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인물]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박혜정2007.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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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인물]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 이자 비평가. 온건좌파 단체인 '페이비언협회'를 설립했다.
최대걸작인 《인간과 초인》을 써서 세계적인 극작가가 되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국적  아일랜드
* 활동분야  문학
* 출생지  아일랜드 더블린
* 주요수상  노벨문학상(1925)
* 주요저서  《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1903)
『인간과 초인』,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등의 작품이 있고,『피그마리온』은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로 영화화되어 전세계에 알려짐. 1925년 노벨 문학상 수상.
 
* 상세
더블린 출생. 프로테스탄트계 귀족의 먼 친척 집안이나 부친이 곡물상을 실패하여 교육만 받고 부동산소개소 급사가 되었다. 1876년 런던에 나와 점차로 사회문제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고, 한편 시드니 웨브(Sidny Webb) 등과 더불어 온건좌파 단체인 '페이비언협회'를 설립하였다. 그후 영국에 가장 일찍이 입센을 소개한 W.아처와 사귀어, 그의 번역으로 공연한 입센의 극이 호된 비난을 받았을 때 그를 변호하였고, 그도 입센을 연구하여 《입센주의의 정수 Quintessence of Ibsenism》(1891)를 내었으며, 이어 영국 극단(劇壇)에서 최초의 문제작이 된 《홀아비의 집 Widower's Houses》(1892년 첫 상연)을 써서 일부 식자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어 1893년에는 매춘부를 다루어 여성의 입장을 변론한 《워렌 부인의 직업 Mrs.Warren’s Profession》(1893)을 쓰고 비로소 극작가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후 성공한 희극 《캔디다 Candida》(1894),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Caesar and Cleopatra》(1898), 《악마의 제자》(1898) 등 10여 편의 희극을 써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의 최대걸작인 《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1903)을 써서 세계적인 극작가가 되었다. 이것은 종래의 《돈 후안》을 반대로 하여, '쫓기는 자는 남성'이라는 주장을 그의 이른바 '생명력'의 철학을 기초로 한 작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반전론을 주창하여 그의 면목을 발휘하였으나 주목할 만한 작품은 거의 쓰지 않았다. 전후에 '형이상학적 생물학 5서(書)'라는 부제를 단 《메투셀라로 돌아가라 Back to Methuselah》(1921)를 써서 《인간과 초인》 이래의 창조적 진화론철학의 집대성을 희극화하였으나, 연극으로서는 실패작이었다. 그보다도 1923년에 쓴 사극 《성녀 존 Saint Joan》이 만년의 걸작이다. 여기서 그는 잔다르크를, 신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 교회나 사제 같은 중계자를 인정하지 않는 신교도로서, 또 나폴레옹적인 전술가로서,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무의식적인 체현자(體現者)로 묘사하였다. 1925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 그의 묘비명 :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 학창시절   

 

영국 더블린에서 출생한 버나드 쇼는 처칠만큼 심각한 정도로 학교 생활을 겪은 적이 없는데도 영국의 교육제도를 호되게 질타하고 있다. 그가 학교에 다닌 기간은 12살부터 17살까지 모두 합쳐서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그 이전까지는 보좌관 신부였던 삼촌한테서 교육을 받았다)이미 교육 제도에 대해 나름대로의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교육 제도는 온통 사기에 불과하다.
10년 동안이나 교육을 받아도 우리의 모국어조차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없으니 말이다. 사실 체육에서는 어느 정도 담력을 얻을 수 있는지 몰라도,정작 정신적인 용기는 배운 게 하나도 없다고 봐야한다."

 

어린 시절의 쇼가 더블린의 웨슬리언 커넥셔널 스쿨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이미 삼촌한테서 공부한 경험이 있으므로, 라틴어 과목의 성적이 다른 아이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앞서 있었다. 그러나 학교 환경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학교가 별로 말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이에 대해 훗날 이렇게 말했다.

 

"학급의 규모가 너무 크고, 교사들은 사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가, 웨슬리 교회의 목사가 되기를 고대하며 그때까지 밥벌이를 위해 선생이랍시고월급만 축내는 경우가 대부분인 실정이었다."

 

버나드 쇼가 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너무 게을러져서 잘 하던 라틴어조차 금방 뒤쳐지고 말았다.결국 그는 명문이라고 알려진 사립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러나 이 학교는 카톨릭을 믿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개신교 신자였던 쇼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공립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그렇지만 공립 학교도 탐탁스럽지 않았다.

 

쇼의 말에 의하면 그 학교는, "우리 아버지처럼 자식을 '트리니티 대학'에 보낼 형편이 못되거나, 자녀를 학자가 아닌 장사꾼으로 키우겠다는것 이외에 그 이상의 목표가 없는부모"의 자녀들에게 적합한 학교였던 것이다.

 

버나드 쇼의 편지나 자서전을 읽어 보면, 그는 어린 시절에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사람 만나기를 꺼려했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그는 80대 중반의 이르러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위인이라고 부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실 나는 불쌍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쇼는 자신의 그런 성격을 부모 탓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주정뱅이였기 때문에 온 가족이 실제로 숨어서 지내다시피 살아야 했다. 심지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척집에 발을 들여놓은 기억조차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 뒤에 아버지가 술을 끊었지만 그때는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래서 쇼는 "너무 주눅이 들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조차 전혀 모르고 자다"고 한다.

 

1912년 편지에서 쇼는,"내가 얼마나 내성적이고 겁이 많았는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있었던 한가지 일화를 들어보면 언제나 겁쟁이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교칙을 위반한 일이 있었다.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선생님이 전체 학생을 차례로 불러 놓고 네가 그렇지 않았느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나는 답변을 거부했다. 그 대신 어린이는 강제로 답변할 의무가 없으며, 어린이를 상대로 심문을 하면 그 아이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게 아니냐고 따졌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조사는 없었다. 아마 쇼의 주장이 그럴듯했던 모양이다.

 

버나드 쇼는 15살에 부동상 중개업소에 취직을 하고 말았다. 그가 학교 생활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경쟁이라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싫어하는 성미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는 이런말을 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경쟁에 약하다. 칭찬이나 표창을 받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경쟁을 전제로 하는 시험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만일 내가 이긴다 해도 나의 기쁨보다는 상대방의 실망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반대로 내가 진다면 나의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버나드 쇼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서도 독학으로 광범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본래 그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통찰하고 그 내면에 숨어 있는진실을 파헤쳐서, 그것을 희곡으로 형상화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재능이 발견된 것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쇼는 50대 중반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무슨 재능이 있는지, 나를 어떤 인물로 만들 것인지, 아무도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을 뿐, 특별한 재주를 가졌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정반대의 교육을 받는 바람에 보통사람들 수준의 자존심마저 갖지 못했다. 내게 어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남이 알려줘서 비로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재주가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위대한 풍자 작가로 명성을 굳힌 버나드 쇼는 이미 학창 시절부터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대단한 아이였다. 나중에 가서 마침내 성공을 거둔 것을 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다. 쇼 자신도 과거를 뒤돌아 보면서, "흥미 없는 과목은 도무지 공부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학교와 교육제도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학교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출처 : [기타] 서적: 천재들의 학창 시절(게르하르트 프라우제) 

 

* 청년시절

 

조지 버나드 쇼는 조지 카 쇼와 루신다 엘리자베스 걸리 쇼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족보상으로는 아일랜드의 지주계급으로서 프로테스탄트계의 '권력층'에 속하지만 현실에 어두웠던 아버지는 처음에 한직인 공무원으로 시작했다가 곡물상 일을 벌여 실패했다. 가난하면서도 귀족행세를 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이는 그에게 단순한 가난 이상의 굴욕이었다. 처음에는 친척 목사에게 공부를 배웠고 그후 학교에 다녔지만, 학교 자체를 거부해서 16세 때 토지중개인 사무소에서 일했다. 쇼는 어머니의 영향과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을 자주 방문한 덕분에 음악·미술·문학의 폭넓은 지식을 갖출 수 있었다. 

 

1872년에 어머니는 1866년 이래로 더블린에서 쇼 일가와 한집에서 살던 그녀의 음악교사 조지 존 밴덜리어 리를 따라 남편을 버리고 두 딸과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1876년 쇼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런던에 자리잡은 어머니와 큰 누나에게 합류했는데 이때 작은 누나는 죽고 없었다. 그는 20대에 계속되는 좌절과 빈곤을 겪어야만 했으며, 어머니가 그녀의 남편에게 받는 용돈과 그녀가 음악교사로 버는 수입으로 생활했다. 오후에는 대영박물관 독서실에서 소설을 쓰고 학생 때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으면서 보냈고, 저녁에는 당시 런던 중류계급 지식인들 사이에 성행한 강의와 논쟁에서 부족한 지식을 스스로 보충했다. 

 

그의 소설은 완전히 실패했다. 반자전적이며 적절한 제목이 붙은 〈미성숙 Immaturity〉(1879, 출판 1930)은 런던의 모든 출판업자에게 거절당했다. 그후에 쓴 4편의 소설과 10여 년 간 언론에 기고한 대부분의 글도 마찬가지로 퇴짜를 맞았다. 그가 첫 문학작품으로 번 돈은 1년에 10실링도 못 되었다. 1887~88년에 씌어졌으나 죽은 뒤인 1958년 출판된 작품〈미완성의 소설 An Unfinished Novel〉은 그의 소설 중 마지막 실패작이었다. 

 

1880년대에 그는 소설가로서는 실패했지만 자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가, 논객, 극작가로서의 경험을 했다. 1884년에는 영국 중류계급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이 새롭게 창설한 페이비언 협회의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이 협회는 혁명이 아닌 지적·정치적 생활의 '침투'(시드니 웹의 표현)를 통한 영국 사회의 변화를 목표로 했다. 쇼는 이 협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영국 사회주의의 고전이 된 〈사회주의에 대한 페이비언적 연구 Fabian Essays in Socialism〉(1889)을 편집하고 두 장(章)을 직접 쓰는 등 눈부신 활동을 했다. 1885년 마침내 연극비평가 윌리엄 아처가 쇼에게 고정적인 저널리스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초기에 잡지에 기고한 글로는〈펠 멜 가제트 Pall Mall Gazette〉에 쓴 서평(1885~88),〈월드 World〉에 쓴 미술평론(1886~89),〈스타 Star〉에 쓴〈바셋 호른 Corno di Bassetto〉등의 재기 넘치는 음악평론(1888~90)과〈월드〉에 쓴〈지 비 에스 G.B.S.〉등의 음악평론(1890~94) 등이 있다. 쇼는 음악, 특히 오페라에 탁월한 식견을 지녔으며, 여기에 재치 있는 여담을 곁들임으로써 그의 평론은 오늘날까지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프랭크 해리스가 그를 〈새터데이 리뷰 Saturday Review〉지의 연극평론가(1895~98)로 임명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치와 언변을 동원하여 빅토리아 시대의 허위와 위선에 찬 무대를 생명감 넘치는 무대로 일신시킬 운동을 전개했다. 


* 초기 극

 

쇼가 희곡을 쓰기 시작했을 당시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극작가는 A.W. 피네로 경과 H.A. 존스였다. 이들은 근대적 사실주의 극을 개척하고자 했지만 인위적인 구성과 진부한 인물유형에서 벗어날 힘이 없었다. 이러한 극의 빈곤은 입센의 여러 작품이 런던 무대에 소개되면서 분명해졌다. 1890년〈인형의 집 A Doll's House〉, 1891년에〈유령 Ghosts〉이 런던에서 공연되었고, 영국 무대에 새로운 자유와 진지함의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쇼는〈입센주의의 정수 The Quintessence of Ibsenism〉(1891)를 막 출판하려던 참이었는데, 미발표작인 희극〈홀아비의 집 Widowers' Houses〉을 급히 손질해 런던 빈민가의 악명 높은 지주제도를 다룬 '입센풍' 작품으로 고쳤다. 1892년에 공연된 이 극은 당시 대담한 신예 극작가들조차 여전히 자주 사용하던 진부한 낭만적 인습을 흔들어놓았다.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선량한 영국 젊은이가 미래의 장인의 재산과 자신의 수입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결과임을 깨닫는다는 줄거리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비극적 상황이지만, 쇼는 늘 비극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의 사랑이 연민을 일으키지 않는다. 주의를 끄는 것은 낭만적 곤경이 아니라 사회의 악이며, 인물의 행위는 풍자적 희극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893년에 쓴 이와 유사한 경향의 극〈워렌 부인의 직업 Mrs. Warren's Profession〉은 검열관인 궁내부장관의 반대로 1902년에야 공연될 수 있었다. 이 극의 주제는 조직 매춘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가 그 '직업'을 거쳐 유럽 전역 매춘굴의 일부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극 전환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도 상황을 결정하는 경제적 요인이 강조되고, 당시 성행하던 '타락한 여성들'을 다룬 희극과는 달리 주제가 냉혹하게 다루어진다. 쇼의 여러 작품처럼 이 극도 일정한 범위에서는 관념극에 속하지만, 관념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보면 본질적으로 고급 희극이다.

 

쇼는 자신의 초기 극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즐겁지 않은 사실에 직면하도록 극적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유쾌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뒤 그는 이 신랄한 희극들에 감정이 상해 있던 감독과 관객을 새롭게 끌기 위해 '유쾌한' 4편의 극을 썼다. 이 두 부류의 작품들을 개정해서〈유쾌한 극과 유쾌하지 않은 극 Plays Pleasant and Unpleasant〉(1898)으로 출판했다. '유쾌한 극'의 첫번째 작품〈무기와 인간 Arms and the Man〉(1894 공연)에서는 발칸 반도를 배경으로, 사랑과 전투라는 낭만적 소재를 가끔 신랄하기는 하지만 재미있고 쾌활하게 다루고 있다.

 

2번째 작품〈캔디다 Candida〉(1897 공연)는 영국 연극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된다. 그것은 1904년 이 극이 왕립극장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된 것을 계기로 할리 그랜빌 바커와 J.E. 베드렌이 손잡고 그곳에서 뛰어난 무대를 잇달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 극의 여주인공은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성격이 둔감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인 목사 남편과 그녀를 사랑하는 젊은 시인 사이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녀는 남편이 실제로는 약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만만한 척하는 남편을 선택한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인은 병적으로 흥분하지만, 예술가로서 더 큰 창조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포기할 만한 아량을 지닌 사람이다.

 

이것은 쇼에게 중요한 주제이며, 정신적 창조자인 남성과 인류의 생물학적 존속을 이끌어가는 여성 간의 갈등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이 주제는〈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의 근간을 이룬다.〈캔디다〉에서 이러한 사변적 주제는 가볍게 다루어질 뿐이며, 이는〈아무도 모른다 You Never Can Tell〉(1899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서 남녀 주인공은 각각 능란한 호색가와 이성적이고 해방된 여성임을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이러한 관념과는 무관한 생명력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한다.

 

쇼는 비평서와 정치적 작품을 계속 왕성하게 발표하는 한편 이러한 극까지 쓰느라 겹친 과로로 건강을 해쳐 중병에 걸렸다. 1898년 그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베아트리체와 시드니 웹의 친구이자 상속인이며 그의 개인 간호사였던 아일랜드인 샬럿 페인 타운센드와 결혼했다. 표면상 금욕적인 결혼생활은 평생 계속되었으나 엘런 테리, 패트릭 캠벨 부인 등 여러 여성들과의 서신왕래를 통해서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쇼는 다음 희곡집〈청교도들을 위한 3편의 희곡 Three Plays for Puritans〉(1901)에도 희곡 자체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이 암시하는 주제까지 감동적인 산문체로 다룬 서문을 붙였다.〈악마의 제자 The Devil's Disciple〉(1897 공연)는 미국 독립전쟁중의 뉴햄프셔가 배경이며, 여기서 전통적인 멜로드라마가 전도된다. 쇼의 최초의 대작〈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Caesar and Cleopatra〉(1901 공연)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셰익스피어의〈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에 등장하는 38세의 요부가 아니라 버릇 없고 포악한 16세의 아이이다.

 

카이사르는 군인의 면모뿐만 아니라 철학자의 면모도 지닌 고독하고 준엄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극의 빼어난 성공은 카이사르를 무대 위의 초인적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아량과 '본유의 도덕성'을 갖춘 설득력 있는 인물로 다룬 데 기인한다. 3번째 연극〈브래스바운드 대장의 변절 Captain Brassbound's Conversion〉(1900 공연)은 의무와 정의로 위장한 여러 종류의 위선에 대한 설교이다.


* 국제적 명성

 

〈인간과 초인〉(1905 공연)에서 쇼는 인류는 더 높은 삶의 형태를 향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력' 운동의 최종 단계라는 자신의 철학을 피력한다. 이 희곡의 주인공 잭 태너는 여주인공 앤 화이트필드의 집요한 청혼을 뿌리치고 이러한 철학에 걸맞게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추구한다. 결국 잭은 인류의 존속과 운명이 앤과 다른 여성들의 생식능력에 달려 있으므로 그녀야말로 '생명력'의 강력한 도구임을 깨닫고 가엾게도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극의 비현실적인 제3막〈지옥에 빠진 돈 주안 Don Juan in Hell〉의 꿈 장면은 가극풍이며, 자주 개별작품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쇼는 유럽 대륙에서 극이 공연됨으로써 일찍이 극작가로서의 자리를 굳혔지만, 이상하게도 영국에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훨씬 뒤에 런던에서〈존 불의 다른 섬 John Bull's Other Island〉(1904 공연)이 공연되면서 에드워드 7세를 위해 특별공연을 한 뒤였다.

 

쇼는 계속해서 고급 희극을 통해 종교적 자각을 탐구했고 사회와 사회악의 결탁을 파헤쳤다.〈소령 바버라 Major Barbara〉(1905 공연)에서 구세군 소령인 여주인공은 자신과 등을 돌린 군수품 제조업자인 아버지가 죽음을 거래하긴 하지만 그의 원칙과 행동은 가장 높은 차원의 의미에서 종교적인 반면, 구세군은 대개 위선적인 대중의 참회와 자신들이 신랄하게 매도하는 양조업자·무기제조업자의 헌금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의사의 딜레마 The Doctor's Dilemma〉(1906 공연)는 보편적인 직업의 자기 보호의식을 대표하는 의료직에 대한 풍자이자 동시에 예술가 기질과 그것을 예술가의 업적과 구분할 줄 모르는 대중의 우매함에 대한 풍자이다.〈안드로클레스와 사자 Androcles and the Lion〉(1912 공연)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철학적 희곡으로, 종교적 찬양의 참과 거짓을 다룬 작품이다. 집단 공개처형을 선고받은 초기 그리스도교 집단을 통해서 보여준 주된 주제는 누구나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쇼의 걸작 희극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인기 있는 작품은〈피그말리온 Pygmalion〉(1913 공연)이다. 그는 이 작품이 음성학에 관한 교훈극이라고 주장했으며 반영웅적인 주인공 헨리 히긴스는 음성학자이지만, 이 작품은 사랑과 영국의 계급제도를 다룬 인간적인 희극이다. 이 극은 히긴스가 런던 토박이인 꽃 파는 소녀를 훈련시켜 귀부인 행세를 하도록 하는 과정과 이 실험의 성공이 몰고온 결과를 보여준다. 정확한 억양은 익혔지만 예의 바른 대화술은 배우지 못한 엘리자 둘리틀이 상류사회에 등장하는 장면은 영국의 극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작품은 1938년에 영화화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쇼에게 안겨주었고, 뮤지컬〈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56, 영화화 1964)로도 각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 제1차 세계대전 후 작품

 

쇼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분수령이었다. 처음에 그는 극작을 그만두고 논쟁적인 소책자〈전쟁에 관한 상식 Common Sense About the War〉을 출판해 대영제국과 그 동맹국을 독일과 마찬가지로 비난하면서 협상과 평화를 주장했다. 그는 반전연설로 악명이 높아졌고, 많은 이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상심의 집 Heartbreak House〉(1920 공연)에서는 전쟁 발발 직전의 한 시골집을 배경으로 전쟁의 유혈에 책임져야 할 세대의 정신적 파탄을 폭로했다.

 

'낙담시키는 비관주의의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으려고〈므두셀라로 돌아가라 Back to Methuselah〉(1922)라는 제목으로 쓴 5편의 연작 희곡에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AD 1920년에 걸쳐 진행된 극적 우화를 통해 창조적 진화라는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1920년에 잔 다르크 시성식을 본 쇼는 그녀에 대한 역사극을 쓸 결심을 했다. 이렇게 탄생된 걸작〈성녀 조앤 Saint Joan〉(1923 공연)에서 잔 다르크는 가톨릭 성자와 순교자로서뿐 아니라 실천적 신비주의자, 이교도 성자, 영감을 받은 천재가 결합된 인물로서 다루어진다. 조앤은 '교회와 법률이라는 강력한 힘 사이에서 파괴된' 탁월한 존재로서, 비극적 여주인공의 화신이다. 그녀의 죽음은 인류가 성자와 영웅들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살해하기도 하는 모순을 보여주며, 인류가 두려워하는 높은 차원의 도덕성이 진화과정을 거쳐 인간의 보편적 기준으로 될 때까지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성녀 조앤〉에 대한 격찬은 1925년 노벨 문학상으로 이어졌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했다.

 

후기 작품들에서 쇼는 자신의 탐구를 심화시켜 희비극적·비사실주의적 상징주의를 완성시켰다. 그후 그는 5년 동안 희곡은 쓰지 않고 1930~38년에 쓴 작품을 편집하는 한편, 백과사전적 정치 소논문인〈여성을 위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입문 The Intelligent Woman's Guide to Socialism and Capitalism〉(1928)을 썼다.

 

그뒤 발표한〈사과 수레 The Apple Cart〉(1929 공연)는 미래파 시각에서 쓴 고급 희극으로, 쇼가 평생 동안 지켜온 급진적 정치철학과 보통사람의 자제력을 불신하는 근본적인 보수성향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외 후기 작품들로는〈너무나 진실해서 선할 수 없다 Too True to Be Good〉(1932 공연)·〈바위 위에서 On The Rocks〉(1933 공연)·

〈이상한 섬의 바보 The Simpleton of the Unexpected Isles〉(1935 공연)·〈제네바 Geneva〉(1938 공연)·〈선왕 찰스의 황금기 In Good King Charles's Golden Days〉(1939) 등이 있다. 전쟁 동안 극작을 중단했던 쇼는 전후 90대에도 희곡〈부자연스런 우화 Farfetched Fables〉(1950 공연)〈셰이크스 대 셰이브 Shakes Versus Shav〉(1949 공연)를 비롯해 초기에 보여준 날카로움의 흔적만이 엿보이는 백일몽〈왜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Why She Would Not〉(1956 공연) 등을 발표했다.

 

건방지고 불손하며 항상 자기과시적이던 쇼는 94세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쾌활한 기지를 발휘하여 줄곧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깡마른 체구, 무성한 턱수염, 멋진 지팡이는 그의 희곡만큼이나 전세계적으로 유명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중에 아내 샬럿이 지병으로 죽자 쇼는 더욱 전쟁의 궁핍함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그는 런던의 아파트를 떠나 1906년부터 살았던 고향 하트퍼드셔의 아이엇세인트로렌스에 있는 시골집으로 내려가 1950년 그곳에서 죽었다.

 

쇼는 17세기 이후 영국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로서 당시 가장 뛰어난 희극작가 이상의 역할을 했다.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인간과 초인〉의 일부인〈지옥에 빠진 돈 주안〉,〈소령 바버라〉,〈상심의 집〉,〈성녀 조앤〉 같은 작품들은 당대의 다른 극작가들과는 견줄 수 없는 수준 높은 진지함과 수려한 산문체를 갖추었다. 그는 도덕적 열정과 지적 갈등 및 논쟁이 담겨 있는 극을 발전시켰으며, 풍속희극을 재생시키고, 상징적 소극과 이단적인 극을 과감히 시도함으로써 그의 시대 이래로 연극의 개념을 새롭게 형성했다. 몽상가이며 신비주의자인 쇼의 작품에는 도덕적 열정에 관한 철학이 스며 있다.

 

쇼는 스위프트 이래로 가장 신랄한 격문의 저자였고,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평론가였으며, 그당시 가장 탁월한 극비평가였다. 또한 정치학·경제학·사회학에 관한 비범한 연사이자 평론가였고, 가장 많은 편지를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대담한 비평적 관점을 많은 다른 관심분야에까지 확장하여 그가 살았던 당시의 정치적·경제적·사회학적 사상 형성에 기여했다.

 

-S. Weintraub J. I. M. Stewart 글


내용출처 : [기타] http://britannica.shinbiro.com/spotlights/nobel/list/B12s3109b.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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