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실험 후 북한주민들의 권력층들에 대한 불만이 어느 때보다 높다. 주민들은 여전히 살아가기에 지쳐 핵실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전쟁’이 나든 무관심이라고 한다.
한국정부를 비롯한 외부에서 지원되는 쌀은 주민들을 단속 통제하는 국가권력인 당기관, 보위부, 보안성 등에 우선 무료로 공급되고 주민들은 여전히 장마당에서 남한 쌀을 사먹어야 한다. 정말 불쌍한 인민들에게 쓰여야 할 구호품들이 간부들에게 다 뜯겨 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팔려나가니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남한 주민들의 정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부 소식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하고 있는 주민들은 현 남한정부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다. 함경북도 청진에 거주하고 있는 이 모 씨는“과거 고난의 행군 시기, 간부나 백성이나 다 같이 허리띠를 조이고 살았는데 지금은 백성들에게만 허리띠를 조이라고 강요한다”며 “간부들은 배부르니까 주민들 단속에 전력하고 있는 게 아니냐” 고 불만을 표출했다.
국경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 주민은“외부 지원식량은 권력계층과 독재기관들이 독점한다. 권력기관은 주민들의 생존문제에 아무런 역할도 안하고 있다. 옥수수쌀이마나 공급 받은 때가 까마득하다”고 말했다.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다는 이른바‘고난의 행군’시기에는 권력기관 간부들도 먹고 살기 힘들어 장사에 나서다보니 주민들에 대한 단속이 상당히 느슨해졌다. 노동당 간부들도 끼니 걱정을 하던 시기였다.
이 당시 배급을 못타는 주민들은 공장을 다니지 않고 장사로 살아가고 간부들도 식량공급이 줄어들자 살기 바쁘기에 급급했었다. 간부들은 뇌물을 받는 데 재미를 보았고, 안전원, 보위부 기관 사람들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단속하면서도 돈, 식량 등을 빼앗은 대가로 눈감아주고 자기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바빴다.
단편적인 예로 그 당시 열차 안전원(경찰)들이 단속한 여행객들로부터 빼앗은 물건 1순위가 그들이 갖고 있는 음식꾸러미였을 정도다. 열차안전원들도 배를 곯다보니 이런 방법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사회 안전원은 장마당에서 장사하는 사람에게 트집을 잡아 장사할 물건을 뺏는 인민들의‘도둑’으로 변하기도 했다.
외부에서 지원하는 식량이 군대가 먹고, 권력자들이 먹고 나머지 20% 정도가장마당을 통해 팔려 현금이 다시 간부들 수중에 들어간다고 북한주민들은 말한다.
탈북민들은 현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옥수수를 보내야 북한주민들에게 제대로 배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옥수수 특성상 보존기한이 짧고 쌀과 비교할 때 가격이 매우 저렴하고, 간부들이 가져갈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에서이다.
정부는 그동안 매년 쌀 50만t과 비료35만t을 인도적 지원 명목으로 북한에 지원해 왔다. 이것은 북한의 한 해 식량 부족량 추정치인 89만 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양이다. 통일부 관계자는“인도요원 4명이 지방의 식량공급소를 다니며모니터하지만 북측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어서 엄격한 검증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외부지원 식량들이 군부나 권력기관들에 우선 공급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우리 집은 할머니 때부터 예수를 믿어왔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내 이름을 홍성헌이라고 지었다. 아버지는 나를 믿음으로 양육해서 주님의 큰 일꾼 이 되길 원하셨다.
1968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앞으로 남한에서 쌀과 성경책과 찬송가, 자원봉사자가 북으로 들어올 것을 예언했다. 우리는 그 예언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치매가 온 줄 알았다. 하지만 1987년 중국에 여행 갔을 때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많은 성경책과 쌀을 지원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사실이 아버지의 예언과 맞아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그때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설교 TAPE를 들었다. 설교 중에 조용기 목사가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했다. 두통으로 30년 넘게 고생을 한 나는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머리가 말끔히 나았다.
이 일로 인해 성경책, 찬송가, 조용기 목사TAPE를 북한에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책을 짐 속에 넣는데 모든 친척과 교인들이 말렸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사히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갔다. 믿음대로 공안당국이 짐을 검열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그래서 숨겨온 성경책으로 친척과 형제 등 여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집을 비우고 외출을 한 사이 도둑이 성경책을 훔쳐갔다. 알고 보니 보위부에서 집을 수색한 것이다. 전도했던 한 사람이 보위부에서 추적하고 있다고 전해줬다. 어쩔 수 없이 아들과 함께 탈북을 했다.
심리적인 타격과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아들은 중국말도 모르고 글도 몰라서 직장에 나갈 수도 없었다. 나는 중국말이 가능했지만 몸의 반쪽을 사용하지 못해서 막막했다.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밤낮으로 교회에 가서 울면서 기도한 지 7개월, 반신 불수였던 몸이 완쾌되었다. 교회의 추천으로 아들은 신학교를 졸업해 전도사가 됐다. 그는 북한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북한인 사역을 하다가 주변 사람의 신고로 북송되었고 나도 아들과 함께 북송되었다. 북송되기 전, 중국감옥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다양한 여성들이 있었다. 감옥에서 이들 40여 명을 전도하기도 했다. 교도소에서 떠들고 찬송을 부르니 감시관이 와서 주도자인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고무 곤봉으로 맞았는데 몇 대를 맞았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후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나올 수 있었다.한 달 열흘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 북송된 후, 아들과 나는 헤어졌고 아들은 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아들은“북한이 못 사는 원인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못 사는 것이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의 곡식은 잘 되는데, 북한의 곡식은 왜 안 되는가? 하늘, 땅, 태양이 같지만 북한이 잘 살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아들은 두개골이 깨지고 팔, 다리뼈가 끊어져 사지를 쓰지 못한 채 감옥에서 순교했다. 아들이 순교한 사실도 3년이 지난 후에 친척을 통해 알게 되었다. 탈북 후, 한국에 오기 싫었다. 대북지원 하는 모습으로 인해 한국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한국에 보낸 것은 잠자는 한국교회를 깨우기 위함인 줄 믿는다.
우리는 민족을 돕는 북한선교를 해야 한다. 북한선교의 방법으로 북한주민에게 외부소식을 알리는 전단지를 풍선에 넣고 날리는 방법이 있다. 나는 북한의 지하교인인 언니를 돕고 있다. 언니에게 선교지원으로 돈을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선교를 할 때는 탈북민과 연계된 지하교회를 돕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은 한 달 월급이 천원이다. 지하교회 한 가정에 1만 원, 2만 원을 지원한다면 그들은 선교를 위해 헌신할 것이다. 이런 일은 탈북민과 연계해서 일할 때 효과적이다.
(대북지원실태) 간부에 식량 우선공급, 주민통제 감시 수위 높아져 + 탈북민, 홍성헌 여사의 증언
간부에 식량 우선공급, 주민통제 감시 수위 높아져
핵실험 후 북한주민들의 권력층들에 대한 불만이 어느 때보다 높다. 주민들은 여전히 살아가기에 지쳐 핵실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전쟁’이 나든 무관심이라고 한다.
한국정부를 비롯한 외부에서 지원되는 쌀은 주민들을 단속 통제하는 국가권력인 당기관, 보위부, 보안성 등에 우선 무료로 공급되고 주민들은 여전히 장마당에서 남한 쌀을 사먹어야 한다. 정말 불쌍한 인민들에게 쓰여야 할 구호품들이 간부들에게 다 뜯겨 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팔려나가니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남한 주민들의 정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부 소식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하고 있는 주민들은 현 남한정부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다. 함경북도 청진에 거주하고 있는 이 모 씨는“과거 고난의 행군 시기, 간부나 백성이나 다 같이 허리띠를 조이고 살았는데 지금은 백성들에게만 허리띠를 조이라고 강요한다”며 “간부들은 배부르니까 주민들 단속에 전력하고 있는 게 아니냐” 고 불만을 표출했다.
국경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 주민은“외부 지원식량은 권력계층과 독재기관들이 독점한다. 권력기관은 주민들의 생존문제에 아무런 역할도 안하고 있다. 옥수수쌀이마나 공급 받은 때가 까마득하다”고 말했다.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다는 이른바‘고난의 행군’시기에는 권력기관 간부들도 먹고 살기 힘들어 장사에 나서다보니 주민들에 대한 단속이 상당히 느슨해졌다. 노동당 간부들도 끼니 걱정을 하던 시기였다.
이 당시 배급을 못타는 주민들은 공장을 다니지 않고 장사로 살아가고 간부들도 식량공급이 줄어들자 살기 바쁘기에 급급했었다. 간부들은 뇌물을 받는 데 재미를 보았고, 안전원, 보위부 기관 사람들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단속하면서도 돈, 식량 등을 빼앗은 대가로 눈감아주고 자기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바빴다.
단편적인 예로 그 당시 열차 안전원(경찰)들이 단속한 여행객들로부터 빼앗은 물건 1순위가 그들이 갖고 있는 음식꾸러미였을 정도다. 열차안전원들도 배를 곯다보니 이런 방법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사회 안전원은 장마당에서 장사하는 사람에게 트집을 잡아 장사할 물건을 뺏는 인민들의‘도둑’으로 변하기도 했다.
외부에서 지원하는 식량이 군대가 먹고, 권력자들이 먹고 나머지 20% 정도가장마당을 통해 팔려 현금이 다시 간부들 수중에 들어간다고 북한주민들은 말한다.
탈북민들은 현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옥수수를 보내야 북한주민들에게 제대로 배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옥수수 특성상 보존기한이 짧고 쌀과 비교할 때 가격이 매우 저렴하고, 간부들이 가져갈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에서이다.
정부는 그동안 매년 쌀 50만t과 비료35만t을 인도적 지원 명목으로 북한에 지원해 왔다. 이것은 북한의 한 해 식량 부족량 추정치인 89만 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양이다. 통일부 관계자는“인도요원 4명이 지방의 식량공급소를 다니며모니터하지만 북측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어서 엄격한 검증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외부지원 식량들이 군부나 권력기관들에 우선 공급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미래한국신문, 박민철 기자 pmc3101@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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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홍성헌 여사의 증언
-북한주민이나 지하교회를 직접 도와야 한다.
우리 집은 할머니 때부터 예수를 믿어왔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내 이름을 홍성헌이라고 지었다. 아버지는 나를 믿음으로 양육해서 주님의 큰 일꾼
이 되길 원하셨다.
1968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앞으로 남한에서 쌀과 성경책과 찬송가, 자원봉사자가 북으로 들어올 것을 예언했다. 우리는 그 예언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치매가 온 줄 알았다. 하지만 1987년 중국에 여행 갔을 때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많은 성경책과 쌀을 지원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사실이 아버지의 예언과 맞아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그때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설교 TAPE를 들었다. 설교 중에 조용기 목사가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했다. 두통으로 30년 넘게 고생을 한 나는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머리가 말끔히 나았다.
이 일로 인해 성경책, 찬송가, 조용기 목사TAPE를 북한에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책을 짐 속에 넣는데 모든 친척과 교인들이 말렸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사히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갔다. 믿음대로 공안당국이 짐을 검열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그래서 숨겨온 성경책으로 친척과 형제 등 여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집을 비우고 외출을 한 사이 도둑이 성경책을 훔쳐갔다. 알고 보니 보위부에서 집을 수색한 것이다. 전도했던 한 사람이 보위부에서 추적하고 있다고 전해줬다. 어쩔 수 없이 아들과 함께 탈북을 했다.
심리적인 타격과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다. 아들은 중국말도 모르고 글도 몰라서 직장에 나갈 수도 없었다. 나는 중국말이 가능했지만 몸의 반쪽을 사용하지 못해서 막막했다.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밤낮으로 교회에 가서 울면서 기도한 지 7개월, 반신 불수였던 몸이 완쾌되었다. 교회의 추천으로 아들은 신학교를 졸업해 전도사가 됐다. 그는 북한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북한인 사역을 하다가 주변 사람의 신고로 북송되었고 나도 아들과 함께 북송되었다. 북송되기 전, 중국감옥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다양한 여성들이 있었다. 감옥에서 이들 40여 명을 전도하기도 했다. 교도소에서 떠들고 찬송을 부르니 감시관이 와서 주도자인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고무 곤봉으로 맞았는데 몇 대를 맞았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후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나올 수 있었다.한 달 열흘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 북송된 후, 아들과 나는 헤어졌고 아들은 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아들은“북한이 못 사는 원인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못 사는 것이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의 곡식은 잘 되는데, 북한의 곡식은 왜 안 되는가? 하늘, 땅, 태양이 같지만 북한이 잘 살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아들은 두개골이 깨지고 팔, 다리뼈가 끊어져 사지를 쓰지 못한 채 감옥에서 순교했다. 아들이 순교한 사실도 3년이 지난 후에 친척을 통해 알게 되었다. 탈북 후, 한국에 오기 싫었다. 대북지원 하는 모습으로 인해 한국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한국에 보낸 것은 잠자는 한국교회를 깨우기 위함인 줄 믿는다.
우리는 민족을 돕는 북한선교를 해야 한다. 북한선교의 방법으로 북한주민에게 외부소식을 알리는 전단지를 풍선에 넣고 날리는 방법이 있다. 나는 북한의 지하교인인 언니를 돕고 있다. 언니에게 선교지원으로 돈을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선교를 할 때는 탈북민과 연계된 지하교회를 돕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은 한 달 월급이 천원이다. 지하교회 한 가정에 1만 원, 2만 원을 지원한다면 그들은 선교를 위해 헌신할 것이다. 이런 일은 탈북민과 연계해서 일할 때 효과적이다.
미래한국신문, 정리/ 김정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