 몸에 굵은 손톱 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습니다.
목덜미와 등 ,옆구리 ,가슴 등이 심하게 할퀴어져 있었습니다.
저와는 몇 년 동안 부부관계가
없었으므로 , 맨살인 상태에서나 가능한 상처들을 보고
저는 참기 힘든 모욕감과 굴욕감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최덕신에게는 어김없이 김앵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급기아는 김앵이 새벽2시에 찾아와 최덕신이 나올 때까지 문을 걷어차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정신이 나간애”라고 하며 김앵을 설득시키러 나간 최덕신은 다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혼자의 몸으로
생활하였고 , 생활비 때문에 유치원과 영어과외를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집에 가끔씩 얼굴을 내미는
최덕신에게 저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권고 했지만 , 그때마다 그는 제게 비아냥거리며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쓰고 있던 성경책상을 뒤 집어 엎어 제 이마가 찢어지게 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런 견딜 수 없는 폭력
앞에 저는 두려워 죽고 싶을 뿐 이였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면, 늘 아이들이 눈앞에 어려 삶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정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에 대하여, 전 저 한사람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강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최덕신 이었습니다.
경기도 양수리의 집에서
비싼 월세 문제로 집을 동작동으로 옮기면서도 최덕신은 계속 집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어디서 뭘 하며, 어느 곳에 묵는지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어쩌다 한번씩이라도 얼굴을 비추어 주는 것이 고마웠고 ,아이들에게도 허울뿐인 아빠라도 있어 주는 것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최덕신은 점점 더 사업을 늘려가기 시작했고, 집회횟수도 점점 늘려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저는 더 이상 이대로는 가정이 지속 된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최덕신이 원하는 것이
“이혼”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즈음이었습니다. 제 친정 식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문으로 제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친정 식구들이 나서서, 그동안의 최덕신과 김앵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는 제 짐작 이상이었습니다.
그 둘은 1998년도부터 동거를 하고 있었으며, 일산에서 집을 얻어 살다가 현재는 응암동에 집을 사서 살고
있었습니다. 저와 아이들이 사는 집에는 생활비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김앵에게는 차를 사주고, 김앵을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뮤지컬학과에 입학시켜
현재까지 등록금을 대어 주는 등, 두 사람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잦은 해외여행을
다녔고 최덕신의 지방 찬양 집회에 김앵이 함께 내려가서 집회 후에 놀다오기 일수였습니다.
한번은 어느 자매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찬양하는 유명한 모집사님이 공항에서 최덕신이 젊은 여자와 키스하는 것을 목격 했다며, 도대체 최덕신의 인격과 영적인 부분이 거지같다고 말씀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는 어떻게 이런 일이 사역자 가운데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냐고 한탄을 하였습니다. 최덕신은 회개하고, 가정이 회복
됐다고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이야기 하고 다녔지만 실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사실을 저는 이제 덮어 두지만은 않으려 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덕신에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권고했지만 그는 계속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가렸습니다.
이에 더 이상 최덕신의 영적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저는 최덕신과의 가정생활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혼을
준비 하면서 결국, 저는 최덕신과 김앵이 지금까지 저질러온 불륜관계를 시인하는 것을 직접 녹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이혼을
원하는 것을 알게 된 최덕신은 자신의 활동에 큰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가까운 조갑진 목사님과 여러 사람들에게 김앵과의 관계가 이미
정리되었다고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시 뒤돌아서서 김앵과 공중전화와 사무실 전화로 연락하고 만남을 지속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인식한 최덕신은 이 무렵부터 집에 들어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녹음을 핑계로 거의 매일같이 새벽녁에
들어오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아 본 결과 그들이 새벽녘까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순간 분노를
감출 수 없었습니다.
최덕신은 이외에도 그동안 김앵과 썼던 카드 빚 2300만원을 갚아줘야 한다며, 제게 친정가서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돈을 구해오라며 강요하였습니다.
카드 빚이 해결해 주면되면 자신과 김앵의 관계도 깨끗하게 정리 하겠단 말을 남기고
해외사역을 떠났습니다.
최덕신이 사역을 떠난 동안 저는 카드 빚을 갖으려 친정집을 찾아 갔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친정집만 시끄러워 지는 결과를 나았습니다.
전 결국 최덕신이 돌아올 때까지 카드 빚을 해결하지 못했고, 사실 처음부터
깅앵과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 없던 최덕신은 자신이 카드 빚을 해결 하겠다는 이유로 교묘히 김앵과
관게를 유지 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최덕신은 김앵의 카드 빚을 갚기 위해 그나마 남아 있던 우리 재산인 제주도 땅 천 평을 저도 모르게 팔아
그녀의 빚을 갚아주었습니다.(1월 10일 날짜로)
이 글에
대해서 최덕신이 어떠한 변명을 하더라도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너무나도 많은
증인들이 있으며,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최덕신과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차마 그동안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본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남동생과 주찬양 단원들을 비롯해서, 집이고, 사무실이고 장소에 상관없이 행해지는 최덕신과 김앵의 추태를 어이
없이 바라보며, 충격 받았던 일들을 그들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최덕신을 한 사람의 사역자로
생각해 주신다면, 저를 위해서도 한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 이전에, 저도 한 사람으로써, 그리고 한 여자로써의 입장에 관하여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최덕신 카페 게시판에, 최덕신이 올려놓은 글을 보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가정이 회복되길 원하는
사람이 왜 지금까지 불륜관계를 놓지 않았으며, 왜 제가 친정에 와 있는 줄 알면서도 집을 나갔다고 표현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최덕신이 제게 아무런 연락도 없이 친정집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러 오지도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그를 못 믿는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최덕신과 살아온 동안 그는 저를 정신이상자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열심히
사역하는 아빠에게 ,엄마가 병적인 사람인 것쳐럼 이해시키곤 했습니다.
간사할 정도로 아이들로부터 저를 따돌리며 교묘하게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저의 친정 식구들의 감정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제가
주님만 의지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진짜로 정신이상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더 이상 최덕신이 이중생활을
하며 많은 성도들 앞에서 거짓되게 행동하며, 찬양사역을 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아래 이런 고백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악몽들을 열거하면서 저 스스로도 너무나 괴로웠고
창피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전 이제 결심하였습니다.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고 , 이에 최덕신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어느 누구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계속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반복되고, 회개를 빙자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속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부인해도 진실은 드러나기에 저는 더 이상의 변명보다는 진정한
돌이킴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과 알면서도 계속 죄를 지속시킨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함을 말씀하신 것으로 멈춘다면 우린 죄를 계속해서 지어도 괜찮은 것과 같겠지만 분명 성경은 그럴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저는 더 이상 최덕신에게 속을 수가 없습니다. 제 눈물을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저는 이일을 정말 주님께 맡기며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 기도 외에는 다른 어떠한 제스쳐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담대하게 모든 일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저의 아이들 때문에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이렇게 밖에 할수 없는 저를 보며 가슴이 아픕니다.
이혼이 거론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가정회복과 감사 운운하며 인터넷에 글을 올린
최덕신은 친정에 있는 제게 아무 연락도 없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여지도 없습니다.
현재도 최덕신은 김앵과 함께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정싸움을 준비중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교회에 다니며 집회를 하고, 크리스챤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최덕신이 주님 앞에 자신을 돌이키지 않는 한, 그가 이 지구상 어떤 오지에 간다 해도 끝까지 싸워 나갈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은 이름뿐일 지라도 제 남편 최덕신이 아이들의 아빠로써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묵인하려
했지만, 수많은 영혼들과 저와 함께 상처 받은 제 아이들을 위해 싸워나갈 것입니다.
http://cafe.daum.net/cdsccm 에서
----------------------------------- 최덕신 집사의 공개
사과문
.. 갓피플 닷컴에서 발췌했습니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최덕신씨가 저희
갓피플닷컴 통해 공식적으로 '네티즌들에게 드리는 사죄의 글'을 밝히겠다고뜻을 전하셨습니다. 아래에 그 전문을 공개합니다.
한국
교회에 드리는 사죄의 글
저의 아내인 김은희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저에 대해 올린 글로 인해 교계가 많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당사자인 저 최덕신이 고백을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1. 먼저 이 모든 사태가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고
부족함임을 고백합니다. 먼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찬양사역을 해 온 것에 대해 깊은
자성과 회개를 하는 바입니다.
또한 저의 인격과 영성의 부족함으로 인해 제가 그 동안 한국교회와 성도님들로부터 받아 온 사랑과
칭찬, 그리고 심지어는 업적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타격과 실망감을 안겨 드린 것에 대해서도 깊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일로 인해
어떠한 질책과 비난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며 교계 지도자들의 지도와 훈계를 따를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2.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함과 동시에 저의 사역자로서의 자격 없음을 깨닫고 모든 공적인 사역을 내려 놓겠습니다.
3. 그 동안의 사역과 그 열매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지만, 한국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여 그 동안 발표한 곡들과 음반들에 대해서도 교계 지도자들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와 성도님들의 격려와 사랑으로 여기까지 온 것을 고백하며 모든 음악저작권도 포기하고 한국교회에 내어 놓겠습니다.
4. 지금 저와 저의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치유와 회복입니다. 개개인의 영적 그리고 내적 치유가 우선되어야 하고, 이어서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 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기도로 도와주시고 많은 격려와 위로로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CCM 가수 최덕신에 대한 진실
저는 최덕신의 아내 김은희 입니다
저는 CCM가수이자 작곡가이고 음악 프로듀서인 최덕신의 아내 김은희 입니다. 현재 저는 최덕신과 간통 고소로 인한 이혼 소송으로 법정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싸움을 선포하고 진행해 오면서, 저는 최덕신이 마지막으로 한 남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써 자신을 돌이켜 주기를 일말에 희망을 걸고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최덕신이란 사람의 인간성과 그의 행동들에 대하여 조용히 간과하고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까지 할 수밖에 없는 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덕신은 현재 간통 혐의로 마포 경찰서에 고소 되어있고, 서부 경찰서에서 수사 착수 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머지않아 빠른 시일 안에 같은 혐의자인 ‘김앵’을 대동하고 소환 될 예정으로 대기 중입니다.
가수 최덕신은 한 가정의 남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이라 수년 동안 인정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그가 가족회복 운운하며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오지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며 마치 자신이 일방적으로 핍박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동정심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체 앞에서 자신을 거짓 포장하고 있습니다. 이혼 소송의 원인이 최덕신과 “김앵“의 불륜이라는 사실을 그도 압니다. 그렇기에 이 소송의 해결책은 그가 불륜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덕신은 현재 불륜을 청산하지도 않은 채 대중 앞에서만 가족회복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이혼을 선포하고 친정에 가있는 자신의 아내인 저 김은희를 집나간 여자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덕신의 거짓된 행동은 그 수위를 더해갔습니다. 최덕신은 주위 사람들과 매체에서는 본인이 가정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처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최덕신은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있던 제게 그가 ‘김앵’과 소비하느라 진 카드 빚을 갚을 돈을 친정집에서 구해오라며 협박하고 죽이려했었습니다.
다시 한번 진실을 말씀드립니다.
최덕신은 지금까지 한번도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한 사역자의 아내로서, 그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싶었습니다. 전 제가 억울한 누명을 쓰더라도, 최덕신이 한 번 만이라도 “김앵”과의 불륜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면 저는 그를 용서하고 그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저의 친정식구들과 주위에 저희 가정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김앵과의 불륜관계를 유지 하였고, 주위사람들에게 가정이 회복되길 원하고, 불륜관계가 정리되었다며 자신을 은폐시켰습니다. 최덕신은 자신이 궁지에 몰리면 몰릴수록 더욱더 주변 사람들과 대중들에게 동정과 위로를 구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마음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식적인 기도제목을 올려놓고 여러분을 속였습니다.
최덕신은 실제 간통 고소장에 대한 답변서에 "돈도 없고 이혼할 마음도 없다고,”기록하여, 자신의 죄를 시인하기보다 어떻게든 이 소송을 무마시키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역자란 어떤 사람이여야 합니까? 최덕신은 저와 결혼 시작부터 지금까지 방법만 달랐을 뿐 늘 이런 식으로 의도적인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사람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기 가족인 아내, 자녀들, 심지어 주위 사람들까지 이용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지금도 최덕신은 새로운 사람들과 여러 가지 일들을 진행중에 있습니다.
최덕신에게 “사역”이라는 명목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그 일들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일이 아닌 돈을 벌기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최덕신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진 돈들은 다시 여자들과의 향락을 위해 흥청망청 쓰여질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최덕신이라는 사람에게 속지 않으셔야 합니다.
최덕신은 이 일이 추진되는 동안 제가 있는 친정이 어딘지 뻔히 알고도 ,한번도 친정으로 전화한 적도, 찾아와 잘못을 구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잘못을 구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는 그 최덕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인격이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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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찬양 선교단 단장이었고, 복음성가 가수이며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 최덕신의 아내 김은희입니다.
저와 남동생이 초기 찬양하는 사람들로 활동할 때, 극동방송에서 최덕신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최덕신이 활동하고 있던 주찬양선교단은 그다지 명성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찬양단과 최덕신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덕신은 제 남동생을 통하여 저에게 관심을 보였고 끈질긴 데이트 신청을 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해 이루어진 만남속에 결국 2달 만에 친정식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부모님의 권유로 급작스럽게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1987년 2월 5일 오후2시 백주년 기념관)
결혼과 동시에 전 주찬양선교단에서 엘토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주찬양 멤버들은 시아주버님이신 최유신 전도사님과 K단장, Y양, 최덕신, 김은희 (본인).5명 이었습니다. 이들과 매일 모임을 갖고 교제할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도 멤버들이 최덕신과 저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특히 시 아주버님은 동생인 최덕신이 이야기하는 것마다 인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빈번하자 저는 같은 멤버인 Y양을 만나서 선교단속의 인격무시와 시 아주버님의 행동에 대한 원인들을 물어보았습니다..
이에 Y양은 저에게 최덕신에 대해 얼마만큼 서로에 대해 알고 결혼했냐고 반문하였습니다. 다른 주찬양 멤버들은 최덕신의 여자관계와 모든 사생활들을 제가 알고, 결혼 한 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밖에 Y양은 결혼 전에 주찬양선교단이 최덕신 때문에 두 번이나 해체 위기가 있었음을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최덕신과 팀 자매들 간의 복잡한 이성관계로 자매들 안에서 분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최덕신은 결혼하기 직전까지 선교단내의 자매와 교제 중이었으며 갑작스런 저와의 결혼 때문에 자연히 단원들이 탈퇴하여 5명으로 팀 멤버가 조정 되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신혼 초부터 남편인 최덕신이란 사람에 대하여 알게 된 사실들은 저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찬양 멤버들이 저희 부부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저는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힘든 상황 속 에서도 저는 시부모님을 모셔야만 했으며 매월 20회 이상 지방 순회공연을 다녔습니다.
첫아이를 임신 한 후, 열 달 동안은 입덧을 해가면서도 꾸준히 최덕신과 함께 주찬양선교단 활동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공식적인 단원공모에서 열 몇 명의 신입단원이 들어오고, 주찬양이 알려지면서 멤버들이 2,30명으로 늘어나고 선교활동도 바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1990년 둘째아이 의선이를 낳고 저는 주찬양 활동을 접게 되었습니다..
매달 20회 이상 지방 공연 활동을 했던 최덕신은 이무렵부터 앨범 녹음과 선교단일로 한달에 반 이상을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가끔 집에 들어오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계속적으로 반복 또 반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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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제가 지금의 이러한 상황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가장 수치스럽고 말하기조차 창피하고 힘든 일을 쓰려고 합니다.
ccm가수 송정미씨가 1집을 만들 당시였습니다. 저는 남편의 권유로 친정집에 며칠간 머물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며칠 뒤 최덕신은 느닷없이 약 봉투를 제게 내밀면서.. 자신이 성병에 걸린 사실을 통보하였습니다..그리고 자신이 결혼하기 전부터 청량리 588을 수시로 다녔음을 시인하며 약을 같이 복용 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의사의 처방조치) 문란한 성생활과 무절제한 사창가 출입으로만 옮는다고 하는 병이 제 남편, 그것도 사역을 한다는 사람에게서 발견 되었을 때, 저는 그 사람과 같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수치스러웠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횟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잦아졌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망연자실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최덕신이 사역자였기 때문에,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은혜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하나만 조용히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행각은 제주도에서 살 때도 해외로 사역(일본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을 나갈 때마다 계속되었습니다. 여행가방속에서 수차례 성병으로 인한 비뇨기과 약을 발견하였습니다. 최덕신은 약을 조제하는 과정에서 차마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어 제 남동생 이름으로 약을 지어왔다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병적 성 도착증에 대하여 저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최덕신은 또다른 불륜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인가도 별로 없는 벽제 산속에 산장 집에서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차가 있어야 나갈 수 있고 밤이면 주변에 불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집에서 저와 어린 아이들은 꼼짝없이 갇혀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갇혀 산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정말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외부로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덕신은 연락두절로 며칠이고 외박을 감행했고 그때마다 저는 어린 아이들의 손을 붙잡으며 밤마다 두려움에 떨며 기도했습니다.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간신히 잠재우고, 남편인 최덕신을 기다리느라 밤을 세우기 일 수 였습니다. 정말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 없는 날들이었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가장에게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저는 최덕신이 어쩌다 집에 들어오면 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 가정을 돌봐줄 것과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줄 것을 권유 하였습니다.그러나 최덕신은 사역한다는 이유로 제 의견을 무시해 버리기 일 수 였습니다.
그러다가 여자문제가 부각 될때면 그때 마다 그는 아이들이 보고있는 상황에서 이성을 잃고 저를 죽일 듯이 목을 조르고 온 집안의 물건들을 부수며 사정없이 저를 폭행하고 입에담지못할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최덕신은 끝까지 여자문제를 헛소문으로 몰고갔습니다. 참을수 없는 가정폭력 속에서 전 그말을 거짓으로라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주찬양 단원들의 자체적인 추적으로 최덕신과 여자멤버와의 불륜관계는 공식적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헛소문일 뿐이라며 내 목을 조르던 남편 최덕신은 이 일로인해 주찬양단팀을 해체하게 되었습니다.
.최덕신과 같이 무리를 일으켰던 여자 단원은(이름을 밝힐 수없음) 불륜사실이 드러난 직후 주변 목사님들의 권유를 받아 부모님이 있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덕신은 주위의 많은 목사님들의 권유로 근신기간을 갖게되었고, 이를 계기로 우리가정은 모두 하와이로 신앙연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와이에서 돌아온뒤 최덕신은 거처를 제주도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해외 사역시 수시로 사창가를 찾는 그의 변태적인 행동들은 가까스로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제게 더 큰 절망을 안겨줄 뿐이었습니다.
제주도는 비행기가 없으면 뭍으로 나올 수 없으므로 한번 지방집회를 떠나면 오랜시일이 걸 릴 수밖에 없음을 당연시 하며 ,최덕신은 지방의 집회를 거의 매주일 다녔습니다.
어디서 무슨 집회를 누구와 어떻게 하는지, 언제쯤 집에 오는지, 가족들에게 한번도 연락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최덕신이 오가는 일들을 관여하지 말아야 했고 어쩌다 조심스럽게 한번 숙소에 대해서 물어보면 윽박지르며 어디서 묵었는지조차 묻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최덕신이 혼자서 집회를 다니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집회가 끝나면 관계자들에게도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않고 홀로 호텔에 투숙하여 포르노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호텔방에서 포르노를 보며 자위행위를 즐겼고, 윤락녀와의 섹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최덕신의 그러한 행동은 늘 사역과 함께 이루어졌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이중적인 모습에 저는 최덕신을 남편으로서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물론 기도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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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불륜사건 이후 다시 두 번째 불륜관계가 시작된 것은 제주도로 이사한지 2년도 못 되어 일어났습니다.
1998년 서울 숭실대학교에 CCM학과가 새로 개설되면서 최덕신은 그곳 강사로 강의를 맡게 되었는데, 학과 오디션때 지금의 간통고소가 돼있는 김앵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덕신과 김앵은 그의 12번째 앨범인 “갈망”의 10번째 곡인 “나의기도”를 함께 부르면서 그것을 계기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로인해 또다시 최덕신은 가정을 소홀히 하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최덕신에게 가정을 지켜달라고 수차례 권유하였으나 최덕신은 되려 저를 이상한 여자로 취급을 하였습니다. 저는 더 이상 가장이 없는 가정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잠시집을 나온 저는 몇분뒤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다시 들어간집은 조금전과 달리 조용하였고 저는 남편과 아이들이 없는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최덕신은 김앵과 함께 아이들과 놀이동산을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방에서 나오는 저를 보고 최덕신과 김앵은 모두 기겁을하며 당황하였습니다.
최덕신은 남편의 외도에 지친 제가 집에서 영원히 떠난줄 알았습니다. 저는 그 상황속에서 침착하게 김앵을 맞이하였으며 잘 돌려보냈습니다. 그날이 김앵과 저의 첫 대면이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무었보다도 저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남편인 최덕신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또다시 화를 내며 이성을 잃었습니다. 다시는 우리 가정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며 짐을 싸 가지고 나가버렸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울면서 가장인 최덕신을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집에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교회 관계자들을 속이고 지구촌 교회와 온누리교회에서 찬양집회를 계속하였습니다.
어쩌다 가끔 집에 들어오면 제가 누구와 통화했는지 ,전화국에서 통화내역을 조사라도 한 사람인양 협박하며 다구쳤고, 자신의 만행이 외부에 알려 질까봐 두려워하며, 저와 아무하고도 통화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한번은 찬양사역자 s양과 통화한 사실을 알아내어, 저를 죽일 듯이 몰아세운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s양과 그냥 안부통화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더욱더 기가 막힌건 김앵의 행패였습니다.
김앵은 저에게 며칠씩 새벽이고 밤이고 낮이고 몇 십번씩 전화벨을 울려댔습니다. 어쩌다 통화가 되면 김앵은 제게 최덕신을 포기하라며 반말과 함께 상스러운 갖은 욕과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조심하라는 협박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두려워서 식구들에게조차 자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아무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느 곳에 나서야 할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렇게 겁에 질려, 어찌 할 바를 알 수 없는 무력한 생활 가운데 ,더 힘들었던 것은 생활비조차 전혀 없이 지내야 하는 가정 형편 이였습니다. 이렇게 5개월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갑자기 최덕신은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들어갈 상황이 생겼다고 하며 저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동안 받은 정신적인 쇼크로 깊게 생각할 시간도 없이, 전 또 다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반 강제적으로 ,무작정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조차 최덕신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았습니다.
매일 밤마다 작업을 핑계로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국에 있는 김앵에게 전화를 걸어 말로 표현하기 조차 거북한 언어들과 들어보지도 못한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가며 ***를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최덕신은 한국에 사역이 있다는 핑계로 가족만 남겨두고 미국을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이 몇 달간 있다가 비자가 끝날 무렵 다시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겨우 핸드폰 연락처를 알아내서 남편에게 안부전화를 하면, 김앵이 전화를 뺏어 받아 되려 최덕신의 부인인 저에게 마구 폭언을 하였습니다 .
김앵의 폭언은 계속해서 밤,낮이고 새벽2,3시고 미국 집으로 성이 찰 때까지 걸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는 전화 벨소리만 울리면 깜짝깜짝 놀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을 당시 L.A 교회에서 한국에서의 최덕신의 행각들이 알려져 교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켰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 성도들이 많이 교회를 떠나는등 ,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게 되자 최덕신은 새로운 거처를 뉴 저지로 옮겼으며, 뉴져지 열린문 장로교회에서 찬양예배 인도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최덕신은 그곳에 간지 한 달 만에 또 다시 한국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몇 달동안 가장인 최덕신의 행방도 모른체, 저와 아이들은 월세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구두 샵에 직원으로, 병원사무원으로, 음식점 주방원으로 일하며 겨우겨우 생활을 꾸려 나갔습니다. 두 아이를 여자의 몸으로 홀로 양육하고 생활하기에 너무도 힘들었기에 저는 여기저기 돈까지 꾸어야만 했습니다.
주변인들을 통해 들은 한국에 있는 최덕신은 그 당시 찬양집회를 계속 한 상태였으며, 그 후로도 “송명희와 친구들 ”앨범을 내는 등 꾸준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앵 또한 여전히 공갈 협박 전화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어쩌다 제 아이들이 전화를 받을 때면 전 너무도 당혹스러워 결국엔 아예 코드를 뽑아버야만 했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온 최덕신은 너무 잦은 한국행으로 인해 교회 일을 등한시 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소문들 때문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날 지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최덕신은 다시 자신의 무능력함을 핑계로 제게 이혼을 요구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정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살아가자고 애원했습니다.
이후 최덕신은 다시 테네시주에 있는 음악의도시 네쉬빌에 집을 얻었습니다.
그는 집안에 스튜디오를 만들고, 이혼하려했던 태도를 바꾸어 평생을 우리 가족을 위해 살 것처럼 제게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러한 그를 다시 한번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집에서도 밤낮없이 김앵의 전화가 매일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때그때 마다 최덕신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김앵이 스토커다. 싸이코다. 정신병자 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고는 혼자 밖으로 나가 다른 곳에서 핸드폰으로 몇 시간씩 김앵과 통화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최덕신은 다시 한국에 나갔다가 미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상습적인 비자 연장으로 결국 미국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하였습니다.
시애틀 공항에서 여권과 비자를 압류당한 최덕신은 곧바로 한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이 사건 당시 저와 아이들은 미국에 관광비자로 들어와 불법체류를 한 상태로 이미 미국에서 영주권 신청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에 한번 나가게 되면 다시는 미국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와 그동안의 수고들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최덕신에게 제가 미국에서 계속적으로 직장을 잡고, 집을 줄이고, 아이들 양육을 책임지고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덕신에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에서 다시 비자를 만들어 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최덕신은 한국에서 사역을 하면서 생기는 무수한 소문들과 자신을 향한 질타와 의심들을 모면 할 수 있는 가정이라는 방패가 가까이 있어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무척이나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최덕신은 저와 아이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또다시 가정과 가족들에게 충실하겠다고 저를 계속 설득 시켰습니다. 그 설득에 저는 마지막으로 남편을 믿고 아이들과 함께 미국에 간지 3년도 채 안 되어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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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들어와 보니 최덕신은 경기도 양수리 산속에 카페를 집으로 거의 얻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순간, 저는 옛날 벽제 산속에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최덕신의 약속을 믿고 꾹 참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얼마 안 되어 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집에는 가끔 사람들을 초대 할 때만 들어와서 일방적으로 제게 손님 접대를 준비해 줄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그럴 때 마다 아이들의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아무렇지 않은 듯이 2,30명의 손님들을 접대 하여야 했습니다.
손님 접대가 끝나면 최덕신은 그날 밤으로 다시 집을 나갔습니다.
가정은 버려둔 채 그는 계속해서 찬양집회를 하였고, 음반회사를 차려 운영하였으며, 그의 삶과 가정생활들이 아무문제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러한 이중성을 연극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최덕신은 이런 저와 함께 기독교 방송 프로인“ CCM다큐”를 촬영하고, 가끔 찬양 집회 때 함께 찬양을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거짓된 모습으로 사람들과 교제를 하였고 그때마다 제 마음은 항상 울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가정이 하나 되길 원하였는데, 계속되는 거짓된 가정생활과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저의 삶은 거의 절망 상태였습니다.
어쩌다 가끔 최덕신이 집안일때문에 집에 머물러 옷을 갈아 입는 때의 일입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 몸에 굵은 손톱 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습니다.
목덜미와 등 ,옆구리 ,가슴 등이 심하게 할퀴어져 있었습니다.
저와는 몇 년 동안 부부관계가 없었으므로 , 맨살인 상태에서나 가능한 상처들을 보고
저는 참기 힘든 모욕감과 굴욕감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최덕신에게는 어김없이 김앵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급기아는 김앵이 새벽2시에 찾아와 최덕신이 나올 때까지 문을 걷어차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정신이 나간애”라고 하며 김앵을 설득시키러 나간 최덕신은 다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혼자의 몸으로 생활하였고 , 생활비 때문에 유치원과 영어과외를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집에 가끔씩 얼굴을 내미는 최덕신에게 저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권고 했지만 , 그때마다 그는 제게 비아냥거리며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쓰고 있던 성경책상을 뒤 집어 엎어 제 이마가 찢어지게 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런 견딜 수 없는 폭력 앞에 저는 두려워 죽고 싶을 뿐 이였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면, 늘 아이들이 눈앞에 어려 삶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정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는 것에 대하여, 전 저 한사람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강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최덕신 이었습니다.
경기도 양수리의 집에서 비싼 월세 문제로 집을 동작동으로 옮기면서도 최덕신은 계속 집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어디서 뭘 하며, 어느 곳에 묵는지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어쩌다 한번씩이라도 얼굴을 비추어 주는 것이 고마웠고 ,아이들에게도 허울뿐인 아빠라도 있어 주는 것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최덕신은 점점 더 사업을 늘려가기 시작했고, 집회횟수도 점점 늘려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저는 더 이상 이대로는 가정이 지속 된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최덕신이 원하는 것이 “이혼”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볼 즈음이었습니다. 제 친정 식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문으로 제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친정 식구들이 나서서, 그동안의 최덕신과 김앵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본 결과는 제 짐작 이상이었습니다.
그 둘은 1998년도부터 동거를 하고 있었으며, 일산에서 집을 얻어 살다가 현재는 응암동에 집을 사서 살고 있었습니다. 저와 아이들이 사는 집에는 생활비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김앵에게는 차를 사주고, 김앵을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뮤지컬학과에 입학시켜 현재까지 등록금을 대어 주는 등, 두 사람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잦은 해외여행을 다녔고 최덕신의 지방 찬양 집회에 김앵이 함께 내려가서 집회 후에 놀다오기 일수였습니다.
한번은 어느 자매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찬양하는 유명한 모집사님이 공항에서 최덕신이 젊은 여자와 키스하는 것을 목격 했다며, 도대체 최덕신의 인격과 영적인 부분이 거지같다고 말씀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는 어떻게 이런 일이 사역자 가운데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냐고 한탄을 하였습니다. 최덕신은 회개하고, 가정이 회복 됐다고 사람들에게 계속적으로 이야기 하고 다녔지만 실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사실을 저는 이제 덮어 두지만은 않으려 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덕신에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권고했지만 그는 계속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가렸습니다.
이에 더 이상 최덕신의 영적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저는 최덕신과의 가정생활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혼을 준비 하면서 결국, 저는 최덕신과 김앵이 지금까지 저질러온 불륜관계를 시인하는 것을 직접 녹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이혼을 원하는 것을 알게 된 최덕신은 자신의 활동에 큰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가까운 조갑진 목사님과 여러 사람들에게 김앵과의 관계가 이미 정리되었다고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시 뒤돌아서서 김앵과 공중전화와 사무실 전화로 연락하고 만남을 지속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인식한 최덕신은 이 무렵부터 집에 들어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녹음을 핑계로 거의 매일같이 새벽녁에 들어오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아 본 결과 그들이 새벽녘까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순간 분노를 감출 수 없었습니다.
최덕신은 이외에도 그동안 김앵과 썼던 카드 빚 2300만원을 갚아줘야 한다며, 제게 친정가서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돈을 구해오라며 강요하였습니다.
카드 빚이 해결해 주면되면 자신과 김앵의 관계도 깨끗하게 정리 하겠단 말을 남기고 해외사역을 떠났습니다.
최덕신이 사역을 떠난 동안 저는 카드 빚을 갖으려 친정집을 찾아 갔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친정집만 시끄러워 지는 결과를 나았습니다.
전 결국 최덕신이 돌아올 때까지 카드 빚을 해결하지 못했고, 사실 처음부터 깅앵과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 없던 최덕신은 자신이 카드 빚을 해결 하겠다는 이유로 교묘히 김앵과
관게를 유지 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최덕신은 김앵의 카드 빚을 갚기 위해 그나마 남아 있던 우리 재산인 제주도 땅 천 평을 저도 모르게 팔아 그녀의 빚을 갚아주었습니다.(1월 10일 날짜로)
(중간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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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해서 최덕신이 어떠한 변명을 하더라도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너무나도 많은 증인들이 있으며,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최덕신과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차마 그동안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모든 일들을 지켜본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남동생과 주찬양 단원들을 비롯해서, 집이고, 사무실이고 장소에 상관없이 행해지는 최덕신과 김앵의 추태를 어이 없이 바라보며, 충격 받았던 일들을 그들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최덕신을 한 사람의 사역자로 생각해 주신다면, 저를 위해서도 한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 이전에, 저도 한 사람으로써, 그리고 한 여자로써의 입장에 관하여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최덕신 카페 게시판에, 최덕신이 올려놓은 글을 보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가정이 회복되길 원하는 사람이 왜 지금까지 불륜관계를 놓지 않았으며, 왜 제가 친정에 와 있는 줄 알면서도 집을 나갔다고 표현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최덕신이 제게 아무런 연락도 없이 친정집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러 오지도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그를 못 믿는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최덕신과 살아온 동안 그는 저를 정신이상자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열심히 사역하는 아빠에게 ,엄마가 병적인 사람인 것쳐럼 이해시키곤 했습니다.
간사할 정도로 아이들로부터 저를 따돌리며 교묘하게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저의 친정 식구들의 감정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제가 주님만 의지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진짜로 정신이상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더 이상 최덕신이 이중생활을 하며 많은 성도들 앞에서 거짓되게 행동하며, 찬양사역을 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아래 이런 고백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악몽들을 열거하면서 저 스스로도 너무나 괴로웠고 창피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전 이제 결심하였습니다.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고 , 이에 최덕신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어느 누구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계속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반복되고, 회개를 빙자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속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부인해도 진실은 드러나기에 저는 더 이상의 변명보다는 진정한 돌이킴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과 알면서도 계속 죄를 지속시킨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함을 말씀하신 것으로 멈춘다면 우린 죄를 계속해서 지어도 괜찮은 것과 같겠지만 분명 성경은 그럴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저는 더 이상 최덕신에게 속을 수가 없습니다. 제 눈물을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저는 이일을 정말 주님께 맡기며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 기도 외에는 다른 어떠한 제스쳐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담대하게 모든 일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저의 아이들 때문에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이렇게 밖에 할수 없는 저를 보며 가슴이 아픕니다.
이혼이 거론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가정회복과 감사 운운하며 인터넷에 글을 올린 최덕신은 친정에 있는 제게 아무 연락도 없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여지도 없습니다.
현재도 최덕신은 김앵과 함께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정싸움을 준비중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러 교회에 다니며 집회를 하고, 크리스챤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최덕신이 주님 앞에 자신을 돌이키지 않는 한, 그가 이 지구상 어떤 오지에 간다 해도 끝까지 싸워 나갈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은 이름뿐일 지라도 제 남편 최덕신이 아이들의 아빠로써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묵인하려 했지만, 수많은 영혼들과 저와 함께 상처 받은 제 아이들을 위해 싸워나갈 것입니다.
http://cafe.daum.net/cdsccm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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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신 집사의 공개 사과문
.. 갓피플 닷컴에서 발췌했습니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최덕신씨가 저희 갓피플닷컴 통해 공식적으로 '네티즌들에게 드리는 사죄의 글'을 밝히겠다고뜻을 전하셨습니다. 아래에 그 전문을 공개합니다.
한국 교회에 드리는 사죄의 글
저의 아내인 김은희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저에 대해 올린 글로 인해 교계가 많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태에 대해 당사자인 저 최덕신이 고백을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1. 먼저 이 모든 사태가 전적으로 저의 책임이고 부족함임을 고백합니다. 먼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찬양사역을 해 온 것에 대해 깊은 자성과 회개를 하는 바입니다.
또한 저의 인격과 영성의 부족함으로 인해 제가 그 동안 한국교회와 성도님들로부터 받아 온 사랑과 칭찬, 그리고 심지어는 업적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타격과 실망감을 안겨 드린 것에 대해서도 깊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일로 인해 어떠한 질책과 비난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며 교계 지도자들의 지도와 훈계를 따를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2.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함과 동시에 저의 사역자로서의 자격 없음을 깨닫고 모든 공적인 사역을 내려 놓겠습니다.
3. 그 동안의 사역과 그 열매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지만, 한국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여 그 동안 발표한 곡들과 음반들에 대해서도 교계 지도자들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와 성도님들의 격려와 사랑으로 여기까지 온 것을 고백하며 모든 음악저작권도 포기하고 한국교회에 내어 놓겠습니다.
4. 지금 저와 저의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치유와 회복입니다. 개개인의 영적 그리고 내적 치유가 우선되어야 하고, 이어서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 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기도로 도와주시고 많은 격려와 위로로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03년 3월 19일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빚진 자 최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