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지구인이면 OK - 1:이상한 만남

박가애2007.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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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한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수북히 떨어진 가로수 잎들을 밟는 소리는

누가 들어도 즐거울만큼 고소한 것이었지만,

아르바이트에 지친 가은에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3년 전 겨울,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가

가은의 아버지에게 막대한 빚 보증을 부탁하고는 종적을 감췄다.

눈물로 호소하던 친구를, 가은의 아버지는 끝까지 믿고 싶어 하셨지만

그건 누가봐도 계획적인 배신이었다.

작지만 탄탄했던 아버지의 회사가 넘어가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다음해 여름,

몸져 누우셨던 가은의 어머니마저 끝내 세상을 달리 하시고 말았다.
일년을 넘게 끈질기게 가은을 쫓아다닌 끝에 가은이 막 마음을 열었던

남자친구 현성도, 겹치는 불행을 함께 견디기 힘들었던지

그녀를 떠나고 말았다.

원망하는 마음은 이미 없었다.

한꺼번에 밀어닥친 엄청난 일들..
가은은 이제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가은은 혼자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남아있는 재산보다 빚이 더 컸기에, 그녀는 모든 유산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머니의 텃밭과 아버지의 정원이 있던 집도,

가을이면 밤이 주렁주렁 열리던 시골의 야트막한 산도..

전철에서 내려 집까지 오르는 길은 멀었다.
서울의 외곽인 가은의 새로운 동네는,
아직도 드문드문 밭이며 야산이 펼쳐진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산이라기엔 너무 낮고,

숲이라기엔 그다지 울창하지 않은 그 동산의 바위 위에,
이따끔씩 그녀는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바로, 오늘밤처럼...

스물 넷,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그녀는

전공과목을 두번이나 바꾼 철부지 대학생이었다.
뚜렷이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보았던 세상은 늘 따뜻했고, 풍요로웠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간혹 모르던 남학생으로부터 고백을 받으며
아버지처럼 따뜻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것도 괜찮겠단 생각을 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 든든하고 따사롭던 울타리가 사라진 지 삼 년.
그 후에 펼쳐진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이런 저런 수많은 아르바이트들...
고생이라곤 해 본 적 없던 그녀에게 일 자체보다 힘든 것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하는 것과,
막막한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이었다.

그녀가 배운 것은,

이제 철저하게 그녀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녀를 책임져 주지 않았고, 마냥 울고만 있어서는

친구고 연인이고 함께 있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씩씩해져야 했다. 강해져야 했다.
지난 추억에 눈물 짓는 일 따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집에 가서 우리 레몬밤 물도 줘야 하고,
나도 고등어 구워서 밥먹고 힘 내야지.'

어느 새 빨갛게 언 손등으로 스윽, 눈물을 닦으며

가은은 차가운 바위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거르고 일한 터라 배도 몹시 고팠다.

아직 11월의 가을밤이건만,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으윽..."

그 때였다.

괴로워하는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린 것은.
혼자인 줄 알았던 가은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가은이 앉아 있던 바위에서 몇미터 떨어진 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조심조심 가은이 다가가서 보니,

몸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젊은 남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남자는 이상한 천으로 간신히 아래를 가렸을 뿐,

변변한 옷 하나 걸치치 않은 상태였다.

"세상에...! 이 추운 날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언제부터 쓰러져 있었던 거야?
어떡하지?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아, 119!"

 

급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배터리가 없었다.

 

"큰일났네. 어쩌지? 여기 이렇게 두면 안될텐데...

이렇게 키가 큰 남자를 나 혼자 옮길 수도 없고."


발을 동동 구르던 가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길가로 나가보았지만

역시나 지나가는 차 한 대 없었다.
가은은 다시 남자가 쓰러진 곳으로 와, 급한 대로 코트를 벗어 덮어 주고는,

남자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이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제 말 들리세요?"

남자는 간간히 신음소리만 흘릴 뿐,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의식이 없었다.

'할 수 없지. 내 혼자 힘으로라도 어떻게 옮길 수 밖에...'

가은이 외투를 덮은 남자의 팔과 어깨를 안아 일으켰을 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얼핏 보아도 180센티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남자가,

깜짝 놀랄만큼 가벼운 것이었다.
세살짜리 아이보다 더 가벼웠다.

아니, 거의 무게가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참으로 의아한 노릇이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동네엔 병원도 없었고, 남자를 어서 따뜻한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크지만, 깃털처럼 몸이 가벼운 이상한 남자를 업고

가은은 집을 향해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