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의 "북학론", 민생을 위한 시대사상

이양자200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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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의 "북학론", 민생을 위한 시대사상


 

박제가의 '북학론', 민생을 위한 시대사상

 

 

18세기를 대표하는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朴濟家:1750~1805)가 어린 시절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통일신라시대의 최치원과 조선중기의 학자 조헌이었다. 박제가는 이들을 흠모하여 그들이 타는 말을 끄는 마부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왜 그러한 생각을 가졌던 것일까?


최치원과 조헌을 존경한 까닭은?


먼저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돌아온 후 신라 사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한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올렸고, 조헌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 올린 동환봉사(東還封事)에서 중국이 실사(實事)가 번성함을 보고 조선도 이에 발맞추어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제가는 골품제도의 모순에 빠져 진골 귀족이 기득권을 독점하고 있는 신라사회에 경종을 울린 최치원과 이론과 명분에만 집착하여 실사를 등한시 한 조선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조헌의 사상에 공감하면서 이들의 마부가 되는 것을 기꺼이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중국 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문제점과 대책을 정리한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여 자신이 그토록 존경했던 역사적 인물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박제가는 1750년 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로 태어났다. 17세 무렵부터 현재 종로에 있는 백탑(파고다 공원) 부근에서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학자들과 어울리면서, 스승으로 모신 박지원과 함께 시대의 문제점을 고민하였다. 1779년에는 정조에게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아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었는데, 4명의 검서관들은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한껏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778년 박제가는 청나라에 다녀온 후 그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한 채 이론에만 깊이 빠져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와 백성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 것이다. 『북학의』는 그 제목에서 보듯 이후 ‘북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의 시대사상으로 자리를 잡는데 기반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


청나라 문물 배워 이용후생에 힘써야

 

『북학의』는 서명응과 박지원, 그리고 박제가 자신이 쓴 세 편의 서문과 『북학의』내편(內篇)과 『북학의』외편(外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지원은 ‘내가 연경에서 돌아왔더니 초정(박제가의 호)이 그가 지은 『북학의』 내편, 외편 2권을 내어 보여주었다. 초정은 나보다 앞서서 연경에 들어갔는데 농사, 누에치기, 가축 기르기, 성곽의 축조, 집짓기, 배와 수레의 제작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와, 인장, 붓, 자를 제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눈여겨보고 마음으로 따져 보았다. 눈으로 보아서 볼 수 없는 것이면 반드시 물어 보았고, 마음으로 견주어서 이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저들에게 배웠다’고 하여 박제가의 북학 사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박제가는 1778년 가을 통진(通津)의 농가에서 쓴 서문에서 ‘저들의 풍속 가운데서 본국에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발견하는 대로 글로 기록하였다. 아울러 그것을 시행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폐단을 첨부하여 하나의 학설을 만들었다.’거나, ‘현재 백성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국가의 재정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대부가 팔짱을 낀 채 바라만 보고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여 이용후생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하였다.

  

『북학의』에 소개된 소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내편에는 수레, 배, 성(城), 벽돌, 수고(水庫), 기와, 자기, 소, 말, 철, 공동품과 서화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외편에는 밭, 거름 뽕과 과일, 농업과 잠업에 관한 내용과 함께 과거론, 관직과 녹봉, 재부론(財富論), 중국 강남의 절강 상선(商船)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병론(兵論), 북학변(北學辨) 등 자신의 논설을 정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글에서 박제가는 ‘북학’은 ‘생활과 백성에 직결된 학문’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방안으로 수레의 사용과 벽돌 이용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수레는 상업의 발달 성과에 따른 유통 경제를 활성화시켜줄 수 있는 기구로 인식했으며, 중국에는 벽돌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사용되어 주택, 성벽, 창고 등이 견고함을 지적하고 우리로 이것을 도입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박제가는 몸소 벽돌 만드는 기술을 연구하여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병론에서는 군비(軍費)가 백성들의 생활과 직결되어 준비되어야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박제가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농본억말(農本抑末) 정책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상업의 장려와 그 바탕이 되는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제란 우물과 같은 것이니 이를 줄곧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는 발언이나 ‘쓸 줄을 모르면 만들 줄을 모르고 만들 줄을 모르면 민생이 날로 곤궁해진다’는 발언에는 상업과 수공업,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사상이 압축되어 있다. 생산된 것이 소비되어야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논리로서, 전통시대에 미덕으로 생각했던 검약이나 소비 억제보다는 적극적인 소비 활동을 통해 생산을 증대시키자는 그의 사상은 근대 경제학의 이론과도 흡사하다.


청 문물 지나친 숭상, 균형감 아쉬워

 

박제가는 분명 시대를 앞서 간 실학자였다. 그러나 박제가는 중국 문명에 지나치게 동화된 측면이 있었다. ‘그들이 일상 내뱉는 말 자체가 바로 문자이고 그들이 사는 집은 금벽(金碧)이 휘황찬란하다. 다닐 때는 수레를 타고 그들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그들의 도읍과 상곽, 음악은 번화하고 화려하며... 아아 그들은 모두 앞으로 우리나라의 학문을 이끌고 우리 백성을 다스릴 사람들이다.’(『북학의』, 북학변)와 같은 위험한(?)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의 이러한 확신에는 지나치게 청의 문화만을 숭상하는 신념이 깔려 있었다. 북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수용에 가장 선구적인 역할을 했지만, ‘균형감각’이라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대목이다. 스승인 박지원처럼 조선의 문화에 대해 보다 애정을 가지면서 중국의 선진 문명을 수용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글쓴이 ; 신 병 주(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